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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피닉스 레기온(Phoenix legion)
작가 : 이리윤
작품등록일 : 2016.8.23

괴멸한 레기온이나 소대의 생존자만 모아놓은, 특별히 잘하는 것이 있거나, 실전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살아남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이들. 약삭빠르며, 저밖에 모르고, 재활용도 못 하는 쓰레기에 어중이떠중이만 모아놓은 데다 꼴에 공로를 세운 기사랍시고 어떻게 처리할 방법도 없어서 군부의 골칫거리라고 불리는, 죽지도 않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 바로 피닉스 레기온(Phoenix legion).

“내가 진다면 네놈들에게 아무것도 명령하지 않겠다. 지금까지 지내왔던 것처럼 지내면 되겠지.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너희는 내 개가 되어야 할 거다. 내가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물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해야겠지. 어때, 하겠나?”

그들이 제이를 만난 후 대륙 동부를 뒤흔든 전쟁에서 최고가 되는 이야기

 
Chapter 1. 도도하지도, 고상하지도 않았다(4)
작성일 : 16-08-28 00:35     조회 : 461     추천 : 0     분량 : 3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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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ten by 리윤

 

  벤자민 레세르 프랭클린.

 진한 녹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스무 살의 그는 웨인 백작의 삼남이었다. 사실 귀족가의 삼남처럼 어중간한 이도 없었다. 첫째는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을 것이고, 둘째는 보통 그런 첫째를 옆에서 보좌한다. 셋째 아들부터는 살 길을 알아서 찾아야 했다. 벤자민은 그런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사가 되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머리를 쓰는 것보다는 몸을 움직이는 게 적성에 맞았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 함께 학술원을 졸업 후 시에트랑 기사 양성학원에 진학하기로 했다. 시에트랑은 기사의 정석이었다. 잉게르드에서 시에트랑의 졸업 증명서가 없는 기사는 기사 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그가 시에트랑에 진학하기로 결정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둘째 형은 시에트랑을 반대했다. 왕립 아카데미의 고학년에 편입해서 가문의 힘이 되는 게 어떠냐는 고집이었다. 그것은 아주 쓸 데 없는 고집이었지만 벤자민은 그 고집을 꺾는 대신 그의 바람대로 왕립 아카데미에 편입했다. 그리고 3년 만에 자퇴했다. 그의 자유분방하고도 대쪽 같은 성미가 아카데미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벤자민은 돌고 돌아 결국 시에트랑 4학년에 편입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제이 에반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그는 지난주 게시판 근처에서 처음 만난 제이를 떠올렸다. 그녀의 어깨에 닿지 않는 짧은 연분홍색 머리카락과 싱그러운 연두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한 눈에 봐도 여리여리해 보이는 이미지인데 그런 그녀가 열아홉 살에 전체 수석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쪽.”

 

  그런데 왠지 그녀의 첫인상이 산산조각 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도 그랬다. 졸업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시에트랑을 떠난 그들은 제이의 안내를 받으며 박차를 가했다. 가장 선두에 선 제이의 승마술은 수준급이었다. 안장에 앉아 말의 허리를 탄탄하게 감은 허벅지와 발판에 굳건히 올린 두 발, 그리고 딱 좋은 타이밍에 가하는 박차까지. 어느 하나 나무랄 데가 없었다.

 

 벤자민이 승마술에 감탄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제이는 묵묵히 선두에 서서 일행을 안내했다. 그들이 가는 길은 제이가 1년에 한 번 고향으로 떠날 때 사용하는 길이다. 북부로 향하는 가장 안전한 길이기도 하니 사람들이 많이 다녀 모양이 잡힌 길이었다. 제이는 허리춤에 찬 물통을 꺼내 입술을 축였다.

 

 시간은 벌써 점심때를 지났다. 그녀를 제외한 이들은 강행군에 부쩍 지친 얼굴이었다. 안쓰럽긴 했지만 여기서 망설였다간 준비도 안 된 곳에서 야영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습기가 있는 땅이라면 불을 붙이기도 힘들거니와 밤에 잘 때 모포 위로 물기가 올라온다. 이 겨울에 잘못하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속도를 좀 더 올려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 더?”

 

  에드워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귀족 도련님인 그들은 말을 이렇게 오래, 험하게 탈 일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수업의 일종인 승마나 아니면 취미생활 정도랄까?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허벅지는 이미 불에 타는 듯이 뜨거웠다. 하지만 지체할 수 없었다.

 

  “얼마 안 남았어. 산은 해가 빨리 진다. 곧 저녁이야. 야영하기로 한 곳에 도착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엉망으로 자야 해. 저녁으로 먹을 산짐승도 잡아야지.”

  “……가자. 제이 말이 맞아.”

 

  로너가 제이의 말에 동의했다. 그 또한 힘들기만 마찬가지였지만 제이의 말에 틀린 것이 없었다. 그들은 마지못해 말에 박차를 가했다. 히힝! 높이 우는 말의 울음소리가 숲을 흔들었다. 해는 벌써 능선에 걸렸고,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졌다. 해의 높이를 가늠하던 제이는 말안장에 걸려 있던 화살통을 챙겼다.

 

  “로너, 여기서 인원을 나누는 게 어때?”

  “우리는 길을 모르는데?”

  “이 길로 쭉 직진하면 넓은 공터가 나와. 딱 봐도 야영지로 안성맞춤이니 보면 알 걸? 슬슬 해가 떨어져. 해가 떨어지면 작은 산짐승들은 다 숨어버리니까 미리 잡아야 할 것 같은데?”

 

  제이의 말에 로너가 잠깐 고민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과 에드워드가 야영지에 먼저 가서 준비를 해놓겠다고 말했다. 에드워드는 그 말에 동의하며 배낭을 고쳐 멨다. 그의 배낭에는 취사도구와 모포, 침낭이 들어 있었다.

 

  “파이어 스틸 사용할 줄 알아?”

  “……어떻게 해서든 너희가 오기 전에 불을 붙여 놓겠어.”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로너의 말에 제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두 명씩 찢어졌다. 로너와 에드워드가 바른 길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제이는 벤자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활은……없네.”

  “영 소질이 없어서 있느니만 못하거든. 난 뭘 하면 되지?”

  “일단 눈에 보이는 과일이나 버섯 종류를 다 따 와. 가지고 오면 분류는 내가 할게.”

 

  제이는 벤자민을 보낸 뒤 매고 있던 활을 바로 들었다. 새하얀 활대가 화려했다. 오른손에 활을 쥔 제이는 근처 나무에 말을 묶어 둔 다음 화살통을 챙겨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이런 산속의 짐승은 인기척을 느낄 일이 잘 없기 때문에 작은 소음에도 예민했다. 제이는 최대한 자신의 기척을 죽였다.

 

 그녀의 몸이 낮아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 사이에서 뭔가가 쏙 올라왔다. 갈색의 긴 귀를 보니 토끼였다. 제이는 화살을 줄에 걸고 시위를 당겼다. 사냥꾼은 인내심이 뛰어나야 한다. 토끼가 수풀을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몸통이 어느 정도 드러나자 망설임 없이 손을 놨다.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간 화살은 퍽, 소리와 함께 토끼의 목을 꿰뚫었다. 난데없는 화살에 목을 내어 준 토끼는 바르작거리다 이내 숨을 다했다. 제이는 쓰러진 토끼의 귀를 한데 모아 허리춤에 걸었다. 이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슴이라도 한 마리 잡아야 네 명이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리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발아래를 유심히 살펴봤다.

 

 잡초가 우거져 분간하기가 힘들었지만 자세히 보니 곳곳에 동물이 지나간 자국이 있었다. 대충 봐도 큰 짐승은 없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다른 저녁거리가 나타나리라. 근처에 있던 나무 기둥에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이고 있길 수 분이 지났을까?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슴이라고 하기에는 움직임이 무척 컸다. 다른 큰 짐승의 흔적은 못 본 것 같아 고개를 갸우뚱하던 제이는 수풀을 헤치고 나타나는 동물에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

  “……너 때문에 오던 동물도 다 도망가겠다.”

 

  알록달록한 과일과 버섯을 한 아름 딴 벤자민은 활을 든 제이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여자 사냥꾼 같은 그녀의 모습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거-”

  “…….”

 

  자신이 딴 것들을 확인받기 위해 다가가던 벤자민은 손을 번쩍 든 제이의 움직임에 행동을 멈췄다. 그녀가 천천히 활을 들었다.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줄에 건 제이는 천천히, 신중하게 시위를 당겼다. 그 모습에 벤자민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화살은 보란 듯이 벤자민을 향하고 있었다. 제이는 그에게 소리를 내지 않고 말했다.

 

  ‘가만히.’

 

  입모양으로 뜻을 때려 맞춘 벤자민은 꽁꽁 얼어버린 것처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의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수풀 소리가 들려왔다. 모골이 송연해졌고, 긴장감 때문에 손에 땀이 맺혔다. 들고 있던 과일이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핑, 하고 활줄이 수축하는 소리와 함께 벤자민의 목덜미에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소름이 삐죽 돋았다.

 

 쿵, 하고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이의 화살이 꿰뚫은 것은 암사슴이었다. 덩치가 많이 크지는 않았지만 토끼도 있고, 벤자민이 따 온-먹을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과일과 버섯도 있으니 나쁘지 않았다. 쓰러진 사슴의 목덜미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자 검붉은 피가 울컥울컥 새어나왔다.

 

  “과일.”

 

  벤자민은 제이에게 자신이 안고 있던 과일과 버섯들을 넘겨줬다. 다행히 그가 가지고 온 것들 대부분이 식용이었다. 먹을 수 없는 것들을 버린 제이는 그것을 자루에 넣고, 벤자민과 함께 사슴을 옮겼다. 식사를 위해서는 해체 작업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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