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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황제의 마음을 훔친 소녀
작가 : 맛있는코코아
작품등록일 : 2019.9.12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소국에서 인질로 잡혀온 공주 리안나. 리안나의 지상 최대 목표는 심기를 거스르는 자는 가차없이 베어 버리는 잔혹한 황제의 궁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 나아가 궁을 탈출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그런데 온갖 멸시와 모욕을 건뎌내며 무사히 탈출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리안나에게 청천벽력같은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다. “발크 국의 왕녀를 황비로 맞겠다.”는. “대체 왜...?”
벗어나려 할수록 황제 카이엘은 리안나를 집요하게 감시하는 한편, 리안나를 유혹하려 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평온했던 제국은 마물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진다.
“나... 여기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
황비이길 거부하는 공주 리안나와 폭군 황제의 아찔한 황궁 로맨스가 지금 펼쳐진다.

 
5. 황제의 시험
작성일 : 19-09-14 10:35     조회 : 353     추천 : 0     분량 : 9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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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나 왕녀...?”

 

 놀란 목소리는 알레인 황자의 것이었을까, 아샨티의 것이었을까..?

 

 어느새 아샨티도 저 멀리 뒤쳐지고 나는 알레인 황자와 나란히 샤카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높은 말 등 위에서 넓은 들판을 달리니 기분이 최고였다. 내 옆의 배경이 빠르게 나를 지나쳐가고 시원한 바람이 얼굴이 얼굴을 때렸다.

 

 ‘신나...!’

 

 이게 얼마 만에 맛 보는 해방감인가?

 

 저 앞에 너비가 꽤 되는 개울이 보였다. 알레인 황자가 고삐를 잡으며 소리쳤다.

 

 “위험해... 속도를 늦춰요! 샤카이 경!!”

 

 샤카이 경은 속도를 늦추기는 커녕 고삐를 더 꽉 죄고 있었다. 샤카이 경은 저 개울을 뛰어넘을 생각이다. 샤카이 경의 말이 뛰면, 이 말도 뛸 것이다. 알레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샤카이 경! 그대가 멈춰야 합니다!!”

 

 나는 몸을 바짝 숙여 말 머리 위에 가슴을 붙였다. 말과 함께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긴장의 끈을 놓았다간, 나는 말과 함께 저 개울에 처박히고 말 것이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며 개울이 우리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말은 점점 조급해 하고 있었다. 나는 고삐를 꽉 쥐었다.

 

 ‘아직... 아직 아냐. 아직.... ‘

 

 우리 앞에서 샤카이 경이 뛰어오르고, 그 말이 저편의 지면을 구르는 소리가 들린 그때,

 

 ‘지금이야!!’

 

 나는 말과 함께 날아올랐다.

 

 

 저 뒤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하늘이 잠시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 나는 말등이 부러지는 일이 없도록 말발굽이 지면에 착지하는 그 순간에 내 몸을 안장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나는 샤카이 경의 오른편에 서 있었다. 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승마 모자와 베일은 이미 아까 날라간 뒤다.

 숨을 고르며 샤카이 경을 바라보니,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마디 해주었다.

 

 “좋은 말이군요.”

 

 최대한 재수없어 보이길 바라며.

 

 “누구처럼 앞뒤 안 가리는 면이 있긴 하지만.”

 

 

 

 

 

 * * *

 

 

 “...아름답군.”

 “네?”

 

 제라드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지금 황제가 뭐라고...?

 

 제라드가 놀란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지만, 황제는 어느새 냉철한 평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다. 그보다, 발크 정세를 확인하라고 보낸 정찰대는 돌아왔나?”

 “그게...”

 

 제라드는 머뭇거리며 오늘 아침 막 들어온 소식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보고하기 영 껄끄러운 내용이었다.

 

 제피리움에 알려진 게 거의 없는 발크 국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알고자 세 번이나 정찰대를 파견했는데, 소식은 모두 끊겼고 돌아온 이 또한 없었다.

 

 보고를 들은 카이엘이 얼굴을 구겼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모두 내가 직접 훈련시킨 최정예 부대원들인데.”

 “그러니까요.. 앞선 정찰대를 구하기 위해 파견한 후발부대마저 감감 무소식이니.. 그런데, 발크 궁에 보낸 우리쪽 사신은 무사히 도착해서 전령조를 보내왔습니다.”

 “사신단은 발크 궁에 멀쩡히 갔다?”

 “예. 발크 국왕이 직접 환대하였고, 우리가 요구한 대로 리안나 왕녀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한 자들도 딸려 보냈다고 합니다. 일주일 전 발크 국을 출발하여 어제 저녁에 리어 제피로스에 당도했다 하니 서두르면 오늘 자정쯤 입궁할 겁니다.

 “흠...”

 

 각 나라에서 인질로 오는 왕녀들은 몸종 역할을 할 시녀 1명과 호위기사 1명씩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그런데도 발크 국의 왕녀만은 한달 여 전 아무 딸린 자도 없이 국왕의 친서만 달랑 들고 이 황궁에 들어온 것이다. 이에 제피리움은 일단 왕녀를 들여놓고 국왕 쪽에 왕녀의 신분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한 상태였다.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 속에 싸인 나라와 사라진 정찰대, 그리고 이타 국 최고의 기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승마실력을 갖춘 왕녀...

 

 눈 앞에 유혈사태에도 꿈쩍 않던 그 얼굴.

 

 황제는 잠시 침묵했다가 명을 내렸다.

 

 “서쪽 지역에서 온 이들은 수상하지 않은 자가 없군. 그들이 도착하면 행장을 푸는 즉시 내게 데려오라.”

 

 

 

 

 

 

 

 * * *

 어제의 승마사건이 있은 뒤로, 내 방은 전에 없이 북적거렸다. 속이 빤히 보이는 계략으로 하마터면 큰 벌을 받을 뻔 했던 아샨티 왕녀와 샤카이는 내 임기응변으로 목숨을 건졌고, 오늘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인사를 하러 왔다. 거기다 우리 발크 국과 형제의 나라인 이오니아 국의 왕자도 또래인 셀저 왕국의 왕녀를 데리고 놀러 왔다.

 

 “랄프 경이 그동안은 이 곳에 못 들어오게 했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허락해줬어.”

 

 리오넬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리오넬은 그러니까 음.. 우리 아빠의 형의 딸인 카렌이 낳은 아들이니까… 내가 얘의 이모가 되는 셈이다.

 <피의 전쟁> 이후 죽은 이오니아의 왕을 대신해서 왕위에 오른 카렌은 끝까지 발크와 이오니아를 위해 싸운 우리 아빠를 기리고자 자신의 아들에게 리오넬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리오넬은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었다.

 

 “많이 컸네, 리오넬. 여자친구도 데려오고.”

 

 내가 놀리자 쭈볏쭈볏 서 있던 셀저 국 왕녀가 얼굴이 발개져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셀저 왕국의 유, 육 왕녀 베스티아 드 뷔 셀저입니다.”

 “리안나 이모 앞에서는 그럴 필요 없어.”

 

 리오넬이 웃으며 소녀를 끌어당겼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직 여덟 살밖에 안 된 소년소녀가 이런 곳에 이런 입장으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좀 서글퍼졌다.

 

 ‘하긴... 헬레나가 마계로 끌려가고 피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내 나이도 여덟 살이었지.’

 

 내가 씁쓸한 미소만 짓고 있자 베스티아는 좀 주저하는 기색으로 “그냥 베스라고 하시면 되요..” 하고 덧붙였다.

 

 “이웃한 나라와 저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다니, 신기하네.”

 

 아샨티가 부럽다는 투로 얘기했다. 하긴, 제피리움의 남쪽에 바로 붙은 이타 국은 지난 백 년 동안 제피리움과 크고 작은 전쟁을 치러 왔으니. 테오3세가 즉위한 뒤로 승기는 완전 제피리움 쪽으로 기울었지만.

 

 “그나저나 리안나 왕녀는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 타지? 어젠 진심으로 놀랐어.”

 “...그 말을 들으니 더 기분이 나쁜데? 어제 그 상황에서 떨어졌음 최소한 허리 골절이었어!”

 “아이, 참. 그 일은 잊기로 했잖아. 뒤끝 하고는... 근데 진짜 어디 기마단에서 훈련이라도 받은거야?”

 “누가 잊는다고 했는데?”

 

 나랑 동갑이라는 이 아이, 진짜 밑도 끝도 없는 천방지축이다. 뻔뻔하기는 저 흰머리 마족 저리가라고... 아, 이건 너무 심한 욕인가.

 

 “사죄의 뜻으로 어제 타신 그 말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샤카이가 얼른 끼어들었다. 이 충직한 호위기사는 이제라도 자기가 모시는 공주의 안하무인한 행동거지를 말리려고 열심이었다.

 

 “...사양하진 않겠어. 그 말이 나랑 잘 맞는 것 같기는 하더라고. 그 말, 이름이 있겠지?”

 “<카르파>입니다만, 이제 왕녀님의 말이니 마음에 드는 것으로 다시 지으셔도 됩니다.”

 “아니, 맘에 들어. <카르파>라.. ‘새벽’이란 뜻인가?”

 “이타 어를 아십니까?”

 

 샤카이는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이래봬도 남쪽대륙과 동쪽의 몇 개 나라 빼고 중앙대륙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나다. 게다가 누구랑 달리 난 머리가 엄청 좋다고? 제국어는 물론 웬만큼 규모가 있는 나라의 말은 대부분 유창하게 할 수 있다.

 

 “정확히는 새벽 중 가장 어두운 때를 말하는 거야.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웠다가 그 때가 지나면 서서히 세상이 밝아지니까. 빛을 부르는 말이란 뜻이지.”

 “호오...”

 

 아샨티의 설명에 내가 감탄하고 있을 때 복도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곧이어 문이 발칵 열리고 숨이 턱까지 찬 마리가 들어왔다.

 

 “리안나 님! 큰일 났어요!! 리안나 님의.. 리안나 님의!!”

 

 나의 뭐가...?

 

 방 안의 모두가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는 가운데, 마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천천히 말해 봐.”

 

 마리는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쉬었다 토해 냈다.

 

 “와, 왕녀님의 나라에서.. 왕녀님을 모실 시녀님과 기사님을 보내셨어요!”

 “그런데..?”

 

 아, 드디어 왔나 보다. 내 예상이 맞다면.. 호위기사로는 틀림없이 ‘그’가 왔겠지.

 근데 그게 그렇게 큰일인가?

 나한테는 오히려 잘 된 일인데. 적어도 이 황궁에서 내가 더 이상 외톨이가 아니어도 된다는 뜻이니까.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마리는 답답하다는 듯이

 

 “그런데 폐하께서... 그 분들을 죽이신다고...!”

 “뭐?!”

 

 나뿐만 아니라 방에 있던 모두가 깜짝 놀랐다.

 “미, 미친 왕이 또 병이 도졌나 봐…”

 아샨티가 질색을 하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 나라의 황제는 누구든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는 가차없이 베어버리는 살인광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 트집 잡힐 일을 한 게 없는데, 왜 내 나라에서 온 자들을 도착하자마자 죽인다는 거야?

 나는 분노에 차 벌떡 일어났다.

 

 

 

 

 *

 

 나는 만류하는 마리를 뒤로 하고 단숨에 황제의 정궁으로 뛰어갔다.

 거리가 워낙 멀어 숨이 턱까지 차 올랐지만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어이없이 죽게 놔둘 수 없어.’

 

 하루에 한 번은 피를 봐야지만 족하는 미친 황제.

 네 놈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팔찌를 풀고 검을 다시 잡는 날에는 기필코 목숨을 끊어놓고 말 것이다.

 내 친구들을 죽였다간…

 

 이를 갈며 정궁에 도착하니 홀 입구서부터 이미 난장판이었다. 근위대 기사들은 숨을 헐떡이며 나타난 나를 무슨 희한한 물건 보듯이 보긴 했지만 아무 말 없이 길을 터주었다.

 언제나 황제를 따라다니는 감청색 머리의 남자가 나를 보더니 “리안나 왕녀가 왔습니다.”라고 고했다.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투다.

 

 나는 그를 지나 홀 중앙으로 걸어 들어갔다. 중앙에 군사들 여러 명이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을 무릎 꿇리고 긴 창을 교차해 목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황제는 그 지엄한 옥좌에서 내려와 뒷짐을 지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인사도 없이 오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받아낸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서는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케인! 루시아!’

 

 나는 소리내어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나와 함께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동료들이 차가운 바닥에 얼굴이 뭉개진 채 엎드려 있었다. 나와 케인의 눈이 마주쳤다. 얼굴에 피가 몰려 좀 붉어지기는 했지만 그는 화가 났다거나 두려움에 떨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눈짓으로 내게 ‘침착해’라고 타이르고 있었다.

 

 ‘침착해... 말려들면 안 돼.’

 

 나는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존귀하신 폐하를 뵈옵니다. 송구하오나, 저들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 목숨을 거두시려는 건가요? 제 잘못이라면 제가 벌을 받고, 저들의 잘못이라 해도 주인인 제가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내 말에 황제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가 대신 죽겠다...? 신하를 위해 주군이 죽다니, 세상에 둘도 없는 코미디로군.”

 

 그러면서 그는 내게 한 발짝 다가오더니, 느닷없이 내 턱을 들어올렸다.

 

 “그대의 나라에 대해서는 궁금한 게 참 많아. 애초에 그대가 정녕... 공주이긴 한 건지부터.”

 “!”

 

 케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의 목에 겨누어진 칼날이 그의 살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내렸다.

 

 “그걸 확인하시기 위해 저의 오라버니께서 저들을 보낸 것이 아닙니까? 같이 온 폐하의 사신단도...”

 “닥쳐라! 너를 모시기 위해 온 자들이 자신의 것도 아닌 무기를 숨겨 왔는데도 짐이 그들을 믿어야 하는가? 허튼 소리를 하면 너도 저들과 함께 죽을 줄 알아라.”

 

 황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종 한 명이 나와 내 앞에 무언가를 툭 던졌다.

 

 ‘내 검...!’

 

 혼자 황궁에 오면서 가지고 올 수가 없어 길드에 맡겼던 검이다. 케인이 찾아서 들어오려고 했던 모양인데...

 

 “오해십니다! 그 검은 생전 리오넬 전하께서 리안나 왕녀님을 위해 특별히 만든 보검으로, 디온 전하께서 저희 편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케인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러나 황제는 조소를 거두지 않았다.

 

 “왕자도 아닌 공주에게 보검을...? 리오넬 전하께서는 그대를 기사로 키우실 생각이라도 하셨단 말인가?”

 

 ‘그래, 이 자식아.’

 

 라고 답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꾹 참았다.

 

 “왕녀, 그대가 말해보라. 저들이 그대가 알고 있는 자들이 맞기는 한가? 저들이 본디 발크 왕궁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그대를 모시러 온 게 아니라면...? 이 황궁에 위협을 가하려 온 자들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테지?”

 

 ‘이런 말도 안되는 트집을...’

 

 이미 피를 보려고 마음을 먹은 자이다.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해야..

 

 도움의 손길은 의외의 곳에서 뻗어왔다.

 

 

 “케인? 케인!!”

 

 사람들 틈에서 리오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따라 급히 달려온 모양이다.

 

 “왕자님,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내버려 둬라.”

 

 황제는 어린 리오넬이 우리가 있는 홀 안쪽으로 들어오도록 놔두었다. 리오넬은 눈에 눈물을 머금고 달려와 케인 앞에 앉더니, 이내 케인에게 창검을 겨누고 있는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치워!”

 “리오넬, 그러면 안 돼!”

 

 나는 다급히 소리쳤다.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칼을 겨누고 있는 사람을 밀치면 어떡하니? 너 때문에 베이겠다.’

 

 기사 몇 명이 달려와 리오넬을 붙들었다. 나는 일어나 황제를 꼿꼿이 쳐다보며 말했다.

 

 “케인은 아버지의 충직한 부하로서 오랜 세월 발크와 이오니아 왕가를 지켜온 사람입니다. 저기 리오넬 왕자도 한눈에 케인을 알아보는데, 이래도 저희를 의심하십니까?”

 

 내 당돌한 태도에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측근이 나는 말리려고 하자 눈짓으로 저지했다.

 

 “아시다시피 제 아버지는 뼛속까지 검사셨고, 저 뿐만 아니라 제 언니와 오빠에게도 평생 지니고 살 검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동생을 위해 아버지의 유품을 챙겨 보낸 제 오라비의 마음을 곡해하지 말아주십시오.”

 “......”

 

 황제는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맹금류의 것과 같은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냈다. 그러고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숨막히는 대치 끝에 황제는 랄프를 향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

 그것으로 루시아와 케인의 목을 내리누르던 창검은 거둬지고, 기사들은 둘의 목을 잡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둘은 여전히 무릎 꿇린 상태로 이 치욕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었다.

 

 “또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

 또 뭐?

 나는 도전적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대륙의 평화 유지를 위해 그대의 나라에 오천 명의 군사를 파병할 것을 요청했으나, 우리 사신이 가지고 온 답서를 보니 거절했더군.”

 ‘우리 나라 인구가 몇인데, 오천 명이나 되는 군사를 요청해? 이런 정신 나간…’

 이번에도 트집이 뻔하기에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답 했다.

 “황제 폐하. 우리 발크 국은 인구가 삼천만이 될까 말까 한 소국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10년 전 <피의 전쟁>으로 온 나라가 폐허가 된 상태인데, 군사 오천 명이라니요.”

 “대체 그 <피의 전쟁>은 누구와 치른 전쟁인가? 서쪽 경계의 어느 나라도 그대의 나라와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고 하고, 이웃한 나라들과는 아직도 동맹이 견고하지. 이오니아도 전쟁의 여파로 오직 천 명의 군사만 보내겠다고 답변했는데… 침략을 받은 나라는 있으나 침략한 나라는 없다니, 이게 무슨 해괴한 말이지?”

 “…..”

 말한다고 한들 믿어 줄까. 하지만 여기서 대답하지 않으면 또 죽인다고 협박하겠지.

 “’마물’입니다.”

 “!”

 홀 안이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고, 황제의 두 눈이 커졌다. 저 잘난 녀석이 놀라기도 하는군.

 “마물이라니… 황당한 소리를 하는군. 이 나를 바보로 아는가?”

 “이 상황에서 제가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아르카디아 해 건너편 서쪽 결계 근처에는 대륙의 끝에 사는 자들도 발걸음을 하지 않은지 오래입니다. 서쪽 결계 너머에는 흉악한 마물이 산다는 옛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고, 그 저주받은 땅과 맞붙은 우리 나라 사람들은 늘 마물의 침략에 시달리며 살아야…”

 “닥쳐라!”

 황제가 소리쳤다. 또 홀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 그는 이제 정말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내 옆에 선 측근조차도 겁을 집어먹고 한 두 발짝 물러섰지만 나는 말을 이어갔다. 할 말은 해야지.

 “폐하. 비록 제 고국은 작고 군사도 얼마 안 되지만, 오랜 세월 마물과 싸워왔기에 한 명, 한 명이 모두 훌륭한 전투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전란의 피해가 복구되면, 폐하의 제국을 위해 큰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입니다.”

 “…..”

 “마물이라니.. 당치도 않은…”

 근위기사단장이 중얼거렸지만 곧 황제의 매서운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좋다. 일단 그대의 말을 믿어보도록 하지. 일으켜라.”

 기사들이 루시아와 케인을 일으켜 세웠다. 루시아의 입에서 으, 하는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오랫동안 무릎이 꿇린 채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리안나 왕녀는 앞으로 제1별궁에서 생활하라. 제라드, 네가 저 천방지축 왕녀에게 교사를 붙여 황궁의 예법과 제국인으로서의 소양을 가르치도록. 그리고 저 검은 황제의 이름으로 압수한다.”

 ‘옆에 두고 감시하겠다, 이건가.’

 제라드라고 불린 측근이 시종들을 시켜 바닥에 떨어진 내 검을 내가고, 우리를 에워쌌던 근위기사들은 제 위치로 돌아갔다. 랄프를 비롯해서 이 곳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없다.

 “물러가도 좋다.”

 그 말 끝에 황제가 몸을 돌리는데, 나는 그의 눈빛에서 이전에 봤던 악랄함을 읽을 수 있었다.

 “케인, 조심…!”

 랄프가 순식간에 검을 뽑아 케인의 다리를 노렸다. 아마도 힘줄을 끊어놓을 생각이었던 것 같다.

 “!!”

 하지만 그 시도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케인이 몸을 날려 랄프의 검을 피한 것이다. 갈 곳을 잃은 그의 검은 허공에서 허우적대다 겨우 멈춰 섰다.

 랄프 경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검”이라고 불리는 랄프경의 검을 피한 사람은… 이제껏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비열한 놈 같으니라고.. 돌아서는 상대의 뒤에 칼을 겨눠?’

 근위기사들이 당황해서 케인을 둘러싸기는 했지만 어쩔 줄을 모르고 엉거주춤 있었다. 어떡하지? 이대로 검을 뽑아 달려들어…?

 “…케인은 전란에서 우리 왕가를 지켜냈던 훌륭한 검사입니다. 제 옆에 두는 것이 탐탁지 않으시면 적당한 부대로 보내 폐하의 군사로 쓰시지요.”

 안 그러려고 해도 비꼬는 듯한 말투가 되어버리는 것을 어쩔 수 없다. 황제는 나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군사 하나 하나가 뛰어나더니, 과장은 아니었나 보군. 짐의 군사들도 하나같이 쓸 만하니, 그 제안은 보류하지. 저 몸놀림을 보니 나중에 짐과 겨루어 봐도 재밌겠어.”

 황제는 이번에는 진짜로 홀 저편으로 사라졌다. 제라드가 우리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황제의 뒤를 따랐다. 홀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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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4. 가슴에는 칼을 품고 2019 / 10 / 14 393 0 8701   
13 13. 사교계의 별이 되다. 2019 / 10 / 6 371 0 8433   
12 12. 유혹의 기술 2019 / 10 / 3 356 0 8488   
11 11. 사랑보다는 질투가 먼저 온다 2019 / 9 / 29 343 0 7005   
10 10. 그날 밤, 무슨 일이...? 2019 / 9 / 29 374 0 5107   
9 9. 춤 추실래요? 2019 / 9 / 26 340 0 7699   
8 8. 탐색전 2019 / 9 / 22 354 0 6239   
7 7.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 2019 / 9 / 15 347 0 7760   
6 6.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으니까 2019 / 9 / 14 326 0 7573   
5 5. 황제의 시험 2019 / 9 / 14 354 0 9019   
4 4. 까마귀 무리에서는 백로가 숨을 곳이 없으… 2019 / 9 / 13 330 0 6254   
3 3. 황제의 경고 2019 / 9 / 12 344 0 7766   
2 2. 황궁에 찾아온 악마 2019 / 9 / 12 383 0 6252   
1 1. 슬기로운 인질생활 2019 / 9 / 12 574 0 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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