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동 주민센터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1등으로 입장한 우리 세 식구는 혼인신고와 출생신고를 동시에 했다. 출생신고 지연으로 약간의 과태료가 나왔지만, 그와 함께하기 위해 미뤄두었었던 일이다. 그와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하다.
그는 성실한 가장으로 열심히 일했고 다정한 아빠로 하영을 살뜰히 보살폈으며, 자상한 남편으로 나를 가득 차도록 사랑해 주었다. 여전히 틈틈이 발을 씻어주고 안마를 해주며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는 그에게, 그리고 하영에게. 나 역시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배우고 노력했고, 틈틈이 번역 일을 하며 돈도 모았다.
우리는 주말이면 하영을 친정에 맡기고 둘만의 낭만적인 데이트를 즐기거나, 셋이서 함께 수족관이나 박물관, 놀이동산 등으로 가족 나들이는 다녔다.
하지만 매달 두 번의 주말은 전 부인과 아들을 위해 거제 집으로 보내야 했는데, 난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보내주었다.
봄이 오고, 다시 계절이 바뀌어 여름이 시작될 무렵. 그 사이 그는 나와 함께 친정을 여러 차례 드나들며 친정 식구들과의 정도 돈독히 쌓아갔는데, 특히 엄마와 많이 다정해졌다. 엄마는 생각보다 그를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셨고, 언제나 ‘강 서방’이라며 살갑게 대해주셨는데, 아마도 딸과 손녀를 위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 진중하고 예의 바르며 나에게 깍듯이 존대하고 존중하는 그의 태도와 행실 그리고 나와 하영을 향한 책임감 등을 좋게 보셨다.’고 했다.
하지만 난 아직 한 번도 그의 가족을 만나보지 못했다. 내가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 그리고 그의 아들과 언제쯤 인사를 나눌 수 있겠는지 물었을 때 그는 ‘조만간 생각하고 있다.’고만 답을 했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하영의 첫 돌을 한 달 앞두고.
그가 하영의 첫 돌에 시댁 식구들과 전 부인, 아들. 모두를 집으로 초대하면 어떻겠냐고 나에게 물어온 것이다. 그러잖아도 그의 아내를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궁금하기도 했고 전하고 싶은 말도 있었기에) 난 기꺼이 찬성했고, 한창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팔월 말. 형님 내외와 조카는 휴가와 맞물려 오지 못하시고, 시어머니와 전 부인 그리고 아들이 참석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문제는 친정 식구들 역시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며, 우리 집에서 돌잔치를 하고 싶어 하시는데 집도 좁거니와 양가 식구들이(특히 그의 가족들이) 아직은 만날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궁여지책으로 돌잔치를 이틀로 나누기로 했다. 주말(토요일)은 친정 식구들과 하고 다음 날(일요일)은 시댁 식구들과 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각자 가족들에게 연락해 두었다.
여름이 가을에게 자리를 내어주던 구월 이십삼일. 친정 식구들과 함께하는 하영의 첫돌 축하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우리는 전날 장을 봐온 재료를 손질해서 요리준비를 하느라 분주했고, 하영이는 보행기를 타고 열심히 거실에서 달리기 연습을 하느라 바빴다.
점심 무렵 도착한 부모님과 오빠, 언니네 식구들까지, 열 명의 식구들로 작은 집은 처음으로 북적인다. 그와 나는 함께 몇 가지 요리를 해서 대접한다. 가족들은 하영의 아장걸음과 어설픈 재롱을 보며 좋아했고, 특히 아빠는 하영이 어린 시절 나와 어찌나 닮았는지 신기하다며 연신 웃으셨다. 솜씨 좋은 그는 안주나 간식이 떨어질 만하면 금세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상에 올렸고, 엄마는 신기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우리 강서방 솜씨가 요리사가 따로 없네, 넌 요리 잘하는 남편 만나 호강하겠다. 이 양반은 평생에 라면 하나 끓여준 적이 없는데...”
우리의 사연을 전혀 모르는 오빠는 그에게 기를 쓰고 술을 권했지만, 그는 갖은 핑계를 대며 받은 잔을 입에 대지 않았다. 딱 한 잔, 아빠가 따라주신 첫 잔만 빼고는 말이다. 아빠는 첫 잔을 따라 주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전처와 헤어진 게 하영이 때문이었다지. 그래, 책임지겠다는 자네 용기 고맙게 생각하네. 한편으로 자네 전처와 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일세 유감스럽게 생각하네. 그래도 이왕지사 이렇게 된 일 어쩌겠는가. 이렇게 예쁜 딸아이도 낳고 했으니 열심히 잘살아 보게. 다른데 한눈팔지 말고, 이혼은 한 번이면 족하네, 두 번은 절대 안 될 일이야. 알겠는가?”
그는 잔을 비운 뒤, 아빠께 잔을 채워드리며 답했다.
“네.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그렇게 꼬여있던 씨줄과 날줄이 풀리고 새로운 매듭이 하나씩 엮이어가며 또 하나의 가족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튿날 오전. 오늘 오실 손님은 세 분뿐이고 재료준비는 어제 다 해놓아서 별로 준비할 게 없다. 그는 열 시에 차를 가지고 어머니를 모시러 갔고, 난 식사 준비를 대충 해둔 뒤 하영이와 놀고 있는데 벨 소리가 울린다.
그의 전 부인과 아들이 약속 시각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한 것이다.
드디어 사진으로만 보았던 그의 전 부인과 아들을 만났다. 차를 앞에 놓고 찻상에 둘러앉았다. 그의 아내는 그의 말처럼 풍채가 좋고 인상이 후덕하고 자상해 보였고 인자한 미소를 은은하게 짓고 있었는데, 풍기는 첫인상이 종갓집 종부 같은 느낌이었고, 그의 아들은 키도 덩치도 얼굴도 그와 많이 닮아, 흡사 그의 어린 시절과 마주 앉은 느낌이었다.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조심스러워 긴장한 채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그녀가 침묵을 깬다.
“하영이라 했지요. 사진으로만 봤는데 정말 예쁘네요. 나도 딸이 한 명 있었으면 하고 바랐었는데... 마음처럼 잘 안되더라고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나도 준비했던 말을 꺼낸다.
“언니, 언니라 불러도 될까요? 한번 안아보세요.”
그녀가 하영을 안고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말한다.
“아기가 엄마를 많이 닮았네요. 난 그이를 닮았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었는데, 참 예쁜 딸아이네요. 부러워요.”
“고맙습니다. 예쁘게 봐주셔서, 그런데 자세히 보면 하늘씨도 많이 닮았어요. 그리고 말씀 낮추셔도 돼요. 제가 어려요. 언니보다.”
“다음에 또 보게 되면 그렇게 하죠.”
원래 수줍음이 많은 건지, 상대가 아빠의 새 부인이라서 그런 건지, 말없이 하영만 쳐다보며 웃고 있는 그의 아들에게 말을 걸어본다.
“네가 산이로구나. 반가워. 듣던 대로 의젓하고 아빠처럼 키도 크고 잘생겼구나. 내년이면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한다지, 축하해.”
산은 날 바로 보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짧게 답한다.
“고맙습니다.”
난 다시 준비했던 말을 꺼낸다.
“나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 그래서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작은 엄마’라고 부르면 어떨까? 난 네 동생의 엄마니까. 그리고 난 산이 널 아들처럼 생각하고 대하고 싶어. 하늘씨 아들이니까. 네 생각은 어떠니?”
산이 엄마를 바라보며 눈으로 묻는다. 그의 아내, 아니 언니가 미소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산은 날 보며 짧게 답한다.
“네.”
사실 난, 이 호칭 문제로 고민하고 그와 상의도 했었다. 그렇게 생각한 호칭이 ‘언니’와 ‘작은 엄마’였다. 난 이 호칭처럼 그의 아내를 친 언니같이, 그의 아들을 친 아들같이 대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게 말문이 트이자, 언니는 그가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혹시 술은 마시지 않는지 걱정하며 궁금해했고, 난 그가 술도 담배도 다 끊었노라고 그리고 직장과 집에서 누구보다 착실히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해, 나와 하영에 대해, 그리고 언니와 산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는 나누었다. 그 와중에 내가 몇 번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표현했는데, 그녀는 나의 사과를 이렇게 받았다.
“괜찮아요. 이미 다 지나간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누구의 탓도 아니에요. 그이도 나도 미영씨도 잘못한 거 없어요. 사람 마음이란 게 몸처럼 생각대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일이 이렇게 되려고, 그때 그런 일들이 있었던 걸 거예요.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 그렇게 된 거라 생각해요. 난 하영 엄마 미워하지 않아요. 하영이도 남편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요. 산이도 같은 마음일 거예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언니와 산이와 대화를 나눠본 후, 나는 그가 왜 어린 나이에 그녀와 결혼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내면은 마치 성자(聖者)의 그것처럼 아름다웠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가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선다.
그의 어머니는 인사하는 내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시고, 오랜만에 만나는 며느리와 손자를 반갑게 안아주고 다독여 주신다. 나는 차를 두 잔 더 내온 뒤, 주방으로 가 식사를 준비한다. ‘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곧, 그가 따라 들어와 묻는다.
“뭐, 도와드릴 거 없어요?”
“이 사람이 지금 누구 욕을 먹이려고 이러실까? 눈치 없이.”
타박과 함께 그를 내쫓는다.
잠시 후, 그의 아내가 들어와 잠시 바라보고 있더니 말한다.
“요리를 잘하네요.”
“아, 네... 별거 없는데...”
그녀는 팔을 걷고 나를 돕는다. 아무래도 이 집안사람들의 입맛은 그녀가 잘 알 것이기에 나는 그녀와 함께 식사 준비를 한다.
거실에 큰 상을 펴고 둘러앉았다. 먼저 언니의 손이 간 음식부터 맛을 본다. 맛있다. 그런데 그 맛이 익숙하다. 하늘씨가 만든 음식들과 맛도 향도 모양도 비슷하다. ‘그가 부인에게 요리를 배웠나 보다.’ 생각하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는 내게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밥을 하고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고 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일을 나가셔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이런 상념을 하며 밥을 먹는데 너무 조용하다. 나 때문일까? 모두 별다른 말 없이 먹는 데만 집중한다. 짧은 시간에 식사가 끝나고, 나는 그와 함께 상을 물리고 설거지를 하려는데, 그가 내 앞치마를 뺏으며 말한다.
“저한테 맡겨요. 괜찮으니 가서 차나 한잔 내가서 앉으세요. 이야기도 좀 하시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으나 그는 빙긋 웃기만 한다. 정말 괜찮다는 뜻이다.
난 불편한 마음으로 차와 커피, 과일을 챙겨 들고 나가 거실에 함께 앉는다. 혹시나 그의 어머니나 부인에게 핀잔이라도 듣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지만 기우였다. 어머님도 언니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말이 떠오른다. ‘맛있게 먹었으면 설거지는 원래 남자가 하는 거예요.’ 그에게 설거지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 같은 것이어서, 이 가족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