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춤을 청한다’던가, ‘한 곡 함께 추지’라는 말도 없이 그저 한쪽 손만 내밀고 있는 황제.
그의 오만한 황금빛 눈이 어디를 보고 있나 했더니... 팔짱을 끼고 있는 나와 케인의 팔을 보고 있다.
“......”
케인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지만 결국 팔을 풀었고,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황제의 손을 잡았다.
“제피리안 무곡으로”
황제가 낮게 읊조리자 시종장이 바로 악단에 사인을 보냈다.
‘이건 모르는 곡인데...’
느리고 낮게 시작되는 곡인데, 아직 내가 배우지 않은 곡이다.
황제가 첫 춤을 춰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 중앙을 비우고 멀찍이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황제와 춤 출 기회를 놓친 여자들이 분한 듯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지지난주에서야 왈츠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는데, 이런 어려운 곡을 어떻게 추겠어?”
이렇게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도 있었고.
“짐이 움직이는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
내 불안감이 표정에 드러났던 걸까? 황제는 고개를 숙여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왜 또... 얼굴이 화끈거리는 거야...
전주가 어느정도 흐르자 황제는 불안해하는 나를 이끌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를 따라 몇 번 스텝을 밟은 나는 곧 의아한 기분에 빠졌다.
‘? 뭐야, 이거... 내가 아는 춤이잖아?’
제피리움 춤은 여기서 말고는 배워본 적이 없이 없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지?
“생각보다 잘 추는군. 왈츠 수업을 곧잘 빼먹었다고 들었는데.”
“...어렸을 때 곧잘 추던 춤이에요.”
“그래? 제국의 궁정무곡을 어렸을 때부터 배웠다고?”
‘이게 제피리움의 궁정무곡이었구나....’
나는 황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미끄러지듯 몸을 몇 바퀴 돌렸다.
상대가 리드하지 않아도,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출 수 있었다.
이건 내가 처음으로 배웠던 춤이니까.
파트너와 거리를 두고 추는 부분에서, 나는 사람들 쪽에 더 가까이 붙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청 잘 추잖아?”
“어쩜 저렇게 몸이 유연하지...? 발도 너무 가볍고...”
“세상에, 황제 폐하 웃고 계신 것 좀 봐요. 믿어지지가...”
제피리안 궁정 무곡은 처음엔 느리게 시작했지만 조금씩 빨라지며 웅장해졌다.
나는 나의 춤 선생의 콧노래에 맞춰서 함께 춤을 추던 날을 생각하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황제의 눈을 들여다보며, 춤을 췄다.
춤을 추는 데는 5분이 조금 넘게 걸렸을 뿐이지만,
내게는 어쩐지 영원같이 느껴졌다.
“......”
“......”
음악이 멈추고 나와 황제가 말없이 서로를 보고 있는 동안, 홀 안은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곧이어 밝고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황제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사람들이 다같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케인이 내 팔을 흔들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
“아, 지긋지긋해...”
제복의 윗단추를 풀며 케인이 씨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땀이 몇 방울 맺혀 있었고,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었으며, 제복에 달린 망토도 삐뚤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케인, 인기 많네?”
내가 키득거리자 매섭게 쏘아본다.
“도와주지도 않고. 이러기야?”
“즐거워 보이던데?
역시 얼굴이 중요하긴 한가보다. 내 호위기사라는 이유로 케인에게 가까이 하려 하지 않던 여자들이 술을 몇잔 먹더니 앞다투어 달려들어 케인에게 춤을 춰 달라고 한 것이다.
덕분에 케인이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특히... 연상의 귀부인들에게.
“너 조심해야겠던데? 너랑 춤춘 부인들의 남편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벼르고 있더라.”
“너...”
케인이 뭐라 말하려던 그 때 우리가 있는 발코니로 술에 취한 아샨티가 난입했다.
“쟐생긴 케인 겨엉-! 나랑도 한 번 춰요, 네?”
“우왁, 공주님, 이거 좀 놔...”
“네에에에에...?”
“리안나! 보지만 말고 좀 도와줘!”
막무가내로 케인의 목을 끌어안은 아샨티와,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케인의 꼴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내가 한참이나 배를 잡고 깔깔거리는데, 갑자기 누가 뒤에서 확 잡아당겼다.
“!”
“? 리안나...?”
아샨티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날 찾는 게 보였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눈 앞에서 열려진 공간의 틈이 닫히고 있었기 때문에.
*
“역시 공간 이동은 기분이 더러워.”
“아이, 참. 리안나 님, 예.쁜. 말!”
“크랜베리 부인 말투 따라하지 마!”
그랑벨 부인인데요... 하면서 이안이 쿡쿡 웃었다.
나는 이안의 품에 안겨 제피리움 황궁의 어딘가에 둥둥 떠 있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와 어깨가 살짝 떨렸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래? 어딜 갔다 이제 나타나는 거고?”
“으음, 좀 바빴어요. 기분이 좀 안 좋기도 하고...”
“기분이 안 좋다니... 니가 무슨 ‘인간’이라도 돼?”
내 말에 이안이 상처받았다는 듯이 울상을 지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에서 섬뜩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온기도, 심장이 뛰는 소리도, 숨결도 느껴지지 않는 섬뜩함..
황제가 화려한 정원 속에 아름답게 핀 장미라면, 이안은 창백한 백합이다. 영원 속에 정지해 버린, 박제된 아름다움...
‘왜 내가 이안을 황제랑 비교하고 있지.’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서, 나는 이안의 볼을 꼬집었다.
“추워. 내려 줘.”
“네, 마이 레이디.”
이안은 천연덕스럽게 웃고는 우리 발 밑에 있던 풀숲에 나를 내려놓았다.
등 하나 켜져 있지 않은 적막한 곳이었다. 황궁 안이라기 보다는... 폐허같은 느낌?
“여긴 어디야?”
“음.. 여긴 테오3세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했던 곳이에요. 꼭 그녀 뿐이 아니라 버림받은 황비들이 죽기 전에 머물렀던.. 말하자면 유배 전용 궁이랄까요?”
버림 받아...? 황제의 어머니가?
“왜 하필 이런 곳으로 데려온 거야?”
어쩐지 으스스하더라니. 연회가 벌어지는 장미 궁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진 않은 곳인지 노랫소리가 들려오긴 하는데...
“저는 이런 곳이 좋으니까요.”
“누가 마족 아니랄까 봐.”
“둘만 있기에도 좋고.
“!”
이안이 몸을 바싹 붙여 왔다. 순간 긴장하며 몸을 빼려 했지만 이안이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한 손은 내 손을 부드럽게 쥐고.
“뭐하는 거야?”
“저랑도 한 곡 춰 주세요.”
저랑’도’...?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나랑 황제가 춤 추는 것을 다 보고 있었나 보다.
마침 장미궁에서 ‘제피리안 무곡’이 연주되고 있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둘이 함께 추고 있지만, 숨소리는 한 명만 들리는, 유령과 함께 추는 춤.
내 춤 선생은 이안이었다.
“어째서 내게 하필 제피리움 춤을 알려 준 거야?”
“글쎄요..?”
“그 때 이 춤을 출 일이 많았나 보지? 제피리움 사교계에 드나들었다거나...”
“글쎄요?”
이안은 빙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그래, 물어본 내가 바보지.
우리는 함께 춤을 췄다.
내가 아직 어렸던 그 때, 이안이 마족인 것을 몰랐던 그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처음 들어보는 곡인 거야. ‘망했구나’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 춤이더라고?”
“제가 허밍으로 해 드렸잖아요.”
“그게 이 곡이었다고....?”
“네.”
“이안, 너...”
“?”
“음치였구나.”
“......”
그럼 그렇지... 마족이 예술을 이해할 리가.
너무하세요.
불쌍한 척 하지 마.
히잉...
버려진 궁전, 달빛조차 들지 않던 그 곳에서 우리는 실 없는 농담만을 했다.
출궁 허락을 얻어 나간 이안이 왜 이 시간에 황궁에 있는지, 황궁 밖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나는 이안에게 이런 질문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질문을 해 버리면...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현실을 마주할 것만 같아서.
***
[이안, 너 이번 일과는 무관 한 것 맞지?]
[네.]
[앞으로는...?]
[그건...
고민중입니다.]
고민중이라는 건.. 언젠가 결정을 해야 한다는 뜻이겠지...?
“어제 그 녀석, 뭔가 이상했단 말야. 아무래도 그 녀석 나름대로 중요한 결정을...”
“리안나. 나 집중하는 중이라 나중에.”
“어? 어.”
“거기 잉크 통 좀 줄래? 내 건 다 떨어져서.”
“...어.”
사각사각.
날 쳐다보지도 않고 종이에 글자를 쓰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는 케인.
‘발크 국에 일어났던 피의 전쟁에 대한 보고서를 써서 올려라’는 황제의 명령 때문에 저렇게 열심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핑계인 것 같다.
나는 옆에서 책을 보는 루시아를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쟤 왜 저래...?’
‘나도 몰라.’
루시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도 요즘 마족문자를 해독하느라 다른 일에 정신을 쏟을 여념이 없기는 했다. 마법사가 많은 우리나라 쪽에도 몰래 서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 하긴 했지만... 루시아 성격에 마냥 기다리고 있을 리만은 없지.
그건 그렇고...
“......”
내 쪽은 일부러 쳐다보지도 않는 게 뻔히 보이는데.
“케인, 잠깐 나와 봐.”
“싫어.”
이걸 죽여, 말아..?
“빨리 나와 보라고!”
쾅!
내가 책상을 내려치자 오후 차를 들고 왔던 마리가 움찔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의자에 앉아 수를 놓던 크랜베리 부인도 깜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평소라면 날 야단 쳤겠지만 내 서슬에 놀랐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이 쪽만 쳐다보고 있었다.
“......”
나를 노려보던 케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펜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복도 끝에 딸린 작은 테라스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다. 둘만 있게 되자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솔직히 말 해.”
“뭘?”
케인은 여전히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속에서 천불이 나지만 안간힘을 다 해 참아본다.
“나한테 화 났잖아.”
“아닌데?”
“아니라고? 어디서 거짓말을... 난 네 눈빛만 봐도 다 알거든?”
함께 한 세월이 몇 년인데... 내가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씩씩대며 쳐다보자 케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그럼 왜 화났는지도 알겠네?”
이거 봐, 이거 봐. 화 안 났다더니.. 네가 뛰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당연하지.”
“뭔데?
케인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게 보였다. 뭐야, 뭘 기대하는 거야. 마치 주인이 놀아주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어제 내가 안 도와줘서 그러는 거 아냐. 으휴, 이 속 좁은 놈.”
“...뭐?”
“어젯밤! 너 여자들한테 릴레이로 춤 신청 받을 때 나몰라라 했다고 이러는 거 아냐, 지금?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었잖아. 갑자기 이안 그 자식이 불쑥 나타나는 바람에 나도...”
그 순간 케인의 눈빛이 확 변했다.
“어제 밤... 어디 있었어?”
“난 네가 그렇게 속이 좁은 줄은 몰랐...뭐....?”
“어젯밤. 아예 안 들어 왔잖아.”
“......”
그 다음 이어진 케인의 질문에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밤새 이안과... 둘이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