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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황제의 마음을 훔친 소녀
작가 : 맛있는코코아
작품등록일 : 2019.9.12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소국에서 인질로 잡혀온 공주 리안나. 리안나의 지상 최대 목표는 심기를 거스르는 자는 가차없이 베어 버리는 잔혹한 황제의 궁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 나아가 궁을 탈출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그런데 온갖 멸시와 모욕을 건뎌내며 무사히 탈출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리안나에게 청천벽력같은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다. “발크 국의 왕녀를 황비로 맞겠다.”는. “대체 왜...?”
벗어나려 할수록 황제 카이엘은 리안나를 집요하게 감시하는 한편, 리안나를 유혹하려 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평온했던 제국은 마물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진다.
“나... 여기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
황비이길 거부하는 공주 리안나와 폭군 황제의 아찔한 황궁 로맨스가 지금 펼쳐진다.

 
15. 위험한 거래
작성일 : 19-10-21 21:13     조회 : 357     추천 : 0     분량 : 7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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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나 답지 않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루시아가 망을 보는 동안 지붕을 통해 막사로 들어가려다가,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만 것이다.

 

 바로 앞 병영 광장에서 저렇게 큰 행사가 열리는 줄 모르고 지붕으로 올라갔다가 황제와 딱! 눈이 마주쳤다...

 

 ‘아무도 소식을 가져다 주는 자가 없으니 행사가 있는지 없는 지 알 리가...’

 

 밑으로 떨어지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부유 마법을 쓰려고 했지만 마력 봉인 팔찌 때문에 말을 듣지 않았고, 나는 꼼짝없이 막사와 병영 광장 사이를 흐르는 실개천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이마저도 루시아가 마법으로 바람을 불어주지 않았다면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수영을 할 줄 알았던가?’

 

 생각보다 물이 꽤 깊었다.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몸을 막 버르적거리는데, 누가 강한 힘으로 날 확 끌어당겼다.

 

 “후아!”

 

 “허억, 허억..”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나는 땅에 끌어올려졌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날 구해준 이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다니엘.. 경?”

 

 병사들이 바로 우리 주위를 에워쌌기에 나는 말을 더 할 수가 없었다.

 

 ‘망했군... 뭐라고 하지?’

 

 솔직하게 하녀들이 여기서 이상한 시체들을 봤다길래 시녀랑 조사하러 왔다고 얘기할 수는 없고...

 

 눈 앞에 보이는 병사들의 발을 바라보며 변명거리를 한참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 위로 뭔가를 둘러주었다.

 

 “...테.. 폐하?”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내 앞에는 황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여기까지 직접 왔어?!’

 

 병사들을 시켜서 끌고 오라고 하면 될 것을...

 

 ‘그나저나 진짜 뭐라고 하지?’

 

 황제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아, 음, 그게...”

 

 나는 옆에 다니엘 경을 바라보았다. 그도 정말 궁금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대답이 늦을수록 더 수상해 보일 텐데...

 

 순간 저 뒤쪽에 구경하러 온 왕녀들과 시녀들이 보였다. 모처럼 황궁에 제국 제일의 기사들이 다 모였으니 구경을 온 모양이었다.

 

 지금은 날 구경하고 있지만.

 

 “어... 잘 생긴 기사님들이 있다고 해서... 잘 보이는 데서 보려다 그만...”

 

 “!”

 

 “......”

 

 다니엘 경을 포함한 다른 기사들은 ‘이런 미친 여자가!’ 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황제만은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니... 살짝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믿는 건가?’

 

 나는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래도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황제는 내 앞에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맞추더니, 엉뚱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래서, 누굴 보러 온 거지?”

 

 “?”

 

 나를 포함, 이번에는 다들 벙찐 표정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그게 중요한가...?

 

 

 “어, 그게...”

 

 ‘모르겠다. 일단 황제가 믿는 게 중요하니까.”

 

 미안해요, 다니엘 경. 도와준 김에 이것도..

 

 “다니엘 경이요.”

 

 “!”

 

 “!”

 

 내 옆에 있던 다니엘 경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가, 다시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왜 그러나 싶어서 앞을 보니

 

 ‘헉.’

 

 황제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아까는 온화한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눈에는 잔뜩 힘이 들어간 게 틀림없이 화가 나 있다.

 

 “다니엘 경이라고...”

 

 실소를 흘린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번에는 다니엘을 쪽을 보았다. 역시 무시무시한 표정이다.

 

 “캐런 가의 사람인가? 에르시 백작의 아들이겠군.”

 

 “네. 캐런 가의 다니엘입니다. 이번에 로열 제피리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사로 정식 복무합니다.”

 

 다니엘은 차분하게 자기소개를 했지만, 목소리에 긴장감이 뚝뚝 묻어나왔다.

 

 그 사이 난 내가 뭘 두르고 있나 봤는데... 세상에.

 

 황제의 망토였다.

 

 “발령은 받았나?”

 

 “네. 위르겐 지방군 14부대장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일주일 뒤 출발합니다.”

 

 “위르겐 지역은 위험지역이니 내일모레 바로 출발하라.”

 

 “!”

 

 “네.”

 

 주변 사람들이 움찔하는 게 눈에 보였는데 정작 다니엘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왜 저러지?’

 

 내가 뭔가 잘못한 거 같은데 뭔지 모르겠다.

 

 황제는 다시 한번 날 째려보더니 뒤돌아서며 명령했다.

 

 “품위없는 행동으로 황궁에 소란을 일으킨 발크의왕녀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방에서 근신하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사들이 날 에워쌌다.

 

 엉거주춤 일어나는데,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봐요, 레이디. 어서 가서 사실은 폐하를 보러 왔다고 말해요.”

 

 “?”

 

 오닐이었다.

 

 “어서. 내 친구 다니엘을 곤경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

 

 이게 무슨 말일까, 생각할 새도 없이 나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걷기 시작했다.

 

 몸이 다 젖어 으슬으슬 떨려왔지만, 황제가 덮어준 망토 때문에 그나마 나았다.

 

 “어서요.”

 

 오닐의 목소리가 멀어져가고, 나는 망설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나와 황제의 거리는 아직 몇 걸음 거리.

 

 “폐하, 사실은..!”

 

 황제는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엄청나게 귀찮다는 표정으로...

 

 “뭐지?”

 

 “그게...”

 

 막상을 말을 하려니 심장이 뛰고 얼굴이 벌개져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짐의 인내심을 시험하는군. 빨리 말하라.”

 

 황제의 목소리를 흡사 으르렁거리는 맹수 같았다. 그가 여기서 손짓 하나만 하면 옆의 병사들이 나를 처참하게 베어 버릴 것만 같았지만...

 

 ‘말 해야 해.’

 

 “사실은.. 폐하를 보려고 지붕 위에 올라갔습니다.”

 

 “뭐?”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렇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화를 내실까 봐.”

 

 “...하!”

 

 황제는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얼굴에는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저는... 저는 폐하를 뵐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요...”

 

 나는 필사적으로 말을 만들어냈다. 잘못 하다가는 다니엘도, 나도 더 큰 벌을 받게 될 수도 있었다.

 

 황제는 피식 웃더니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알량한 잔머리를 굴리는구나.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방으로 가서 근신하라.”

 

 그걸 끝으로 황제는 정말 자리를 떴고, 다니엘도 몇몇 기사들과 광장으로 돌아갔다.

 

 ‘...된 걸까?’

 

 황제가 가자마자 병사들이 다시 나를 재촉했다. 나는 광장 쪽으로 돌아가는 다니엘을 흘깃 보았다. 그와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그는 아무 감정 없는 얼굴로 다른 이들과 자리를 떴다.

 

 

 

 

 

 ***

 

 

 

 “빌어먹을!”

 

 

 집무실로 돌아온 카이엘은 제복 상의를 거칠게 벗어 의자에 내던졌다.

 

 그럴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속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그런데도 그 말을 듣자마자 기분이 좋아지다니...

 

 ‘미쳤군. 단단히 미쳤어...’

 

 카이엘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숨을 골랐다.

 

 책상에 걸터앉아 차분하게 생각을 해 보았다.

 

 뭐가 문제인지.

 

 

 ‘빌어먹을. 매일 일에만 치여 사니 연애를 할 수 있을 리가... 눈 한번만 맞춰도 사방에서 달려들기나 하고.’

 

 

 그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는 여자 꼬실 줄을 몰랐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 아름다운 외모로 태어나 자라면서 지금껏 칭송 외에 다른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록 선황의 핍박으로 어린 나이에 전장을 전전했지만, 그 곳에서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특히 여자들.. 여자들은 그가 청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와 애인으로 삼아주기를 원했다. 그는 제국의 황자였고, 아름다웠으며, 모든 면에서 뛰어났으니까.

 

 하지만 리안나는...

 

 ‘지난 번에는 트리스탄 왕자더니.. 이번에는 캐런의 아들인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창피를 무릅쓰고 황족, 특히 황제의 연애사를 기록한 야사집에서 본 짓도 해 봤다.

 

 공식 연회에서 첫 춤을 함께 추고,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 느슨한 차림으로 단 둘이도 있어도 봤는데...

 

 ‘연회 날에는 춤이 끝나자마자 쌩하니 사라져버리고, 집무실에서는 울려 버렸지.’

 

 카이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여자들, 황궁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고관대작의 딸들이나 시녀들... 아무리 그가 무서워도 눈 한번만 마주치면 황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본느 공녀만 해도, 자기 나라가 그렇게 됐는데도 자신을 믿는다며 아내로 삼아달라 했었지...

 

 하지만 리안나 왕녀는 어떤가.

 

 여전히 황제인 자신에게 별 감흥은 커녕, 관심도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만날 때마다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카이엘이 입을 손으로 가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폐하.”

 

 뒤따라 온 알레인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기에는 당황한 표정의 알레인과 잔뜩 골이 난 제라드가 함께 서 있었다.

 

 사관학교 졸업 행사에서 황제가 갑자기 연단을 비운 통에 급하게 알레인 황자가 대신 격려사를 하고 정궁으로 온 참이었다.

 

 카이엘은 말 없이 둘을 노려보았다.

 

 ‘주위에 저 놈들만 있는 것도 문제야...’

 

 “형님?”

 

 그저 선하기만 한 자신의 배다른 동생.

 

 “여자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는 황제는 위엄이 서지 않습니다.”

 

 자신을 무슨 박물관에 박제된 황제처럼 만들려는 제라드.

 

 지난번 리안나 왕녀와 둘이 있을 때 쳐들어와서는... 뭐랬지? ‘불량한 복장으로 레이디를 유혹하는 것은 시정 잡배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폐하.’ 라고 했었나?

 

 카이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놈들은 여자도 안 사귀나? 이럴 때 차라리 랄프라도...’

 

 그나마 주위에 정상적으로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랄프였지만... 그는 수도에 숨어든 아틸리안 공의 잔당들을 색출하느라 궁을 비웠다. 하긴, 그 랄프도 신시아가 시집을 간 이후로는 재미없는 과묵남으로 변해 버렸지.

 

 ‘...결국 내 탓인가?’

 

 “형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사라지셔서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카이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알레인은 그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은 제라드더러 자리를 피해 달라는 신호기도 했기에, 제라드는 문 밖에 대기하겠다고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형님, 수석 집행관의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여자 때문에 이리 뛰고 저리 뛴다니...”

 

 “...발크 국의 왕녀가 막사 지붕에서 떨어졌다.”

 

 “네에?”

 

 “다행히 개울로 떨어져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졸업식을 하는 기사들을 보고 싶어서 지붕 위에 올라갔다더군.”

 

 “네...?”

 

 알레인은 지금 내가 뭘 들었지... 라며 중얼거렸다.

 

 “캐런 가의 다니엘인가... 에르시 대신의 아들을 보러 갔다던가...”

 

 “......”

 

 카이엘이 그렇게 말하며 무거운 한숨을 토해 냈기에, 알레인은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카이엘은 몇 번 큰 숨을 내쉰 다음, 알레인에게 명령했다.

 

 “인질의 관리는 네 몫이니 적당한 벌을 내리도록 하라... 제멋대로 못 돌아다니도록.”

 

 말을 마치고도 씩씩대는 폼이,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 형님, 리안나 왕녀를 마음에 두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

 

 ‘!’

 

 또 카이엘의 인상이 험악해졌으므로, 알레인은 괜히 말했나 싶어 어깨가 움츠러들고 말았다. 하지만 곧,

 

 “그... 기왕이면 벌보다는 왕녀가 좋아할 만한 일을 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뭐지?”

 

 “어, 으음...”

 

 사실 알레인도 리안나와 말을 섞은 적이 별로 없기 에 리안나 왕녀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뭐라도 말해야 하기에... 곰곰이 생각하던 알레인은 한 가지를 생각해 냈다.

 

 “아! 왕녀에게 황궁 외출을 허락하는 것은 어떨까요?”

 

 “외출?”

 

 “네. 지난번에 왕자들 모임에서 얼핏 들었는데, 리안나 왕녀가 황궁 안에서만 있으니 답답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답답하다...”

 

 “네. 왕녀와 친척인 리오넬 왕자가 한 말이니 틀림 없습니다.”

 

 알레인은 그러면서 리오넬이 리안나와 같이 위르겐에 다녀오면 안 되겠냐고 부탁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에 고민하는 황제에게 그럴듯한 제안을 했다.

 

 “마침 얼마 전 아샨티 왕녀가 다른 왕자, 왕녀들과 함께 아네르 강가로 가을 꽃놀이를 가게 해 달라고 청을 했거든요. 그 때쯤 리안나 왕녀도 근신령을 풀고 함께 갈 수 있게 해 주면 틀림없이 좋아할 겁니다.”

 

 “......”

 

 카이엘은 잘 모르겠는 얼굴로 부루퉁하게 있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하라.”

 

 알레인은 카이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제라드가 들어와 몇 가지를 보고했지만, 만족할 만한 소식이 없었기에 그도 곧 물려 버렸다.

 

 

 

 

 ‘꼴이 참 우스워졌군.’

 

 스스로 생각해도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무서울 것, 부러울 것 하나 없었는데... 고작 어린 계집애 눈에 들지 못해서 이 꼴이라니.

 

 이래서 선황은 누구도 사랑하지 말라 했던 것인가...

 

 카이엘은 심란한 마음에 해가 다 질때까지 홀로 집무실을 서성였다.

 

 그런데 카이엘 혼자 있던 어두컴컴한 집무실에, 누군가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고민이 있으신 얼굴이군요.”

 

 “! 누구...”

 

 카이엘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안 왕자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방금까진 아무도 없었는데...’

 

 카이엘은 반사적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장식용 검을 차고 다니던 선황제들과 달리, 카이엘은 사람을 벨 수 있는 검을 항상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런... 저를 해치시려구요?”

 

 이안은 쿡쿡 웃었다. 괜한 힘 뺄 필요 없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신경을 거슬렸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카이엘은 검집에 손을 둔 채로 물었다. 집무실 밖은 항상 넷 이상의 근위병과 두 명의 시종이 지키고 서 있었다.

 허가받지 않는 자는 이 방에 들어올 수 없다. 물론 허가받은 자라면 시종이 들여보내기 전에 고할 것이고.

 

 하지만 이안이 들어온다고 고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위대하신 테오 3세 폐하. 비천한 이 몸은 당신의 종복입니다.”

 

 이안 왕자가 과장된 몸집으로 몸을 수그렸다.

 하지만 그것은 예를 갖췄다기 보다는 오히려 조롱에 가까웠다.

 

 “당신께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제안?”

 

 카이엘이 눈을 찡그렸다. 야심한 밤에 찾아와 제안이라니... 전설에 나오는 악마를 실제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네...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가지실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 난 이미 천하를 가진 황제다.”

 

 이안이 섬뜩하게 웃었다.

 

 “리안나 왕녀요.”

 

 “!”

 

 이안의 유리알 같은 눈이 방 안의 촛불을 따라 아른거렸다.

 

 카이엘은 자꾸만 흩어지려는 정신을 모아 말했다.

 

 “그대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지?”

 

 “리안나 님을 황비로 맞으시려면... 없어져야 할 장애물이 많지 않습니까?”

 

 “......”

 

 이안은 훗, 하고 웃었다.

 

 “제가 그걸 없애드리지요.”

 

 “......”

 

 카이엘도 이안이 말하는 ‘장애물’이 뭔지 알고 있었다.

 

 한 때의 유희로 끝나면 모를까, 리안나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으려면 이안의 말대로 넘어야 할 선이 많았다.

 

 제국의 황족 순혈주의,

 그리고 귀족 중심의 사회인 제피리움에서 리안나를 황비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리안나 왕녀 주위의 인물도 무시할 건 못 돼요. 특히 케인... 그가 있는 한, 리안나 왕녀는 절대 황비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리안나와의 결혼을 반대할 제피리움의 모든 이들과... 그녀의 호위기사를 없애 준다고?

 

 그걸 묻기보다 카이엘은 이안에게 조용히 질문했다.

 

 “...그래서 그대가 원하는 것은?”

 

 이안은 만족한 듯 씩 웃었다.

 

 “폐하, 리안나 왕녀의 아버지... 리오넬 님의 무덤을 찾고 계시지요?”

 

 “!”

 

 그걸 어떻게...

 

 카이엘이 입을 떼기도 전에 이안이 속삭였다.

 

 “그 분의 무덤을 찾으면 제일 먼저 제게 알려주세요.”

 

 언뜻 대답하지 못하는 카이엘에게 이안이 아주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폐하께서는 반드시 리안나 님을 가지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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