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울고 있지요?
-…엄마가 많이 아프대. 그런데 넌 누구야?
갑자기 나타난 그 남자는 나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그는 몸에 색소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색도 거의 하얗고, 눈동자도 아주 연한 하늘색이었다. 피부도 아주 하얬는데, 특이한 점이 있다면 피부가 하얀 다른 사람들처럼 투명한 피부 밑으로 푸른 핏줄이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밀가루처럼 밋밋했다.
마치 누군가 인위적으로 빚어놓은 조각상 같았지만,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신비하고 아름다웠기에 아직 어렸던 나는 그런 위화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난 그때, 너무 외로웠다.
-저요? 전 이안이라고 해요.
그는 스스럼없이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내 방 뒤쪽에 있던 작은 정원을 아버지나 언니를 비롯해서 다른 이들이 찾지 않게 된 것은 무척이나 오래 된 일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이렇게 잘 생긴 오빠가 이 곳까지 왔을까?
-이안? 이상한 이름이네. 난 리안나라고 해.
그가 누구든 좋았다. 이 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 중에서 나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매달려서 내가 얼마나 심심했는지, 몇 번밖에 보지 못한 엄마가 많이 아프다고 해서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은지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전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주었다. 간간히 웃기도 하고, 때로는 내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기도 하면서. 가끔 혼자 떠들다 지쳐 잠들면 내가 편히 잘 수 있도록 무릎을 빌려 주기도 했고.
하지만 어느 날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둡고 축축한 땅바닥에 홀로 누워 있었다. 기겁을 하고 일어나려 했지만 손을 짚은 곳이 너무 끈적끈적하고 미끄러워 그만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등부터 발 밑까지 모두 질퍽한 피였다. 빛 하나 없이 어두웠지만 끈적한 느낌과 냄새로 알 수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닥치는 대로 사람을 불렀다.
-어디, 아무도 없어? 유노! 루시아! 아빠!!
하지만 누구 하나 오지 않았다.
날 찾아온 것은 오직, ‘죽음’ 이었다.
-리안나 님?
-이안? 이안이야?
반가운 목소리에 다가가려고 했지만 내가 아는 익숙한 실루엣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기지개를 켜듯 느릿느릿 움직이는 그것.
나는 별안간 나를 둘러싼 어둠 자체가 거대한 늑대임을 깨달았다. 나는 깜깜한 방 같은 곳에 갇힌 게 아니라, 커다란 늑대의 몸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가 고개를 살짝 틀어 푸른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끔찍한 눈은 웃고 있었다.
‘이안[IAΦn˚]이라는 말은 고대어로 ‘죽음’이란 뜻이에요. 리안나 님의 어머니께서 제게 주신 이름이에요.’
내게 마침내 비밀을 알려줄 수 있어서 기쁘다는 듯이 말하고,
어둠 속에서 ‘그것’이 커다란 입을 벌렸다.
*
“허억.”
꿈이다.
“허억, 허억.”
나는 몸을 일으키고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가슴이 아프다. 너무 아프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악몽을 다시 꿨다.
‘…여기 와서 이안을 다시 만나서일까.’
나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았다. 이 꿈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전조가 틀림없다. 그 재수없는 흰머리 마족을 꿈에서까지 보다니…
“리안나 왕녀님. 설마 지금 주무신 겁니까?”
거 봐. 벌써 안 좋은 일이 일어났잖아.
“아니.. 잔 것은 아니고 깜박 졸았…”
“그게 그거죠. 기가 막혀. 어떻게 예법 수업시간에 주무실 수가 있죠? 얘기는 들었지만 정말 왕녀님의 교양 수준은 형편 없군요!”
내 전속 교사라는 이 여자... 무슨 그랑베리인가 크랜베리 자작부인이었던가, 하여튼 무슨 부인은 안경과 함께 목소리를 한껏 치켜 올렸다.
‘아, 머리 아파…’
누가 나한테 예법 따위 가르쳐 달랬나. 얼마 있을 생각도 없는 이 제피리움 황궁 예법을 내가 왜 배워야 하냐고!
“여기 오신 수많은 왕녀와 왕자, 공녀와 공자 중에서 황궁예법 수업을 받도록 지시하신 분은 오직 리안나 왕녀뿐이에요. 그게 뭘 뜻하는 지 모르시겠어요?”
무슨 뜻인데?
나는 잠이 덜 깨 멍멍한 정신으로 교사를 바라보았다. 교사의 주름진 눈이 이상하리만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건 바로! 황제 폐하께서 왕녀님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 뜻 아니겠어요?”
“켁”
그 싸이코 황제가? 퍽이나 말이 되는 소리를.
어처구니 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는데 바로 교사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또 그런 교양 없는 소리를!”
“죄송.. 최근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컨디션이 영…”
“그런 핑계는 집어 치우세요! 이 제피리움 황궁에서 살아가는 분들은 언제 어디서나, 교양과 품위를 잊어서는 안 되는 거에요. 아시겠어요? 교.양.과. 품.위!”
“아…”
‘피곤해, 피곤해, 피곤해!’
나는 내 앞에 종류별로 놓인 찻잔과 찻잎을 와장창 쏟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요 며칠 황제의 ‘특명’으로 제피리움 황궁 예법과 역사, 춤, ‘제피리움 귀족으로서의 기본 소양’이란 것을 배우는 중인데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일어나자마자 아침부터 밤까지 직계 황족을 만났을 때 인사하는 법, 방계 황족을 만났을 때 인사하는 법, 고위 중앙 귀족이면서 중요한 직책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인사하는 법, 고위 중앙 귀족이긴 한데 좀 덜 중요한 직책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 인사하는 법.. 이하 생략.
아무튼 이딴 걸 배우고 있는데 머리가 안 도는 게 이상한 거다.
‘이것도 고문이라면 이걸 고안해 낸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천재인 거야…’
“정말.. 리안나 왕녀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평생을 쌓아온 제 교양마저 아네르 강가의 모래마냥 사르르 사그라지는 느낌이에요. 아무튼… 피곤하신 것 같으니까 오찬 후 티타임 예절은 이만 하도록 하고, 어제 배운 귀족 연보를 복습해보도록 할까요? 제가 어제 드렸던 <제피리움의 건국과 위대한 가문의 형성>은 읽어오셨겠죠?”
“아악, 제발 그만…”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테이블에 머리를 묻었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
*
“...역시 고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별궁과 정궁 사이에 꾸며진 공중정원에서 리안나가 수업받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라드가 말했다.
“저 왕녀는 이상하리만치 귀족다운 면이 없군요. 몸가짐이 평민들마냥 풀어지지는 않았지만 남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데도 당당하고.”
카이엘이 말을 받았다. 제라드가 무안한 표정으로 돌아보았을 때 카이엘은 차를 들이키며 싱긋 웃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황제의 편안한 모습이었다.
“중앙대륙과 멀리 떨어진 작은 소국이라 왕족이나 귀족의 위엄이 바로 서지 않아서 그렇겠지. 짐도 예전에 대륙의 서쪽에 있는 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런 경우를 많이 봤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라드는 입술을 혀로 축이면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뭐 때문인지 황제는 저 검은머리 소녀를 맘에 두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녀에 대해서 안 좋은 보고를 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리안나 왕녀가 평범한 공주로 살지 못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평범한 공주?”
“예.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고 왕궁 안에서 조신히 사는 다른 공주들처럼 말입니다.”
“…어째서 그렇지?”
카이엘이 제라드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지간히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발크 국으로 갔던 정찰대는 모두 소식이 없지만… 아나키아 공국으로 갔던 정찰대가 돌아와 아르카디아 섬나라에 대해 떠도는 소문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리안나 왕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지만 대략 비슷하더군요.”
“…계속.”
제라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담담히 보고를 이어갔다.
“리안나 왕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발크 국에 태어나서는 안되는 ‘저주받은 아이’였기에 국가에 큰 갈등을 야기했다고 합니다. 리오넬 국왕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리안나 왕녀를 왕궁에서 기르지 않고 평민들이 사는 마을에 숨겨서 길렀구요. 하지만 결국 <피의 전쟁>이 발발했고… 리오넬 국왕은 마침내 리안나 왕녀를 처형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합니다.”
“호오. 그런데 어떻게 살아남았지?”
카이엘이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이건 정말 생각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뒤에 이어진 제라드의 말은 더 충격적이었다.
“그게… 현재의 디온 국왕과 리안나 왕녀가 오히려 전란 중에 리오넬 국왕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
카이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제라드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자신이 들은 사실을 낱낱이 고했다.
“발크 국왕은 선왕이 전쟁에서 전사했다고 발표했지만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시신이 없기 때문이지 않나? 이 곳까지 이름을 떨칠 정도로 뛰어난 장군이니 행방불명됐을 뿐,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소문도 있어. 짐도 그것까지는 들어봤네.”
“그게 이상하다는 겁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전쟁터에서 전사했는데, 아무도 시신을 수습한 자가 없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시신을 찾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다니... 게다가 현 발크 국왕.. 그러니까 리안나의 오라비인 디온 국왕은 선왕의 묘도 만들지 않았다 합니다.”
“그것 참 이상하군. 짐도 선황을 위해 장례만은 후하게 치뤘는데 말야.”
“…..”
카이엘의 입가에 떠오른 섬뜩한 미소를, 제라드는 모른 척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디온 국왕과 그 자매들이 아버지를 죽인 자리에 묘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 <피의 전쟁> 때 발크 군에 복무했던 자에게 직접 들었다고 합니다.”
“이해가 안 되는군. 어째서 그 자식들이 아버지를 죽인단 말인가?”
“왕족들에게는 피를 나눈 가족이 때로는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일이 종종 있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폐하께서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제라드의 직설에 카이엘의 얼굴이 굳었다.
제라드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전에 없이 저 왕녀에게 관심을 두시길래... 심혈을 기울여 정보 수집을 하고 있습니다만... 가까이 두실 만한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틸리안 공작의 행방도 찾지 못해 정보원들을 운용하기가 좀 빠듯한데.. 저 왕녀에 대한 조사는 이쯤에서 접을까요?”
“아니지.”
카이엘이 칼같이 제라드의 말을 잘랐다.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살아남을 정도의 위인이라면 더 철저하게 조사해야지. 그게 사실이라면 살인자가 내 지척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네.”
제라드는 마지못해 작게 대답했다.
‘평판이 좋지 않거나 행적이 수상한 자들은 모두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제거해 왔는데... 대체 왜 저 말라깽이에게 집착하는지 모르겠군. 대업을 앞에 두고 이래서야...’
오랫동안 황제를 보필해 온 수석 집행관 제라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
집무실로 돌아온 제피리움의 황제, 카이엘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왜 그렇게 눈에 밟히나 했더니... 나와 비슷한 면이 있어서 그랬던 건가.’
리안나 왕녀에 대해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자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친부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실낱같은 목숨을 가까스로 이어갔던 어린 시절.
‘사람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알아본다고 하더니...’
카이엘은 혀를 차며 홀로 옛 생각에 빠져 들었다.
“엘, 왔니?”
“네, 어머니.”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여자에게 다가갔다.
제피리움의 귀족들이 입는 전통 가운을 입은 그녀는 언제나처럼 몹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특히나 ‘순혈’임을 증명하는 연한 금발과 황금색 눈동자에서는 범접할 수 없을 만한 신비로움마저 느껴졌다.
여자는 자신의 앞에 선 소년을 끌어당겨 무릎에 앉혔다.
“시킨 대로 아버지께 인사 잘 드렸겠지?”
“…그럼요.”
“아버지는 건강하시니?”
“네.”
‘빌어먹게 건강하시죠.’
카이엘은 속으로 랄프가 알려준 욕설을 읊으며 빙긋 웃었다.
폐위된 황비, 올리비아는 그저 아들의 기분이 좋아진 줄 알고 함께 미소지었다.
“이제 네 동생도 걸어 다니겠지?”
“네. 오늘은 제가 직접 글을 가르쳤어요. 아버지는 물론이고 바르텐 재상도 훌륭하다고 칭찬하셨어요.”
올리비아는 잠시 동안 아들의 등을 쓰다듬다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듣기만 해도 가슴 한 쪽이 아파지는, 그런 목소리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용서한다는 말은.. 하지 않던?”
“…오늘은요.”
“……그렇구나.”
여자는 아들을 더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강한 여자였다. 고귀한 혈통과 아름다움을 지녔고, 그녀의 남편에게서 가해지는 부당한 모욕과 폐위되던 순간의 굴욕도 그녀의 당당함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었다.
바로 아들의 안위였다.
그녀의 친동생은 폐위된 그녀를 대신해 황비가 되어, ‘순혈’인 황자를 무사히 낳았다.
그 말은 곧, 유누스 2세에게 카이엘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제피리움의 황제가 될 건강한 다른 적자가 있으니.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의 광기는 점점 심해져.. 공공연히 그녀와 그 아들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요즘 황궁에는 곧 올리비아에게 ‘황제의 눈물’이 내려질 거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는 실정이었다.
만약,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면 올리비아는 그 눈물을 마시고 영면에 들게 될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카이엘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게 뻔했다.
자신의 아들을 낳은 여자에게 독약을 내리는 미친 황제가, 그 아들이라고 손수 죽이지 못 할까?
“다음에 또 아버지를 보면, 꼭 어머니가 용서를 빌더라고 전하렴. 허락만 해주신다면… 기꺼이 폐하의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싶다고… 응? 아가야.”
“…네.”
‘하지만 어머니는 잘못한 게 없잖아요.’
아이는 이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 말을 했다가는 어머니가 더 슬퍼할 게 뻔했다.
하지만 명석한 카이엘은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사실은 아주아주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이고, 어머니의 능력을 질투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부당하게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선선대 시절부터 황족, 특히 황태자의 교육을 담당해 온 바르텐 백작도 어머니만큼 훌륭한 황비는 이제껏 없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올리비아는 황족들과 유서 깊은 가문들의 지지를 받던 고귀한 황비였으며, 머리에 얹은 왕관이 무색하지 않게 제피리움의 백성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어머니가 잘못한 게 있다면 단지, 아버지가 잘못된 방식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것뿐이었다.
카이엘이 부루퉁하게 앉아 있기만 하자 올리비아는 빙긋 웃으며 아들을 돌려 앉혔다.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언제나처럼 아들을 놀려주었다.
“우리 엘은 너무 예뻐서 걱정이야. 결코 너보다 아름다운 신부를 맞을 수는 없을 테니까… 엘은 이 다음에 커서 누구를 신부로 맞고 싶니?”
“전 결혼하지 않을 거에요.”
‘어머니를 지켜 드릴 거에요.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도록.’
“어머나, 그럴 수는 없어. 엘은 폐하의 장자이니 아름답고 현명한 여자를 비로 맞아야 한단다. 너와 같은 곳에 서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미래를 그려갈 수 있는 사람을 말야. 그리고 그녀에게 꼭 네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을 주렴.”
“……”
올리비아는 아들을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엘, 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단다.”
“….몰라요, 그런 거.”
수백 명이 생활하는 커다란 황궁이었지만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를 듣는 중에도, 어린 카이엘이 원했던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언젠가 어머니가 이 어두침침한 궁을 벗어나, 그와 함께 밝은 햇살 아래를 거니는 것.
그런 날이 온다면 어머니의 얼굴에 묻은 눈물 자국도 없어질 거고, 그 역시 지금보다 훨씬 행복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끝끝내 내가 바랐던 그런 평화는 오지 않았지.’
우울한 회상을 끝낸 카이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처진 커튼을 젖혔다.
어둠에 싸인 황궁이 적막 속에서 그 어두컴컴한 광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집무실에서 보이는 제1별궁의 하얀 지붕을 바라보고 있자니, 겁도 없이 카이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리안나의 푸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저주받은 피의 공주라...’
남들이 들으면 펄쩍 뛸 만큼 황당한 생각이.. 제피리움의 황제, 테오3세의 뇌리를 지나갔다.
‘-그녀라면 어쩌면.. 내 곁에서 이 황궁의 어둠을 이겨낼 수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