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보레오 마을. 촌장의 집무실.
“...도저히 돈이 모이지를 않습니다.”
“애초에 어디서 그렇게 큰돈이 나오겠습니까.”
“그 상인놈이 이때다 싶어 너무 큰 액수를 요구하고 있는 거라니깐요!”
세 농민대표를 앞에 둔 촌장은 가만히 턱수염을 쓰다듬는다. 매일 아침마다 가지런히 정돈하는 염소수염은 그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그에 반해 제대로된 면도조차 못 해 여기저기 듬성듬성한 수염을 거칠게 벅벅 긁으며 크레일은 다시 입을 연다.
“여름에 농민들 생활이 어쩐 줄 뻔히 알면서 시찰 나온 걸 테니, 적당히 대접만 하면 안 되겠습니까? 굳이 장신구를 선물할 필요는...”
“시찰은 남작 전하께서 명하신 거고 영애는 세상 물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네. 안 그래도 시골은 도시와 달라 많이 힘들어할 텐데 제대로 된 선물조차 없으면 남작께 가서 무슨 악담을 쏟아놓을지 어떻게 아는가?” 크레일은 툴툴거리며 입을 다문다. 옆에서 그 꼴을 보던 게랄이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저 상인 놈들이 문제입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조치를 어떻게 취하겠는가. 저놈들이 남작님 직할령에까지 연을 대놨다는데.”
물론 거기서 자신에게도 짭짤한 수익이 발생한다는 말은 구태여 더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든 몇 푼씩이라도 모아보세. 지금 허리띠를 졸라매는 게 나중에 목이 졸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농민들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떨군다. 지들이 별 수 있겠어, 촌장은 턱수염을 가다듬는다. 하급 농민들이야 허리띠든 올가미든 조르라는대로 졸라야지.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리고 소년의 고개가 빠꼼히 들이밀어진다.
“아버지! 저 잠시 나갔다 올게요!”
이번 건으로 꽤 큰 수입을 올릴 상인들에게서 또 어떤 명분으로 돈을 뜯을까 고민하던 촌장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촌장의 아들 라울은 느긋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대문 너머로 발걸음을 옮긴다. 라울을 기다리고 있던 소년들은 그를 보고 몸을 일으킨다.
“어, 기다렸어?”
“우리도 방금 왔어.”
라울은 파비앙이 저린 다리를 주무르는 것을 보고도 무심히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럼 가자.”
앞서는 라울을 따라 소년들은 저린 다리를 억지로 끌고 따라간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촌장자택에서는 작은 시내와 광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백가구 정도의 마을이 한 눈에 보인다. 라울은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중심로를 따라 내려갈 때마다 어깨를 한껏 핀다. 그의 뒤를 따르던 소년들도 그가 길을 걸을수록 기고만장해지는 것을 보며 혐오감과 부러움을 함께 느낀다. 하지만 별 수 있나, 촌장의 아들인 그는 왕자와 같은 위치에 앉아 있는데.
“광장에 있댔지?”
라울의 물음을 파비앙이 받는다.
“외부인이 밥을 먹을 만한 곳은 광장 밖에는 없잖아.”
“집으로 초대하지 그랬어?”
마에즈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묻는다.
“남작이 누구 집에 머물지 말고 여관에 머물라 그랬다던데.”
“서민 시찰이랬나? 빡세게 시키네. 어차피 딸내미한테 영지를 물려줄 것도 아니면서 뭐하러 시찰을 시키는 거야?”
“글쎄다. 혹시, 나를 사위로 삼으려고 눈도장 찍으러 보낸 거 아니야?”
남작의 귀에 들어간다면 불경죄로 고초를 겪을 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라울은 크게 웃는다. 어이없다는 표정의 소년들도 서로를 마주보며 마지못해 작게 웃는다.
광장에는 이미 많은 남자들이 모여 있다. 다른 일을 하는 척, 약속이 있는 척 모두 딴청을 피고 있지만 모두의 시선은 한 곳에 몰려 있다. 인근 십수개의 마을을 다스리는 영주의 따님, 루드비히 남작 영애를 향해.
“마을 형들은 다 모여 있는 것 같아!”
아직 여인보다는 다른 것들에 관심이 많은 막내 동생, 까뮤는 키득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저것 봐, 라미에 형은 머리에 돼지기름까지 발랐네.”
라울과 소년들도 행인인 척 남작 영애가 앉아 있는 식당의 테이블을 향한다. 도시에서 온 아가씨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래 엿들을 심산이다. 클라크 아저씨의 음식점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작 영애는 입에 손수건을 대고 맞은편의 사내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사내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씩 끄덕이며 발끝으로는 테이블 아래 영애의 강아지를 툭툭 치며 시간을 때우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영지 시찰을 다녀야 하는 거냐고! 나는 왕도로 시집 갈 몸인데! 이런 촌동네에는 관심 없단 말이야!”
“물론입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품위에는 이런 곳은 맞지 않죠.”
“난 또 영지에서 손꼽히는 크기의 마을이라길래 레티샤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안목에는 레티샤 정도는 되어야 맞을 텐데요.”
“뭐냐구, 이게! 이 마을에 대한 불만만으로도 서재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야!”
“맞는 말씀입니다, 아가씨. 아가씨의 심미안이라면 서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심드렁하니 아가씨의 불평을 달래던 호위기사, 필립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소년들을 발견하고는 말을 잊는다. 성인식을 치를 나이 즈음 되어 보이는 세 명의 소년들과 꼬마 하나가 다가오고 있다. 거기까지는 딱히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런데 어째선지 소년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면서 걸어오고 있다. 심지어 하나는 뒤쪽을 보고 있다. ...뭐지? 동네 바보들인가?
“뭐야, 필립. 왜 그래?”
남작 영애는 테이블 아래로 자신의 개를 쓰다듬으며 묻는다.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죠?”
“이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들어 봐! 먼저 이 광장!”
대화 소리가 들리는 거리까지 접근한 라울은 들려오는 그 대화에 자부심으로 가슴이 부푸는 것을 느낀다. 과연 성에서 살다 온 남작 영애의 아가씨는 자신이 갖게 될 이 아름다운 마을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마을 최대의 만남의 터이자 사랑장인 이 광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주말 저녁만 되면 젊은 남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떠들며 서로를 힐끗거리다가 연애가 시작되곤 하는 낭만의 광장이다.
“광장이라는 말조차 여기엔 사치야! 차라리, 그래 그냥 둥근 곳! 둥근 곳이라고 불러야해! 믿을 수 없어, 이게 광장이라고? 이 마을 사람들은 광장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거야? 촌동네라 학교도 없는 거야?! 광장은 넓은 곳이라는 뜻이야! 내 방이 여기보다 두 배는 넓겠다! 그리고 저 꽃밭!”
수많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광장 중심의 저 꽃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촌장배 꽃꽂이 대회에서 15년이나 연속으로 우승한 라울의 어머니가 직접 관리하는 꽃밭으로 사시사철 언제나 다른 꽃들이 번갈아 핀다. 언제나 마을을 향긋한 꽃향기로 가득 채우는 이 꽃밭과 그것을 관리하는 라울의 어머니는 언제나 마을의 자랑거리다.
“색은커녕 향의 조화조차 고려 안 하고 막무가내로 심은 저 꼬라지를 좀 봐. 내 코가 다 비틀어지겠어! 우리 정원사가 저랬다간 당장에 해고야, 해고. 아니지, 해고가 뭐야? 당장 목을 쳐도 그 가족들이 와서 꽃밭을 보면 불만은커녕 석고대죄하다가 돌아갈걸?! 그리고 이 음식점!”
영애가 앉아 있는 클랭크 아저씨의 음식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라울의 여자친구이자 마을 제일의 미녀인 에밀리의 아버지, 클랭크가 직접 경영하고 요리하는 여관 겸 음식점으로 라울이 가장 좋아하는, 아니 마을 사람들 전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점이다.
“어떻게 마을에 음식점이 하나 밖에 없을 수 있어? 그나마 메뉴가 꼴랑 다섯 개?! 우리 세바스찬이 먹는 개밥 가짓수도 다섯 개는 넘어! 게다가 저 서빙하는 여자애는 대체 뭐야? 자기가 예쁜 줄 아는 저런 촌구석 계집애를 웨이트리스라고 세워놓으면 입맛이 떨어지는 게 당연하잖아!”
라울은 영애를 향해 진심이 담긴 발길질을 날린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발이 영애에게 닿기 전에 소년들이 그를 제지하고, 어느샌가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대고 있던 호위무사의 손도 느슨해진다. 영애는 뒤늦게서야 뭐냐는 듯 찡그린 눈을 돌린다.
“아, 아이고! 아이고, 이 바보 형이 또!”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 멍청이가 저희 동네 유명한 바보라서요! 미녀를 보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요!”
라울의 신발에서 날아온 진흙이 코앞에 떨어지자 개가 사납게 짖기 시작한다. 영애는 허리를 숙여 개를 신경 쓰느라 라울이 눈을 부라리는 것을 다행히 보지 못 한다. 소년들은 라울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꼬집으며 재빨리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필립은 소년들을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린다.
“...굳이 피를 볼 필요는 없겠지.”
“뭐라구 필립?”
“바보마저 홀린 듯이 다가오는 아가씨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멘트에 영애는 짐짓 싫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다. 하지만 입에 걸린 미소는 손수건으로 채 가려지지 않는다.
“아오, 저 못 생긴 게!”
라울은 차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 하고 돌을 힘껏 냇가에 던진다. 돌에 맞은 개구리는 머리가 터져서 축 늘어진 채로 떠내려간다. 단 한 번의 발길질로 모두를 몰살시킬 뻔한 라울의 만행에 다른 소년들은 속으로는 별의별 욕을 다하면서도 입으로는 그의 비위를 맞춰준다.
“그러게나 말이야. 그런 얼굴로 레티샤는 무슨.”
“귀족으로 살다보니 자기가 엄청 잘난 줄 아는 거지.”
라울은 그래도 분이 안 풀린다는 듯 돌을 들더니 이번에는 아니마를 이용한 악력으로 그것을 부숴 버린다.
“어떻게 엿먹이지?”
소년들은 라울의 말을 곱씹어보고는 깜짝 놀란다. 이 미친놈이 기어코 우리 가족들까지 처형시키려는 건가.
“남작 영애한테 해코지를 하려고?”
“야,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잘못 되면 우리 모두 죽어.”
“특별한 사람이 부리는 이기에 불만을 가진다면 그것만으로 죄잖아.”
라울은 친구들의 소심함에 울컥해서 고개를 돌리지만, 이내 그 분을 속으로 삭인다. 그래, 법은 법이고 규칙은 규칙이다. 어찌보면 자신 또한 특별함에 안주하며 이기심을 부리고 있지 않은가. 주제를 알고 선을 넘지 말자. 언제나 아버지가 하는 말이다. 주제를 알고 선을 넘지 말아라.
“후우우...”
라울이 잘게 다져진 분노를 입으로 내뿜자, 소년들은 안도하면서도 계속 불안해한다. 그런 소년들의 눈에 그의 분노를 돌릴 좋은 먹잇감이 들어온다.
“저기, 덴 지나간다.”
그 말에 라울은 고개를 번쩍 들어 한 방향을 바라본다. 2차 성징이 이제 갓 찾아온 한 소년이 수풀을 해치며 숲을 오르고 있다. 라울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다른 소년들은 그 미소를 보며 이제야 완전히 안도한 표정을 짓는다.
“야, 고아!”
라울이 큰 소리로 덴을 부른다. 하지만 덴은 반응하지 않는다. 익숙하다는 듯 라울은 돌을 집어 덴을 향해 던진다. 아니마로 조정된 돌팔매는 정확히 덴의 관자놀이를 향한다. 하지만 덴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쳐낸다.
“다리X신네 고아 새끼야! 어디 가냐!”
라울은 다시 한 번 고함을 지른다. 덴은 발을 우뚝 멈췄다가 다시 재개 놀린다.
“저 새끼 잡자.”
라울은 그 말을 시작으로 발에 아니마를 실어 덴을 향해 폭발하듯이 뛰어간다. 덴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라울의 움직임과 동시에 반대방향으로 질주한다. 다른 소년들은 두 박자 늦게 몸을 일으켜 라울을 따라 아니마를 운용하며 달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잡고 만다, 백정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