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9일 아침.
준혁이 간편한 라운드 반팔티에 어제 빨아 둔 츄리닝 바지를 주워 입었다.
"준혁아 준비 다했니? 밥은 먹고 가야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지던 준혁이 방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엄마 나 밥 먹을 시간 없어. 빨리 가야 돼"
"아니 그래도 한 숟가락은 먹고 가야..."
방 밖으로 나오는 준혁을 보며 준혁의 어머니 홍희가 말을 멈췄다.
"... 너 오늘 형사팀 첫 출근이라고 안했니?"
"맞습니다만?"
자신의 물음에 태연스레 대답하는 준혁을 보며 홍희가 고개를 갸웃한다.
"너 그러고 출근할거니?"
"왜? 뭐가?"
"니 옷차림을 봐. 출근이 아니라 어디 운동하러 가는 것 같은데? 첫 출근이면 정장같은거 입어야 되는거 아냐?"
"에이 엄마도 참, 나 이제 형사야. 형사가 최대한 도둑놈 쫓아가기 편한 옷을 입어야지. 그리고 어제 인사발령식 때 정복입었잖아"
"아니 그래도 츄리닝은 좀 아닌 것 같은데..."
"아 엄마 TV도 안봐? TV에 나오는 형사들 보면 다 이렇게 입고 다녀. 나 갔다올게"
현관문을 나서는 준혁을 바라보며 홍희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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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팀 사무실에 출근한 준혁을 희연이 멍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혹시.. 조준혁 반장님?"
나름 첫 출근이라고 1시간 일찍 사무실에 도착한 준혁을 희연이 혼자 맞이했다.
"예, 안녕하십니까"
준혁이 90도로 인사했다.
준혁도 파출소에 있으면서 희연의 소문은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김희연, 도내 유일한 여자형사,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경찰에 입문한 형사 6년차 배태랑 엘리트 형사이며 SM은행 강도사건, 실내사격장 총기탈취 사건, 노부부살해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형사 4년차에 2계급이나 특진한 인재.
170cm에 이르는 늘씬한 키와 몸매에 이쁘장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성격이 상당히 털털한 '상남자'라는 소문도 익히 들었다.
준혁이 속한 경찰서 형사팀에는 총 5개의 팀이 있는데 김희연은 준혁과 같은 형사2팀이었다.
인사하는 준혁을 바라보며 희연이 묘하게 미소지었다.
마치 웃음을 억지로 참는 것 같은...
"..흡 반가워요 반장님.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됬네요. 저는 반장님이랑 같은팀 김희연이라고 해요. 아 물론 한 조는 아니구요."
형사팀의 인원은 한팀에 5명으로 구성되어있다.
기본적으로 2인 1조씩 2개조에 1명의 팀장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인데 이 조 개념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선임조장과 조원이 붙어 다녀야 한다는 얘기를 바로 어제 용진에게 들은 준혁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많이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머, 무슨 소문을 들었는데요?"
'걸리면 다 뒤진다고...'
꿀꺽.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되삼킨 준혁이 말한다.
"도내 최연소라는 최연소 타이틀은 다 갖고 계시는 유능한 엘리트 형사시라고..."
여자치고 '예쁘다' 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가 없지만, 희연의 경우 '예쁘다' 라는 말보다는 '일잘한다' 라는 말을 훨씬 좋아한다는 사실을 사전조사를 통해 알고 있던 준혁의 대답이 이 순간 빛을 발했다.
"호호호, 오랜만에 기분 좋네. 듣기로 반장님 나이가 26살이라고 들었는데 제가 3살이나 많으니까 말 놓아도 되겠죠?"
"예 선배님.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고마워, 말 잘해서 좋네. 딱딱하게 선배님이니 부장님이니 하지 말고 그냥 누나라고 불러. 직장에서 누나라고 부르기 좀 그러면 형이라고 부르던가"
경찰의 계급은 총 11개로 순경, 경장, 경사, 경위, 경감, 경정, 총경, 경무관, 치안감, 치안정감, 치안총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직책이 있는 경우 그 직책을 호칭으로 부르고, 직책이 없는 경우 그 계급에 맞는 호칭을 사용하거나 그냥 일괄적으로 선배님이라고 부른다.
순경과 경장은 반장님, 경사는 부장님, 경위는 주임님, 그 위로는 '계장'급 이상이기 때문에 대부분 직책을 가지고 있으며 경무관이상은 소위 말하는 '높으신 분들' 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경찰생활 내내 마주칠 일도 없다.
"예 형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하는 준혁을 보며 희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민도 안하고 형님이라고 부르네? 내가 전혀 여자같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인가?"
준혁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너..."
희연이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하이~"
당직근무 겸 외근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형사1팀 박종수와 최용진이 희연을 보고 인사하다가 멀뚱히 서있는 준혁을 보고 멈칫한다.
"누구? 안면이 있는데.."
용진의 물음에 종수가 대답했다.
"아 그 들어온지 1년만에 징계받은 신임......."
종수가 희연의 사나운 눈초리를 보고 말을 멈췄다.
"조반장님?"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형사2팀으로 발령받은 조준혁입니다."
"아 예. 근데 왜 옷이..."
"푸흡"
말끝을 흐리는 종수를 보며 희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힛 크크크크큭"
희연의 웃음을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한 종수가 한숨을 쉬었고, 용진이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 음.. 반장님, 초면에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그 직원들 출근하기 전에 옷부터 갈아입으시는게 좋을 것 같은데요"
"예?"
영문을 몰라하던 준혁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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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편하게 입고 오라는 소리를 듣고 츄리닝이면 될 줄 알았다?"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준혁을 보며 용진이 물었다.
"아닙니다. 팀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셔서 츄리닝을 입고 왔다기 보다는 아무래도 형사가 도둑놈 잡고 다니고 하려면 좀 편하게 입어야 할 것 같아서.. TV에서도 뭔가 복장이 굉장히 자유로워 보이길래..."
"하아.. 그거 한 번 자세히 봐봐"
"예?"
"TV 한번 자세히 보라고. 대부분 등산복 바지나 등산복 옷일걸? 너처럼 쌩 츄리닝은 아무도 안입고 다녀."
"아..."
"왜 등산복은 되는데 츄리닝은 안되는지 궁금하지? 특별한 이유같은거 없어. 그냥 윗분들이 등산복은 별 터치를 안하는데 츄리닝은 싫어해. 형사가 너무 놀러다니는 것처럼 보인다나 뭐라나"
"예..."
"당장 우리팀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내가 봐도 츄리닝은 좀 그래. 무슨 말인지 알지?"
올해 43살의 용진의 말에 준혁이 더욱 고개를 숙였다.
"팀장님, 제 새 조원 첫 출근부터 기 다 죽겠습니다. 몰라서 그런건데 한 번 봐주시죠"
준혁과 한 조인 경일이 끼어들었다.
오늘부터 준혁의 조장이 된 경일은 형사 10년차 배태랑인데 비해 나이가 36살로 조장 중 가장 어린 편에 속했다.
경일의 대답에 이해할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준혁을 바라보며 한 차례 한숨을 쉰 용진이 말했다.
"하아.. 그.. 준혁이라고 했지? 이제 내새끼니까 이번 일과는 별개로 딱 한가지만 조언할게"
"예?"
"이 생활 오래하고 싶으면 알아도 모르는 척, 들어도 못들은 척 해야해. 윗 사람의 말이 도저히 이해가 안되면 윗사람과 맞서려 들지말고 윗사람에게 맞추려고 노력해"
용진의 말에 2팀원들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게 싫어서 서랍에 혹은 가슴에 사직서 품고 다니는 사람, 내가 아는 것만 열 손가락은 넘어갈거다"
"..."
"내가 한 말 명심해. 그래야 하는, 아니 그래야만 하는 곳이 지금 니가 있는 이 곳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