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입니다. 저 위대하신 <성검> 리오넬 전하의 따님이시자 아르카디아의 수호자, 발크 왕국의 공주이신 리안나 폰 라인바르크 전하. 아니키아 공국에서 온 충직한 이안 드 트리스탄이 인사 드립니다.”
“!!”
이, 이런 미친놈...
제피리움 황궁 입구에서 고작 인질의 신분인 나에게 이렇게 예를 표하다니.
이 곳에서 이렇게 무릎을 꿇는 예를 갖출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명, 절대 황권을 지닌 황제 테오 3세뿐이다. 우리를 이 곳으로 불러들인, 잔인 무도한 황제의 귀에 이 일에 보고되기라도 하면…
아니, 그보다 ‘인간’인 척 훌륭한 연기를 펼치는 그의 모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저렇게 고귀한 외모의 귀공자로 치장해도 그에게서 풍기는 악취는 나를 전율케 한다.
-마족 주제에.
랄프 경도 크게 당황해 황급히 시종들에게 명해 이안을 일으켰다.
“제피리움 황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왕자님. 오랜 동맹국의 공주님을 뵙게 되어 반가운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나.. 여기서는 제피리움 황족 외에는 그런 예를 갖춰서는 안 됩니다.”
“아, 제가 큰 실례를 범했군요.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겠습니까?”
랄프 경은 두꺼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런 불경을 문제 삼아도, 문제 삼지 않아도 곤란해지는 것은 그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일말의 정의가 남아있다면 이런 일로 또 하나의 목숨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원하진 않을 테지.
“...이만 가죠. 황제 폐하를 오래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되니.”
이안의 능청에 평정을 되찾은 나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안은 눈에 보일 듯 말 듯하게 씨익, 웃고는 나를 따라왔다.
*
한참을 걷고 걸어 우리는 황제가 머무는 정궁에 들어섰다.
몇백 명을 거뜬히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큰 홀의 중앙에, 황제의 의자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의 지엄한 얼굴은 천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시종장이 시키는 대로 황제 앞으로 나아가 또 다른 왕국에서 온 인질이 나를 소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아뢰었다.
“가장 존귀하신 제피리움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저는 발트 왕국의 리안나 폰 라인바르크 왕녀입니다. 황제 폐하의 은총으로 황궁에 불려온 아나키아 공국의 이안 드 트리스탄 왕자를 소개합니다.”
“.....”
황제는 말이 없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나는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융단에서는 오래 묵은 피냄새가 난다.
“아나키아의 왕자, 황제 폐하의 앞으로!”
시종장의 외침에 이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비천한 아나키아의 왕자, 지엄하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풋. 웃음이 나올 뻔했다. 저 마족 놈이 뭐래?
그래도 그의 파격적인 아부가 황제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반갑군, 트리스탄의 아들. 그대의 아비에게는 늘 내가 신세만 지고 있지.”
트리스탄 은행의 돈을 거의 공짜로 끌어다 쓰고 있는 제피리움의 횡포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폐하의 신실한 종으로서 당연한 일을 하는 것뿐이지요.”
황제는 소리 내어 웃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안에게 선심을 베푸는 것으로 그의 흡족함을 보여주었다.
“그대는 앞으로 제1별궁에서 생활하라. 아무쪼록 제 집인 것처럼 편하게 지내게.”
황제와의 알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입궁한 지 한 달이나 된 나한테는 안부를 묻는 의례적인 인삿말조차 없이.
*
“리안나 님 성격에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이곳에 온지가 언제인데 자기 편 하나 만들지 못하다니요? 나 참, 벌써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가기로 결정된 여인도 있는데.”
이안은 둘만 남게 되자 옳다꾸나 하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얼씨구? 그래서 날 후궁으로 만들어 주려고 여기 왔다는 거야, 뭐야?”
나도 모르게 그의 멱살을 잡고 말았다.
“왜, 왜 이래요?”
“시끄러워, 이 징그러운 마족 놈! 또 날 속여서 잡아먹으려고 왔냐? 이 꼴은 또 뭐야! 이안 드 트리스탄이라니 같잖게...”
“아이, 참. 그 생각은 진작에 집어치웠다니까요.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거에요?
“아직도 화가 나 있냐고, 아직도? 너같으면 화가 풀리겠니? 응? 무슨 낯짝으로 내 앞에 나타나, 나타나기를...”
“리, 리안나 님. 이러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보잖아요...”
아차, 여긴 황궁이지. 나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인질들의 트집을 잡기 위해 혈안인 시녀, 기사들이 아닌 척 하면서 곳곳에서 이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구두의 뾰족한 굽으로 이안의 발을 꾹 밟아주고는 자리를 떴다.
*
황제는 자신의 테라스에서 이안과 리안나가 벌이는 행각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왕족 인질 관리의 총책임을 맡은 제2황자, 알레인이 있었다.
“아나키아의 왕자와 발크 왕녀 사이가 각별한가 보군.”
“죄송합니다, 폐하. 미처 확인을 못했습니다.”
“...됐다. 어차피 변방의 작은 나라들 아니냐. 저들끼리 뭉쳐봐야 고작 함께 향수병이나 달래는 수준이겠지.”
“..하지만 가까이 붙어 있는 나라의 왕자와 왕녀입니다. 둘이 눈이 맞아 결혼이라도 시켜달라고 하면...”
동생의 걱정에 황제는 피식,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대는 걱정도 팔자군. 저 말라깽이 꼬맹이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음...”
알레인은 저기 밑 들판에서 이안에게 두 주먹을 마구 휘둘러보이는 리안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금빛 자수가 박힌 화사한 드레스도 무색할 만큼, 지금 저 행동에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귀부인들과 공녀들은 매일같이 저 계집 얘기로 입이 바쁘더군. 전혀 공주 같지 않은 외모에, 교양도 없고, 사교 행사에는 콧방울도 안 비친다고... 꼴에 올해로 열여덟이 된다지?”
“아, 예... 오는 10월에 열 여덟째 생일을 맞는다고 들었습니다.”
황제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하늘을 나는 새부터 바닥을 기는 미물조차도 경의를 표한다는 카이엘의 아름다움이었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미녀들도 황제 앞에서 감히 제 미모를 뽐내지 못했다.
그런 황제에게 저 아이는... 풋내 나는 어린아이에 불과해 보일 뿐이겠지.
“아르카디아 지방 사람들은 대륙인들에 비해 골격이 왜소하다지요. 아마 그래서 또래 여인들에 비해 성장이 늦어 보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반면 올해로 스무 살이라는 저 왕자는 나만큼이나 훤칠하군.”
“그...렇네요.”
또 할 말이 없다.
알레인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황제의 옆에 서서 외국에서 온 왕자를 내려다 보았다. 기일을 어기지 않기 위해 보름이 넘도록 밤새 마차를 타고 왔을 텐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황제에 필적할 만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왕자.
“제라드가 내게 귀띔해주길, 원래 아나키아에는 왕자가 없다더군. 유력한 상인 가문이 연합해 만든 국가라.”
“네...넷? 그럼 저 왕자는...”
“물론 상인들의 왕이라는 트리스탄 가에서 귀한 아들이라며 우리에게 보냈지. 하지만 ‘골든 로드’의 상인들도 저 이안이라는 자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어.”
“그렇다는 건 설마... 감히 우리쪽에 가짜를 보낸 걸까요?”
“글쎄, 모르지. 하지만 저 왕녀와 아는 사이인 것을 보니 덮어놓고 의심하긴 뭐 하단 말야... “
황제는 잠시 생각하다 “알레인, 네가 알아서 잘 감시해라.” 라는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깍듯이 인사하고 물러나던 알레인을, 황제가 다시 불러세웠다.
“신시아에게 발크 국 왕녀를 위해 파티용 가운을 여러 벌 지으라고 일러라.”
“네...? 어째서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왜 형님이 직접 일개 왕녀의 가운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동생에게 카이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각국의 왕자, 왕녀들이 모두 이 제피리움 황궁에 모였으니 축하 연회를 베풀어야겠다.”
“아...”
“이번엔 저 왕녀도 입을만한 가운이 없다는 핑계로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지는 못할 거다”
“...네.”
‘왕녀를 이용해 저 자의 정체를 캘 생각이로군.’
이 넓은 황궁에서 약소국의 왕녀가 가운을 핑계로 매번 연회에 불참하는 것까지 꿰고 있다니... 알레인은 형님의 치밀함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황제의 테라스를 빠져 나왔다.
*
나는 방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참았던 긴장감을 일순간에 후- 하고 털어냈다.
그의 앞에서는 아닌 척 있었지만 온 몸을 전율케 했던 공포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이안.
나는 어릴 적 그에게 한번 ‘잡아 먹힐 뻔’ 한 적이 있다.
내가 아직 순수했던, 까마득한 어린 시절. 나는 내 엄마의 친구라며 가끔 내 앞에 나타나 나를 무릎에 앉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그를 참 좋아라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이 되어도 온 세상에 해가 비치지 않았던 날이 있었다.
그리고 그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안이 네 발로 기어 내게 다가왔다. 투명한 유리눈이 번뜩였고 커다랗게 벌린 그의 입 안에 날카로운 이빨이 가득 나 있었다. 딱 한번 본 그의 본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 정도로 무서웠다.
이안 드 트리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이 곳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사실 그에게 우리 인간과 같은 성 따위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마족이니까.
애초에 이안이라는 이름이 고대어로 ‘죽음’이라는 뜻을 아는 사람이 이 곳에 있기나 할까?
‘아마 없을거야... 이 나라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마법을 잃어버렸으니.’
나는 침대에 누워 한숨을 쉬었다.
아주 오랜 옛날, 인간도, 지금과 같은 대륙도 없었던 태고의 세상은 신족과 마족이 끝없는 전쟁을 이어가던 혼돈 그 자체였다.
오랜 전쟁으로 신족은 지쳤고, 자신들이 흘린 피 속에서 잉태된 생명-인간-에게 자신들의 힘을 나누어 주고 스스로 세상과 동화되는 길을 택했다.
그들은 그들의 위대한 신, 솔트의 육체로 육지를 만들고 마족들을 끌어들여 그 자신들과 함께 육지에 흡수되었다.
그들의 창조자인 솔트의 육체 속에 숙명의 적과 함께 갇혀 전쟁을 끝내기 위한, 장엄한 최후였다.
하지만 멈출 줄 모르는 파괴의 마왕 베아녹스는 끝까지 버티며 세상을 파괴하려 했고, 결국 신들의 힘을 나눠가진 태고의 인간들이 북쪽의 척박한 땅에 간신히 그를 봉인하는 데 성공한다. 그들은 그것도 모자라 세상의 반을 아우르는 거대한 결계를 친다. 그것이 지금 중앙대륙의 북쪽에 길게 뻗은 결계이다.
사실 신족이 사라진 마당에 인간들의 힘만으로 마왕을 봉인하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허무의 여왕 벨라가 인간들을 도왔는데, 이 마왕도 덧없는 전쟁을 끝내려는 솔트의 의지에 감화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자신도 지쳤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태고의 인간들을 도와 베아녹스를 봉인하고 북쪽에 결계를 친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서쪽 대륙에 녹아 든다.
그녀가 사라진 후 태고의 인간들은 서쪽에도 인간과 마계의 국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결계를 치지만, 이 때는 마왕의 도움을 받지 못해 서쪽 결계는 약간 불완전한 결계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인간들은 몇 천년 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선조들이 만든 이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랜 평화에 여기 제피리움을 포함해서 중앙대륙의 인간들 대부분은 신에게서 받은 힘-마법-을 사용하는 법을 잃어갔지만, 내 고향인 발크처럼 서쪽 결계와 가까이 맞닿아 있는 아르카디아 해의 나라들은 마계에서 이쪽으로 간간히 넘어오는 마물들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마법의 대륙 안쪽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마왕의 독기가 스며든 땅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마물들은 어느 정도 숙련된 검사나 마법사가 없앨 수 있지만, 문제는 ‘마족’이다.
아무리 강한 마법사라도 제대로 된 마족을 만나면, 손 한번 못써보고 한줌의 재가 될 뿐이었다. 마족은 마법사를 흡수해 더 강한 힘을 얻기 때문에, 오히려 강한 마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마족의 먹이가 되어 비명 횡사할 확률이 더 높은 셈이다.
나 역시... 강한 마법의 힘을 타고 났기에 어릴 때 이미 이안과 같은 ‘괴물’에게 점찍히고 말았다.
그리고 마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뒤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작은 전쟁에 휘말리면서 살아야만 했다.
사실 지금도 불과 몇 달 전 마족과 싸우다가 입은 부상이 아직 낫지 않아 오빠가 강제로 오른손목에 마력을 봉인하는 팔찌를 채워 버린 상태이다. 이런 몸으로 마법을 또 사용하게 되면 온몸의 오장육부가 다 파괴될지도 모른다며.
‘그런 와중에 여기서 이안을 만나다니.’
-이번에야말로 정말 죽을지 몰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차가운 한기가 몰려왔다.
나는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온 방에 촛불을 밝혔다.
눈을 감아도 쉽게 잠은 오지 않고
두려움과 절망감이 조금씩 내 마음을 잠식해 들어왔다.
‘내 목숨을 쥐고 있는 미친 황제도 모자라.. 손가락 하나로 가볍게 사람을 죽이는 마족까지… 나.. 살아서 이 황궁을 나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