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여느 때처럼 덴이 레아의 치료를 끝내고 동굴 벽에 머리를 기대 쉬고 있는 참이었다.
“나 이제 떠나.”
갑작스런 레아의 선언에 덴은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 한다.
“...숲을 떠나신다구요?”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아. 그런 덴은 레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정면으로 향한다. 아쉬움과 섭섭함, 여러 가지 감정이 그를 토닥인다.
“...그렇군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말이 아닌 듯한 위화감이 든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의 감정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어디로 갈 거에요?”
“음... 일단 대도시인 레티샤를 가볼까. 혹시 레티샤 가봤어?”
“아뇨. 전 아버지랑 이 마을에 정착한 뒤로는 거의 이 마을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걸요. 하지만... 글쎄요.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라던데요.”
거짓말이다. 마을 여자들은 입만 열면 레티샤 타령을 할 정도로 크고 아름다운 도시다.
“그래? 그럼 어디를 갈까나...”
...난 대체 뭘 바라고 있는 거지? 덴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에 빠져든다.
“아, 어제 라울이 여기 왔었어.”
덴은 깜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운다.
“라울요? 라울이 어떻게 여기를...”
레아는 이 또한 별 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뭐 적당히 혼내서 돌려보냈어. 나에 대해서 다시는 언급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너를 앞으로 절대 괴롭히지 않겠다는 아니마 맹세도 받아냈지.”
아니마 맹세는 아니마를 이용해 맹세를 세우는 것이지만, 그렇게 큰 효과는 없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빠르게 맹세의 효과가 사라진다. 레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찬다.
“쯧, 뒤탈을 없애기 위해서는 역시 죽였어야 했는데 난 너무 착해 빠졌다니까.
하하하, 덴은 뒤엣 말은 단순한 농담으로 넘겨 버린다.
“고마워요, 레아. 그렇게까지 해주다니.”
“밀린 왕진비라고 생각해.”
이렇게나 선하고 고마운 사람을, 이렇게나 강인하고 특별한 사람을, 주제도 모르고 붙잡으려 들다니.
“...레티샤로 가보세요.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분명 레티샤가 도움이 될 거에요. 사람도 물건도 몰리는 곳이니까요.”
레아는 고개를 갸웃한다.
“아까는 별로라더니?”
“이 주변에 레티샤 말고 목적지로 세울만한 도시가 어디 있나요.”
덴은 멋쩍은 웃음으로 모순되는 말을 무마한다.
”그러고보니 이제 영웅절 주기잖아요. 영웅절하면 레티샤죠.”
“아... 영웅절.”
레아는 탐탁치 않다는 듯 말을 흐리며 고개를 숙인다.
“축제를 싫어하시나요?”
“아니, 그보다는... 글쎄. 영웅절을 별로 안 좋아해서.”
덴은 눈썹에 물음표를 그린다. 영웅절은 명예와 충성을 지키며 죽어간 영웅들을 추모하고 기리는 행사로 이그니스 연합에서 연합맹주의 탄신일보다 크게 치는 행사다. 그렇기에 이그니스 연합에서 크고 자란 사람이라면 영웅절을 싫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웅절에서 으뜸으로 치는 영웅들은 칠 년 전 대륙전쟁에서 죽어간 영웅들이며 그 중에서도 대영웅 레아를 주인공으로 세운다.
“레아의 이름은 대영웅의 이름에서 따 온 거 아니었어요?”
“아니. 나는 태어날 때부터 레아였어.”
“그럼 우연히 이름이 겹친 거에요? 좋겠네요.”
레아는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발끝으로 낙서를 한다.
“뭐... 그렇지.”
갑작스레 내려앉은 레아의 분위기에 덴은 의아함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낀다. 내가 뭔가 말실수를 한 건가? 덴이 어쩔 줄 몰라 불편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레아가 먼저 입을 연다.
“넌 계속 아보레오에 살 거야?”
“...같이 떠나자는 말씀인가요?”
뒤에서 쩔쩔 메고 있던 덴은, 천천히 그 말을 이해하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기대감과 기쁨에 가득 차 되묻는다.
“응?”
하지만 레아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덴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사래를 친다.
“아아, 그런 뜻은 아니야. 일행을 늘릴 계획도 없고, 무엇보다 너무 위험한 길이라서.”
덴은 실망감을 채 감추지도 못 하고 애써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죠. 하프 임페로의 여행이니 분명 이런저런 위험한 일들이 많이 닥치겠죠.”
“물론 너는 쿼터 임페로고 치료도 할 줄 알고 사냥에 해체에 요리까지 할 줄 아니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데려갈 수는 없지. ...잠깐. 말하고 보니 굉장히 아쉬운 인재인데?”
레아의 농담에 따라 웃으면서도, 덴은 스스로가 더할 나위 없이 풀이 죽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하려던 말은, 계속 여기서 이런 푸대접을 받으면서 살 거냐는 거야. 솔직히 너 정도의 의술이면 적어도 의사 조수로는 들어갈 수 있잖아?”
“...그런가요?”
의사는 굉장히 귀한 직업이다. 칠 년 전의 큰 전쟁에서 군의관들이 많이 죽어 더욱 귀해졌다. 마을 치고는 꽤 큰 규모의 아보레오 마을도 아프면 냅두거나 민간요법으로 처방해야 할 정도로 근방에 의원은커녕 의사 하나 없다. 그렇기에 덴은 자신이 가진 능력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 했다.
“게다가 쿼터잖아? 줄만 잘 서면 의사 조수가 문제냐? 니 이름으로 의원까지 하나 차려줄 걸? 아침에 딱 문 열어서 아니마 소진될 때까지만 잠깐 일하고 점심 먹고 또 빤짝 일해서 소진시키면 퇴근할 수 있는 꿀 직업을 갖게 되는 거지. 하루에 3시간도 일 안 할 거야, 아마. 그러니까 아버지를 데리고 레티샤든 어디든 큰 도시로 떠나. 가서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구해.”
꿈만 같은 이야기다. 의원이라니. 떠나는 김에 힘내라고 해준 포장된 소리겠지만, 어쨋든 덴은 기분이 좋아진다.
“고마워요, 레아.”
“꼬맹이 지금 내 말 안 믿어서 고맙다고 한 거지? 진짜야. 속는 셈치고 가까운 의원에 가서 물어라도 보던가.”
가까운 의원이래봤자 남작령까지 걸어서 몇일을 가야 한다.
“그래서 지금 떠나시는 거에요?”
“너 가면 이제 나도 갈라고.”
아쉬운 마음에 덴은 그녀가 머물던 동굴을 바라본다.
“그럼 이 동굴은...”
“도로 매워놓을 생각이었는데 남겨둘까? 쓸 일 있겠어?”
“좋은 추억을 회상할 공간은 언제나 많은 게 좋죠.”
“...완전 애늙은이 같애.”
“하하, 아버지 말고는 그닥 좋은 추억을 나눴던 사람이 없어서요.”
언덕 아래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 몇 명 정도만이 그들 부자에게 친근하게 대해준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동정심과 우월감에서 비롯된 것. 덴과 아우덴은 아보레오 마을에서 가장 비천한 자니까. 그렇기에 레아와의 추억이 더 소중했다. 더할 나위 없이 신비롭고 특별한 사람과 이렇게 친근히 대화할 수 있다니. 그래서 레아가 더 고마웠다. 때로는 누나같이, 때로는 여동생같이, 이야기를 잘 해주고 잘 들어줘서.
“아, 그렇지.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오, 이별선물이야? 난 아무 것도 준비 못 했는데.”
“가지 말고 기다리고 계세요. 금방 가져올 게요.”
덴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을을 향한다. 사실 준비해 놓은 선물 같은 건 없다. 그 핑계로 조금이라도 레아를 붙잡고 싶을 뿐이다.
그 때 아보레오 마을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떠날 일만 남았던 남작 영애가 세바스찬이 안 보인다며 기리기리 날뛴 것이다. 처음에는 하인이 실종된 줄 알았던 농민들이 개라는 설명을 듣고 웃었다가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세바스찬이 그냥 개인줄 알아? 내 개라고! 이 몸의 개란 말이야! 너희들 모두를 합쳐도 세바스찬한테는 안 돼! 그러니까 당장 찾아 와!”
“도망간 게 아니겠습니까? 원래 짐승, 아니 동물이라는 것들은...”
“내가 세바스찬을 몇 년을 길렀는데! 여기보다 더 큰 마을에서도 풀어놔도 재깍재깍 찾아오는 애라고!”
“하지만 여기는 숲이라 산짐승들이 잡아먹었을지도...”
옆에서 계속해서 한 마디씩 딴지를 걸던 촌장은 결국 호된 따귀를 맞고서야 입을 다문다.
“그래, 너. 니가 촌장이지? 책임지고 세바스찬을 찾아와, 그렇지 않으면 촌장인 니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거야! 그러니까 그딴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가서 집 한 채라도 더 뒤져!”
그 대화를 곁에서 듣고 있던 라울은 얼굴이 사색이 된다.
왕이 귀족에게 영지를 맡기듯이, 귀족도 작은 마을의 통치는 한 집안에게 일임한다. 그렇기에 촌장의 자리는 세습이면서 동시에 귀족의 명이 있으면 언제라도 다른 집안으로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자리이다. 그렇기에 라울은 이대로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먼저 파비앙과 마에즈를 불러 입단속을 단단히 시킨다.
“야, 지금 촌장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아?”
“앙?”
라울이 파비앙에게 눈을 부라린다. 하지만 파비앙도 그에 굴하지 않고 말을 계속 잇는다.
“영애 눈 뒤집힌 거 못 봤어?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라울이 계획이 있다고 말하려는 찰나, 마에즈의 중얼거림이 그의 귀를 당긴다.
“아니, 아니지. ‘우리’가 죽는 건 아니지.”
라울은 마에즈의 멱살을 잡아 올린다.
“뭐 이 X끼야? 다시 말해 봐.”
공포와 분노, 약간의 희열과 살의가 뒤섞인 눈으로, 마에즈는 라울을 내려다본다.
“개를 죽인 건 너지 우리가 아니야.
목소리는 덜덜 떨고 있지만, 눈빛은 반쯤 맛이 가 있다. 그것이 라울을 소름 돋게 만든다.
“그만 해, 그만! 우리끼리 이럴 때가 아니잖아!”
파비앙이 간신히 둘 사이를 중재하며 떨어뜨려 놓는다.
“라울! 뭔가 계획 없어?!”
여전히 마에즈를 노려보며, 라울은 천천히 말을 뱉는다.
“없긴 왜 없어. 아주 기똥찬 걸로 하나 있지.”
그리고는 눈을 홱 돌려 파비앙을 마주 본다.
“외발이네로 가자. 찾아야할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