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수는 이미 시위를 당기고 있다.
“레아!”
드렉스는 레아를 향해 손을 뻗으며 남은 아니마를 모두 쥐어짜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헛된 일임을 직감한다. 이 아니마로 무엇을 하던지 간에, 저 화살은 막을 수 없다.
그 때 레아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한다.
펄럭, 레아는 몸을 돌리며 입고 있던 후드 코트를 벗어 넓게 펼친다. 넓은 품이 그대로 열리며 바람의 저항을 받아 코트는 그대로 거대한 차양막이 된다. 시야가 막힌 궁수의 손이 잠시 멈칫한다.
레아는 펄럭이는 코트자락 사이로 종탑을 흘낏 올려다본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진다. 천천히, 주인 잃은 옷자락만이 바닥에 떨어진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드렉스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는 레아를 찾아 고개를 사방으로 돌린다.
앞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하늘을 가리키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재빨리 그 위로 시선을 돌린다. 그 종탑 위에는, 피로 범벅된 레아가 궁수의 시체를 품에 안고 있다.
그 얼굴, 놀랍도록 아름답고 경탄할만큼 단아한 그 얼굴. 그래, 드렉스는 저 얼굴을 알고 있다. 수많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드렉스는 그녀를 부른다.
“...레아.”
드렉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나온다.
이렇게나 멍청할 수가. 드렉스는 자신의 바보 같음에 웃음을 멈추지 못 한다. 그녀가 얼었다고...?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는 얼 것이라고? 나는 벌써 레아가 누군지를 잊은 건가?
저건 레아다. 혼자의 몸으로 수천의 적을 죽여 대영웅이라는 전무후무한 칭호를 받은 여인이자,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왕의 목숨을 구하고 패잔국의 포로로서 처형당하여 시신조차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 한 전설의 영웅이다.
그런 여인을 지킨다니, 짐이나 안 되었으면 다행이지.
드렉스는 웃음을 멈추지 못 한다.
예언은 옳았다. 이 곳에서 석 달이 넘게 잠복하고 있던 보람이 있었다.
드렉스는 레아를 올려다본다. 드높은 종탑에서 적의 피로 온 몸을 적신 그녀의 모습은, 그 날의 그녀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레아는 코트를 넓게 펼쳐 궁수의 시선을 차단한다. 그리고 나부끼는 코트의 자락 사이로 종탑 위 궁수의 위치를 확인한다.
잡았다, 레아는 자신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 한다. 아니마를 집중해 궁수의 뒤로 몸을 옮긴다. 궁수는 그녀가 거리를 건너뛰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 한 채 아래를 주시하고 있다. 이내 그 아래에 아무도 없음을 눈치 채지만, 이미 레아에게 목을 잡힌 후다.
“움직이면 바로 죽이겠다.”
궁수의 목을 감싼 두 손 아래로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레아는 양 손의 아니마를 궁수의 몸에 주입해 그의 아니마 운용을 차단한다.
“몇 가지 질문이 있다. 먼저 무기를 버려라.”
궁수는 활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하지만 여전히 한 손에는 화살을 쥐고 있다.
“화살도 버려라.”
천천히, 궁수는 양 손을 올린다. 그리고 손에 힘을 풀어 화살이 미끄러지도록 놔둔다. 하지만 화살이 반쯤 미끄러졌을 때, 궁수는 화살을 움켜쥐며 빠르게 몸을 돌려 레아의 목을 찔러든다. 레아는 재빨리 손에 아니마를 주입한다. 하지만 궁수의 팔이 더 빨랐다.
찰나의 순간, 궁수의 눈이 레아의 눈과 마주친다. 궁수의 눈이 커다래진다. 궁수는 화살을 든 주먹을 황급히 되당긴다. 화살은 허공을 가르고 길을 잃은 주먹의 힘은 몸의 균형을 무너트린다. 레아의 손이 궁수의 목에 깊숙이 파고든다. 레아는 황급히 손을 떼지만, 이미 궁수의 목은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은 후다.
비틀거리는 궁수의 발이 허벅지 높이의 종탑 벽에 부딪힌다. 아래로 떨어지려는 궁수의 몸을 레아가 간신히 붙든다. 궁수는 반밖에 남지 않은 목으로 간신히 헐떡인다. 레아는 궁수를 끌어당겨 품에 안은 채 피가 나오는 그의 목을 누른다. 하지만 이미 그 정도로 어찌 될 수준의 상처가 아니다.
“정말로, 돌아오셨군요.”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궁수는 간신히 말을 잇는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꿀렁이는 피가 레아의 어깨 위로 쏟아진다.
“말하지 말아요. 상처가 더 악화되니까.”
궁수는 창백해진 손을 간신히 들어, 레아의 얼굴을 더듬거린다. 고개를 들어 눈으로 확인할 근육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거친 숨을 내쉰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레아님. 당신을.”
궁수의 눈가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흐른다. 그는 파란색으로 빳빳해진 입술을 억지로 움직인다.
“제 화살, 보셨습니까?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열심히 수련했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잇는 제가, 자, 자랑스럽습니까?”
레아는 궁수를 내려다본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남자가 자신의 품 안에서 죽어간다. 그리고 그녀는 이 남자가 원하는 대답을 알고 있다. 그녀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린다.
레아는 눈을 꾹 감았다가 천천히 뜬다. 그리고 그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푸근한 목소리로 그를 어루만져준다.
“자랑스러워. 고마워. 계속 기억해 줘서.”
궁수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레아는 천천히 궁수의 시신을 내려놓는다. 편안한 그의 얼굴과 달리 레아의 얼굴에 더 이상 인자한 미소는 남아있지 않다. 레아는 입술을 꼭 문 채, 곧 자신에게 닥칠 감정과 싸울 준비를 한다.
어두운 것이 바닥으로부터 뿌리를 뻗어 그녀를 옭아맨다. 자신을 나락으로 끌어당기는 그 감정에, 레아는 괴로운 신음을 토해낸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냐고? 아니, 아니다. 그녀는 살인에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순탄한 삶을 살지 못 했다. 그렇다면 거짓말에 대한 죄악감이냐고? 그 또한 아니다. 그녀는 거짓말에 죄악감을 느낄 정도로 순수한 삶을 살지 못 했다.
다급한 발자국 소리에 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드렉스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그녀를 내려다본다.
지겨운 눈빛이다.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과의 추억을 보는 멍한 눈빛.
“미안하지만.”
레아는 씁쓸히 말한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잠시 후 들이닥친 수비대에게 드렉스는 킹즈세븐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을 보여준 뒤 시신을 인계한다. 성으로 모시겠다는 수비대의 제안을 거절하며 드렉스는 레아와 함께 여관으로 향한다.
“그러니까... 대영웅과 놀랍도록 닮았을 뿐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라는 거네요?”
“그런 거죠.”
으흠, 드렉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레아가 의아한 눈으로 돌아본다.
“그렇게 쉽게 믿는 거에요?”
“물론이죠. 아름다움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사실 믿고 있지 않다. 닮은 수준이 아니라 쌍둥이라고해도 믿을 정도인데, 생판 남이라고? 차라리 숨겨진 조카라고 말하는 편이 믿기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라도 믿고 있다는 신뢰를 심어 줘서 이그니스의 수도로 데려가야만 한다.
레아는 드렉스를 의심스런 눈으로 보더니 이내 고개를 앞으로 돌린다. 후드 아래로 보이는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쳐져 있다. 드렉스가 조심스레 묻는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이때까지 제 얼굴에서 대영웅을 본 사람들은 다들 괴로울 정도로 제 말을 안 믿어줬거든요. 드렉스 씨처럼 선뜻 믿어주는 분을 본 건 처음이라 기분이 좋네요.”
드렉스는 찌르는 통증을 느끼며 가슴을 움켜쥔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양심... 아니, 위장이 좀 아프네요. 제가 위장이 예민해서.”
“젊을 때 건강 안 챙겨 놓으셨나 봐요?”
장난스런 레아의 대꾸에 드렉스는 괜히 심통이 나서 툴툴거린다.
“저 아직 젊은데요.”
“몇 살이신데요?”
“올해로 앞자리가 3이 됐어요.”
“헤에... 보기보단 젊으시네요.”
드렉스는 상처 받는다.
“그리고 서른하나면 제 수비범위도 넘었으니 좀 더 편하게 대해도 되겠네요.”
그 상처에 소금이 뿌려진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요! 그런 편견을 깨야 세상이 평화롭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구요!”
“숫자에 불과하더라도 두 자릿수 차이는 심했잖아요?”
“두자릿수라뇨? 레아도 거의 서른이잖아요.”
“제가요? 저 이제 스물인데요. 제가 언제 제 나이를 말한 적이 있...”
레아의 입꼬리가 천천히 일자로 변한다. 아차. 대영웅의 나이로 계산을 해버렸다.
“...안 믿었구나.”
드렉스는 당황해서 레아가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 한다.
“믿는다더니 거짓말이었구나?”
“아니, 아니요! 믿었어요!”
“그럼 그 나이 계산은 어디서 나온 건데?”
“그, 그게, 뭐냐. 아, 그래! 얼굴이 나이 들어 보여서 그랬어요. 얼굴이. 하하하하.”
드렉스는 자기가 덫을 피하려다 사자의 꼬리를 밟았다는 사실을 한동안 깨닫지 못 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레아는 이미 싸늘한 눈빛조차 거두고 발을 돌린 뒤다.
“어... 레아? 노, 농담이에요, 농담. 하하하하... 저기, 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