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직접 나선 수도권 마물 소탕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아니, 중급 마물 하나 해치우는데 중앙군 한 개 대대가 괴멸해으니 제피리움 입장에서는 비극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 쪽에서는 성과가 있었다.
첫째, 케인이 다친 곳 하나 없이 무사히 돌아왔고
둘째, 작전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죽을 뻔한 황제를 구해서 신임을 얻는데 성공했으며
셋째, 제라드에 대한 이런저런 정보를 얻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걸 찾았지.”
케인은 품에서 천에 싸인 무언가를 꺼냈다.
천을 풀어보니 남자의 주먹 만한 크기의 조각이 나왔다.
“이건...?”
“이안이 말한 그 <홀>이라는 게 사라지는 걸 운 좋게 목격했어... 순식간에 사라져버려서 기억나는 건 별로 없지만... 이게 그 근처에 떨어져 있었어.”
아쉽다. 마법사인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홀’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작은 단서라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할 수는 없어.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
내가 아쉬워하는 걸 보고 루시아가 지적했다.
“누가 그걸 몰라? 맨날 이 지루한 곳에 갇혀 있는 게 답답해서 그러지... 아무튼, 이 문자는 뭐지?”
원래 무언가의 일부였던 것 같은 하얀 조각에는 마법사인 나조차 알지 못하는 문자가 조각되어 있었다.
필시 이것은 마물을 소환하는 <홀>을 만드는 주문의 매개체로 사용된 후 깨진 주물의 일부일 것이다. 주물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항아리였을 수도 있고, 석판이었을 수도 있고...
누구의 짓인지,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알려면 조각에 적힌 주문을 해독해야 하는데 어떤 나라의 문자인지도 모르겠으니…
그리고 엄청나게 작은 크기의 글자인데도 마치 찍어낸 것처럼 정연하게 음각되어 있다. 아무리 실력 있는 조각가라 해도 이게 가능한가?
“......”
이안은 그것을 집어 눈 가까이 가져갔다. 조각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그가 희미하게 웃는 것을 보니 내 짐작이 맞는 모양이다.
“그거, 마족 문자지?”
이안은 빙긋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네놈들이 문자도 써?”
케인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저놈들끼리 서신을 주고받거나, 본인들의 역사를 기록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으니까. 한마디로 문자가 필요 없는 종족이 마족이다.
“뭐… 잘 쓰지는 않지만 있어서 나쁠 건 없죠.”
“이런 주문을 발동시키기 위해 만들었겠지. 어쨌든 마족 문자는 맞다는 거군?”
이안은 이마를 찡그리고 웃었다. 저놈이 말을 안 하는 걸 보니 확실하다. 마족은 이 세상에 이득이 될 게 없는 사악한 존재이지만, 이상하게 거짓말은 안 한다.
“그거, 무슨 뜻인지 말 안 해줄 거지?”
“네.”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저 얄미운 놈.
나는 혹시나 이안이 중요한 증거물을 가루로 만들어버릴까 봐 얼른 그의 손에서 조각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좋아… 하지만 이안, 우리가 찾아낸 단서 덕분에 너도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된 셈이니 너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내놔.”
내 말에 이안이 알쏭달쏭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리안나 님께 도움 될 만한 정보가 없는데...”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네가 여기까지 숨어들어온 지가 언제인데 아무것도 못 알아 냈을리가?”
“정말인데... 아, 그러면 이건 어떨까요?”
이안은 능글맞게 웃으면서 얼굴을 내 앞쪽으로 쑥 들이밀었다.
“뭐든 질문을 하나 하세요. 리안나 님이 물으시는 거라면 뭐든 대답해 드릴테니.”
“......”
나와 케인, 루시아는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저 놈의 정보력은 상당하지만 문제는 그만큼 입이 무겁다는 거다. 그런 놈이 먼저 질문을 해도 된다고 한 것은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마족은 거짓말을 안하니까.
“저 녀석이 모를 수도 있는 건 물어보면 안 돼.”
“알고 있어.”
흔치 않은 기회인만큼 확실한 답을 들을 수 있는 걸 물어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면서.
“이안. 너, 이번 일과는 무관하다고 했었지.”
“네.”
잠시간의 침묵 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지?”
이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번 작전에서 죽은 군사들의 장례식을 치뤄줘도 모자랄 판에, 축하 연회라니 무슨 소리야?”
신시아가 머리를 짚었다.
오랫동안 공석인 황비를 대신해 황궁의 대소사를 돌보는 역할을 해 온 그녀는, 방금 황제로부터 수도 인근에 나타난 마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개최하란 지시를 받은 터였다.
“장례식은 이미 치뤄줬을텐데.”
“적어도 추모의 기간을 가져야지!”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건이다.”
카이엘이 차갑게 잘라 말했다.
한마디라도 더 토를 달면 바로 엄벌을 내릴 기세였다.
“...수도의 시민들이 불안해하고 있으니 일부러 연회를 열어 우리 군이 승리했음을 알리려는 겁니다.”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신시아는 카이엘을 노려보다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틀렸다.
저런 눈을 했을 때의 오빠는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신시아가 기를 내리자 시종장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시아는 이 황궁에서 카이엘의 면전에 대고 직언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였지만, 싸이코 황제가 꼭지가 돌면 무슨 일이 날 지 장담할 수 없었다.
“외국인들 중에서 정비를 뽑겠다는 건 어떻게 됐어?”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다.”
“...뭘 고민하는 거야? 답은 정해져 있는 거 아냐?”
신시아가 눈을 크게 뜨고 카이엘을 보았다. 이번에는 카이엘이 시선을 피했다.
“으음?”
신시아의 눈썹이 휘었다.
카이엘은 오래전부터 황족의 몰락을 불러온 근친혼을 폐지하고, 대대적인 숙청과 전쟁으로 악화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유력한 대가문 또는 강대국의 공주를 황비로 맞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제피리움에 가장 큰 이익이 되는 쪽으로.
지금 정세에서 가장 제피리움에 도움이 되는 쪽은 단연 제국과 가장 긴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이타 국의 아샨티였다.
너무 다른 문화나 이타 국에서 아샨티의 서열이 낮다는 게 문제가 된다면 동쪽에 인접한 로젠 왕국이 좋을 것이다.
이타보다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쓰는 언어나 풍습이 제피리움과 거의 유사한 데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니까. 게다가 로젠 왕국에서 온 공녀는 카이엘과 나이도 비슷하고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어차피 둘 중의 하나일 텐데, 뭘 그렇게 뜸을 들여?”
“둘..이요?”
시종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타 국의 아샨티 아니면 로젠 왕국의 프리아나밖에 더 있어? 그 외의 나라들은...”
“신시아.”
“......”
신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카이엘의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알았어.”
‘이만 가자’며 신시아는 시녀와 함께 일어났다. 카이엘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잘 가라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
“공주님.”
복도를 걸어가다가 최측근인 시녀가 가까이 다가와 신시아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신시아의 눈썹이 크게 휘었다.
“뭐? 발크 국의 왕녀를?”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관에서 함께 있는 것을 본 자가 있다고도 하고, 수석 집행관님께 시켜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다고 하십니다.”
황궁 여기저기에 눈과 귀를 두고 있는 신시아였다. 가장 든든한 아군이면서 동시에 가장 무서운 적이기도 한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신시아에게 보고되었다.
“허.”
어쩐지 드레스를 지어 보내질 않나, 별 볼 일 없는 소국 출신 왕녀를 귀빈 테이블에 앉히질 않나, 내 이상하다 했지...
“그런데 하고 많은 미녀를 놔두고 왜 하필 그 왕녀일까요?”
“독특해서겠지. 흔치 않은 머리색에 몸집이 작고 가냘퍼 보이니 매력이 있잖아?”
신시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방 앞에서 시녀를 물렸다.
“근데 그 성정에 얼마나 가겠어? 이본느 공녀 일만 해도... 아무튼 이제 그만 가 봐, 이제닌. 너도 피곤할 텐데.”
“네. 그럼 편히 쉬세요.”
시녀가 물러가는 걸 보던 신시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미쳤군, 카이엘... 연애 결혼이라도 하시겠다?”
다음 순간, 아름다운 그녀의 눈에 서슬퍼런 독기가 서렸다.
“이 나는 정략결혼의 도구로 실컷 이용해 먹고...?안 될 일이지.”
***
“아름다우십니다.”
그랑벨 부인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거듭 말했다.
“왕녀님, 정말 예뻐요.”
마리도 옆에서 두 손을 모으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왜들 이래, 정신 사납게...”
“스읍, 왕녀님. 교.양.있.는 말투!”
“알았어요, 알았다고.”
내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젓자 그랑벨 부인은 바로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몇 주 같이 있다 보니 어느 정도 친해졌는데... 알면 알수록 이렇게 순진한 여인이 어떻게 황궁에 들어왔을까 신기할 뿐이다.
“케인 경은 왜 안 오시나요? 에스코트를 해야 하는데...”
“오겠지.”
마리는 초조하게 방 문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루시아는 천하태평이었다. 기껏 차려 입었는데 예쁘다는 말 한 마디 없는 루시아.. 역시 내 친구야.
“케인 경이 오시면 깜짝 놀라실 거에요. 너무 예쁘셔서.”
“아닐 걸.”
내가 딱 잘라 대답하는 그 때, 케인이 도착했다.
“늦었잖아!”
이상하다?
오자마자 내가 뾰족하게 한 마디 했는데도, 바로 받아치는 소리가 없다.
“?”
“......”
심지어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밖에 멍하니 서 있다. 제복을 차려입어서 오늘따라 훤칠한 허우대가 잘 살아 보이는구만, 왜 저렇게 멍청한 얼굴을 하고 서 있지?
동공은 커다래지고 입은 바보같이 벌어져 있고...
“케인... 케인!”
“어..어?”
보다 못한 루시아가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제서야 고장난 인형처럼 뻣뻣하게 움직인다.
“뭐야... 설마 감동한거야? 너무 예뻐서?”
풋, 하는 웃음소리에 케인의 얼굴이 빨개졌다.
“무, 무슨... 그 무식하게 큰 헤어밴드는 뭐냐? 너무 바보같아서 놀란 것 뿐이야.”
“이거 마리가 해준 건데...”
“어, 엇... 아니, 그게...”
놀라서 또 허둥거리는 케인... 하아, 얜 정말..
“괜찮아요... 다음엔 더 예쁘게 해 볼게요...”
“아니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 헤어밴드는 예쁜데, 그걸 하고 있는 사람이 영...”
마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이자 케인은 더욱 어쩔 줄 몰라하며 쩔쩔맸다. 보다 못한 루시아가 케인의 등을 떠밀었다.
“됐고, 빨리 왕녀님 모시고 가. 이러다 정말 늦겠어.”
“어, 어...”
케인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내게 한쪽 팔을 내밀었다. 어색해 보이는 그 동작에 웃음이 나왔다.
나는 한쪽 손을 그의 팔에 올리고, 발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제국군이 마물을 물리친 공을 기리는 연회가 시작된다.
멀어져가는 우리 등 뒤에 대고 그랑벨 부인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잘 하고 오세요! 다음번에는 꼭 멋진 공자님의 에스코트를 받으실 수 있도록 이 자넷 그랑벨이 최선을 다할테니...!”
*
연회장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화려한 불빛과 아름다운 선남 선녀들.. 그 한가운데 신전 조각상을 옮겨놓은 것 같이 아름다운 용모를 뽐내는 삼남매가 앉아 있었다.
커다란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던 황제는 나와 케인이 다가가자 눈동자만 움직여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집요하게 탐색하는 것 같은 눈빛이 내 온몸을 샅샅이 흝고 지나갔다.
나는 살짝 몸이 떨리는 걸 느끼며 무릎을 굽혀 황제에게 인사했다.
“어머나, 오늘 아주 예쁘네요. 리안나 왕녀.”
아무 말도 없는 황제를 대신해서 옆에 신시아 황녀가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나는 신시아에게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 입고 있는 크림색 드레스도 신시아 황녀가 선물한 것이다. 예전에 있었던 초록색 공단보다 가슴이 훨씬 더 드러나고, 치마 주름이 훨씬 풍성한...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이 드레스를 만들 때 재단사들이 내 빈약한 가슴을 보고 어찌나 놀라던지...
“케인 경은 뼛속까지 군인인가 봅니다. 이리도 아름다운 우리 동생에게 한 마디도 않는 걸 보면.”
알레인 황자가 웃으며 놀리자 케인은 그제서야 깜짝 놀라며 신시아에게 무릎을 굽혔다.
“눈부시게 아름다우십니다.”
호호호-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홀 안을 잠시 맴돌다가 흩어졌다.
나와 케인은 머쓱해져서 서로를 바라보다가 얼른 황제의 앞을 빠져나왔다. 황제는 여전히 우리를 뚫어져라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우리 뒤에는 황제에게 인사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섰기에.
*
황제에게서 어느정도 떨어지자마자 케인이 내게 속삭였다.
“야, 황제가 널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낸들 아냐? 아주 볼 때마다 살 떨려 죽겠어...”
“‘널 토막내서 씹어버리겠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
“야! 남의 일이라고 막 말하냐?”
우리가 그렇게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나, 발크 왕녀님은 호위기사님이랑 사이가 엄-청 좋으신가 봐? 둘이서 속닥속닥..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으시나?”
“그럴 수 밖에 없겠죠. 에스코트 해 줄 다른 왕자님이나 공자님이 아무도 안 계시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약속한 듯이 일제히 들리는 웃음소리.
“......”
또다. 오늘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조롱.
케인의 단단한 팔뚝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나는 상대할 거 없다는 신호로 그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케인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한 번 내려다보고는, 한숨을 쉬며 자리를 옮겼다.
그래. 저런 것들 상대해 봐야 어쩌겠어?
다른 사람을 짓밟고 찍어 눌러야만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멍청이들인데.
“오랜만에 춤이나 출까?”
나는 케인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케인이 잠깐 놀란 얼굴을 했다가, 곧 얼굴을 풀면서 “그래.”라고 답했다.
우리 둘은 궁정 생활을 한 기간이 짧지만, 늘 둘이 붙어 다녔기 때문에 내 춤 파트너는 언제나 케인이었다.
악사들이 왈츠곡을 연주하기 위해 음을 맞추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우리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첫 춤상대와 눈을 맞추며 준비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아까 앞장서서 나를 비웃던 여인 무리들이 파트너를 앞에 두고도 유난히 주위를 힐긋거리는 게 보였다.
‘왜 저러는 거지...?’
의아해서 가만히 있자니 주변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께서 일어나셨어.”
“그러게. 춤을 추시려나 봐...”
“어쩐 일이시지? 황자 시절 이후로는 한 번도 춤을 추신 적이 없는데...”
정말 커다란 의자에 앉아있던 황제가 일어나 천천히 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두 갈래로 갈라지고, 악사들도 연주를 시작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에게 춤을 신청하실까?’
그 순간만큼은 모두 이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와 케인은 황제가 누구랑 춤을 추든 아무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구석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황제가 천천히 홀 안을 가로지르기 시작하자 아까 목소리를 높였던 여인이 자신있는 표정으로 앞에 나섰다. 황비 후보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프리아나 공주였다.
그 옆에 아샨티도 지지 않고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있고.
다른 여인들도 두 여자의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 나서지는 않고 있었지만 내심 황제의 선택을 받고 싶어서 긴장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재밌네...’
나만 보면 물 만난 고기처럼 놀리기 바쁜 것들이 숨도 편하게 못 쉬고 서 있는 걸 보는 게 꽤나 재미 있어서, 나는 그들 얼굴 표정을 하나하나 보고 있었다.
그런데 홀 안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황제가 프리아나 공주를 그냥 지나친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보기좋게 구겨지는 순간 아샨티도 그냥 지나쳐 버리고,
그 다음 공녀도, 그 다음 공녀도...
황제가 대가문의 여인들을 지나칠수록 차례차례 그 여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고...
다른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느릿, 홀 정 가운데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오고 있었다.
“...?”
오고 있어?
이 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게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구석에 있는 여자는 나를 포함 몇 명밖에....
‘나밖에 없잖아?!!’
주위를 둘러보던 내가 주위의 소란에 다시 정면을
봤을 때.
그 곳에는 내게 손을 내민 황제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