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눈과 오로라가 쏟아지는 춥고 외로운 땅에 있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시간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콘서트홀에서 언젠가 누군가를 위해 연주할 날을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도 없는 관객석을 바라보며, 무대 위에서 홀로...
꿈은 분홍빛 하늘 아래의 몽환적인 땅에 있다.
재미있는걸 좋아하는 꿈은, 장미 정원이 달린 아름다운 궁전에서 온갖 종류의 장난감과 말하는 그림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
좋은 냄새가 나는, 달콤한 과자를 만들며...
운명은 별들이 훤히 보이는 신비로운 땅에 있다.
책임감이 큰 운명은, 별들을 볼 수 있는 천체탑에서 별자리표와 망원경을 이용해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고, 관찰하며...'
"주인님은... 서재에... 계십니다..."
비대하게 부풀어오른 머리를 가진 파랑새가 문을 열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문 너머에는 하늘 위로 끝없이 선반이 이어진 서재가 있었다. 천장이 보이지 않았다. 있는건지 의심까지 되었다.
"어머, 넌 누구니?"
서재의 한가운데에서 둥실둥실 떠다니는 탁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던 소녀가 말했다. 갈색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분홍색 물방울 무늬 잠옷을 입은 어여쁜 소녀였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네."
당신이 눈을 감은 순간 소녀는 의자에 앉은채 당신의 눈 앞에 둥실둥실 떠있었다.
"근데 그게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나... 너희는 아니?"
소녀가 탁자 위에 있는 무언가들을 보며 물었다. 고급스런 모자를 쓴 먼지 덩어리와 잿더미가 있었다.
"결혼식을 치르는 부부들의 기윈입니다, 그렇죠 재 자작?"
"그렇습니다 먼지 남작."
가룻더미들이 말했다.
"그렇구나~ 참 고마워라."
소녀는 후하고 바람을 불어 그들을 흩어지게 해버렸다. 잿더미와 먼지 더미가 마귀 뒤섞이며 바닥을 더럽혔다.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래... 기억 났어. 얼마 전에 여기에 왔던 꿈들이었지, 이상한 마법사의 말을 듣고 이 세계에서 사라지지 않을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었지."
소녀는 의자에서 내려와 서재의 상공으로 높이, 높이 올라갔다. 몇십분이 흘러서야 소녀는 책 한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가짜 거리의 결혼식'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큰 서재를 만들었는지 기억나니?"
그녀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넌 이야기를 좋아하거든."
거울 속의 소녀가 대답했다. 두 형상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 세계에서 넌 꿈의 신이었어. 아니, 꿈 그 자체였지."
"아... 그래!"
소녀가 손뼉을 쳤다.
"난 모두의 꿈의 이야기를 서재로 만들었지! 지루할 틈이 없었는데 요즘은 왜 이럴까?"
"여기는 네 세계가 아니거든. 이 세계의 지배자가 그쪽 세계의 널 배껴만든거야. 이 세계에선 꿈을 꿀 수가 없잖아."
"그래 맞아! 그래서 내 세계의 꿈들을 이 세계에 풀어놨어! 뒷이야기가 적힐 수 있게!"
소녀는 책을 펼치고 단숨에 읽었다. 그리곤 책을 덮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응? 넌 누구더라?"
소녀가 당신을 보며 말한다.
"주인님, 이 자는 당신을 찾아온 자다. 어떡할거냐?"
클라렛의 대답에 소녀는 당신에게 다가와 당신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당신을 바라볼수록 그녀의 흐릿한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그래, 그래!"
소녀는 박수를 치면서 서재의 동쪽 문을 열어주었다.
"저기로 가서 '운명'을 만나! 그러면 운명이 너를 '시간'한테 데려다 줄거야. 그 애를 죽여! 그러면 너의 소원을 들어줄게."
"거짓말이야. 쟤는 자기 추종자들한테도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어. 근데 다 미쳐버렸어."
소녀는 깐족대는 거울에게 다가갔다. 거울 속의 소녀는 소녀를 끊임없이 '거짓말쟁이'라며 비웃었다.
"시끄러워."
소녀는 거울을 깨트렸다. 조각조각 나눠진 거울들은 계속해서 '거짓말쟁이'라고 노래하듯이 소녀를 비웃었다. 깨진 거울만큼 많아진 목소리가 소녀를 비웃었다.
"얘 말 듣지마 미쳤거든."
소녀가 해맑게 말한다. 그녀는 클라렛을 바라본다.
"이건 뭐였지?"
"주인님의 고양이다. 불만 있냐?"
소녀는 까르르 웃었다.
"어서 가! 어서 가!"
동쪽 문의 손잡이가 손으로 변하더니 당신을 그 너머로 끌고간다. 클라렛은 당신을 따라간다.
"어디로 가더라?"
문이 닫히기 전 소녀는 중얼거렸다. 깨진 거울들은 여전히 그녀를 '거짓말쟁이'라며 비웃어댔다.
당신은 아직 서재를 못 벗어났다. 끝없는 책장이 벽이 된, 동쪽으로 쭉 이어진 복도를 걸어가다 보면 문이 보일것이고 그게 유일한 출구이다. 중앙 서재의 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다. 앞으로 걸어가는수밖에 없다.
당신이 한참을 가다보면 책을 책장에 집어넣으려고 안간힘을 내는 검은 옷의 마법사가 보인다.
"넌 누구냐?"
클라렛이 그에게 물었다. 검은 토끼구가 장식된 검은 고깔 모자에 검은 망토를 입은 키 큰 소년이었다. 모자의 한가운데엔 초승달이 박혀있었다.
"아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높으신 분의 거처인건 알지만 꼭 해야할 일이 있어서요."
"이곳에 그 책은 넣지 못한다. 여기 꽂힐 수 있는 책은 꿈뿐이다. 그것도 모르냐?"
마법사는 굉장히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과장되고 어색한 행동이었다.
"그럼 저 대신 이거 좀 간직해줄수 있습니까? 이 책은 꼭 묻혀야할 사악한 책이거든요."
마법사는 당신에게 억지로 책을 넘겨주었다.
"넌 대체 누구냐? 여기는 주인님의 서재이고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건 그분의 권속 뿐이다. 또한 이 자는 주인님의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너..."
마법사가 클라렛을 만졌다. 그러자 그녀는 종이쪼가리로 변하더니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방해꾼은 없을테니 이제 선택은 당신 몫이군요."
그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실패한다면 저 축생이 일을 대신했겠죠. 꿈의 수하들은 각자 목적이 있고, 다들 미쳤지만 주인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가진다는 공통점이 있거든요. 자, 시간을 죽일지, 혹은 살려둘지...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직접 선택하길 바라겠습니다. '관찰자님'."
그 말을 끝으로 마법사는 영문 모를 웃음과 함께 그 자리에서 알록달록하고 반짝거리는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마법사가 사라진 자리에는 별문양과 달문양이 하얗게 새겨진 잉크색 카드만이 남아있었다.
카드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검은 달 마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