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이 끝난 후, 책을 한 권 챙겨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그가 합류한 후 두 시간의 모임은 매우 짧게 느껴졌다. 여러 맴버들이 있었지만 유독 그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갔고, 그의 반응에 마음이 갔다. 그 역시 나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모든 맴버들에게 동일한 관심과 공감을 보였고 나 역시 다르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눈빛과 표정 말투와 목소리, 행동 들에서 그렇게 느꼈다. 두 번의 만남과 네 시간의 짧은 대화를 통해 그는 내 마음 한켠에 슬그머니 자리를 잡은 것이다. 원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오랜 친구처럼 조용하고 편안하게.
벤치에 앉아서 책을 펼쳤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책을 들고 딴생각에 잠긴다. 나는 나름 콧대 높은 삶을 살아왔고, 까다로웠으며 눈도 높았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그 중년의 아저씨는 내 맘속에 자리 잡은 것일까. 아마도 폐쇄 병동이라는 이곳의 특수성과 모임의 진실성 때문일 것이다. 비밀이 없는 진솔한 관계. 하지만 그렇다면 나머지 맴버들은 왜 아직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지 못했을까? 특별히 잘난 것도 없는, 지금은 백수가 된 중년의 알코올 중독자 유부남에게 나 지금 끌리는 건가? 벌써 다음 주를 기대하며 설레하는 내가 나는 당황스럽다.
순간 멀리서도 또렷이 구별되는 기분 좋은 바리톤 음색에 ‘움찔’한다. 그가 올라온다. 누군가와 함께. 나는 침착하게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와 두 친구는 나를 보더니 입을 딱 다물고 당황한 듯 행동한다. 그는 인사도 건네지 않고 나를 못 본 척해버린다. 순간 그들이 모임에 관해, 어쩌면 나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이었을 거라 직감한다. 그래서 날 보고 당황했으리라. 책으로 고개를 돌린 채 곁눈으로 그를 관찰하는데 ‘아무것도 아닌 척’하고 있는 것이 선명히 보인다. ‘그도 나와 같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임이 파하고 나는 그를 그는 나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이유인지 황급히 내려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듯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입원 후 가장 지루했던 한 주가 흘러, 그와 함께하는 세 번째 모임 시간. 주제는 ‘행복’이다.
이 남자에게 행복이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란다. 특별한 사랑을 꿈꾸고 특별한 여행을 꿈꾸고 특별한 놀이를 꿈꾸면서도, 꿈은 꿈으로 남겨두고 현실 속의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꿈을 위해 현실 속 가족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님을 안다. 미련하다. 물론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혹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 역시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련할 만큼 가족을 사랑하는 이 남자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면 좀 더 자신의 행복을 위해 꿈을 위해 인생을 살 것이라 생각해 본다. 가족이라는 굴레에 메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가족만을 바라보는 삶. 바보 같다고 생각된다.
난 그만큼 거창한 사랑을 해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모든 것을 희생하고도 아깝지 않을 만큼 위대한 사랑 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런 사랑이 있다면 한번 해 보고 싶기는 하지만, 평생 하고 싶지는 않다. 좀 무섭다. 그 사랑에 질식해 죽을까 봐.
나는 아직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부, 명예, 권력, 사랑, 가족, 쾌락, 평안, 모든 것이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행복의 기준도 다르지 않을까? 나는 아직 진짜 행복은 이런 것이다. 라고 느껴보지 못했다.
아무튼, 이 미련할 만큼 고지식하고 바보처럼 착한 사람이.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 사람이. 내게 쪽지를 주고 갔다. 규칙 따위를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띄면 곤란해질 수 있겠다 싶어 재빨리 챙겨 넣긴 했다.
친구 하잔다. 사심 없이. 이걸 대시로 받아들여야 하나?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남녀 간의 그냥 친구라, 가당키나 한 말인가? 순진한 건지 모자란 건지 아니면 순진한 척하는 약삭빠른 선수인 건지 헷갈린다. 일단 지금까지의 그의 캐릭터를 보아서는 선수의 재목은 아닌듯하다. 순진한 거로 봐 주기로 하자.
하지만 친구라면 따로 만나서 밥도 먹고 대화도 하고 맛있는 것도 나눠 먹고 그래야 하지 않은가? 뭐, 밥은 식당에서 같이 먹으니 그렇다고 치고, 다른 건 어떡할 건가? 마땅히 방법이 없으니 정중히 거절할밖에. 그렇게 쪽지를 써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언제 마주칠지 알 수 없으므로.
어쨌든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도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니. 그가 유부남이긴 하지만 연애를 하자는 게 아니잖은가.
다음날 오후 옥상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쪽지를 던져주고 내려왔다.
다음날 오후,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그를 보았는데, 책을 들고는 있는데 읽지 않고 두리번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 날 기다린 눈치다. 옆에 앉으니 그의 눈이 말한다. ‘줄 게 있어요’ 그는 주머니에서 돌돌 말린 종이 스크롤을 꺼내 그와 나 사이에 내려놓았고 나는 잽싸게 챙겨 주머니에 넣고 종종걸음치며 병실로 돌아와 읽어보았다.
생각보다 명석하고 주도면밀한 남자다. 편지에 초콜릿까지. 그러니까 내가 남자에게 이런 편지를 받아 본 게... 이십 년은 된 거 같다. 아. 대학교 때 받아 봤으니 십오 년쯤 됐나 보다. 그동안 여러 남자를 만나 봤지만 이렇게 글로 마음을 전해온 사람은 없었다. 쪽지나 생일카드, 연하장 같은 건 많이 받아 봤지만 말이다. 나의 일천한 경험으로 볼 때 글을 쓰는 사람, 특히 글에 마음을 담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보기 힘들었다. 대체로 진실한 사람들이 많았다. 글은 아무나 쓸 수 있지만, 글에 마음을 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남자 평소에도 편지나 글을 즐겨 쓰는 사람일 것이다.
‘필담을 하자’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 방식으로 대화도 하고 맛있는 것도 나눠 먹자는 건데 현명한 방법이다. 가벼운 사람이 아니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사실 반쯤은 장난으로 그를 대했었다. 이제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그는 정성 들여 글에 마음을 담는데 나는 장난삼아 대한다는 건 옳지 못하다. 나도 정성으로 글에 마음을 담아 진지하게 대해야지.
답장을 적어 그처럼 간식을 하나 넣어 스크롤을 만든 다음 그가 원하는 시간에 옥상에서 전해 주었다.
그 후 우리는 거의 매일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하루씩 돌아가며 주거니 받거니 하기도 하고 동시에 교환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언제 어디서나 편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는데, 나는 이것을 ‘낚아채기’라고 부른다. 그가 먼저 시작하게끔 했는데, 필담 시작 며칠 후, 교육 프로그램을 마치고 교육장에서 병동으로 돌아가는 복도에서였다.
오가는 환우들로 북적이는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그의 손에 스크롤이 들려있었고, 전방 2미터에서 그는 손목을 내 쪽으로 살짝 틀었을 뿐 다른 몸짓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눈으로 ‘받아요’라고 말하고 있었고, 나는 옆을 스쳐 지나가며 그의 손에서 스크롤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능숙하게 낚아챘다.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고, 나는 심장이 쫄깃해지는 짜릿한 스릴과 쾌감을 느꼈다.
다음날 점심시간 식당. 저 멀리 그가 내 쪽으로 앉아 식사 중이었다. 난 식사 후 옥상에서 전해 줄 생각으로 편지 스크롤을 환자복 상의 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 길이 때문에 약간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는 내가 식당에 들어설 때 그것을 보았을 것이다. 내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그도 자리에서 일어섰고 잔반을 버리고 식판을 반납하는 곳에서 내 뒤에 줄을 섰다. 순간 허전한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주머니에 꽂혀있던 편지가 없다. 아차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보는데, 편지가 그의 주머니에 꽂혀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어이가 없어 그를 쳐다보니 빙긋 웃고 만다.
난 ‘전직이 소매치기였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삼켜야 했다. (대신 편지에 물어봤다) 그는 간도 크게 백 명이 넘는 환자들이 들고나며 동시에 식사하는 이곳에서 ‘낚아채기’를 시전한 것이다. 그 후, 우리는 마치 놀이처럼 매일 같이 서로의 주머니를 털며 스릴을 즐겼다.
그의 편지는 좀 특별했다. 편지글 외에도 자작시나 좋은 글귀 좋은 노랫말 등과 함께 항상 컬러 프린트지의 뒷면에 예쁜 그림을 손수 그려 주었다. 그의 글도 좋았지만, 그의 그림도 좋았다. 언제나 그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에.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우린 서로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 갔고 그만큼 신뢰와 우정도 깊어갔다. 한 달이 지날 무렵 난 그에게 벗으로서의 단순한 우정이 아닌 애정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내 마음이 그를 단순한 친구가 아닌 남자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깨달았기에... 그래서 그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글이 아닌 행동으로.
그 후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마다 그의 맞은편이나 바로 옆자리에 붙어 앉기 시작했다. 눈을 마주 바라보며 대화하고, 곁에서 서로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글에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를 친구로 좋아했는데 요즘 들어 그 감정이 ‘연모’로 변해간다는 고백이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말했다. 난 그에게 굳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 역시 당신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고 있지만, 우리의 감정이 깊은 것이 아니므로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그냥 놔두면 흘러가는 것이고, 흘러갈 것이라 답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생각과 달리 쉬이 흘러가지도 사라지지도 않았고 조금씩 커 저만 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키워갔고, 다시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그의 퇴원을 얼마 남기지 않고 나는 2박 3일로 외박을 나왔다. 원래는 집으로 가 쉬었다 오는 계획이었지만 집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시내를 돌아다니다 아담한 호텔을 발견하고 충동적으로 체크인을 한 후, 방으로 올라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예요.”
-그래 외박 나왔지? 집에 오는 중이니?
“아뇨. 이번에는 집에 안 가고 그냥 시내에서 바람 좀 쐬고 친구네 집에서 쉬었다가 들어가려구요”
-아니 왜? 지난번 그 일 때문이니?
“네. 아빠도 오빠도 지금은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그래 알겠다. 누구랑 있을 거니?
나는 혼자 있을 생각이지만 말을 돌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매일 전화 드릴게요.”
-술 마시면 안 된다... 알겠지만 걱정이 되는구나. 에휴~
“조용히 있다 들어갈 거예요. 걱정 마세요. 또 전화할게요.”
-그래. 믿는다.
지난달 외박 때 노총각인 오빠와 아빠는 내게 한심하다는 듯 잔소리를 해 댔다.
‘서울유학에 미국 유학까지 보내서 교수 만들어 놨더니 기껏 고향으로 내려와 정신병원이냐?’라는 요지였고 나는 응수했다.
“서울 유학은 내가 뼈 빠지게 학비 벌면서 했구요. 미국 유학도 제 돈으로 갔어요. 교수도 제 능력으로 됐고요. 유세 그만 하세요. 저 좀 내버려 두세요.”
잔소리는 다툼으로 이어졌고 난 그길로 병원으로 돌아와 버렸었다.
그때 생각을 하자 마음이 심란해져서 밖으로 나와 시내를 돌아다녔다. 병원에 있을 때는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막상 나오면 뭘 먹어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마땅한 게 없다.
퇴원 날짜도 다가온다. 육 개월 예정으로 입원했으니 한 달 후면 다시 집으로 들어가 눈치를 보며 지내고, 일자리도 구해야 하고 머릿속이 복잡하다. 술 한 잔이 간절하다. 역시 중독자 인가보다. 답답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니 바로 술을 찾게 된다. 아직 입원 기간이 한 달 남았다. 치료 중 음주는 금물이라는 걸 잘 알지만, 오늘은 그냥 충동에 지기로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