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아.”
게일은 간신히 목소리를 낸다. 그 목소리가 한심할 정도로 떨리고 있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레아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 가슴이 아려온다. 어째서 저렇게 나를 못 본 척 하는 걸까, 아니 무시를 하는 걸까. 게일은 다시 입을 열었다가, 닫는다. 겁이 난다. 또 다시 무시당한다면 견디지 못 할 것만 같다.
문득, 워치프는 어이가 없어져서 웃기 시작한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무시당할까봐 무서워? 지나가던 개가 다 웃겠구만. 천하의 워치프가 말 씹히는 게 무서워서 절절 대는 꼴이라니.
갑작스런 웃음에 드렉스는 미친 사람 쳐다보듯 워치프를 바라본다. 웃음이 잦아들자 워치프는 목소리를 크게 한다.
“레아! 나다, 게일 블랙스미스다. 왜 자꾸 나를 안 보려드는 거냐?”
하지만 여인은 매정할 정도로 눈빛 한 번 주지 않는다. 뒤섞인 여러 감정이 울분이 되어 워치프의 가슴을 채운다.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것을 보며 드렉스는 그를 막을 준비를 한다.
“...칠 년이잖아. 자그마치 칠 년만이잖아! 그동안 어디서 지냈던 거야? 왜 날 자꾸 무시하는 거야?!”
“워치프. 레아는 지금 매우 피곤한 상태입니다. 당신들의 추격 덕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 했어요.”
결국 드렉스가 레아 대신 입을 연다. 하지만 워치프에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직 저 야속한 여인의 모습만이 뇌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내 스스로 답을 찾는다. 그의 입에서 짧고 고통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내게 실망한 거냐? 난폭하고 잔혹하게 변해버린 내 모습에 실망한 거냐? 하지만, 떠난 건 너였잖아!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잖아!”
워치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를 주시하고 있던 드렉스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워치프. 그만 하세요!”
워치프는 사나운 눈으로 드렉스를 노려본다. 드렉스는 말없이 검을 검집에서 뽑을 준비를 한다. 한참을 성난 숨을 들이키던 드렉스는 몸을 돌려 마부석으로 나간다.
“꺼져. 내가 하겠다.”
“예. 워치프.”
히트맨은 고삐를 넘겨주고 옆으로 비켜 앉는다. 마차는 난폭하게 속도를 낸다. 그제서야 레아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워치프의 등을 바라본다. 넓지만 쓸쓸한 그 등이 거칠게 고삐를 쥐고 있다.
겁에 질려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것이 아니다. 저 자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감정에서 이미 공포는 사라졌다. 다만 너무나 미안해서 눈을 마주칠 용기를 내지 못 했던 것이다. 저 남자의 목소리와 행동에서 느껴지는 그리움과 원망과 기쁨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리고 자신을 그걸 이용하고 있기에.
문득, 레아는 한 쪽 구석에 앉아 있는 브레이커와 눈이 마주친다. 아니, 후드의 아래 그림자속 눈과 마주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레아는 낯선 곳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깜짝 놀란 레아는 뒤를 돌아본다. 거대한 저택의 홀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대리석 바닥으로 되어 있는 긴 홀의 양 벽에는 창문이 무수히 달려 있고 높은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반짝인다. 홀의 끝, 양 쪽으로 갈라지는 거대한 계단의 사이에는 레아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홀의 오른쪽 절반은 창밖에서 부드럽게 비치는 아침 햇살을 받아 윤기 나게 반짝이고, 왼쪽 절반은 저녁노을을 받으며 불타고 있다. 말 그대로, 화염에 휩싸여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레아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이 곳은, 그녀의 집. 그녀의 고향. 아버지와 함께 살던, 사랑하던 이와 함께 살던 그녀의 안식처. 안식처였던 곳.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아.”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레아는 황급히 뒤를 돌아본다. 후드를 뒤집어 쓴 인영, 브레이커가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다. 레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브레이커의 뒤를 노려본다. 지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두운 예배당엔 촛불만이 몇 개 밝혀져 있다. 예배당의 가장 안 쪽에는 레아의 얼굴을 한 조각상이 서 있다.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검을 든 조각상은 앞으로 내민 반대쪽 손에 천칭을 들고 있다.
“우리의 두 번째 구세주, 죽음에서 세 번이나 돌아온 데우스의 대적자시여.”
브레이커는 레아를 향해 무릎 꿇는다.
“저는 당신의 종. 제가 모은 이들은 당신의 종. 원하시는 바를 말씀하시옵소서. 이 한 목숨 바쳐 당신의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대답을 하기도 전에, 레아는 다시 마차에 앉아 있다. 거친 숨을 들이키며 레아는 몸을 앞으로 숙인다.
“레아, 괜찮으십니까?”
드렉스가 황급히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온다. 레아는 간신히 고개만을 끄덕이며 눈으로 브레이커를 찾는다. 하지만 그늘에 가려진 그 얼굴에선 아무 것도 읽어낼 수가 없다.
그것은 레아의 인생 최악의 마차여행이었다. 덴이 깨어났을 때 작게 상황을 설명해준 것 외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은 불편한 여행이었으며, 위치프가 가끔 레아를 뒤돌아보는 것 말고는 아무도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비인간적인 여행이었으며, 그렇기에 며칠이나 피로가 쌓였지만 단 일 분도 눈을 붙일 수 없었던 살벌한 여행이었다. 그렇기에 정오 무렵 하얀 성산의 발치에 도달했을 때, 레아는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마차는 일반인들이 출입하는 관문이 아니라 상크투스교의 고위 공직자들이 이용하는 거대한 석문으로 향한다. 경비를 서고 있던 수도사들이 상크투스의 문장이 찍히지 않은 마차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손으로 멈춰 세운다. 하지만 워치프는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멈추십시오! 멈추, 멈추십시오!”
수도사들은 말에 치이지 않기 위해 검문을 포기하고 옆으로 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낙법으로 재빨리 자세를 고쳐 잡은 수도사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곧장 마차를 쫓는다. 결국 마차가 석문에 도달할 때쯤 마차의 두에는 두 다스도 넘는 수도사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석문에 도달하여 워치프는 마차를 멈춘다. 쫓아오던 수도사들은 재빨리 마차를 포위하며 양 손에 꼬나 쥔 봉에 아니마를 주입한다.
“열어라.”
긴장의 기색조차 느껴지지 않는 워치프의 목소리에 오히려 수도사들이 김이 빠진다. 하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봉과 마음을 다잡는다. 워치프는 마부석에서 내려오며 검을 뽑아든다.
충돌의 직전, 브레이커가 마부석 쪽으로 몸을 빼며 입을 연다.
“다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느긋한 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린 브레이커는 품에서 듀오데카스의 문장을 꺼낸다. 왕관을 중심으로 열두 자루의 무구가 돋아난 형태의 문장이다.
“듀오데카스입니다. 길을 비켜주시겠습니까.”
석문의 관리를 맡고 있던 조장이 앞으로 걸어 나와 그 문장을 확인한다. 그리고 불만스러운 눈으로 워치프를 흘긴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듀오데카스 분들이라 하여도 이렇게 막무가내로는...”
조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 한다. 워치프가 그의 양 볼을 한 손으로 거칠게 쥐었기 때문이다.
“막무가내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한다. 닥치고 열어라.”
그리고 거칠게 조장을 밀어낸다. 상급자의 굴욕을 본 다른 수도사들의 눈에 한층 강한 적개심이 실린다. 조장은 부글거리는 속을 간신히 누르며 석문을 열라는 신호를 내린다.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성스러운 산의 꼭대기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상크투스는 데우스를 모시는 상크투스교의 교도이다. 꼭대기를 감싸는 고리 형태, 혹은 도넛 형태로 지어진 도시는 물의 신인 데우스가 꼭대기에서부터 흘려보내는 물을 다섯 갈래로 나눠 대륙에 흐르게 한다. 그렇기에 상크투스의 반은 언제나 물에 잠겨 있고, 물의 도시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상크투스에는 약 이만 여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상크투스는 수도사들이 수행하는 수도지구와 주민들이 사는 거주지구, 그리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상업지구로 나뉘어 있으며 외부인에게 공개된 지역은 상업지구 뿐이다.
건물들은 모두 하얀 돌로 지어져 있는데, 지붕들이 모두 곡선의 형태를 띠고 있어 블록 전체의 지붕을 이어서 본다면 마치 물이 흘러가는 듯한 모양새를 띤다. 대륙으로 흐르는 지류의 낙수 지점에 하나씩 지어진 다섯 대성당의 지붕이 돔 형태인 것도 물의 신인 데우스를 따르는 건축형식이다. 물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도시의 중앙, 폭포를 상징하는 건물을 만날 수 있다. 타워라고 불리는 일곱 층짜리 건물은 지리적일 뿐 아니라 행정적으로도 상크투스의 핵심이다.
일행은 마구간에 마차를 대충 맡겨 놓는다.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워치프가 레아에게 다가온다. 드렉스가 그 앞을 막아선다. 워치프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돋는다. 드렉스는 그것을 보면서 조심스레 검의 손잡이를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