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집무실로 가는 동안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근위기사들의 수가 기이할 정도로 적다는 점이었다.
‘호위기사 소집령과 관련이 있나?’
의아해하는 동안 집무실 앞까지 도착했다. 시종이 지키고 서 있다가 나를 보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누가 왔다고 알리지도 않고...?’
나는 더욱 긴장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와 보는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방은 전체적으로 하얀 색 계열로 꾸며져 있었다. 웅장한 것을 강조하는 제피리움 답게, 군더더기 없이 크고 굵직한 선으로만...
나는 썰렁한 집무실을 한 바퀴 돌아보다가, 책상 옆에 있는 창가에 기대앉은 황제를 보고 멈춰 섰다.
졸린 듯 기댄 채 무언가를 읽고 있던 그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리안나 폰 라인바르크가 존귀하신 황제 폐..”
“됐어.”
“.....”
이번에도 인사를 씹혔다.
방 안에는 나와 황제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를 내 오는 시녀나 시종도, 황제의 정무를 보좌하는 보좌관들도....
갑자기 도서관에서의 일이 떠올라 몸이 움츠러들었다.
“뭘 하고 있지?”
“아... 예?”
“......”
황제는 창가에 기댄 자세 그대로 얼굴을 찡그린 채 손가락을 까딱하고 있었다.
‘아, 보고서...!’
나는 황제에게 다가가 보고서를 건넸다.
그런데 이 상황에 황당하게도 내 시선은 황제의 벌어진 앞섶에 가서 꽂히고 말았다.
‘흐악....’
늘 답답할 정도로 성장을 하고 있지 않았었나? 집무실에서는 좀 편하게 하고 있는 스타일인가.
‘그래도 보고하러 오는 사람도 많을 텐데...’
셔츠가 생각보다 많이 풀어헤쳐져 있어서 대리석상 같은 그의 가슴이 다 보였다.
거기다... 머리칼도 좀 촉촉하다...? 창문 사이로 늦은 오후의 햇빛이 들어와 그의 눈부신 금발과, 사이사이의 물방울을 반짝였다.
어디다 눈을 둬야 할 지 모르겠다.
“왜 그러지?”
“네? 뭐가요?”
“어딜 보고 있느냔 말이다.”
“그게...”
황제를 보고 있자니 발끝부터 가슴, 옆구리까지 간질거리는 같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애먼 벽만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필 거기에는 빼앗긴 내 검도 걸려 있었고.
“검은 못 준다.”
“네에...”
황제는 보고서를 몇 번 뒤적거리다가 다시 내게 내밀었다.
“벌써 다 읽으셨어요?”
“읽어라.”
“......”
글 읽을 줄 모르나?
순간 울컥 했지만 황제의 명이라 거역할 수가 없었다.
‘기억해, 상대는 살인광 싸이코패스야...’
나는 결국 황제의 앞까지 다가가 보고서를 건네 받았다.
황제가 내가 거의 코앞까지 다가가서야 보고서를 건네주었기 때문에 나와 그의 거리는 아주 가까워져 있었다.
‘방은 또 왜 이리 더운 거야...’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는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르카디아 해 너머 소 군도를 집어삼킨 ‘피의 전쟁’은 제국력 975 년 봄, 발크 왕국의 헬레나 여왕이 그의 충복에 의해 시해되면서 발발했다...”
“......”
또다시 집요한 황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내 어린 시절을 송두리째 집어삼킨 전쟁의 경과를 담담하게 읽다 보니 피가 싸하게 식어갔다.
“시해의 표면적인 이유는 헬레나 여왕이 타국의 왕자와 결혼하여 정통성이 없는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으나 실은 .. 마계와 인간계의 경계에 있는 발크, 이오니아 등의 소국을 괴멸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소설 같은 이야기에 코웃음을 칠 법 한데도 황제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여기서의’ 정통성이 없는 아이’는 다름 아닌 나를 말하는 것이기에.. 내 기분은 순식간에 어둔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몸에 열이 올라 나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몇 번 하고서는 다시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시해가 일어난 날 밤, 발크 궁은 반군 세력에 순식간에 점령당했고, 리오넬 왕은 충신 몇 명만 데리고 겨우 탈출했다. 아직 어렸던 디온 왕자와 유노, 리안나 공주도 궁정인 몇 명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하며 발크 섬의 서북부, 로키아 섬으로 피신했다...”
“......”
황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모른 척 보고서만 들여다 보았다. 의도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때문에 일어난 전쟁의 경과를 직접 읽으라는 것은 내게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보고서를 든 두 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리오넬 왕은 고국인 이오니아에 원군을 요청하고, 모든 군인들을 발크 섬의 최남단, 헤로디안 지방에 집결시켰다. 957년 여름, 드디어 마물들을 앞세운 무자비한 학살에 대한 반격이 시작됐다. 리오넬 왕이 이끄는 군대는 발크 섬을 뒤덮은 마물들을 차례차례 몰아내기 시작했지만 961년 10월, 델 아너스 고궁 전투에서 리오넬 왕이 행방불명되면서 승리가 요원해지고 말았다...”
나는 잠시 읽기를 멈추고 숨을 골랐다. 보고서는 이 뒤에 겨우 반 페이지 정도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생지옥과 다름없던 그 전란 속, 유일한 등불과도 같았던 아버지의 실종 소식은... 우리 형제뿐 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사망 선고와도 같았다.
그 때 오빠와 나, 유노, 케인은 아버지를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로키아 섬에서 봉기한 부대와 종군하고 있었는데
재회를 바로 앞 둔 그 며칠 전, 전투에 참가한 전원이 몰살당하고 아버지는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안나.”
“......”
우리가 부랴부랴 델 아너스에 도착했을 때에는 버려진 궁 안에 우리 군사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찢긴 채 널려 있었다.
“리안나.”
바닥이며 돌 벽, 무성하게 자란 풀숲에까지 채 마르지 않은 피가 묻어서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리안나!”
“헉!”
정신을 차려보니 황제가 내 어깨를 꽉 잡고 있었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고,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
보고서. 마저 읽어야...
내가 다시 보고서에 눈을 돌리자 황제가 황급히 보고서를 빼앗았다.
“그만 됐다.”
“......”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왜 이러나 했는데 울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울지 않아... 난 약하지 않으니까.’
이게 무슨 창피한 상황인 지 모르겠다. 그저 사실이 적힌 보고서를 읽었을 뿐이다. 글로 남기지 않아도 내 머리와 몸 속에 생생하게 아로새긴 일들인데, 왜 새삼스럽게... 그것도 테오3세 앞에서.
‘이러면 안 돼. 우습게 보이기만 할 거야.’
그런데 황제는 무슨 생각인지 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나를 끌어당겼다. 어? 하는 사이 그의 품... 아니 맨가슴에 내 뺨이 닿았다.
“!”
나는 반사적으로 황제를 확 밀쳐내고 말았다. 누군가 나를 이런... 이런 식으로 안으려고 한 것은 처음이었다. 황제는 눈썹을 꿈틀하기는 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내 손을 잡았다.
당황스러운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차가운 내 손에 그의 열기가 옮겨오고 있었다.
신비롭게 빛나는 그의 황금안이 나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터질 듯 한 긴장감에 숨이 막혀 오려는 그 순간.
“폐하, 급히 보고드릴 안건이... !”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들이닥친 사람은 알레인 황자였다.
당차게 들어온 그는 요상한 분위기에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멈춰 섰다. 뒤따라 들어온 제라드도 할 말을 잃고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가 들어와도 된다고 했지?”
황제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 한마디만으로 방 안의 분위기는 살얼음장처럼 변했다.
내 손을 놓는 그에게서 아쉬움이 느껴졌다면.. 내 착각일까?
“...죄송합니다. 너무 급한 건이라.. 그런데 폐하, 옷차림이...”
알레인은 말을 하다 말고 혼자 얼굴이 빨개졌다. 제라드는 묘한 표정으로 나와 황제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황제는 한숨을 쉬고서는 내게 “그만 물러가라.”라고 손짓했다.
보고서가 완성되면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
나는 울었던 흔적이 보일까 목례만 겨우 하고서는 집무실을 빠져 나왔다.
집무실을 빠져 나오니 아까는 황량했던 정궁의 복도가 수많은 궁정인들로 인해 북적이고 있었다.
그들도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온 나를 보고 놀란 듯 저들끼리 수군댔다.
나는 마치 다른 세상에서 툭 튀어져 나온 멍한 느낌이 들어, 휘청거리며 겨우 정궁을 빠져나왔다.
***
근위기사단장의 소집해제령이 내려지자 황궁 동쪽 병영에 하릴없이 앉아있던 호위기사들이 하나 둘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불러놓고 아무 일도 안 시키고...”
케인은 툴툴거리며 검을 챙겨 일어났다. 난데없는 소집령에 합동 훈련이라도 하려나 하고 내심 기대 했는데, 훈련장에 그냥 내리 앉혀두고는 시간만 보내게 할 줄이야...
“아무것도 안 하니 좋지 않습니까? 케인 경은 움직이고 싶어 좀이 쑤시나 보군요.”
누군가가 아는 체를 해 왔지만 케인은 대꾸하지 않고는 서둘러 리안나의 방으로 향했다.
황제가 지시한 보고서를 아직 다 못 끝낸 게 마음에 걸려서였다. 케인은 글을 쓰는 데는 별 재주가 없었기 때문에 리안나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피의 전쟁의 발단 부분을 쓸 때 그녀 기분이 어떨지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하면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루시아도 마리네 집 핑계로 궁을 비웠는데...’
예감이 좋지 않아 서둘러 돌아온 케인은 1 별궁의 분위기가 어딘지 어수선한 걸 느끼고는 지나가는 하녀를 불러 물어보았다.
“아까 기사님이 안 계실 때 리안나 왕녀님께서 혼자 폐하께 불려갔다 오셨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갔다 오셨을 때 안색이 너무 안 좋으셔서...”
“뭐?”
케인의 낯빛이 대번에 변했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도 잊고 리안나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
“리안나.”
케인의 부름에 멍하니 앉아 있던 리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리안나는 안에 입는 홑옷만을 걸치고 의자에 맥없이 앉아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 자식이 너한테 무슨 짓 했어?”
케인은 리안나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리안나와 비슷한 푸른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했다.
“케인.”
“응?”
“대련 한 번 하자.”
“뭐? 지금?”
“응. 연습용 검 있지?”
검술 대련을 하자는 얘기였다. 케인은 뜨악한 표정으로 리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려고 이런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나? 리안나의 표정을 보니 상당히 심란한 상태인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꼭 리안나는 생각이 많아질 때 케인에게 대련을 해달라고 졸랐다.
한 번도 케인을 이긴 적이 없으면서.
“...알았어. 기다려.”
어떤 말을 해도 리안나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케인은 두말없이 나가서 연습용 검을 빌려왔다.
리안나의 방은 넓은 편이긴 했지만 검술 연습을 할 만큼 탁 트인 공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쾌적한 곳에서만 싸워왔던 그들이 아니기 때문에.
리안나는 케인이 검을 쥐어주자마자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케인이 허리를 뒤로 빼며 그 일격을 받아 넘겼다.
“천천히 해. 오랫동안 쉬었잖아.”
“상관없어.”
“......”
황제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흥분해 있는 걸까? 단순히 화났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슬픔도, 분노도 아닌 무언가...
리안나는 지금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함께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리안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던 그였는데, 지금 리안나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안해하고 혼란스러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심해. 빈틈이 너무 많아.”
케인이 거리를 좁히며 리안나의 목 쪽으로 검을 놀리자 리안나는 몸을 유연하게 틀어 뒤쪽의 소파로 피했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검을 바꿔 잡아 케인의 검을 다시 쳐냈다.
리안나의 검술은 이런 점에서 훌륭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웠으며, 가볍고 빠른 자신의 체구를 십분 활용했다.
전쟁에 투입되는 마법사들은 백병전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기본적인 군사 훈련을 함께 받는다. 하지만 리안나는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마법사인 동시에 탑 클라스의 검사이기도 했다.
물론 케인에게는 한참 못하지만.
“너무 급하다니까.”
이십 여분의 대련은 이번에도 케인의 승리로 끝났다.
리안나는 케인이 보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다가 그만 함정에 걸려들고 말았다. 자신보다 힘이 센 상대와 싸울 때에는 함부로 거리를 좁히면 안 되는데, 결정적인 한방을 날리려다 오히려 케인의 밑에 깔리고 말았다.
“항복?”
“항복.”
리안나는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완전히 케인에게 말려들었단 건 그녀도 알 수 있었다. 뒤로 넘어지더라도 그녀가 다치지 않게 일부러 침대로 넘어뜨린 것만 봐도...
침대?
리안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순간 케인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필 그녀는 얇은 속옷만 입은 상태, 연습용 검만 없으면 지금 이 자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케인은 화들짝 놀라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야, 야, 이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비켜. 옷 입게.”
“으응...”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어색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케인은 리안나가 다시 겉옷을 입을 동안 멀찍이 뒤돌아 서 있었다.
그 동안에도 리안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케인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황제는 널 왜 불렀대?”
“...보고서가 어디까지 됐나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아.”
“그거 말고는?”
“없었어. 중간에 황자랑 제라드가 들어와서.”
리안나는 옷을 다 입고서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비단결 같은 검은 생머리가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덮었다.
“......”
지금 내가 홀린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까.
케인은 리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동료로써, 여동생으로써 대했던 그녀를 이런 마음으로 보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건 그 자신도 몰랐다.
그도 왕궁 생활이 답답하다며 리안나가 훌쩍 여행을 떠나버린 뒤로, 그녀가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던 사실이니까, 리안나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일 것이다.
‘언젠가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여전히 자신 앞에서 속옷만 입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당당한 저 애한테?
케인은 자신을 돌아보며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는 말을 건네는 리안나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
아틸리안 공작이 제국에, 그것도 수도에 잠입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보고도, 마물이 또 수도에 인접한 도시에서 출몰하고 있다는 보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카이엘은 긴급 회의를 서둘러 마무리하고는 혼자 집무실에 돌아왔다.
긴 한숨이 목을 타고 넘어왔다.
지난 밤 만찬 때 신시아가 지나가는 말로 리안나 왕녀와 이안 왕자가 밤을 함께 보내는 사이라는 소문을 이야기하기에, 리안나 왕녀에 대한 이런저런 의혹들을 한꺼번에 확인할 겸 오늘 낮에 본인을 불렀었다.
그런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안고 싶었어.’
카이엘은 놓아버렸던 리안나의 손을 떠올렸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볼 때마다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왕녀였다.
처음에는 독특한 외모, 그 다음에는 잔혹한 광경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침착함, 그 다음에는 부당한 압력에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 그 다음에는 어린 소녀와 같은 순진함...
그리고 오늘은 그녀 안에 감춰진 깊은 슬픔과 분노를 보았다.
카이엘은 리안나의 손을 쥐었던 손을 가만히 쥐었다 다시 펴 보았다.
살면서 많은 악독한 짓을 한 그였지만... 오늘만큼 잘못했다는 생각이 든 적은 처음이었다.
‘보고서를 굳이 읽으라고 할 필요까지는 없었나...’
얼마 되지도 않는 보고서였다. 산더미같은 서류를 보는 데 익숙한 그이기에, 그 정도 내용은 보자마자 다 훑어보았다. 그러면서도 리안나에게 읽어달라고 한 이유는, 그녀가 정말 자신의 친부를 죽일만한 위인인지를 시험해보려던 것이었다.
‘리안나 왕녀가 직접 리오넬 왕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을 본 자가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직접 증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제라드는 저 멀리 서부까지 정찰대를 파견해 ‘피의 전쟁’에 참전했었던 사람을 찾아냈다며 카이엘에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카이엘은 ‘설령 그녀가 친부를 살해했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며 코웃음 쳤지만 사실 그도 궁금하기는 했다. 평생 아버지를 증오했던 자신도 아버지의 몸에 검을 댄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오늘 낮에 리안나 왕녀를 만나본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사실이 아닐 것이다.’
리오넬 왕을 살해했다는 것도, 이안 왕자와 연인 사이라는 것도.
아버지가 행방불명됐다는 대목에서 리안나 왕녀가 보인 슬픈 표정은 결코 꾸며낸 것이 아니었다. 아니, 리안나 왕녀는 다른 자신을 꾸며내는 데에는 재주가 없었다. 게다가 남자와 사귀어본 적도 없는 게 분명했다. 지난 번 도서관에서 만났을 때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손만 닿으면 과할 정도로 긴장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그런 여자가 이안 같은 바람둥이와 사귄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필요 이상으로 그 왕녀에게 많은 관심을 쏟고 있어... 이런다고 내게 쉽게 마음을 열 것 같지도 않은데.’
차갑고 냉혹한 황제로만 살다 보니, 여인에게 마음을 얻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어떻게든 눈에 띄려고 안달인 다른 외국 공주들과 달리, 리안나는 자신에게 별 관심도 없어 보였고 만나면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경계하는 게 마치 야생 고양이 같았다.
“큰일이군.”
어쩐지 처음으로 가질 수 없는 걸 원하게 됐다는 생각에, 카이엘은 낮게 탄식했다.
‘너 외에는 아무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 황제는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가 아니거든.’
죽기 직전 정신이 돌아왔던 선황은 카이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선황을 미친 사람이라고 업신여겼던 카이엘도 그 말만큼은 새겨들었었다.
‘황제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파멸하게 된다.’ 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