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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황제의 마음을 훔친 소녀
작가 : 맛있는코코아
작품등록일 : 2019.9.12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소국에서 인질로 잡혀온 공주 리안나. 리안나의 지상 최대 목표는 심기를 거스르는 자는 가차없이 베어 버리는 잔혹한 황제의 궁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 나아가 궁을 탈출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그런데 온갖 멸시와 모욕을 건뎌내며 무사히 탈출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리안나에게 청천벽력같은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다. “발크 국의 왕녀를 황비로 맞겠다.”는. “대체 왜...?”
벗어나려 할수록 황제 카이엘은 리안나를 집요하게 감시하는 한편, 리안나를 유혹하려 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평온했던 제국은 마물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진다.
“나... 여기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
황비이길 거부하는 공주 리안나와 폭군 황제의 아찔한 황궁 로맨스가 지금 펼쳐진다.

 
18. 한낮의 납치극
작성일 : 19-11-15 18:03     조회 : 359     추천 : 0     분량 : 7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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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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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네르 강가에 도착하니 이미 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아샨티가 타박을 주긴 했지만 대체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프리아나와 그 추종세력 몇을 빼고는 대부분의 왕자, 왕녀가 참석한 것 같았다.

 

 감시역인지는 몰라도 알레인 황자도 있고.

 

 오랜만에 숨막히는 황궁을 벗어난 사람들은 소프라노 톤의 웃음소리를 한껏 쏟아내며 들떠 있었다.

 

 폭이 그리 넓지 않은 아네르 강을 따라 알리섬, 라벤더가 만들어내는 흰색과 보라색의 물결. 그리고 그 꽃밭 위를 노니는 왕자와 공주들…

 

 ‘이렇게 보기에는 지상 낙원이 따로 없군.’

 

 “늦으셨네요. 안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샤카이가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이 아닌, 사교용 미소를 띤 채로.

 

 “그러게요. 그냥 경의 안내를 받아서 올 걸. 길을 찾느라 더 지체했네요.”

 

 나도 미소를 띠며 샤카이의 팔에 손을 얹었다. 누가 보더라도 친분이 있는 기사에게 애정을 표시하는 레이디처럼.

 

 “막사 내부를 살펴 보았습니다.”

 

 샤카이는 나를 에스코트하는 척 하며 사람들과 떨어진 강가 쪽으로 걸어갔다.

 

 저쪽에서 연습용 검을 들고 놀고 있던 남녀가 우리를 흘긋거리다가, 다시 자신들의 놀이에 열중했다.

 

 “내가 말한 곳은 찾았나요?”

 

 “네. 담장과 벽 사이에 숨겨진 공간이 있더군요.”

 

 샤카이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 ‘황제가 비밀리에 특수군대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아까 블루아 궁에서 황제가 언급한 ‘백색 사단’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곳을 출입하는 사람도 있던가요?”

 

 샤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감시가 심해 오래 지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너무 늦으면 의심을 살 수도 있고요.”

 

 하지만 쓰레기장에서 이런 걸 찾았습니다.

 

 낮게 속삭이며 샤카이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

 

 마력석이었다. 정확히는 사용하고 남은 마력석 찌꺼기.

 

 원래는 노란빛이나 오렌지빛을 띠고 있었을 것들은 그 안에 담겨 있던 마력을 방출한 뒤, 푸석거리는 회색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불순물이 많이 섞인, 저급한 것들이지만 마력이 부족한 초급 마법사들이 마법 연습을 할 때 용이하게 쓰이는 것들이었다.

 

 “이게 뭔지 아시는 겁니까?”

 

 샤카이의 손에서 마력석 조각들이 부스러져 내렸다.

 

 “...알아요.”

 

 역시 막사 안에서 마력을 느낀 것은 우연이 아니었구나.

 

 ‘이 자도 마법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겠지. 황제가 키우는 비밀 군단이 마법사 군대라는 걸 말해도 될까...?’

 

 샤카이는 현명하고 과묵한 자라 믿을 만했다. 문제는 아샨티다. 그녀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데다 이타와 제피리움은 사실 철천지 원수 사이기도 하니까.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굳어 있자 샤카이가 뭔가를 말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 때.

 

 “뭐야, 조심해!”

 

 고함소리와 낮은 비명소리가 귓가에 들리더니, 한 남자가 내 쪽으로 확 엎어졌다.

 

 “!”

 

 나는 얼른 옆으로 몸을 움직여 피했다. 길이가 비교적 짧은 드레스에 발목까지 오는 신발을 신고 있어 움직이기가 수월했다.

 

 문제는 넘어진 쪽이었다. 내가 피해버리는 바람에 그는 볼썽 사납게 경사진 바닥에 처박혔고, 심지어 한바퀴 구르기까지 했다.

 

 “어머머...”

 

 주위의 숙녀들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몇 발자국 옆에 연습용 목검이 떨어져 있었다. 샤카이와 얘기하며 걷다보니 검을 들고 놀고 있던 무리까지 온 모양이다.

 

 “이봐! 앞을 보고 걸어야지, 위험하잖아!”

 

 “뭐...?”

 

 엉뚱한 데서 화살이 날아온다.

 나는 내게 소리지른 남자를 쳐다보았다. 넘어진 남자와 한 무리에 있던 다른 남자였다.

 

 “연습하는 곳에 그렇게 가까이 오면 어떡해? 널 피하려다 넘어졌잖아?”

 

 “허...?”

 

 바닥에 엎어져 있던 남자도 고개를 번쩍 쳐들고 소리친다. 얼굴이 빨개진 게 레이디들 앞에서 체면을 구겨서 창피한 모양인데, 그걸 지금 내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옆을 보니 샤카이도 여차 하면 검을 뽑을 기세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짜증이 났지만...귀찮은 일을 만들기 싫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진 남자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곰 같이 생긴 그 남자는 오히려 더 시비를 걸어왔다.

 

 “그게 미안하다는 태도야?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역겨운 까만머리 계집.”

 

 ...아.

 

 오랜만이다.

 

 인내심의 한계가 오는 이 기분.

 

 “하하, 표정 봐라? 표정만으로는 사람도 죽이겠는데? 꼴에 어느 나라 공주였다, 이거냐?”

 

 “물러서십시오.”

 

 남자가 내게 위협적으로 다가오자, 샤카이가 앞으로 나섰다. 그런데 처음에 나에게 앞을 보고 걸으라고 소리쳤던 남자가 샤카이의 팔을 잡았다.

 

 “호위기사 양반, 당신은 빠져. 우리가 누군지 모르겠어?”

 

 “......”

 

 샤카이의 눈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래, 이들 역시 제피리움의 중앙 귀족들인 게 분명하다. 유창한 제국어, 어린 나이, 세련된 차림, 멍청한 표정에 붉은 뺨, 거만한 태도...

 

 내 특이한 외모를 경멸하고 헐뜯는 치들.

 출신이 다른 자들을 함부로 깔아뭉개야 속이 시원한 이들.

 

 “길리엄, 무슨 일이야?”

 

 눈앞에 멍청한 남자를 한대 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기사 한 명이 다가왔다.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었다.

 

 “...드미트리 형님, 이 여자가 우리가 연습하는 데 와서 훼방을 놓았습니다. 감히 차기 친위대원 후보들에게... 외국인 인질 따위가...”

 

 “너 또 술 먹은 거야?”

 

 뒤쪽에 서 있던 여자 중 한 명이 “조금밖에 안 먹었어요.”하고 답하는 게 들렸다.

 

 그 말을 듣고 남자는 한숨을 쉬며 한 손을 이마에 올렸다. 그는 뭐라고 중얼거리가다 내 쪽을 바라보았는데, 대번에 얼굴이 구겨졌다.

 

 “당신은...”

 

 그 얼굴을 보자 생각났다. 예전에 나를 황제에게 데리고 갔던 기사.

 

 두 남자가 이때다 싶었는지 그 기사에게 들러붙어 조잘대기 시작했다.

 

 “드미트리 형님, 이 참에 저 여자에게 확실히 알려 줘야 해요. 제피리움의 중앙 귀족에게 함부로 하면 어떻게 되는지.”

 

 “맞아요. 저 여자 때문에 형님 동생도 쫓겨가듯이 발령지로 갔잖아요? 다니엘의 복수를 해주자고요.”

 

 컥. 다니엘이... 저 사람 동생이었어?

 

 “......”

 

 뜻하지 않은 상황에 샤카이는 걱정스러운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로서는 한숨이 나올 일이었다.

 

 사람이 과연 어디까지 못날 수 있을까? 고귀한 신분을 자처하는 이들이, 나 한 명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드미트리는 두 남자의 얘기를 말없이 듣고 있기만 했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희 둘의 얘기는 잘 알겠어. 하지만 저기 계신 리안나 왕녀님은 엄연히 한 나라의 왕족이니 함부로 우리가 벌을 내릴 수는 없다.”

 

 듣자 하니 어이가 없어 앞으로 나섰다.

 

 “벌을 주다니? 저 남자 때문에 다칠 뻔한 건 나에요.”

 

 “기가 차는군. 아까는 사과 해놓고, 이제 와 태도를 바꿔? 아까부터 이쪽에서 검술 연습을 하고 있는 걸 힐끔거렸으면서... 일부러 이쪽에 와 훼방놓은 거 아냐?”

 

 뒤집어 씌우는 게 보통이 아니다.

 

 “누가 힐끔거렸다고? 애초에 왜 꽃놀이를 하는 데까지 와서 검술 연습을...”

 

 “자, 자.”

 

 드미트리가 앞으로 나섰다. 그가 입고 있는 붉은색의 비단 갑옷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친위대의 인장.

 

 그는 얼굴에 거만한 웃음을 띤 채 우리의 중간에 섰다. 그리고는

 

 “리안나 왕녀님, 제가 아까 상황을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리안나 왕녀님께서 길리엄 군에게 사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째서?”

 

 “여기는 제피리움이고, 길리엄은 제피리움의 중앙 귀족이니까요.”

 

 나와 샤카이의 얼굴에 똑같은 웃음이 떠올랐다.

 환멸감이 가득한, 비릿한 미소였다.

 

 당치 않은 핑계로 우리를 괴롭히려던 녀석들은, 일이 자기 뜻대로 돌아가자 신이 난 듯 뒤에서 키득거리고 있었다.

 

 “못 하겠다면?”

 

 “......”

 

 드미트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우리 분위기가 너무 살벌했는지 저쪽에서 꽃놀이용 배를 띄우던 무리도 이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까 내가 한 나라의 왕족이니 함부로 벌을 줄 수 없다고 한 걸 똑똑히 들었는데. 공식 재판장에라도 끌고 갈 건가요?”

 

 드미트리는 나를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그는 옆에 떨어져 있던 목검을 주워 들었다.

 

 “제피리움에서 중앙 귀족에 대한 불복과 모욕은 엄벌의 대상입니다... 왕녀님을 생각해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했건만.”

 

 “어느 한 쪽을 억울하게 만드는 게 원만한 해결은 아니죠.”

 

 “그런가요...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드미트리는 들고 있던 목검을 내게 건넸다.

 

 “...결투라도 하란 건가요?”

 

 나도 모르게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형님, 진심입니까? 지금 저보고 여자와 검술 대결을 하라고...”

 

 “안될 것 뭐 있나? 방금까지도 숙녀 분들과 검을 들고 놀고 있지 않았나?”

 

 “그거야 저 분들이 검술 하는 걸 알려달라기에..”

 

 “문제될 것 없네. 내가 알기로 리안나 왕녀님도 검술을 좀 배우셨을 거거든. 이 황궁에 장검을 가지고 오실 정도니까.... 왕녀님, 아시겠지만 우리 제피리움에는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려울 때 당사자끼리 결투를 하는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드미트리를 바라보며 웃었다. 저 놈이 내 검술실력을 알 리 만무하고...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내가 겁을 먹고 길리엄에게 빌 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길리엄이란 남자는 술 때문인지 체면 때문인지 빨개진 얼굴을 벅벅 비볐다.

 

 “이봐요, 왕녀님. 지금이라도 좋게 사과하고 끝내는 게 어때? 난 명예로운 로열 제피로스의 생도고, 레이디를 존중하지만... 내게 검을 겨눈 사람을 곱게 보낼 생각은 없어.”

 

 “사과는 그쪽이 해야 할 것 같은데...”

 

 “뭐야?”

 

 “사과 할 마음 없으면 빨리 검이나 들어. 구경꾼들도 적당히 모였는데, 실망시키지는 말아야지.”

 

 나는 드미트리에게 목검을 받아들었다.

 

 내 태도에 놀란 듯, 그는 예전에 봤던 벙찐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다시 재수없게 웃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디 한번 멋대로 해보라는 투였다.

 

 “아, 진짜... 재수가 없을라니까.”

 

 길리엄은 어느새 주위를 에워싼 구경꾼들을 보고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친구에게서 검을 받아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자세는 꽤 괜찮네.’

 

 하디만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기사 놀음에서나 볼 수 있는 자세였다. 실전에서는 저렇게 ‘난 지금부터 너랑 싸울거야.’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저런 둔해 보이는 몸뚱아리.. 솔직히 10초면 결판낼 자신 있다.

 

 “정말 하실 겁니까?”

 

 “왜요? 딱히 말릴 생각도 없으면서.”

 

 샤카이는 내 말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샤카이는 영리한 기사였다. 아마 검술 실력도 상당할 것이다.

 

 지난 번 나와 함께 말도 탔었고, 방금도 길리엄을 피하는 내 움직임을 봤으니.. 그라면 내가 취미로 검술을 배운 게 아니라는 것쯤을 알 것이고, 이번 기회에 구경하고픈 마음도 있겠지.

 

 ‘아무튼.’

 

 자, 이제 저 애송이를 어쩐다?

 

 알레인 황자까지 보고 있는 마당에 저 녀석을 가뿐하게 이겨 버리면 또다시 내 신분을 의심받을 수도 있었다.

 

 제피로스에서는 몇년 전부터 숙녀들이 운동삼아 검술을 배우는 유행이 있었으니, 나도 딱 그 정도처럼 보이게 적당히 놀아주다 운으로 이긴 것처럼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용감한 기사님, 먼저 공격 하시겠어요?”

 

 내 도발에 길리엄이 바보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욕설을 내뱉으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저쪽에서 알레인 황자가 놀라 “멈춰!” 하고 소리를 쳤지만 나도, 길리엄도 멈출 생각은 없었다.

 

 ‘정말 느리군.. 빈 틈은 있는대로 보이고... 뒤에서 머리를 내리쳐 줘야겠어.’

 

 그럼 멍청함이 좀 나아지겠지.

 

 하지만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저게 뭐지…?”

 

 어디선가 땅이 울리는 소리가 났고, 길리엄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강 하류 쪽에서 먼지가 피어 오르는가 싶더니, 곧 깃발이 없는 수십 기의 말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지…? 이곳에는 출입을 허가 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데…”

 

 알레인 황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런 기마대를 황궁 뒤편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해준 이는 없을 것 같은데요.”

 

 어느 틈에 왔는지 이안이 태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반란…!”

 

 알레인 황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밑에서 꽃놀이를 즐기고 있던 사람들도 무슨 일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며 일어섰다.

 

 “모두 황궁으로 돌아간다! 어서!”

 

 “기사들은 어디 있지? 황자님을 보호해!”

 

 “무기를 들어라! 앞선 자들을 막아!”

 

 드미트리의 지휘 덕에 황궁 후문에 가까이 있던 이들은 황궁의 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태반은 순식간에 검은 복면을 쓰고 말을 탄 자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너댓 명의 기사들과 알레인, 샤카이가 검을 뽑기는 했지만 우리에게는 말도 없었고 숫자도 너무 적었다.

 

 ‘야단났군. 지금 마력도 봉인된 상태인데…’

 

 나는 손에 든 목검과, 손목에 채워진 팔찌를 번갈아보다가, 앞을 바라보았다.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은 정체를 밝히라는 알레인의 외침에도 아랑곳 않고,

 

 칼을 뽑아 든 채 우리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

 

 

 아네르 강가에서 사상 초유의 습격사건이 벌어진 직후, 케인과 아델은 리오넬을 데리고 제피로스에 당도했다.

 

 “그 새파란 기사는 잘 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업무를 인계해 줄 선임이 죽어버렸으니.”

 

 “그래도 예정된 날짜보다 빨리 와서 다행이지. 뭐, 제국 최고의 엘리트 기사라던데 잘 하겠지...”

 

 둘은 위르겐을 떠나오기 직전 그 곳으로 발령 난 신임 기사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름이 다니엘 캐런이라는 그 자는 로열 제피로스는 제국 최고의 기사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라고 했다.

 

 가문도, 외모도 출중한데다 진중한 성격인 그 기사는 초토화된 자신의 근무지를 보고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에리히가 함께 있으니 금방 수습할 거야. 둘이 잘 맞는 것 같았고.”

 

 “그 재수없는 자가 걱정이지. 이름이 트라이앵글인지 트라이스튼지. 도움은 안 되고 발이 치이기나 할 것 같은데.”

 

 “하하...”

 

 “그런데 웬 소란이지?”

 

 수도 안의 분위기는 부산스럽다 못해 흉흉했다. 군인들이 쫙 깔려 있었고, 곳곳에서 검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마침 수도 관문에서 그들을 맞은 병사는 케인이 안면이 있는 이였다.

 

 “아틸리안의 잔당 세력이 수도에 잠입했소. 그래서 그 자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대놓고... 이러면 그 자들이 더 꼭꼭 숨지 않겠어?”

 

 병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리오넬을 한 번, 케인을 한 번 바라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지금 황궁에 큰일이 났네. 그 치들이 황족 소유의 아네르 강가까지 쳐들어와서 황자님을 납치... 아!”

 

 말하다 뭐가 생각났는지 병사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케인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 뭐야?”

 

 “자네, 발크에서 오신 왕녀님을 모시지? 그 왕녀님도 잡혀갔어.”

 

 “뭐어?”

 

 케인과 아델, 리오넬이 동시에 소리쳤다. 병사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먼 타향에서 이런 일을 겪게 되셨으니 참 유감이네만... 독기를 품은 자들이니 어찌 될지 장담할 수가 없어. 폐하께서 직접 명을 내려 이렇게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고는 있지만...”

 

 병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라며 케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의외로 케인과, 함께 온 다른 이들의 반응이 담담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이럴 때.”

 

 아델이 이마를 짚자 케인도 한숨을 쉬었다.

 

 “며칠 내내 달려서 좀 쉬고 싶었는데... 하여튼 도움이 안 된다니까.”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자네들은 충성심도 없나? 모시는 공주님이 잡혀갔는데 걱정은 커녕 이상한 소리를 하고... 나는 우리 황자님이 걱정되 죽겠는데...”

 

 병사가 기겁을 하고 소리치자 리오넬이 의젓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황자님은 안전하실 테니.”

 

 이... 이 사람들은 돌은 건가? 아니면 천성이 낙천적인건가...

 

 병사는 눈을 꿈벅거리다가 엉거주춤 되물었다.

 

 “어째서?”

 

 아델이 씨익 웃으면서 대답했다.

 

 “리안나 공주가 같이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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