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땡땡이쳐버렸다.
저 멀리서 크랜베리 부인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도저히 왈츠 수업만큼은 못 참겠다.
대체 왜 저런 뾰족한 구두를 신고 춤을 추라는 거야? 너무 편하게 살아서 이렇게라도 고통을 느껴보고 싶은 건가? 귀족들의 사고방식은 당최 이해를 못하겠다.
“오랜만에 독서나 해 볼까~”
왈츠 수업을 땡땡이치고 도망 온 곳은 제피리움 황궁의 도서관이다. 옛날에 신전으로 쓰던 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도서관은 크기만 컸지 이용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조용했다.
아무도 없는 드넓은 회랑을 홀로 걷고 있자니 해방감에 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가볍게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장서 보관실 여러 개를 지나쳐 <고대 기록 보관실>이라는 방 앞에 멈춰섰다.
마법사는 원래 그 근본이 학자다. 마법이란 것 짜자체가 마력의 물질화를 연구한 결과물이니까.
마력이 있다고 그냥 마법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발현방법을 연구해야만 쓸 수 있는 것이니, 자연스럽게 마법사는 공부를 아주 잘 해야 하고, 무엇보다 책과 친해야 한다.
그것도 요즘 나오는 책이 아닌, 케케묵은 <고대 서적>과.
‘옛날부터 제피리움 황궁 도서관에는 희귀한 고대 서적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는 소문이 많았지.’
나는 주위를 한번 살펴보고는 돌문을 꾹 밀어보았다. 무슨 장치를 해 놨는지 육중한 돌문은 의외로 미끄러지듯 쉽게 열렸다.
‘...최근까지 누가 이용했나? 제피리움에는 마법사가 없어서 이 곳의 기록은 사실상 그냥 방치되고 있다고 들었는데...’
마법은 결국 잊혀진 신과 마왕의 힘을 빌려다 쓰는 것이기 때문에 관련 기록은 대부분 고대어로 적혀 있었다. 마법사가 아니면 고대어를 사용할 일도 없으니, 결국 이 제피리움에는 고대어를 읽을 수 있는 이가 없는 셈이였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희귀한 고대 서적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이 곳에서는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한 채 그냥 쌓아만 두고 있다는 게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전설처럼 퍼져 있었다.
몇십년 전, 그러니까 제국이 이만큼 강해지지 않았을 무렵에는 장난 삼아, 또는 일생을 건 연구를 완성시킬 목적으로 이 도서관에 와 고대 서적을 훔치는 자들도 있었다고...
‘소문이 다 사실은 아니었나 보군...’
나는 거대한 서가마다 빼곡히 정리되어 있는 기록들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방대한 고대 기록들은 연도별로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보관상태도 상당히 양호했다. 장서 분류법은 최신의 것을 쓴 걸 보니, 최근에 누군가가 이 기록들을 정리한 게 분명했다.
“옛날 얘기에 관심이 많은가?”
“!”
서가를 보고 감탄하느라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놀랍게도 제피리움의 황제, 테오3세가 서 있었다.
“...예법 수업은 아직 성과가 없나 보군.”
내가 너무 놀라 멍하니 있자, 황제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응? 부드럽게?
내가 뭘 잘못 봤나? 천하의 냉혈한 황제가 웃어?
나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한참을 버벅대다가 가까스로 예를 올리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황제는 “됐다.”라는 한마디와 함께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나를 스쳐가는 하얀 망토 자락 너머로 아름다운 옆모습이 보였다.
다시 봐도 신이 인간으로 화했나 싶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다.
‘어떻게 저런 얼굴을 하고 대륙에 피바람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까?’
내가 또 너무 넋을 놓고 있었나 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황제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
또다.
그의 시선에 온 몸이 긴장되는 게 느껴진다. 황제의 눈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데인 듯 화끈거린다.
살의를 느낄 때와는 또 다른... 이런 느낌은 대체 뭘까?
어색한 침묵을 깨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여기는 출입금지 구역이다. 허가증이 없으면 들어올 수 없지. 표지판을 보지 못했나?”
보긴 봤지.
“예... 근데 지키는 사람이 없길래...”
문도 열려 있었고...
내가 웅얼거리자 황제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지었다.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 들어왔다?”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하긴. 들어와 봐야 여기 쓰인 글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를 테니...” 하고 중얼거린다.
“폐하께서는 여기 있는 글들을 읽을 줄 아십니까?”
내 당돌한 질문에 황제의 눈썹이 크게 휘었다. 하지만 대답은 해주었다.
“...배우고 있다.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지.”
“! 누구에게서...”
어떻게, 누가? 고대어를...?
황제는 눈이 땡그라진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보면 도망가기 바쁜데.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온 걸 들켜놓고 살려달라고 빌기는커녕 짐에게 질문을 하다니... 그대는 목숨이 여러 개인가 보군.”
아, 맞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으면 질문할 수 없댔지. (별 거지같은 법이 다 있다.)
“죄송합니다. 이런.. 이렇게 어려운 글들을 읽을 수 있는 분이 있다는 게 놀라워서...”
제피리움에 고대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이건 정말 놀랄 노 자다.
“...짐의 수석 집행관은 유능하지. 아직까지 그가 뭘 모른다고 하는 말을 못 들어봤다.”
“수석 집행관이라면 그...”
항상 그림자처럼 황제를 따라 다니는 그 감청색 머리 남자를 말하는 거 같다. 이름이 뭐라더라... 제라드였나?
“......”
황제는 다시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손을 덥석 잡았다.
“?”
내가 놀라서 손을 빼려고 하자 그는 손을 더 꽉 잡고는 자신의 엄지 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을 스윽 훑었다.
“!!!”
간지러워!
“뭐, 뭐 뭐.....”
얼굴은 왜이렇게 화끈거리는 거지?
쿡.
낮게 들리는 웃음소리에 이젠 귀까지 뜨겁다.
웃어...? 천하의 리안나 폰 라인바르크의 손을 잡고도 무사할 줄 아냐...고 소리지르고 싶지만
좁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그의 웃음이 잔잔하 부서지는 것을 보며 또다시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만 나가라. 짐은 여기 혼자 쉬러 온 것이니.”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무표정한 표정이다.
내가 무릎을 살짝 굽히고 나서 물러가려는데
황제가 “아, 잠깐.” 하고 나를 불러세웠다.
“예..?”
“혹시 제라드를 마주치거든 여기서 날 봤다고 하지 말고.”
...황제도 땡땡이 쳤구나.
***
‘땡땡이도 치고... 의외로 인간적인 면이...’
나는 방으로 돌아와 황제와 조우했던 일을 곰곰이 새겨보고 있었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뜻밖의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보다는 질문들이 더 많았지만.
‘제라드가 어떻게 고대어를 읽을 수 있다는 거지? 한번 조사해봐야겠어...’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마물 출몰 건도 그렇고, 황궁을 탈출할 적절한 시기며 방법도 생각해야 하니까.
하지만 정작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엉뚱하게도 황제, 테오 3세에 대한 생각이었다.
나를 보고 웃던 황제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옅은 금발에 신비로운 황금색 눈동자. 대리석을 깎아놓은 것 같이 얇고 투명한 피부...
내 손을 잡았던 그의 크고 강한 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아주 태평하구만? 그랑벨 부인이 화가 잔뜩 났던데.”
“으아악!”
케인이 방문을 열고 서슴없이 들어왔다. 얘는 명색이 호위기사라는 애가 숙녀 방에 들어오는 데 거침이 없어.
“그랑벨 부인이 누구야?”
내 물음에 케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누구긴 누구야? 네 예법교사잖아.”
“...크랜베리 부인이 아니었어?”
“...너...”
케인은 뭐라 말하려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의자를 끌어와 내 옆에 앉았다.
“제대로 좀 해. 너에 대해서 일일이 황제에게 보고되고 있다고.”
케인은 자꾸 의심받으면 곤란하다,며 투덜거렸다.
“왜 나같은 변두리 소국 공주에 대해 일일이 보고를 받는 거지? 할 일이 없나?”
“모르지. 어쩌면 요주의 인물로 찍혔는지도.”
케인은 의자에 등을 대고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나는 그에게 도서관에서 황제를 만난 일과, 그가 수석 집행관인 제라드에게 고대어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케인 역시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여기에서 그 자의 존재감이 상당하더라고. 철저히 귀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제국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황제의 최측근이 된 자니까. ‘수석 집행관’이라는 직책도 그가 입궁하면서 생긴 거라던데?”
“제피리움 귀족도 아닌 외국인을 위해 없던 직책까지 만들었다...? 어쩐지, 여기서는 재상의 역할이 별로 없다 했더니 재상 역할을 하는 자가 따로 있어서 그랬던 거였어.”
“...한번 조사해 봐야겠어.”
케인은 다음주에 황제와 함께 마물 소탕을 위해 출궁했을 때 집중적으로 제라드에 대해서 조사해보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 외에도 탈출을 위해 몰래 만들고 있는 황궁 지도, 이안의 동향파악, 발크 국에 있는 내 오빠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이야기는 다시 내 예법 수업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내일부터 예법 수업은 성실하게 듣도록 해. 그 여자가 어지간히 열 받았는지 너 대신 마리를 벌 준다고 하더라.”
“애꿎은 마리는 왜...”
“귀족들 사고방식이 그렇지 뭐.”
귀족에게 직접 벌을 줄 수는 없으니 하녀에게 벌을 준다는 건가?
안 그래도 나 때문에 고생하는데 벌까지 받게 할 수야 없지.
“내일부터는 잘 해볼게... 아, 그보다.”
나는 케인의 어깨를 툭 쳤다. 언젠가 꼭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이 기회인거 같다.
“마리가 너한테 관심이 있는 거 같던데. 어때, 한 번 잘 해보는게?”
내 말에 케인이 눈을 부라렸다.
“뭐라고?”
“아니, 생전 그런 일이 없던 애가, 너가 온 뒤로 이상하게 부끄럼을 타더라고. 널 맘에 들어하는 게 분명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케인은 꽤 잘 생긴 편이다. 키도 꽤 크고 늘씬한 데다가 검을 만지는 사람이다 보니 몸도 다부지고...같이 다니면 꼭 여자들이 케인에게 수작을 걸고는 했었지.
“그래서?”
마리는 나와 동갑으로, 평민 출신인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서 하녀 일을 시작했는데 금방 황궁에 스카웃되었을 정도로 싹싹하고 착하다고 소문이 난 아이였다.
하녀라서 수수하게 입고 다니긴 하지만 깨끗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제피리움의 보편적인 미녀상이기도 하고.
“마리 정도면 괜찮지 않아? 여기서 만난 것도 보통 인연이 아닌데 한번 잘 해보면 어ㄸ...”
“너, 지금 그 말 진심이야?”
“어, 어...?”
케인의 표정이 갑자기 살벌하게 변했다. 뭐야, 갑자기 분위기 왜 이래...
“방금 한 말. 진심이냐고.”
“당연히...”
진심이지. 이런 걸 가지고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냐?
아니, 애초에 진심이고 자시고 별 생각 없이 한 말이긴 한데.
‘진심이라고 했다간 진짜 한대 때릴 표정인데?’
“당연히 장난이지! 뭐 이런 거로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 사람 민망하게...”
이럴땐 빠른 태세전환이 답이지.
나는 하하하 웃으면서 케인의 어깨를 팡팡 쳤다. 하지만 내 오바액션에도... 케인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몰라서 묻냐?”
“?”
케인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딘가 섭섭해 하는 거 같기도 하고...
‘왜 이러지? 뭘 잘못 먹었나.’
이유를 모르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내가 ‘뭐?’ 라고 입모양을 만들어 보였지만 케인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됐어.”
한마디와 함께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
***
카이엘은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보를 스윽 쓸어보았다.
셀워드 지방의 특산품인 최고급 비단으로 만들어 황제에게 바쳐진 공물답게, 섬세한 결과 부드러운 질감이 일품이었다.
‘귀족 아가씨들의 손은 이 비단결만큼이나 곱다는데...’
여자 손을 잡아본 적이 없기에 그런가보다 했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마주친 김에 한번 잡아본 리안나 왕녀의 손바닥에는 굳은 살이 배겨 있었다.
‘검을 잡는 부분이었어.’
손바닥 위쪽, 그러니까 네 손가락의 아랫부분... 그리고 엄지가 접히는 부분.
“그냥 떠도는 소문이 아닌가 보군.”
리안나 왕녀가 조국의 선왕을 시해했다는 소문.
제라드는 전란 중에 리오넬 왕이 묻혔다는 무덤을 찾으면 단서가 나올 거라며 이 일에 예산을 더 요구했는데. 죽은 자의 무덤을 찾아서 뭘 어쩐다는 건지 카이엘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거늘... 하물며 존재여부도 불분명한 무덤을.’
아무리 어려운 지시도 뚝딱뚝딱 해 내던 제라드가 왜 리안나 왕녀 일에는 뜨뜨미지근한지, 그것도 불만이었다.
귀찮은데 그냥 불러서 물어봐?
하지만 마주칠 때마다 눈알을 굴리며 눈앞에 놓인 상황을 요리조리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왕녀가 순순히 대답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쥐새끼처럼 영악하게 굴려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어...’
미간을 찌푸리던 카이엘은 문득 자신에게 손이 잡혔을 때 리안나의 반응을 떠올리고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단박에 얼굴이 빨개지면서 말을 더듬던 그 모습.
순진한 귀족 영애, 또는 닳고 닳은 귀부인들이라도 그와 마주할때 보이던 표준반응이었다.
늘 ‘난 상관 안해.’라는 식으로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그런 표정도 지을 줄이야. 그런 걸 보면 리안나 왕녀도 결국 속은 다른 귀족 여인들과 똑같을지도 모른다.
황제는 손끝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톡, 톡 치며 빙그레 웃었다.
“고전적인 것은 언제나 옳지. 한번 정공법으로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