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하얀 세상이 있었어요.
그 세상은 물도, 바람도, 심지어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는 심심한 세상이었어요.
한 줌의 모래조차 만질 수 없는 지루한 세상, 물론 정말 아무것도 없는 세상은 아니었답니다.
세상에 있는 유일한 존재, 유일한 생명.
하얀 세상엔 나무 한 그루가 살고 있었어요.
나무는 너무 너무 외로웠어요.
하얀 세상엔 자기 혼자밖에 없었기 때문이에요.
나무는 친구를 원했어요.
대화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같이 놀아줄 누군가를, 함께 있어줄 누군가를 원했어요.
친구를 원했던 나무는 하얀 세상 밖의 다른 세상들을 지켜봤어요.
너무나도 아름다운 세상들이었어요.
하얀 세상의 밖은, 온갖 색들이 한데 모여 아름다운 것들을 이루었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꿈이라는걸 꾸고 있었어요. 거기다 다른 세상들엔 시간이라는게 있어서 조금만 기다리면 세상이 변하는걸 지켜볼 수 있었어요.
나무는 밖의 세상들이 너무 너무 부러웠어요.
자기도 밖으로 나가 색깔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과 놀고 싶었지만 하얀 세상에 깊게 뿌리를 내린 나무는 그럴 수가 없었어요.
친구를 원한 나무는, 자기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게 싫었던 나무는, 다른 세상들에서 본 것들로 자신의 세상을 꾸미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하얀 세상엔 색깔이 채워졌어요.
나무는 너무 너무 행복했어요."
당신은 어딘가를 걷고 있다.
꿈 속을 거닐듯 몽롱한 느낌이 당신의 온몸을 감싸고 있다. 당신은 한 걸음, 한 걸음씩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물 속을 걷는듯한 답답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당신의 오감은 흐릿해져 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감각, 온몸으로 느끼는 온기, 당신은 그런 것들을 잃어버린채 계속, 계속 어딘가를 걷고만 있다.
이성조차 흐릿해져 있는 당신은 자신이 지금 걷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 자신이 걸음을 딛고 있다는걸 깨닫게 된다면 서서히 하나씩, 흐릿해져 있던 것들이 돌아올 것이다. 자신의 이름, 자신의 정체, 그리고 오감과 시간에 대한 개념, 살아온 생에 대한 기억. 그 모든 것을 기억해냈을 때 당신은 비로소 걸음을 멈출 것이다.
그러자 안개가 걷히듯, 당신이 걷고 있던 어딘지 모를 어딘가에 안개가 깔리기 시작한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당신의 눈엔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안개가 아니었다.
당신은 그저 아무것도 없던 시야가 무엇인가로 채워지는걸 지켜볼 것이다. 깊은 바다의 물결처럼 흔들리는 푸른색, 청록색, 보라색, 온갖 색들이 마구 뒤엉키며 바닥과 하늘을 채워나갔다.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듯 마침내 공간이 모양을 갖추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우주와 뒤섞인 하늘. 바닥은 평범한 대리석과 벽돌의 길이었지만 중력이 뒤엉킨 이 세계에선 가끔 하나씩 조각 조각 공중으로 떠오르는 때가 보일 것이다. 하늘엔 거대한 시계나 톱니바퀴, 침대, 궤종시계같은 것들이 불규칙적으로 떠다니고 있었고 건물의 윤곽과 그림자들이 이곳 저곳을 매우고 있었다.
당신이 눈 앞에 나타난 정체 모를 것들에 대해 생각할 틈새도 없이, 당신은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당신이 먼저 다가가거나, 불길한 예감을 느껴서 달아나거나 할 필요는 없다. 정확히는, 할 수 없다. 그 사람은 당신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눈앞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우주의 한 켠을 배어낸듯 별이 총총히 빛나는 검푸른 망토를 뒤집어쓴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인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새까만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당신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관찰자님."
무관심한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는 무엇이든 감싸줄 것처럼 포근하고 다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