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제피리움의 황궁.
평소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흐르는 곳이지만, 오늘은 모처럼 곳곳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오늘은 세계 각 국에서 온 왕자, 왕녀들을 환영하기 위한 성대한 연회가 열리는 날.
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거대한 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온갖 호화로운 치장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 실없는 대화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머나, 저기 저 아가씨가 ‘그’ 왕녀인가봐요?”
“어디요? ‘그’ 왕녀라니?”
“몰라요? ‘거지 왕녀’!”
“아~! 발트인가 말크인가 하는 구석데기 왕국에서 왔다는?”
“까르르, 구석데기라니 너무했네요. 그나저나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저 검은 머리카락... 정말 불길하네요.”
“정말 그렇군. 그런데 왜 저렇게 비쩍 마른 거지? 가운이 아니었음 여자인지도 모르겠어, 하하하.”
“세상에, 마르틴 경은 정말 짓궂군요! 아하하.”
‘...시끄러워.’
오늘도 조롱의 주인공인 나인가.
나는 새 샴페인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사람들도 참 희한하다. 오늘은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든 황제도 참석한 데다가, 말도 안되게 잘 생긴 이안까지 이 곳 황궁 연회에 데뷔하는 자리인데. 거기다 곧 황제의 후궁이 된다는 아름다운 이본느 공녀까지 저기서 빛을 발하고 있는데도 여기저기서 온통 내 얘기 뿐이다.
‘역시 사람들은 칭찬보다는 남의 흉 잡는 것을 더 좋아한단 말이야.’
“역시 사람들은 남의 칭찬보다는 흉 보는 걸 더 좋아해요. 그쵸?”
“으악!”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지 말라고, 이 마족 놈아!
놀란 나머지 샴페인을 쏟고 말았다. 얄궂게도 그 샴페인은 (감히) 나의 빈약한 가슴을 놀린 말티즈인지, 말틴인지 하는 놈한테 쏟아졌다.
“이, 이런...”
그는 못생긴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한 눈에 봐도 값비싼 새틴 블라우스의 소매가 흠뻑 젖어있었다.
“이, 이...”
어머, 나 설마 지금 웃고 있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그가 나를 보며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그 때,
“아이고, 죄송합니다. 마르틴 백작님. 귀한 옷이 다 젖어버렸네요.”
이안이 얼른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백작은 잠시 멍청한 얼굴이 되어 자신보다 머리 하나 반은 큰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얼굴을 마주하고 서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렇게 얼빠진 얼굴이 되고 만다.
불쌍한 사람들. 저것의 진짜 모습을 알면 당장에 오줌부터 지릴 텐데.
내 아니꼬운 시선을 뒤로 한 채
이안은 특유의 넉살로 마르틴 백작의 혼을 쏙 빼놓고 있었다.
“이것은 저 동쪽 신비의 나라인 카이도스에서 만든 새틴 아닙니까? 이 제피리움에서 유행을 좌지우지하는 백작님이라더니, 역시 안목이 다르시군요?”
“오, 과연 아나키아인이라 바로 알아 보는군. 골든 로드의 상인들을 닦달해 겨우 구한 거지.”
“아버님께 말씀 드려서 새 것을 구해 드리지요. 최상품으로 원단 두 필은 넉넉히 구할 수 있습니다.”
“뭐! 그게 정말인가?”
“물론이지요. 게다가 제가 여행하면서 알게 된 최고의 재봉사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바보에게 또 이안은 귓속말로 “재봉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미모가 또 대단합니다.” 따위의 말을 지껄였다.
“뭐어어~?”
그의 입술이 단번에 헤- 하고 벌어졌다. 그의 기름이 가득 낀 두 볼이 그를 더 멍청해 보이게 해주는 듯 하다.
“마음에 드실 겁니다.”
이안은 그에게 눈을 찡긋 해 보이고서는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뚱보 백작은 나를 흘깃 째려보고는 그의 옆에서 아양을 떨던 여자들과 함께 저쪽으로 가 버렸다.
“저런 작자가 귀족이라니.. 재앙이 따로 없군.”
“뭐, 그런 거죠. 자, 그럼 가실까요?”
“왜 이래?”
이안이 내게 팔짱을 끼자 시선이 확 모이는 게 느껴진다. 팔을 빼려고 힘을 주어 보지만 그의 완력을 이길 수 없다.
“날 그냥 내버려 둬! 너같은 놈이랑 다녀서 이목을 끌고 싶진 않아.”
“저도 그렇지만... 리안나 님도 초대 받았는 걸요.”
“초대? 어디에?”
“황제의 테이블.”
이안의 얼굴에 비틀린 웃음이 스치듯 지나갔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의 진짜 얼굴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그 곳엔 어마어마하게 큰 대리석 테이블이 있었다. 그 테이블에는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앉아있고, 중앙에는...
‘황제!!’
제피리움의 황제 테오3세.
본명은 카이엘 아비누스 폰 제피리움.
소문으로만 들었던 잔인한 학살자가 바로 눈 앞에 있다. 누구도 범접 못할 검술을 지녔다고 소문이 자자하고, 또 그의 자태는...
‘옛날 신족이 인간으로 모습으로 화하면 저런 모습일까.’
나는 멍하니 이안에게 이끌려 자리에 가서 앉았다. 주변에서 나와 이안에게 이런저런 인사를 건넸지만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황제의 아름다움에 취해 버렸던 것이다.
“...님? 왕녀님?”
“..네..?”
나를 부른 여자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벌꿀 색 금발을 풍성하게 늘어뜨린 요염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한눈에 봐도 고귀한 신분임을 알 수 있었다.
“신시아에요. 내가 직접 골라 보낸 원단인데 옷이 아주 예쁘게 잘 만들어졌군요.”
“아! 후의에 감사 드립니다.”
신시아!
이 역시 소문이 자자한 황제의 여동생이다. 황제를 도와 ‘황족 숙청’에 가담했던, 그리고 지금도 3황자와 함께 황제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고 있는 제1황녀.
‘희대의 악녀라더니.. 그냥 평범한 귀족 여자 같은데.’
나는 지금 그녀가 지어준 녹색 공단 드레스를 몸에 걸치고 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신시아 황녀가 내게 연회용 가운을 지으라며 원단과 함께 재봉사까지 보내왔던 것이다.
자, 이제 생각해야 한다.
왜 이들이 별궁 구석에 방치하던 나를 친히 이 곳까지 끌어냈을까? 귀한 드레스까지 선물하면서?
지금 이 테이블에 앉은 이들도 황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황자나, 측근 귀족들뿐. 타국에서 온 손님은 나와 이안, 그리고 황제의 오른쪽에 앉은 이본느 공녀 뿐.
이본느 공녀야 황제가 총애하는 아틸리아 가문의 여식이자 곧 후궁이 되기로 결정된 여인이니 여기 있는 게 이상하지는 않지만..
나와 이안은?
“우리 궁에 각 나라의 고귀한 왕족들이 모두 모였기에, 짐이 연회를 마련했지. 그 중에서도 가장 멀리서 오신 두 분을 짐이 어찌 홀대할 수 있겠소?”
황제가 입을 열자 테이블 위를 오가던 모든 대화가 일시에 멈췄다. 대화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마치 목 위에 칼날이 겨누어진 듯한 긴장감이 들어찼다.
그 침묵을 가르고 황제의 차디찬 시선이 내게로 날아와 꽂혔다.
“안 그래도 발크에서 온 그대가 좀처럼 다른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내 걱정이 많았는데.
이안 왕자와는 곧잘 지낸다고 하니 마음이 좀 놓이는군.”
‘...날 떠보려는 거군. 목적은 이안인가.’
나는 이안을 잠시 째려보았다.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이 녀석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건데.
어쩌면 황제는 이미 이안이 있지도 않은 왕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 속 시커먼 놈이 왜 이곳에 왔는지 모르지만, 이미 이 놈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비춰진 이상 나도 적당히 둘러댈 수밖에 없다.
“제 부족함으로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안이 눈치껏 재빨리 끼어들었다.
“저는 지금은 돌아가신 발크 국의 헬레나 여왕님의 은덕으로 어릴 적에 발트 왕궁을 방문할 수 있었답니다. 리안나 왕녀 님과는 그 때 알게 된 것이지요.”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여왕이라... 발크 국은 여왕이 통치하는 나라였군. 짐은 몰랐는데.”
제피리움을 비롯한 대륙의 많은 나라가 여자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나라도 외교 문제에서만큼은 아버지께서 국왕으로 나서셨으니, 황제에게는 뜻밖이겠지.
아니, 그것보다 나와 말을 맞춰놓은 것도 없는데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는 이안에게는 정말 두손두발 다 들었다. 아... 반은 정말인가? 이안과 만나게 된 계기가 내 어머니 때문은 맞으니까.
-내 어머니, 헬레나 역시... 이안과 같은 마족이니까.
“제 고국은 작은 나라라 선왕 시절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공동으로 통치하셨지요. 제 아버지께서는 본디 이웃한 이오니아의 공작이셨는데, 발크와의 동맹을 위해 어머니와 결혼하셔서 발크 국왕으로 즉위하셨었답니다.”
내 말이 끝난 후 황제의 반응은 정말 뜻밖이었다.
“아버지라... 내 어릴 적 그대의 아버지를 직접 뵌 적이 있었지.”
‘!’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황제가 어떻게...?
“선황께서는 짐이 이 제국을 짊어질 기량이 있는 태자인지를 여러 각도로 시험하셨지... 그 깊은 뜻을 받들어 나는 몇 번이나 국경의 전장으로 보내졌어. 그 시절에는 선황의 깊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만...”
황제가 차게 웃었다. 테이블 위에는 아까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쨌거나 골든 로드의 평화유지를 위해 갔던 타투로스의 사막에서 리오넬 장군을 만났었지. 참... 훌륭한 분이더군.”
테오3세가 우리 아버지를 알고 있다니… 이건 정말 뜻밖이다.
“...아버지..요.”
나는 쉽게 말을 받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 아버지라.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아무리 기억해내려고 발버둥쳐도 기억은 자꾸만 희미해져 가고… 참혹한 최후의 모습만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생각할수록 가슴을 찢는 고통이 느껴지기에.
“타투로스 사막에서 야만인 용병들에게 꼼짝없이 수세에 몰렸을 때, 리오넬 장군께서 단 백명의 병사들로 용병대를 물리치고 우리 형님을 구해내셨던 이야기는 몇 번이나 들었어도 질리지 않았습니다.”
알레인 황자의 말에, 신시아 황녀도 손뼉을 치며 거들었다.
“맞아, 맞아. 이오니아는 우리 제국과 국교만 텄지, 왕래가 거의 없는데도 리오넬 님의 소문은 여기까지 닿았어요. 리오넬 님의 별명이... 분명히 <성검> 이었지? 정말 근사해.”
신시아가 내 기분을 의식한 듯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말해주었지만 난 웃을 수가 없었다.
‘젊었을 적 아빠의 타투로스 원정... 난 몰라, 그런 건 들어본 적 없어.’
오랜만에 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니 눈이 뜨거워졌다.
생각하면 안 되는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눈밭에 흩뿌려진 검은 피, 잿빛 하늘, 무릎 꿇은 오빠의 모습.
“...흠, 흠.”
내가 적당한 말로 대화를 이끌어나가지 못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지고 말았다. 난처해 하는 이들을 위해 나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아직 어릴 때 돌아가셔서...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분위기는 또 삽시간에 숙연해졌다. 몇몇은 나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황제는 턱을 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고...
그저 식기가 달각거리는 소리만 나던 끔찍한 침묵을 깨운 것은 이안의 옆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귀족이었다.
“흥, 선황의 깊은 뜻... 그러고 보니 유누스 2세께서는 최후까지 태자를 정하지 않으셨지요.”
“!”
사람들의 표정이 전부 납처럼 굳어버렸다. 밑도 끝도 없이 이 상황에서 왜 저런 말을...
황제를 슬쩍 보니… 맙소사.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저기 앉아있는 테오 3세일 것이다.
“이런.. 취했군.”
알레인 황자가 그 귀족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옆의 시종에게 눈짓했다. 얼른 데려가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 귀족은 정말 많이 취한 듯, 또 주절대기 시작했다.
“위대하신 테오 3세시여, 진정 선황께서 저 신성한 태양의 홀에 형제들의 피가 뿌려지는 것을 바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르텐 백작! 죽고 싶은겐가!”
결국 알레인 황자가 의자를 거칠게 밀며 일어났다. 하지만 목소리와는 달리 진짜 화가 났다기 보다는… 황제의 표정을 살피고 있는 걸 보니, 아마 저 황자는 유혈사태를 막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을 수 있을까? 각 귀빈의 두 세 걸음 뒤에 있는 근위기사들의 근육이 팽팽해진 것을 여기서도 느낄 수 있다. 황제의 눈짓 하나면, 저들은 아무 망설임 없이 저 노백작의 머리를 베겠지.
“그래요, 백작님. 이런 좋은 날 왜 분위기를 망치고 그러세요? 아무리 선대 때부터 재상을 지내며 우리 제피리움에 수없는 공로를 세우신 백작님이라지만, 매일 이렇게 술에 취하는 모습을 보이셔서야... 손님들도 계시는 데 얼굴이 뜨겁군요.”
신시아 황녀도 황제의 표정을 살피며 거들었다. 일부러 공로니, 어쩌니 하는 꺼내는 것을 보니, 저 바르텐 백작이라는 사람은 제피리움의 홀에서 꽤나 명망이 높은 사람인가 보다. 죽으면 곤란한... 아무리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테오3세라 할지라도 귀족들의 반발을 살 수도 있는.
우리를 둘러싼 살기를 느꼈는지, 다행히 바르텐 백작의 눈에 어느정도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제, 제가 취해서 실언을 했습니다... 불충을 용서하시지요..”라고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사색이 되어 있던 그의 시종들이 뛰어와 백작을 부축했다. 그들의 옷에 바르텐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니, 저들도 백작가의 일원이겠지. 나는 이상하게 그 중에서 유난히 어리고 눈빛이 맑은 소년에게 눈이 갔다.
‘아직 근위대의 긴장이 풀리지 않았어. 뭔가-‘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그 찰나.
황제가 우리 바로 옆의 랄프 경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까딱해 보이는 게 보였다.
“!”
“꺄아아악!!”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분수처럼 솓구쳤다. 랄프 경이 백작을 부축하던 금발 소년의 손을 자른 것이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아악!!”
소년의 비명과 백작의 절규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어린 소년의 손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내 공단 드레스에도 뿌려졌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까?
황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아이는 그대의 손주이지? 가엾게도 할애비의 잘못 때문에 영영 손에 검을 쥘 수 없게 되었군.”
“으흐흑.”
이를 꽉 깨문 백작의 입에서 비통한 울음이 새어 나왔다.
“내 차마 선대의 치세를 함께한 귀 공의 목숨을 거둘 수 없어 작은 바르텐의 손 하나를 거두는 것으로 만족했으니 앞으로 짐의 은혜를 불충으로 갚지 말라.”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순백의 망토 자락을 펄럭이며 자리를 떴다.
한 순간에 펼쳐진 아비규환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 얼음처럼 굳어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 역시 입술을 한 일자로 다문 채 고통 속에 뒹구는 소년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나는 황제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그의 눈동자....
‘아차!’
저편의 이본느는 이미 혼절해 있다. 정작 잘려 나뒹구는 손과 피범벅이 된 바닥에 뒹구는 소년의 바로 옆에 있는 나는… 이렇게나 태연한데.
아마 이본느 공녀의 저 모습이 ‘귀족 여성’으로서 보여야 할 모범적인 모습이겠지.
옆을 돌아보니 이안도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나를 보고 있다. 그의 눈이 내게 말하고 있다.
‘분위기 파악 좀…’
“아...”
나는 어지러운 척 몸을 앞으로 숙였다. 내 몸에 와인잔과 그릇이 밀려 내 치마와 이안의 바지로 와장창 쏟아졌다. 이안이 얼른 나를 부축하며 일어섰다.
“오, 오늘은 날이 좋지 않은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시게. 흥이 깨졌으니 다들 일어나도 괜찮겠군.”
황제의 말에 다들 허둥지둥 일어났다. 벌벌 떠는 그들을 따라 우리도 나가려는 참에...
“아, 참. 이안 왕자, 리안나 왕녀.”
“...네?”
황제가 우리를 불러세웠다. 나와 이안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또 왜….
그런데 다음에 이어진 황제의 말은 정말 황당했다.
“두 분이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말게나. 나는 언젠가 이 궁에 있는 왕족들 가운데서 정비를 뽑을 생각이거든.”
“예…?”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인질 중에 정비를 뽑겠다니,
그리고 이 와중에 나더러 이안이랑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말라니…. 이게 대체 무슨 뜻?
나도 그의 아내가 될 수 있다는 소리인가?
완전히 얼이 빠진 나를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황제.
나는 멀뚱멀뚱 서서 그 자리에 굳어 있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