“리안나 공주가 같이 있잖은가?”
아델의 말에 병사는 또 눈만 꿈벅꿈벅거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리안나 공주가 같이 있는 게 뭐...? 친위대장 랄프 경이 같이 있다면 또 몰라도.
한참을 그러고 있던 병사는 그냥 헛소리로 흘려 듣기로 했는지 통행증을 주고 길을 비켜섰다.
“자, 이걸 가지고 가게. 오늘 수도로 들어온 사람 중 이 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큰 곤혹을 치를 테니.”
*
어린 리오넬이 많이 피로해 했기에, 케인 일행은 수도 관문에서부터 황궁까지 가는 길에는 마차를 빌려 탔다.
“아까는 리오넬이 들을까 봐 말하지 못했는데.”
마부석에 앉아 있던 케인이 말을 꺼냈다.
“음?”
“리안나는 아직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태야. 아마 무기도 없었을 테니... 무턱대고 마음을 놓기는 어려워.”
“마법을? 아아... 그 부상... 아직 회복하지 못한 건가.”
아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공주가 어떤 사람인가. 홀로 지옥에 떨어진대도 살아 돌아올 걸... 자네답지 않게 걱정을 하고 그래?”
“......”
케인의 표정을 살피던 아델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당장 구하러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 좀 보게! 아하하.. 공주가 지금 이 얼굴을 꼭 봐야 할 텐데.”
“...닥쳐. 그리고 그 중늙은이 같은 말투 좀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런 얼굴을 하고...”
“이제 사십이 넘었으니 나도 늙은이가 맞지. 마력 때문에 노화가 더딘 게 뭐 내 잘못인가...? 하여튼.”
아델은 곱슬거리는 앞머리를 손으로 빗어넘겼다. 리안나와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었다.
“공주는 아직도... 자네의 애틋한 마음을 모르고 있는 거지?”
“! 애틋하긴 누가...!”
“쉿. 왕자님 깨실라...”
“...쓸데 없는 소리 마.”
케인은 짐짓 눈을 부르떴지만 이미 그의 얼굴은 그의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빨개진 뒤였다.
아델은 옳다꾸나 하고 실컷 놀려먹었다.
“자네도 공주도 참 대단해. 그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면서도 서로에 대해 그만큼 모르다니...”
“...모르긴 누가.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
- 적어도 나는.
케인은 가슴 한 구석이 저며오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는 리안나를 사랑한다. 그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던 그 추운 겨울날, 내가 너의 보호자가 되기로 한 순간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는 없었던 거야.
하지만 너는 아니지.
케인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가 리안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다 아는데도, 오직 리안나만 몰랐다.
언젠가 이 마음이 보답받을 날이 올까...?
그는 자신이 없었다.
*
케인 일행이 도착했을 때, 황궁 앞에서는 큰 소란이 일고 있었다.
“폐하! 직접 가신다니요. 안 됩니다!”
“닥쳐라! 날 막는 자는 불충으로 간주하겠다!”
카이엘은 이성을 잃고 날뛰는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황제의 모습에 제라드, 랄프, 근위대장 등 최측근들로부터 시종들에 이르기까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비록 아틸리안 공작이 황궁 근처로 오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랄프는 그들이 몸을 숨긴 거처를 알아내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들은 수도 변방, 몰락한 대귀족의 저택에 은거하고 있었고 그 수가 얼마 남지 않아 한 개 기사단 정도가 가면 능히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황제가 직접 가겠다고 난리인 것이다.
“폐하! 알레인 황자님까지 잡혀가신 마당에 폐하마저 가셨다가 다치시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구요?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나이가 지긋한 근위대장 다르칸이 카이엘의 앞에 무릎까지 꿇고 애원했지만, 카이엘은 눈을 부릅뜨고 명령했다.
“비켜라. 황제의 명이다.”
카이엘은 다르칸을 지나쳐 말에 올라탔다.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는 황궁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카이엘이 말을 타고 나서자 굳이굳이 말리던 이들도 말에 올라타 그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같이 가겠다고 말할 수 있겠나?”
“그냥 따라가야지, 뭐.”
“근데 저 여자는 뭐지...?”
아델은 군인들 사이에 에워싸인 철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안에는 남루한 옷을 입은 금발 여성이 앉아 있었다.
“! 저 여자는...”
***
나와 알레인은 눈이 가려진 채 황궁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버려진 성으로 끌려왔다.
조금 전 상황.
샤카이는 과연 훌륭한 기사였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괴한들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상황은 빠르게 악화되어 갔다.
“원군은 아직인가!”
우리가 원군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괴한들은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근위대원 한 명을 저 멀리 날려버리고 알레인 황자에게 돌진했다.
“황자님!”
드미트리가 달려갔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가 괴한이 탄 말에 검을 깊숙이 꽂기는 했는데 말의 몸통이 그를 덮쳐버린 것이다.
“아아악!”
이제 검을 들고 싸울 수 있는 자는 샤카이와 알레인 뿐이었다.
그나마 알레인은 존재감이 없었고...
‘망했군...’
이제 남은 방법이 없었다.
오해를 사게 될까봐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영문도 모른 채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목검을 고쳐 잡자 괴한 하나가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검을 들고 달려왔다.
나는 옆으로 피하며 그의 손을 목검으로 세게 내려쳤고, 그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 검을 놓치는 그때.
알레인 황자가 일을 저질러버렸다.
“황자님! 안됩니다!”
드미트리의 외침이 허공에 공허하게 흩어졌다.
“!!”
알레인 황자가 자신을 찌르려던 괴한을 말에서 거꾸러뜨리고 그 말에 올라탄 것이다. 그는 남은 자들과 싸우는 대신에 발로 말의 옆구리를 힘껏 찼다.
“나는 제피리움의 황위 계승서열 1위의 알레인이다! 선택해라! 날 인질로 잡을 것인지, 여기서 무의미한 싸움을 할 것인지!”
이런 멋진 말을 남기고.
‘안 돼! 그러면 상황이 더 복잡해진다고-!’
그 상황에서 그나마 샤카이가 냉철한 판단을 했다. 괴한들이 잠시 주춤하는 틈을 타 샤카이는 아샨티 왕녀를 번쩍 쳐들고 황궁을 행해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칼 하나를 잡아 내 머리채를 잡으려 다가오는 괴한의 허벅지를 찔렀다.
그리고는 비명 지를 새도 없이 고꾸러지는 그를 사뿐히 건너뛴 다음 말의 고삐를 잡아 올라탔다.
바닥에서 눈이 휘둥그레진 채 나를 보고 있는 드미트리와 눈이 마주쳤다. 말에 깔려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정신은 말짱한 듯 했다.
‘운이 좋으면 살아남겠지.’
이미 남은 괴한들 상당수는 알레인을 쫓아간 후였고, 나까지 황궁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자 잠시 망설이는 듯하니 모두 나를 좇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이미 알레인은 포박당한 상태였고, 나도 별 저항 없이 순순히 잡혀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애초에 제피리움에 인질로 온 것도 모자라 여기서 또 인질이 되다니, 잘하는 짓이군.’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결정적인 순간에 이안은 어디로 내뺐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때는 좀 도와주면 어디가 덧나나?
‘교활한 마족 놈.. 어디 가서 또 뭔 꿍꿍이를 꾸미고 있겠지. 다시 보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내가 이를 갈고 있는데 옆에 같이 묶여있던 알레인이 나를 질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안나 왕녀,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신까지 이런 곳에 끌려오다니...”
“황자님을 혼자 보내기엔 좀 걱정이 되서...”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옵니까?”
“이런 상황에서 잘도 나불대는군.”
우리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이 일의 주모자인 것 같은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복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아틸리안 공작!!”
알레인이 소리쳤다.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틸리안 공작...? 살아 있었어?
“날 알아보시는군, 잘난 제피리움의 황자 전하. 그대의 비열한 형님이 내 등에 칼을 꽂았지만 난 여기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네.”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얼마 안 되는 우리 백성들 목숨 부지하게 해달라고 몇 대를 걸쳐 모셔온 주군까지 배신하고 테오3세에게 무릎을 꿇었다. 모든 걸 희생해가며 이 제국의 부를 위해 일했어! 그런데 내게 돌아온 건 뭐지? 결국 내 영지를 불태우고, 내 백성들은 노예로 삼았지. 그 뿐인가! 불쌍한 내 딸은 도대체 왜 죽인 거지?!!”
그의 비통한 외침은 언젠가 들었던 바르텐 백작의 비명을 떠올리게 했다.
“아틸리안 공작, 진정하시오! 형님의 일은 내가 사과하겠소.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시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지금 남아있는 사람들마저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내 형님이 여길 찾아내지 못할 것 같소?”
아틸리안 공은 코웃음을 쳤다.
“되는대로 지껄이기는... 지금 내게 남아있는 것이 있을 것 같소? 황제가 이 곳을 찾으면 더 좋지. 황제의 눈 앞에서 너를 갈기갈기 토막내서 죽여주겠어. 만약 찾지 못한다면 널 아틸리안 영지로 데려가서 평생동안 고문실에서 비명을 지르게 해주마.”
아틸리안 공은 감옥문을 열어 알레인을 질질 끌어냈다.
알레인의 희디 흰 얼굴이 차가운 돌바닥에 내던져졌다. 공작의 구둣발이 알레인의 머리통을 짓눌렀다.
“황제가 오기 전에 울분을 좀 풀어야겠다. 자, 황제를 증오하는 놈들은 모두 와라. 여기에 그 짐승같은 자의 피붙이가 있다!”
그 다음에는 무참한 린치가 이어졌다.
나는 알레인 황자가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고통스러워 눈을 감았다.
‘생각보다 맷집은 있군... 하지만 더 맞으면 위험하겠어.’
날 묶은 밧줄은 이미 좀 느슨해져 있었다.
나는 알레인 황자가 혼수상태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혼자가 되야 저들이 방심을 할 테니.
“용케도 울지 않는군.”
이제 때리는 것도 질렸는지 그들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머리... 그래, 네가 소문으로 듣던 발크 국 왕녀로군. 야만인의 나라에서 온 계집.”
야만인이라니? 눈이 절로 치켜떠졌다.
“황제가 네 값을 많이 치를 것 같진 않지만... ‘일단은’ 살려두마. 그 전까지 너를 데리고 오는 수고에 대한 ‘대가’를 치루고 있으려무나.”
“......”
아틸리안 공은 감옥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손에 피를 묻힌 사내들이 징그럽게 웃으며 하나, 둘 내가 있는 감옥으로 들어왔다.
그 중 가장 몸집이 큰 사내가 먼저 내 앞으로 다가와 몸을 숙였다.
“듣던 것보다는 곱군. 내 평생 공주님을 안게 될 줄은 몰랐는데....”
“......”
또 이런 패턴인가?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날 안겠다고?”
내 말에 사내들이 일제히 웃어제꼈다.
“이 계집 좀 봐? 겁이라고는 모르는 년이로군. 어디 모자란 거 아냐?”
“뭐, 어때? 질질 짜면서 우는 년보다야 재미 좀 보겠지.”
‘더러운 놈들...’
이가 갈렸지만 난 웃는 낯을 유지했다.
“내 손을 풀어주면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을 선사해주지... 기대해도 좋아.”
“하?”
내 말에 사내들이 또다시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이 꼬마가 말하는 거 들었어?”, “웬만한 술집 아가씨보다 낫군!”
그때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알레인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리...안나 왕녀, 안... 됩니다.”
“아직도 주둥이를 놀릴 힘이 남았나?”
퍽! 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알레인의 머리가 푹 고꾸라졌다.
‘...저 멍청이.’
나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고는 거구의 사내에게 등을 돌렸다.
다소곳하게 눈까지 감고.
“자요.”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 중 한명이 칼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어차피 무기도 없는 나를 풀어주는 게 뭐가 문제가 될까 생각한 모양이었다.
“살다살다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군. 그래도 뭐 좋아... ‘평생 잊지 못할 순간’...? 기대해보지.”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걱-
나를 묶고 있던 밧줄이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