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프...!”
드렉스는 덴을 대신 들쳐 메고 서둘러 레아를 일으킨다.
“서둘러요, 어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부축을 받아 간신히 일어난 레아는 다시 속도를 내려 한다.
“레아! 어디냐!”
하지만 뒤에서부터 다시 한 번 닥쳐오는 거대한 압박에 레아는 발을 헛디딘다. 드렉스는 재빨리 뒤를 살핀다.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씩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어째서 도망가는 거냐, 레아!”
레아는 이를 악물고 발에 아니마를 싣는다. 하지만 스스로도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음을 느낀다. 아니마의 운용은 정신 집중이 생명, 과도한 압박에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의 추격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 이것이 듀오데카스인가, 레아는 식은땀을 흘린다.
“레아! 나다! 게일이란 말이다!”
덥썩. 레아는 팔목을 잡힌다. 황급히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아, 아아, 착각이구나. 안도와 공포가 동시에 휘몰아친다. 목소리만으로 이 정도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니.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월광, 그 아래 음산한 빛으로 빛나는 나무들. 야수처럼 자신들을 쫓는 괴물과 계속해서 자신을 지켜보는 파수견. 레아의 공포와 피로는 점점 극에 달한다. 워치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릴 때마다 레아의 속도는 눈에 띄게 떨어진다. 입술이 조금씩 떨린다. 떨림은 전신을 돌아 다리마저 떨게 만든다. 결국 레아는 풀썩 주저앉고 만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드렉스. 하지만 더 이상 아니마를 운용하지 못 하겠어요.”
조금씩 기어와 어느샌가 정신을 집어삼켜버린 공포에 레아는 반쯤 정신을 놔버린 것 같다. 드렉스는 입술을 물며 검을 빼들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에 대항해 선다.
외침이 멈춘다. 온 숲을 전율시키던 사나운 기운이 가라앉는다. 레아는 침을 삼키고 두렵게 떨리는 눈을 들어 확인한다. 두 쌍의 발이 드렉스의 앞에 서 있음을. 신발을 신고 있는 그 발이, 무언가 너무 인간적이라 레아는 갑작스런 안도감에 휩싸인다. 얼어 있던 몸이 조금씩 녹기 시작한다.
“...레아.”
한 쌍의 발이 급히 다가오는 것을 드렉스가 막아선다.
“...뭐 하자는 거냐, 드레치스. 뒈지고 싶은 거냐?”
드렉스는 입술을 핥는다. 상황이 굉장히 안 좋다, 저 쪽은 듀오데카스만 세 명. 그에 반해 이 쪽은 현재 전력이 될 사람은 드렉스 자신 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임무를 실패해도 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무언가 꾀를 내어야 한다.
워치프는 검집에서 검을 꺼내든다. 그는 말을 두 번 하는 사람이 아니다. 워치프는 아니마를 이용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그 속도를 이용해 그대로 드렉스의 정수리를 내려찍는다. 드렉스는 그것을 몸을 틀어 검으로 흘리면서 반대쪽 손으로 워치프의 몸통을 노린다. 워치프는 그것을 팔꿈치를 당겨서 막고 검을 든 반대편 주먹으로 드렉스의 얼굴을 노린다. 수차례의 공방 끝에 둘은 거리를 벌린다.
모든 공격이 가해질 때와 방어될 때 해당 부위에 순간적으로 아니마 아머를 둘렀다가 해제한다. 티끌만큼의 낭비도 없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아니마 운용이다. 그것만으로 워치프와 드렉스는 상대의 실력을 꿰뚫어 본다. 워치프는 속으로 놀란다.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었던가? 그의 몸이 뜨거워진다.
실로 오랜만이다. 이렇게까지 합을 맞추는 상대는. 이 녀석과의 싸움은 즐길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워치프의 눈은 여전히 쓰러진 채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레아를 향한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워치프는 검을 고쳐 쥐고 돌진 자세를 취한다.
“자, 잠시만요, 워치프!”
드렉스가 양 손을 들어 그의 돌진을 멈춘다.
“뭐냐 드렉스. 검의 대화에 말은 필요 없을 텐데.”
하하하, 드렉스는 짧게 웃는다. 하지만 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간다. 만일 워치프와 싸워서 이긴다한들 이 곳에는 두 명의 듀오데카스가 더 있다. 그것도 워치프와 함께 온 자는 바로 그 악명 높은 브레이커. 검사로써는 상대하기 여단 까다로운 자가 아니다. 게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격을 가하는 히트맨까지. 저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워치프를 상대하는 것보다도 승률이 낮다. 적어도 워치프는 다른 기술은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검사니까. 그러니 여기서는 싸움을 피해야 한다.
드렉스는 도박을 하기로 한다.
“상크투스로 갑시다, 워치프.”
워치프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내가 뭣하러.”
“만일 우리를 플라눔으로 끌고 간다면 우리는 끝까지 저항할 것입니다.”
“마음대로 해라.”
워치프는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드렉스는 황급히 말을 덧붙인다.
“우리, 라고 했습니다. 저 혼자가 아니에요.”
그 말에 워치프는 우뚝 발을 멈춘다. 드렉스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아무리 당신과 브레이커가 강하다고 해도, 어터 임페로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겠습니까?”
워치프는 떨리는 눈으로 레아를 바라본다. 하지만 레아는 여전히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레아가. 너를 위해 나와 맞서 싸울 거라는 이야기냐?”
드렉스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뻔뻔하게 연기를 이어간다.
“물론입니다. 눈치 못 채셨습니까, 레아가 지금 당신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레아는 오직 나를 통해서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레아와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다면, 할 이야기가 있다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을 겁니다. 상크투스로 갑시다.”
워치프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숲 속에서 한 남성이 도약해 워치프의 곁에 선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얼굴, 히트맨이다.
“속지 마십시오, 워치프. 저 여자는 레아가 아닙니다.”
“...그건 또 뭔 개소리야?! 니가 레아라고 전서구를 날렸잖아!”
“그게...”
히트맨은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어물거린다. 워치프가 사나운 눈으로 드렉스를 돌아본다.
“얼굴을 먼저 보여라. 레아가 맞는지 아닌지 확인을 해야겠으니.”
드렉스는 레아를 돌아본다. 공포와 떨림을 모두 몰아낸 레아는 드렉스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인다. 소매에서 빠져나온 하얀 손이 천천히 후드를 잡아 뒤로 넘긴다. 그리고 레아는 고개를 똑바로 들어 워치프를 마주 본다. 드렉스보다 약간 마르고 키가 큰 체형, 삭발하다시피 짧게 자른 머리에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세 줄의 긴 흉터. 워치프, 게일 블랙스미스의 형태를 눈에 담는다.
각오하고 있었건만, 워치프는 형편없이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 한다. 부축하려는 히트맨을 손을 들어 막은 워치프는 그대로 한참을 레아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떨리는 입술을 애써 억누르며, 아무 말 없이 상크투스의 방향으로 발을 돌린다.
일행은 아무 말 없이 워치프를 따라 대로로 나간다. 워치프는 멀리서 달려오는 짐마차를 세운다. 상인으로 보이는 부자가 긴장한 미소를 띠며 묻는다.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나요?”
“내려.”
워치프의 짧은 대답에 상인의 표정이 굳는다. 상인의 손이 고삐를 꽉 쥐자 워치프는 그의 멱살을 잡아 강제로 끌어내린다.
“나, 나으리! 아이고 나으리! 안 됩니다요! 여기에 제 전 재산이 걸려 있습니다요!”
상인은 필사적으로 워치프에게 매달린다. 하지만 안면에 주먹을 맞고는 멀리 날아가 기절한다.
“아버지!” 곁에 앉아있던 아들이 황급히 내려 아버지에게 달려간다.
“브레이커, 운전해라.”
워치프는 거칠게 내뱉고는 뒷칸에 올라타 상자들을 전부 밖으로 던진다. 소년은 재빨리 그 상자들을 도로에서 꺼내 아버지의 곁에 쌓는다. 드렉스는 입술이 마르는 걸 느낀다.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상황이 되지 않는다.
드렉스는 짐칸에 올라탄다. 워치프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레아를 앉히고 그 옆에 덴을 뉘인다. 자신은 레아의 맞은편에 앉는다. 일종의 인간 바리케이드다. 워치프는 짐칸의 안 쪽, 하나 남겨둔 상자에 걸터앉는다.
“히트맨, 운전을 부탁드립니다.”
브레이커도 짐칸에 올라타 드렉스가 앉은 벽의 안쪽에 앉는다. 잠시 뒤, 마차가 천천히 움직인다. 레아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또렷한 시선들을 느낄 수 있다.
워치프는, 게일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레아를 바라본다. 후드코트가 그려내는 그 옆태를 멍하니 바라본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꿈인가? 꿈일까? 말을 타고 레티샤로 달려오면서도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기대감에 언제부턴가 그 숲에 레아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앞에 두자 다시 믿을 수가 없다. 저게 정말로 레아일까? 물론 아까 본 그 얼굴은 분명 레아가 맞다. 하지만 레아는, 레아는 분명...
칠 년 전, 처형식이 떠오른다. 잊으려 할수록 오히려 심장과 뇌리에 더욱 선명하게 박히던 그 끔찍한 기억. 거기서 게일은 분명히 봤다. 레아의 목이 달아나는 것을. 죽음에서 돌아온 것인가? 하지만, 어떻게? 어터 임페로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칠 년의 시간이 걸렸는가. 그리고 어째서,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것인가.
“...레아.”
게일은 간신히 목소리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