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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두 번째 첫사랑(화양연화)
작가 : 정연일
작품등록일 : 2018.11.15

6인(人) 6색(色)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건실한 직장인이자 가장이었던 강하늘. 대우조선 사태로 정리해고를 당하고 방황하다 알코올 중독자가 된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다가온다.
‘나는 가정이 있는데….’

유명 사립대 교수로 젊은 나이에 성공과 실패를 맛본 김미영. 좌절 속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된 그녀 앞에 나타난 남자.
‘난 친구보다 가벼운 연인이 필요해….’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일을하며 가정을 꾸려가던 신수아. 오직 남편과 아들, 가족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그녀에게 닥친 또 다른 시련.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방황하는 아들의 치료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어머니 윤명희.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아들에게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외도는 크나큰 죄악이야….’

아빠의 부재가 늘 안타까웠던 아들 강 산. 어느 날 아빠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고 아빠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 한다.
‘내게 여동생이 생겼다고?’

그리고 2049년의 그의 딸 강하영.

여섯 명이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 가족의 이야기.

 
1부. 나의 이야기(9화)
작성일 : 18-11-28 09:40     조회 : 322     추천 : 1     분량 : 8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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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에 그녀는 깨어 묻는다.

 

  “뭐 만들어요?”

  “해물 파스타요. 입에 맞을는지 모르겠지만.”

 

  어느새 뒤로 다가온 그녀는 뒤에서 나를 안는다.

 

  “저. 음식 안 가려요.”

 

  그녀는 맛있게 먹어주었고. 식사 후 우린 운동을 겸해 산책을 나가 동네를 한 바퀴 돌았고, 책을 읽다 잠자리에 들었다. 어둠 속에서 내 품에 안겨 눈을 감은 채 그녀가 말했다.

 

  “하늘 씨 말처럼 눈치 볼 사람도 없고, 하늘 씨랑 같이 있으니 마음은 참 편하네요. 지금은. 하지만 솔직히 앞날을 생각하면 좀 캄캄하고, 두려워요. 내가 선택했지만 조금은.”

  “그래요. 그래서 저도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저... 제가 아내와 헤어지고 온다면 받아줄래요?”

 

  그녀는 가만히 눈을 뜨고 날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그러기를 바랄 거라 생각하나요?”

  “그럼, 미영 씨는 그런 생각 전혀 안 해봤다는 건가요?”

  “전혀 안 했다고는 못하겠네요. 거짓말이니. 하지만 그러지 말아요. 제가 원하지 않아요. 어떻게든 제가 헤쳐 나가야 할 일이에요. 조금 두렵긴 하지만 자신 있어요.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있구요.”

 

  나는 잠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아기를 위해서지.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울 수는 없어요. 그게 어떤 건지 저는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래도 그건 하늘 씨와 가족들에게 너무 큰 죄인걸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듯, 말을 끊었던 그녀가 다시 말을 잇는다.

 

  “만에 하나 제가 원한다면……. 아니에요. 가정하지 않는 게 좋겠네요.”

 

  말을 끊어 버렸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것 같아 답했다.

 

  “그래요. 난 여전히 아내와 아들을 사랑하지만, 미영 씨가 원한다면 가족을 등 질 각오는 돼 있어요. 하지만 헤어진다고 해서 완전히 인연을 끊을 생각은 아니에요. 아들에게는 여전히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 할 것이고 아내에게도 전 남편이겠지만 해야 할 도리는 다할 생각에요. 물론 지금은 어디까지나 제 생각일 뿐이지만, 그래야 한다면 조만간 아내와 아들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사죄하고 용서를 구해야겠지요.”

 

  그녀는 준비라도 한 듯 바로 말을 받는다.

 

  “그럼, 제가 하늘 씨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요? 알다시피 전 결혼에 큰 관심이 없어요. 평생을 혼인이라는 관계에 매어 살아가는 것. 저는 감당 못 할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냥 친구처럼 가끔 만나고, 아이에게 필요할 때 아빠 노릇만 좀 해 주는 그런 남자친구나 연인으로 남길 바란다면요?”

 

  그녀의 또 다른 가정에 난 잠시 생각한 후 답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비밀로 뭍고,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야겠지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고, 그래야 한다면.”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말했다.

 

  “그럼. 일단 그 문제는 뒤로 미뤄 둬요. 출산할 때까지, 그때까지 함께 살면서 겪어보고 찬찬히 생각해 보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보고, 아기도 만나보고 그러고 난 후 마음을 정하는 거로 해요. 그때까지는 그냥 연습한다. 생각하고 우리 신혼부부처럼 그렇게 지내요. 너무 고민하지 말고, 미리 걱정하지도 말고, 현실에 충실하며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복을 즐겨요. 저는 지금 하늘 씨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아기를 품고 있는 현재가 소중하고 행복해요.”

  “네. 그렇게 해요. 저도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해요.”

 

  나는 그녀를 가슴에 꼭 안아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김미영 씨. 당신을 사랑해요.”

  “저도요.”

 

  나의 첫 고백을 그녀는 ‘저도요’라고 받아주었고,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그녀와 함께 남포동 국제시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어디로 가는지’ 물었고, ‘국제시장’이라는 나의 답에 ‘왜?’라고 다시 물었고, 난 웃으며 ‘가 보면 안다’라고 답했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온 국제시장 의류 골목 안쪽, 18년 전 아내와 함께 임부복을 구입했던 그 가게는 다행스럽게도 아직 그대로 있었다.

 

  “임부복 전문점... 이네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십팔 년 전 제가 아내에게 임부복을 선물했던 바로 그 가게예요. 다행히 아직 그대로 있네요. 아내는 여기서 산 임부복을 입고 편안히 잘 지냈고, 건강하게 아들 산이를 출산했죠.”

  “아. 네...”

 

  내가 그녀를 굳이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은 그녀에게 아내에게 했듯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고, 한편 내게는 아내의 자리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알아주길 바라서였다. 다행히 그녀 앞에서 아내의 이야기를 상기시켰을 때 그녀는 불편한 심경을 표현하지 않았다. 속이 깊은 그녀는 이해해 주리라 믿었다.

 

  난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 담배도 끊었다. 산모와 태아를 위해. 나의 삶은 목표의식을 갖고 조금씩 바뀌어갔다.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했고 집에서는 미영에게 충실했다. 태아의 아빠이자 미영의 남편으로, 마치 18년 전 신랑 강하늘이 신부 신수아에게 그러했듯이.

  미영 또한 집에서 틈틈이 번역일을 하고 집안일을 하며 나에게, 태아에게 충실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소형 중고차도 한 대 구입했다. 나의 출퇴근과 미영의 외출을 위해 차가 필요했다.

  우린 정말 신혼부부처럼 지냈다. 눈빛만 마주쳐도 웃음이 났고 손끝만 스쳐도 전기가 통했다. 함께하는 모든 것이 즐거웠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저녁이면 맛있는 요리로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하고, 그녀와 뱃속 아기에게 책을 읽어주었고, 휴일이면 함께 영화나 공연을 관람하거나 소풍을 다녔다. 매월 산부인과 정기검진도 함께 받으러 다녔는데, 담당 주치의인 여의사는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처음 나를 볼 때부터 나에게 ‘참 잘 생각했다’라며 잘 대해 주었다.

 

  그렇게 석 달의 시간이 흘러 그녀의 배는 점점 보름달이 되어갔고, 9월 25일, 예정일을 이틀 앞둔 무덥던 날. 오전 작업이 마쳐갈 무렵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 근무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는 건 급한 용무라는 뜻.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출산이 임박했음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배가 아파요…. 진통 같아요.”

 

  차분하려고 노력하지만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 분명 진통이 시작된 지 제법 됐을 것이다. 아마도 나의 오전 근무가 끝나기를 기다렸으리라.

 

  “지금 바로 갈게요. 조금만 참아요.”

 

  이런 날을 대비해 얼마 전 아내의 출산이 임박했음을 사무실에 말해두었었다. 사무실로 달려가 아내에게 출산 진통이 왔음을 알리고 오후 작업은 다른 기사에게 맡길 것과 내일은 월차를 쓰고 쉴 거라는 말을 전하고 차를 몰아 날 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통증을 참느라 이미 땀이 흥건히 젓은 채 누워있었다. 땀에 절은 작업복 상의만 벗어 던진 채, 그녀를 안아 들고 차에 태우고 그녀가 다니는 산부인과 병원으로 향했다.

 

  “많이 아프죠.”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

 

  “아직은 생각보다 견딜 만해요. 죽을 만큼 아파야 애가 나온다는데 아직은 아닌가 봐요.”

 

  그녀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문득 18년 전 아들의 출산 때가 떠올랐다. 지금과 상황이 비슷했다. 다른 건 그때는 깊은 밤이었고 산모는 아내였다. 지금은 낮이고 산모가 미영이라는 것.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진료실에서 나온 담당 여의사는 웃으며 말했다.

 

  “태아와 산모 모두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정상 진진통이고 아직 자궁이 다 열리지 않아 촉진제를 처방했으니 좀 기다려 봐야겠지만, 아마도 자연분만이 가능할 거 같네요. 부인 옆에 계셔주세요. 초산이라 많이 힘들 겁니다.”

 

  분만 대기실로 들어서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말없이 나의 손을 찾았고, 난 그녀의 손을 잡고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녀와 아기의 순산을 위해 시작된 나의 기도는 나와 그녀 그리고 아내와 아들, 어머니로까지 이어졌고, 우리 모두의 앞날을 축복해 달라고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목이 메도록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기도를 끝마치고 고개를 들자, 그녀는 내 젖은 눈을 보고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무슨 기도를 그렇게 간절히 드렸어요? 눈물까지 흘려가며... ”

  “하영이와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요.”

 

  그 말을 듣고는 그녀가 토끼 눈이 되어 묻는다.

 

  “하영. 우리 사랑이 이름인가요?”

  “네. 제 이름에서 한 자, 당신 이름에서 한 자씩 따왔어요. 하늘과 미영의 하영. 한자로는 클 하 자에 영화로울 영 자에요.”

  “강하영. 예쁜 이름이네요. 의미도 있고. 미리 좀 알려주지 그랬어요. 궁금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안 알려 드린 거예요. 궁금하시라고, 극적으로 알면 재밌잖아요. 이제 ‘사랑’이란 태명 대신 ‘하영’이란 이름으로 불러줘요. ‘강하영’”

 

  뭐라 대꾸를 하려던 그녀가 소리 없이 내 손을 꽉 쥔다. 진통이 오는가 보다. 꽉 다문 입술 사이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온다. 나는 그녀의 통증을 덜어주기 위해 그녀의 전신을 주무르며 마사지를 하기 시작한다. 나는 쉬지 않고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재미없는 개그를 들려주고, 노래를 불러주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오래전, 나의 아내 신수아 에게 그랬듯이….

 

  저녁 여섯 시가 다되어 분만실로 들어간 그녀를 초조하게 기다리기를 한 시간.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분만실을 나오는 여의사에게 다가갔다.

 

  “축하드립니다. 예쁜 공주님이에요. 산모도 건강하고요.”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내가 많이 힘들어하진 않던가요?”

  “힘들지 않은 출산이 어디 있어요. 다만 산모가 체력이 좋으셔서 비교적 순산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네. 감사합니다.”

 

  회복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나를 보자 울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에 몸을 숙이고 그녀를 살며시 안아주며 말했다.

 

  “많이 힘들었죠. 고생했어요. 정말 수고하셨어요. 고마워요. 또 사랑해요.”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눈물만 흘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느낄 수 있다. 기쁨과 슬픔, 안도와 불안, 희망과 두려움.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부모님이 보고 싶고 미안한 마음도 들 것이다. 부모님의 축복 속에 결혼을 하고 맞이해야 할 출산을 이렇게 외로이 맞이하는 게 슬프고 가슴 아프기도 할 것이다. 난 말 없이 오래도록 그녀의 등을 쓰다듬고 토닥여 주었다.

  신생아실 유리 벽 너머로 본 하영은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꼬물거린다. 난 그 얼굴에서 금세 미영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다행이에요. 엄마를 많이 닮았어요. 자라면 미영 씨 못지않은 미인이 될 거에요.”

  “제가 보기엔 하늘 씨도 많이 닮은 거 같은데요?”

  “그런 말 말아요. 하영이는 무조건 엄마를 닮을 거예요. 그래야 해요. 적어도 외모는.”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헤죽헤죽 웃었다. 긴장이 풀린 그녀는 비로소 허기가 느껴지는지 배가 고프다고 했고, 나 역시 하루종일 공복이었음을 깨닫는다. 간호사에게 산모에게 뭘 좀 먹여도 되는지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십 분을 헤매어 죽집을 발견하고 전복죽과 해물 죽을 사 들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늦은 밤 우린 입원실에서 같이 죽을 먹으며 하영의 이야기를 나눴다.

 

  이틀 후, 집으로 돌아오자 난 바빠져야 했다. 그녀의 산후조리를 해 주어야 했으므로, 새벽에 일어나 미역국을 끓이고 그녀의 하루 치 식사준비를 해두고 출근했고, 쉬는 시간마다 전화를 걸어 그녀와 하영의 안부를 물었다. 저녁이면 장을 봐서 퇴근하고, 집안일을 했다. 그녀는 하영에게 젖을 물리다 툭하면 눈물을 흘렸는데, 걱정이 돼서 물어보면 ‘행복해서’라고 답했다. 그리고 하영을 안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했다. 나는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아들 산이에게 했듯 하영을 씻기고 기저귀를 갈고 분을 발라주고 트림을 시키고 잠이 들 때까지 안아주었다. 마치 17년 전으로 돌아간 듯 난 피곤함도 느끼지 못한 채 들떠있었고, 달콤하고 행복했다.

 

  보름쯤 시간이 흘러 그녀가 바깥출입을 하게 되고 이틀 후, 퇴근길에 그녀가 좋아하는 치즈 치아바타와 과일을 사 들고 집에 도착했을 때 싸늘한 무언가가 날카롭게 나를 스쳤다. 그녀와 하영이 보이지 않는다. 원룸은 작은 방이다. 단번에 그녀가 근처로 산책하러 나가거나 가게를 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그녀의 짐과 하영의 물건들까지 모두 없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방은 나 혼자 지내던 상태로 정리돼있었다. 방으로 들어서며 석 달 전 그녀가 이 집으로 들어온 날 밤 그녀와의 대화가 떠 올랐다.

 

  ‘그럼 제가 하늘 씨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요?.... 그 문제는 뒤로 미뤄 둬요. 출산할 때까지... 그러고 난 후 마음을 정하는 거로 해요.’

 

  그녀는 떠난 것이다. 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의자에 주저앉는데 식탁으로 쓰던 테이블 위에 편지 한 통이 눈에 들어온다. 집어서 주머니에 넣은 뒤 집을 나서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담배 한 갑과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편의점 앞 테이블에 앉아 소주병을 따서 병째 한 모금 삼키고, 담배에 불을 붙여 깊게 한 모금 들이켰다. 한동안 끊었던 술과 담배 연기가 동시에 들어가자 살짝 현기증이 인다. 일단 미리 진정제로 술과 담배를 처방했다. 편지에 무슨 말이 적혀 있건 결론은 분명했으니까. 그녀는 이미 떠났으니까. 편지를 꺼내는 손이 떨린다.

  봉투를 열고 편지를 펼치며 왜 떠났는가? 왜 그렇게 결정해야 했는가? 혼자 물었다.

 

  「하늘 씨 보세요.

  지난 삼 개월의 시간이 제겐 마치 꿈이라도 꾼 듯한 시간이었어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적이 있었나 싶어 돌아볼 만큼. 결혼 생활이 이런 거구나 싶었고, 특히 하영이와 당신과 함께한 시간은 제게 이 시간과 상황을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 씨 당신을 욕심나게 했습니다. 저는 당신을 보며 ‘부인과 헤어지라고. 그리고 나와 하영이와 함께 살자고, 진심으로 그러고 싶다’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수차례 삼켜야 했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처음부터. 출산 때까지만 하늘 씨를 이용할 생각이었습니다. 출산만 하고 나면 아기를 데리고 떠날 생각으로 이 집으로 들어온 것이지요. 네. 제 마음은 거짓이었어요. 처음부터. 절반쯤은. 그런데 당신과 함께 지내면서 그 거짓이 점점 진심이 되어갔어요. 하영을 출산한 후 당신을 보며 내겐 당신이 필요하다는 진실이, 욕심이,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 씨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렸어요.

  더 이상 당신 곁에 머문다면, 영영 당신을 보내지 못할 것 같아. 아니 보내지 않을 것 같아 제가 먼저 당신을 떠납니다. 제 곁에 있어도 항상 마음 한켠에는 부인과 아들이 가시처럼 박혀 있는 거 느낄 수 있었어요. 이제 마음 편히 가세요, 가족들에게. 그리고 어머니와의 관계도 회복하시고요. 당신에게 부담이 되는 것도 당신의 가족들에게 죄를 짓는 것도 더 이상 마음이 무거워 못하겠어요.

  저는 집으로 돌아가요. 부모님께서 많이 놀라시겠지만 어떻게든 될 거예요. 설마 딸과 갓난쟁이 손녀를 내쫓기야 하시겠어요. 제 걱정은 제발 하지 말아 주세요. 잘 지내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그동안 정말 너무 고마웠어요. 행복 했구요. 사랑해요. 하늘 씨 진심으로. 그리고 미안해요. 안녕.

  PS. 상실감이 클 거라는 거 알아요. 그래도 나 없다고 술 마시지 말고 건강해야 해요. 꼭!」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그냥 멍해진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마냥 멍하니 앉아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술병이 눈에 들어온다. 기계적으로 술병을 들고 마셔버린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넘었다. 한 시간을 멍하니 앉아 있었던 것이다.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소주를 한 병 더 샀다. 약이 필요했다. 집에 들어가 방에 주저앉아서 편지를 다시 읽었다. 이 감정을 뭐라 말 해야 할까.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듯 허전했고 아팠다. 총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유행가 가사처럼 총 맞은 것처럼 아팠다. 아파서 울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고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냥 걸었다. 네 번째 신호가 떨어지자 전화가 연결되었다. 답은 없고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울음을 겨우 추스르며 물었다.

 

  “..... 하늘 씨... 괜찮아요?”

 

  나는 울면서 답했다.

 

  “..... 아파요... 나 죽을 것 같아요.... 왜... 그랬어요?”

 

  그녀는 더 크게 울며 말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도 아파 죽을 거 같아요. 미안해요.”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진정하기 위해 진통제, 아니 마취제가 필요했다. 소주를 따고 단숨에 반병을 비웠다. 차츰 마음이 가라앉았다. 나는 마음을 진정하며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 ‘까톡’ 톡이 들어왔다.

 

  『혹시 나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죠. 하늘 씨 강한 사람이잖아요. 믿어요. 난 당신의 뜻을 존중해요. 어떤 선택을 하건 미련 없이 원망 없이 따르겠어요. 혹시라도 몸 상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두 번 다시 나도 하영이도 못 볼 줄 알아요.』

 

  그녀 역시 아파서 울고 있었다.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내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일까? 아니다. 아마도 선택을 요구하는 것이리라. 나의 뜻을 존중한다고 하지 않는가. 결국, 마지막 선택은 다시 내게로 넘어왔다. 냉정하고 차분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무엇이 더 소중한가? 내 남은 삶에 있어,’

  ‘아내와 아들, 어머니, 미영과 하영. 이들에게 있어 나의 존재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일까?’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만 나머지 한쪽을 품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양쪽을 다 품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남은 소주를 다 비우자 신경이 곤두서고 정신이 명료해진다. 다시 묻는다.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가족인 아내와 아들, 어머니 그리고 새로운 가족 미영과 하영이다. 그렇다면 그중에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당연히 미영과 하영이다. 결론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먼저 거제로 가 아내를 만나야 했다. 마침 내일은 주말이니 아들도 집에 있을 것이다. 마음을 정하고 나자 머리도 조금씩 진정이 되어간다. 내일 가족을 만나 지금까지의 상황을 사실대로 털어놓고 사죄를 하고 용서를 구할 것이다. 어떠한 처분도, 비난도 달게 받는 수밖에. 이혼에 관해서는 아내의 뜻을 존중해야 한다. 거부하더라도 난 이의를 달 수 없다. 난 유책 배우자이기에. 그러고 있는 사이 자정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고, 내일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말
 

 항상 감사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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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부. 나의 이야기(6화) 2018 / 11 / 24 333 1 7340   
6 1부. 나의 이야기(5화) 2018 / 11 / 23 315 1 6054   
5 1부. 나의 이야기(4화) 2018 / 11 / 22 311 1 8966   
4 1부. 나의 이야기(3화) (1) 2018 / 11 / 20 348 1 6297   
3 1부. 나의 이야기(2화) 2018 / 11 / 19 338 1 6247   
2 1부. 나의 이야기 (1화) 2018 / 11 / 18 331 2 6082   
1 인사, 목차, 프롤로그 2018 / 11 / 17 503 1 3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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