턱을 괴고 세상 한심하다는 듯이 날 빤히 바라보는 루시아.
“잘-한다, 잘 해. 가서 정보만 좀 얻어오랬더니 아주 화제의 주인공이 되서 오셨네?”
“아, 그만-! 이미 내가 가기 전에 이상한 소문이 나 있었다니깐?”
나는 책상을 쾅- 소리가 나게 내리쳤다. 거의 그와 동시에 그랑벨 부인의 부채가 내 손등을 내려쳤다.
“아얏!”
“소문은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더 과장되는 법. 앞으로 계속 사교 모임에 참석하셔서 입지를 쌓도록 하세요.”
이 말을 마치고 그랑벨 부인은 갑자기 이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차라리 잘 됐지 뭐에요? 황제 폐하와의 썸씽이라니! 이 얼마나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이냔 말에요-!”
“왜 당신이 설레고 두근거리는 건데...?”
“저의 제자가 황제 폐하와 연인사이가 되는데 당연히 가슴이 뛰죠! 정말 왕녀님은 계 타신 거에요. 막말로다가 진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쬐깐한 나라 공주님이 오셔서 폐하의 비가 되다니! 왕녀님 인생에 이보다 더한 경사가 있겠어요?”
“이봐요, 여사님. 오래 살고 싶다면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가뜩이나 기분 안 좋은데 사람 앞에 두고 막말을 하다니... 내가 음산하게 노려보자 그랑벨 부인은 아차 싶었는지 부채로 입을 가리며 멋쩍게 웃다가 갑자기 볼일이 생각났다며 밖으로 나갔다.
“어휴, 머리야...”
“그런데 진짜 어떻게 된 거야? 여자에게는 눈길도 안 준다는 황제랑 어쩌다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너 능력 좋다?”
그랑벨 부인이 나가자마자 루시아가 본심을 드러냈다.
“몰라. 일이 꼬이려니 진짜... 아니, 파티에서 춤 한번 추고, 황제가 불러서 갔을 뿐인데 왜들 이렇게 난리야?”
“그전에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잖아.”
그러면서 루시아는 내 쪽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진짜 황제가 왜 그러는 걸까? 진짜 너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 아냐?”
“미쳤냐? 그 미친 놈이... 아니지, 미친 놈이니까 가능할지도.. 아냐, 그래도 천지에 널린 멀쩡한 여잘 두고 왜 나를...”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동안 루시아는 날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는 너는?”
“뭐?”
“왜 황제랑의 소문은 차분하게 해명 못 한 거야?”
“......”
그건 나도 궁금한 거다.
‘진짜 왜 그랬지...?’
그냥 ‘황제가 본국의 사정을 보고해달라고 해서 갔다.’ 고 하면 될 일을... 괜히 나 혼자 두근대서는 애매한 태도로 소문만 부풀려버렸지.
‘두근거려...?’
가슴에 손을 대 봤다.
“?”
“...모르겠어. 이상하게 테오3세...그러니까 황제랑있으면 .. 기분이 이상해.”
“기분이 이상하다고?”
“아니, 그러니까... 옆구리가 간지럽다고 해야 하나? 나도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어..”
그리고 볼 때마다 그의 시선이 왜 그렇게 뜨거운 건지도... 하지만 이런 기분을 루시아에게 다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뭐야, 진짜...?”
정신을 차려보나 루시아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 그럼 케인은...”
“그러니까.”
“?”
“케인이랑은 뭘 해도 그런 게 없거든? 심지어 저번에는 대련하다가 침대에 같이 엎어져 있기까지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단 말야. 근데 이상하게 황제랑 있으면 막...”
나는 황제가 내 손을 잡았던 일과 날 안았던 얘기를 해버렸다. 말을 끝내고 나자 얼굴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리고 있었다.
“......”
루시아는 입을 벌리고 날 바라보았다.
“뭐야,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아냐.”
루시아는 이상한 표정을 한 채 입을 다물어버렸다.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지는 바람에 나는 황제의 이야기를 더 하는 대신 어제 들었던 이상한 소문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요즘 황궁에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고. 뭐... 밤마다 시체가 돌아다닌대나?”
“그냥 하녀들 사이에 떠도는 괴담 아냐? 여기서 사람 죽는 게 한두 번 있는 일이냐고.”
“그건 아닌 거 같았어.”
어제 모임의 화두는 단연 나였지만, 사람들은 요즘 황궁에서 목격된다는 이상한 사건사고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했다.
“뭐 황궁에 이상한 병이 도는 것 같다고도 하고.. 그래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거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밤에 돌아다닌다는 거라며...”
“그러고 보니... 지난 번 황궁에 들어오다가 이상한 걸 봤어.”
루시아는 마리네 집에 다녀오다가 황궁의 ‘샛문’ 근처에서 봤다는 남자 얘기를 했다.
“하녀나 하인들이 출입하는 문 옆에 보면... ‘샛문’이 있잖아? 쓰레기나 병든 사람 아니면 시체를 실어 나르는 문 말야..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왔다고 들여보내주질 않는 문지기랑 실랑이를 하는데.. 그 문으로 누구가 들것에 실려 나오더라고.”
천이 덮여 있어서 누가 또 죽었나 했는데, 갑자기 거기서 누가 벌떡 일어났다고 했다.
우리 또래정도 되는 젊은 남자였는데, 병색도 없이 멀쩡한...
그는 자신을 들고 있던 사람의 멱살을 잡더니 ‘황제 폐하를 만나게 해 달라!’라고 소리치며 한참 난리를 쳤다고 한다.
“제라드인가 그 사람 이름도 막 외치고...하여튼 정신이 없더라고. 문지기도 그 쪽으로 달려가길래 그 틈을 타서 얼른 들어오긴 했는데 그 사람이 갑자기 입에서 피를 벌컥 쏟는 거야.... 근데 그게 꼭...”
그 뒷말은 나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력 부족 현상.”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순간 그 생각이 들었어. 여기에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말야.”
“......”
흔히들 사람이 병에 걸려 죽을 때 피를 토하는 장면을 상상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드물다. 그것도 시뻘건 피를 한꺼번에 토하는 일은 더더욱...
하지만 마법사들은 가끔 그런 일을 겪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력에 비해 무리하게 마법을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안에 내장이 꼬이면서 혈류가 막히게 되고, 그 상태로 그냥 두면 내장이 차례차례 파열된다. 우리는 이걸 ‘쇼크’라고 불렀다.
“진짜 마력 부족이었다면... 죽었을텐데, 그 사람.”
루시아는 그 때 그 사람을 쫓아가볼 걸 그랬나 은근히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쇼크가 온 마법사들은 빠른 시간안에 마력을 수혈받아야 한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정도의 마력만큼은 수혈을 받아야 휴식을 취하면서 마력을 회복할 수 있으니까.
“만약 제라드가 마법사라면, 몰래 마법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정도 실력이 있는 자라면 내가 못 알아챌 리 없어. 처음 왔을 때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일수록, 그러니까 마력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정교한 마법사일수록 상대방의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루시아는 처음 여기 왔을 때 황제와 제라드 앞에서 오랜 시간 무릎 꿇린 적이 있었는데, 제라드가 마법사라면 그때 자기가 바로 알아챌 수 있었을 거란 뜻이었다.
“모르지. 진짜 뛰어난 마법사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데도 능하니까... 아, 이 마력 봉인구 좀 풀어줘. 내가 직접 접촉해 봐야겠어.”
내가 마력 봉인 팔찌가 채워진 오른쪽 손목을 내밀자 루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 돼.”
“왜! 이제 다 나았다고!”
“아니, 아직이야.”
루시아는 딱 잘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굳게 닫힌 그녀의 입매에서 ‘절대 안 들어줄거야’라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루시아! 내 몸 상태는 내가 더 잘 알아. 난 정말 괜찮다고. 검도 없는데 마법도 못 쓰는 상태로 있는 게 더 불안...”
“한 번만 더 쇼크가 오면 진짜 장담 못 해.”
“......”
“여기 오기 전 디온과 약속했어. 네가 ‘완전히’ 회복되기 전까지는 절대 마법을 못 쓰게 하겠다고.”
“......”
내 표정이 너무 우울했는지 루시아가 얼굴을 조금 풀었다.
“조금만 참아. 네 상태는 내가 매일 체크하고 있으니까... 앞으로 한 달? 길어야 두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야.”
“...너무 멀어. 지금 제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마물이 나타난다는데...”
대체 언제까지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황궁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는 거야?
“리안나.”
루시아가 내 손을 잡았다.
“네가 잘못되면 슬퍼할 사람들을 생각해. 우리가 얼마나...”
루시아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반짝인 것 같았다. 그걸 숨기려고 다른 곳을 보고 있기는 했지만...
“......”
왠지 가슴이 먹먹해 와 나는 루시아의 손을 잡은 채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
“가십거리로 만들지 말라니까. 기어코 그 왕녀에게 날개를 달아 줬군.”
멍청한 여자 같으니라고... 신시아는 혀를 찼다.
“용케 그 머리로 로젠에서 사교계의 명사로 군림했네요.”
“명사는 무슨.. 왕세자비 자리를 던지고 뛰쳐나와서 사고만 쳐대니 여기 보내진 거지. 가문의 힘이 아니었다면 진작 어디 사원으로 보내져 쓸쓸하 죽어갔을 여자야.”
시녀 이제닌은 신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처음처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황궁의 인질 중 하나로 놔두었으면 될 것을... 공녀가 앞장서서 소문을 퍼뜨려 줬으니, 앞으로 사교계에서 리안나 왕녀의 입지만 단단해지겠군요.”
“맞아. 오라버니는 무슨 생각인지 다들 그 왕녀와 자신을 두고 떠들어대는데도 가만히 있고...”
원래 카이엘의 성정이었다면 감히 황제를 가십거리로 삼았다며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애꿎은 이안 왕자님에게만 벌을 내리신 걸 보면, 정말 다른 생각이 있으신가 봅니다.”
이제닌은 황제가 이안 왕자에게 근신령을 내렸다는 소식을 전하며 덧붙였다.
“......”
“...그보다 공주님, 랄프 경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안 읽어 보십니까?”
“됐어. 어차피 임무 때문에 당분간 황궁에 없다는 얘기겠지.”
신시아는 편지가 담긴 은쟁반을 밀어버렸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내게는 ‘황족의 의무’ 운운하며 다 늙은 노인네들과 결혼을 시키고 살인자로 만들어놓고. 황제 주제에 연애라도 하겠다는 거야...? 아니, 절대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카이엘이 소중하게 여기는 거면 뭐든 부숴버릴 작정이었다.
랄프도 밉기는 매한가지였다. 자신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 황제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척, 위하는 척 주위를 맴도는 꼴이 미치도록 싫었다.
“...공주님.”
신시아의 생각을 훤히 꿰고 있는 이제닌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불렀지만, 신시아는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서 아샨티 왕녀에게 보내기로 한 아이들을 데려와 봐. 내가 직접 당부할 말이 있으니.”
“...네.”
조용한 발걸음 소리 뒤로 방문이 닫힌 후,
신시아의 눈에서 소리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
케인과 리오넬이 위르겐으로 떠나고,
리안나와 황제의 스캔들이 조금씩 제피리움 사교계로 퍼져 나갈때 즈음,
황궁의 동쪽 병영은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있었다.
제국 최고의 엘리트 기사 사관학교의 졸업생들을 위한 황궁 행사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졸업 생도들은 황궁으로 초청받아 황제의 격려를 받고, 기사 최고의 영예직으로 불리는 황제 친위대원들과 함께 병영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황제를 직접 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이기에,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까지 함께 황궁을 방문해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영광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는 졸업 생도 중에는 프리아나의 모임에 참석했던 다니엘도 끼여 있었다.
“축하한다, 내 동생. 첫 복무만 끝나면 네가 내 자리를 이어받게 될 거야.”
다니엘의 형인 드미트리는 동생을 자랑스럽게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에는 친위대의 인장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리안나를 황제의 집무실로 끌고갔던 친위대원이었다.
“형, 나는 전방에서 복무하고 싶어.”
다니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형을 밀어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백작 작위를 이어받으면 당연히 내 뒤는 네가 이어야지. 이번에 위르겐 파견도 실전 경험 쌓으라고 잠깐 보내는 거니까, 가서 적당히 열심히 하고 돌아와.”
“형, 친위대원 자리가 세습은 아니잖아...”
“어휴, 좋은 날 답답한 소리 좀 그만하고 저기 황제 폐하나 좀 보라고! 드미트리 형님이야 폐하 뵐 일이 많겠지만 우리가 언제 저 고고한 자태를 직접 뵐 수 있겠어?”
오닐이 형제 사이에 끼여들어 하마터면 어색해질 뻔한 대화의 흐름을 끊어버렸다.
다니엘은 웃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앞에 앉아있는 황제가 보였다. 정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이렇게 먼 곳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제피리움의 태양이자 희망... 그 분의 뜻이 곧 우리가 가야 할 길.’
속으로 학교에서 수없이 읊었던 ‘기사 훈장’을 읊고 있는데 드미트리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다들 황제 폐하가 곧 결혼할 거라고 하셔. 그렇게 되면 친위대의 숫자는 더 늘어날 거야. 아니면 근위대라도... 무슨 말인지 알지? 황비님을 보호해야 하니까.”
드미트리는 동생이 황궁 안에서 근무하게 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미리 알려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돌아온 동생의 대답은 엉뚱했다.
“...발크 왕국에서 오신 공주님이랑?”
“뭐? 무슨 소리야.”
드미트리는 얼굴을 찡그렸다. 외모도, 풍채도, 검술도 자신보다 뛰어난 동생이지만 이상하게 시류를 읽는데는 영 재능이 없었다.
“테오3세 폐하의 첫 황비는 로젠 왕국에서 오신 프리아나 아르헨 님이 될 거야. 내가 뭐 때문에 그 분의 사교모임에 널 넣어줬는데?”
“......”
“제발, 다니엘. 그 분이 황비만 되면 우리가 이런 갑옷을 입을 필요도 없어진다고. 언제부터 제피리움이 진짜 기사 복무를 했어?”
드미트리는 여전히 굳은 표정인 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다니엘, 걱정하지 말고 이 형만 믿고 따라 와. 이제 제피리움 황궁에 늙은 꼰대들의 시대는 갔어. 모두 죽거나 유배 갔으니까.”
“......”
“이제 나랑 너 같은. 그래, 여기 있는 오닐과 우리의 귀여운 약혼녀 에밀리 같은... 우리 제피리움을 지켜온 대가문들의 젊은 후손들의 시대라고. 나를 봐. 아직 변변찮은 작위도 없는 너희들을 황궁에 출입시켜 주고 있잖아?”
“형, 에밀리는...”
드미트리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는 동생의 애매한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아, 그리고 얘기가 놔와서 말인데. 그 여자, 정말 건방지더라.”
“누구? 발크 왕녀님 말이야?”
“왕녀는 무슨. 그냥 몸값 비싼 인질 중 하나지.”
드미트티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주 웃기는 여자야. 나한테 대놓고 하대를 하더라니까? 제피리움의 캐런 가문을 뭐로 보고... 아니, 가문을 몰랐어도 이 인장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하!”
드미트리는 리안나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내세울 게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왕국에서 온 인질 주제에...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 목숨 따위는 떨어진 낙엽 신세라는 걸 모르나...? 당장 데려오라는 폐하의 명령만 없었어도 진짜...”
“...내가 보기에는 꽤 괜찮았는데.”
“뭐...?”
드미트리는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다니엘을 바라봤다.
“내가 봤을때는 꽤 괜찮았다고. 한 나라의 왕녀로서의 기품이 느껴졌어.”
“...기품?”
“응. 다른 사람들한테서는 느낄 수 없던... 카리스마랄까, 아무튼...”
다니엘은 얼굴이 빨개진 채 ‘레이디가 아니라 왕녀님이라고 부르고 싶었다’고 말했다.
“와, 아까부터 정말 왜 이래? 너까지 그 왕녀한테 반하기라도 한 건 아니지?”
“그런 게 아니야.”
다니엘이 얼굴을 찌푸리자 옆에 있던 오닐이 웃음을 터뜨렸다.
“형님, 그럴리가 있겠어요? 그냥 이 녀석은 너무 착할 뿐이에요. 괜히 ‘절도의 기사’라고 불리겠어요..? 그저 가냘픈 레이디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하는 건 이 녀석의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이라서 그런 거라구요. 그렇지, 다니엘?”
“......”
오닐이 눈을 찡긋 해 보였지만 다니엘은 기분이 상한 듯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드미트리는 기가 찬 듯 웃었다.
“가냘프기는... 꼴에 자기 검까지 황궁에 들고 와서 폐하께 압수당했다. 모르긴 몰라도 어릴 때 검술 배우겠다고 난리쳤을 거야.”
“푸하하, ‘말괄량이 안젤리느’ 처럼 말이죠?”
“그래... 걔 때문에 바르텐 소백작님이 얼마나 골치를 썩었나. 기사들과 겨루게 해 달라고 설치고 다녀서 온 집안 망신을 다 시켜서...”
“아아, 생각나요. 어쩔 수 없이 견습생 한 명이랑 겨루게 해 줘서 무참하게 깨졌죠, 아마?”
옆에 있던 생도들이 끼여들었다.
“맞아, 맞아. 매일 실력 좋은 기사들이 적당히 져 주니까 진짜 자기 검술이 대단한 줄 알고... 아주 가관이었지.”
드미트리의 동료도 그 때 일이 생각난다며 웃었다.
“하여튼, 어느 집마다 가끔 그런 괴짜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내가 보기에는 그 왕녀도 그런 말썽꾸러기들 중 하나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드미트리는 딱 잘라 말하고는 다시 황제가 앉아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곧 황제의 격려사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자유롭게 떠들고 있던 기사들이 순식간에 대열을 갖춰 차렷 자세를 취했다.
친지와 가족들도 얼른 주변으로 물러나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피리움의 태양, 테오 3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아름다운 용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모인 사람들 모두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다니엘은 이제 조금만 있으면 기사로서 황제에게 첫 임무를 부여받아 위르겐으로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제국과 황제를 위해 사는 삶. 다니엘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원했던 삶이었다.
“...?”
그런데 이상했다. 연단에 선 황제가 격려사를 하는 대신 다른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하게 내리쬐는 가을 햇빛을 참으며 황제의 격려사만을 기다리고 있던 생도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눈알만 굴려 황제가 쳐다보고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
구경하러 온 무리중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던 것 같다.
황제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훈련광장에서 조금 더 떨어진 근위대원 막사, 정확히는 막사 지붕이었다.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옆에 있던 동료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과연 거기에는 긴 머리의 여자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리안나 왕녀?”
다니엘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데,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떨어진다-!”
그와 동시에
황제가 연단 위에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