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놀이에 초대받았다고 한들 근신령이 풀리지 않으면 갈 수 없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웬걸?
당일 아침에 황제의 시종이 와서 근신해제령을 알렸다.
“잘 됐어요, 공주님! 어서 준비해요.”
마리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옷장을 뒤져 드레스를 이것저것 꺼냈다.
“무슨 바람이 분 거지...?”
반성문을 제출했을 때만 해도 묵묵 부답이었는데.
“아무렴 어때? 네가 안 가면 또 그 아샨티인지 밀크티인지가 찾아와 난리칠 테니까, 어서 가.”
루시아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루시아는 상인 길드에서 맡아두었을 오빠의 답장을 받기 위해 근신이 풀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족문자의 해석에 대한 답을.
*
“그럼, 다녀올게.”
“그런데 공주님, 이건 어쩌죠? 폐하께 돌려드려야 할 텐데...”
“......”
마리가 내민 것은 황제의 망토였다.
순백색의 비단에 도톰한 안감이 덧대어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남자를 위한 망토.
“근신령이 풀렸으니, 가장 먼저 돌려드리러 가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랑벨 부인의 말이 맞기는 했다.
워낙 트집을 잡는 성격의 황제인지라, 바로 돌려주지 않으면 나중에 또 뭐라고 할지 몰라
시간이 좀 빠듯하긴 해도 정궁에 들르기로 했다.
“부탁한 것, 잊지 말아요.”
“알겠습니다.”
나를 데리러 온 샤카이 경에게는 막사에서 우리가 봤던 수상한 공간을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나는 마리와 함께 정궁으로 향했다.
내가 막사 위로 올라간 소동은, 마리가 휴가 중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다행히 마리는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나와 마리는 정궁까지 가는 길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망토를 덮어주신 분은 아마 왕녀님이 처음일 거에요.”
“나도 믿기지 않았어.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더니 벌을 내리지 뭐야? 또 뭐에 기분이 상했는지...”
마리에게 날 구해 준 다니엘이 갑자기 위르겐으로쫓기듯 발령난 것과 내가 근신령을 받은 상황을 설명해주자, 마리는 입을 가리고 웃었다.
“황제 폐하는 물론 무서운 분이세요. 하지만 저희같은 평민들에게는 좋은 분이기도 해요.”
“그래?”
의외라는 내 물음에 마리가 반색을 했다.
“네.. 귀족에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노예로 팔려갈 뻔한 우리 마을 사람들을 구해주셨으니까요.”
“...수도 내 노예제 폐지 조치를 말하는 거야?”
마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중소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를 넓히거나 관직을 사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돈을 못 갚으면 노예로 팔아서 큰 이득을 남겼어요. 우리같은 사람들은 세금을 내는 것만도 벅차서, 그걸 알면서도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요...”
“..확실히 노예제 폐지는 파격적이기는 했어. 지금은 수도 뿐만 아니라 대도시에도 확대됐지, 아마?”
“네! 그것 뿐만이 아니라, 말도 안되는 고율의 이자는 모두 삭감해주고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평민들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그래서 저도 여기서 일할 수 있는 거구요.”
그러면서 마리는 뿌듯하다는 듯이 웃었다. 해맑은 미소를 짓는 마리는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오빠가 북쪽 전장으로 끌려갔잖아? 그건 힘들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아요.”
“......”
내가 오빠 얘기를 꺼내자 마리는 금방 슬픈 표정이 되었다.
나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황제에게는 분명 부정하기 힘든 양면성이 있었다.
귀족의 횡포를 막고, 평민의 생활을 신장시킨 것은 물론 테오3세의 치적이다.
하지만.
‘내가 부강하기 위해 남을 공격한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인걸까?’
황제는 다른 나라를 침략해 그 나라의 부를 빼앗아, 그것으로 국고를 채웠다.
그리고 충성을 맹세한 아틸리안 영지를 기습하고 후궁으로 맞은 이본느 공녀를 죽였지.
‘후궁이라도... 자신과 혼인한 여자를 어떻게...’
그것도 재판을 통한 처형이 아니라 먼저 ‘죽이고’ 처형 사실을 발표했다. 말이 처형이지 엄밀히 말하면 살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정궁에 다 왔다. 마리가 망토와, 답례의 의미로 준비한 꽃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발크 왕국의 리안나 왕녀님입니다. 폐하의 망토를 돌려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근위병은 마리가 들고 온 ‘폐하의 망토’를 흘깃 보더니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지금 안에 없소.”
“그럼 어쩌지요? 시관님 한 분을 불러 주시면 드리고 가겠습니다.”
어차피 황제를 만나 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그런데 근위병은 뜻밖의 말을 했다.
“폐하께서는 블루아 궁에 계시니 가서 직접 드리시오.”
“블루아 궁이요...? 전 거기가 어딘지 모르는데요.”
근위병은 대답 대신 가까이 있던 시종 하나를 불렀다.
“알미오스! 이 분들을 블루아 궁으로 안내해주게.”
알미오스라 불린 시종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 앞으로 달려왔다.
“안내하겠습니다.”
“?”
“......”
왜 물건을 주고 받는 일을 이리 번거롭게 하는 것이지? 나와 마리는 영문을 몰라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보았지만, 근위병도 시종도 아무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
처음 들어본 ‘블루아 궁’은 정궁에서도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네르 강가로 나가는 길과 같은 방향이라는 것이었다.
“다 왔습니다.”
‘? 여기는...’
알미오스가 멈춰선 곳은 내가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 때는 밤이었기 때문에 지금과 인상이 많이 달랐지만, 틀림없었다.
‘이안이 나를 데려왔던 곳...’
여기... 분명히 황제의 어머니가 죽기 전 머물던 곳이라 했었다.
“들어가십시오. 저와 이 아이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별 수 없었다.
나는 마리에게 망토와 꽃을 받아들고 혼자 궁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정원은 손질되어 있지 않아 풀숲이 무성했고, 회백색의 건물은 대낮에도 창백한 인상을 주었다.
역시, 궁전이라기 보다는 작은 기도원 같은 느낌을 주는 건물이었다.
‘왜 황제의 생모가 이런 곳에서 죽었던 거지?’
의문을 가지며 한 발짝 더 내딛었을 때, 황제가 누군가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레네의 혼인 문제는 신시아의 결정을 따르겠다. 그 일에 대해 더 이상 입에 담지 말라.”
“엘로드 대공이 집요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대답을 하지 않으면 셀저 왕국을 치는 데 협력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요...? 이제와 이레네 님께 동정심이라도 가지신 겁니까?”
“황족의 운명은 황족이 결정한다! 그게 내가 세운 원칙이야. 잊었나?”
‘...너무 살벌한데.’
황제는 그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제라드와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폐하, 이용하실 수 있는 자원은 전부 이용하셔야 합니다. 폐하의 권력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은 상황도 좋지 않고..”
“여덟 살 난 여자아이까지 이용해야 할 정도로 내 입지가 형편 없다는 뜻인가? 제라드! 자네는 불필요한 일에 너무 정신을 쏟고 있어! 그럴 정신이 있으면 백색 사단에 더 집중하게.”
황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함이 느껴졌다. 결국 제라드가 체념한 듯 “네”하며 물러나다가, 날 발견하고는 표정이 확 구겨졌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 당장 나가...”
“제라드, 그만 됐다.”
“! 하지만..”
“가거라.”
“......”
제라드는 입을 꾹 다물고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 사람... 나를 싫어하는구나.’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황제의 압력에 밀려 제라드는 자리를 떴고,
나는 황제에게 다가가 망토를 건넸다.
황제는 망토를 받아들며 웃었다.
“바로 올 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염치는 있군.”
“......”
황제는 편한 복장으로 뜰 안에 세워진 작은 동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어린 천사를 조각한 그 동상은 깨어지고 녹슬어서, 동상이 서 있는 대에 사람이 앉을 정도로 자리가 넉넉했다.
녹슨 동상과 눈부신 금발을 가진 황제의 모습이 대비되어, 어쩐지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꽃놀이를 간다고 들었는데.”
황제는 그러면서 내 옷차림을 훑어 보았다. 나는 하얀 실크 소재에 하얀 레이스로 장식을 더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아마 내 옷차림이 꽃놀이를 가는 숙녀 치고 수수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움직이기 불편해서요.”
화려한 옷이 싫은 이유를 에둘러 말하자, 황제는 알만 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복 윗도리는 벗어두고, 편안한 셔츠에 바지 차림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황제가 아닌... 그냥 평범한 남자 같다.
“그대는 참으로 신기하군.”
“제가요?”
“그래. 오만하기 보다는 당당하고..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남의 눈치를 보지도 않지.”
“......”
나도 황제를 신기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도리어 이렇게 말 하니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대의 그런 점이 참 좋아.”
“!”
이런 말을 들었을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또 옆구리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나는 얼른 답례로 들고 온 꽃을 내밀었다.
“여긴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단 둘이 살던 궁전이다.”
황제는 꽃을 받아들며, 내 손을 슬쩍 끌어당겼다.
“이 곳에서요...?”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앉게 되었다.
나는 당황한 티를 안 내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그래. 이 곳을 보니 어떻지..?”
“...제국의 황자께서 지내시기에는, 좀 수수해 보이네요.”
누구한테서였나... 황제의 어머니가 폐비였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기에, 나는 일부러 ‘황비’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지... 여기는 버림받은 황비를 위한 궁이니까.”
“!”
그런데 본인이 직접 말할 줄이야.
나는 돌조각이 떨어지는 회백색 벽에서 눈을 돌려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의 신비로운 금안이 나를 꿰뚫어 보는 듯 했다.
“제피리움의 황제는 한 대에 적게는 세 명, 많게는 열 명이 넘는 여인을 정비 또는 차비로 맞아들여. 그 여인들은 후계자를 낳지 못한다거나, 부덕하다거나... 아니면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날개를 꺾이고 이 궁에 유폐된다.”
나는 뭐라 답할 수 없어 황제의 옆에 앉아 그의 시선을 따라 스산한 궁 내부를 둘러보았다.
“나는, 내가 아내로 맞아들일 여자는 그런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아.”
어느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이본느 공녀를 죽였나요?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
그러다 퍼뜩 내 앞에 슬픈 눈을 한 이 남자가 그 냉혈한 황제가 맞나, 라는 의문이 들었다.
아까 제라드와 나눈 대화의 내용도 그렇고...
어쩌면 황제는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 왔던 것이 아닐까?
내가 놀란 눈을 하고 쳐다보는 게 우스웠는지, 황제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마치 귀신이라도 되는 양 쳐다보는군. 그대는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에...
“그야 물론...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멋진 황제 폐하시죠.”
“훌륭하고 멋지다라...”
내 딴에는 모범답안이라고 내 놓은 건데, 황제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절도의 기사.”
“네?”
“네가 막사 지붕 위에서라도 보고 싶었다던 다니엘의 별명이다.”
“하하...”
“그대 아니라도 많은 여인들이 그의 이야기를 하지. 늠름하고 멋지다고 말야... 왕녀도 그런 취향인가?”
왜 또 그 이야기를... 그러고 보니 황제는 왜 내가 다니엘을 보고 싶었다고 하자마자 그를 발령지로 보내버렸을까.
나는 대답하는 대신 눈을 피해 버렸다.
“나는 그대에게 나를 꾸며내고 있지 않은데. 그대는 나를 진심으로 바라보지 않아.”
“...폐하, 저는...”
저는 이 황궁에 얽힌 슬픈 이야기나, 풋내 나는 기사들에게는 관심이 없어요. 그보다는 이 궁 밖에 출몰하는 마물과, 죄 없이 고통받을 많은 사람들과, 당신의 그 수상한 집행관, 그리고 이 황궁 안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일들에 관심이 있지요.
...아무리 연애 경험이 없는 나라도, 이쯤 되니 이 남자가 내게 뭘 기대하는 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황제에게 할 수는 없었고, 그도 내 말을 더 들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잡담은 이쯤에서 그만 하지. 늦으면 제라드 녀석이 또 토라질 테니... 그대도 모처럼의 외출을 즐기도록.”
다음에 또 보지.
황제는 언제나처럼 멋대로 대화를 끝내 버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당신과 또 만나고 싶지 않아.’
분명히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는데...
황제에게 인사하는 내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피어 있었다.
***
리안나와 헤어지고 난 후, 카이엘은 허탈한 마음으로 정궁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웠다.
제라드가 늘 강조하는 황제의 위엄...은 무슨.
‘두서 없이 이런저런 말이나 늘어놓고... 질투하는 티나 내고. 우습다 생각했겠지.’
블루아 궁에서 리안나 왕녀를 볼 줄은 그도 몰랐기에, 반갑고도 당황스러워서 그답지 않게 말을 많이 하고 말았다.
블루아 궁은 카이엘의 어둔 과거가 남은 곳이기에, 카이엘 본인과 그의 측근 랄프, 제라드 말고는 출입이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나마 요즘 제라드와도 의견 충돌이 잦아 앞으로 자신 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못하게 하려고 했는데,
그 곳에 리안나가 떡하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내색은 안 했지만 어찌나 놀랐는지...
그래도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그가 한 말처럼 그는 리안나에게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줬으니까.
‘황제 테오3세’가 아닌 ‘카이엘’의 모습을.
그의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던 것 같다. 늘 보던 경계하는 눈빛이 아닌, 인간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던 눈이었다.
황제라는 위치 때문에 마음대로 리안나에게 다가갈 수도 없던 그이기에,
그 짧은 대화도 소득이라면 큰 소득이었다.
‘블루아 궁으로 오게 한 것은.. 아마 루터스의 짓이겠지.‘
친위대원으로 있다가 근위대로 옮겨간 루터스는 카이엘이 아끼는 부하 중 하나로, 눈치가 빠르고 영민해 늘 카이엘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는 했다.
카이엘이 관심을 보이는 왕녀가 하필 그가 부재중일 때 나타나자, 블루아 궁으로 안내할 정도의 순발력을 발휘할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상이라도 줘야 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정궁에 들어서는데, 시종 하나가 그를 보자마자 급하게 뛰어왔다.
“급서입니다.”
시종의 표정을 본 카이엘은 그 급서가 랄프에게서 왔음을 짐작했다.
“내용은?”
“폐하께 직접 보고한 문서라 보지 못했습니다.”
수신인을 황제로만 지정하게 되면 그 문서는 황제 본인이 아니면 열어볼 수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황제만이 알아야 할 극비문서일 수도 있었다. 대신에 그 옆에는 바로 명령을 받을 수 있도록 측근들이 대기하고는 했다.
“근위대장님께서 대기하고 계십니다.”
시종의 말에 카이엘은 곧장 집무실로 뛰어 올라갔다.
근위대장 다르칸과 근위기사들, 친위기사들이 집무실 앞에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카이엘은 그 앞에서 바로 문서를 뜯어보았다.
“!”
문서를 읽은 카이엘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예상한 대로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랄프는 제피로스로 숨어 든 아틸리안 공작을 찾았지만 추격에 실패했다. 그런데 그를 놓친 위치가 문제였다.
[아를레프 다리 부근에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그가 황궁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서는 사력을 다해서 쫓겠으나, 황궁도 만발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카이엘은 종이를 꽉 쥐어 구겨버렸다. 수도의 각 곳에서 황궁으로 통하는 비밀통로... 지도조차 없는 그 길들은 황족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곳으로 아틸리안이 도망쳤다는 것은...
‘내통자가 있다!’
문제는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카이엘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를레프 다리에서 시작하는 비밀 통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
눈에서 번개가 이는 듯 했다. 카이엘이 다급하게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정궁에 울려 퍼졌다.
“다르칸! 근위기사들을 모두 데리고 황궁 북쪽의 아네르 강가로 가라,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