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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연아"
"네, 선배"
병재의 부름에 희연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경일이... 화 많이 났을까? 표정이 너무 안좋아 보여서..."
멈칫
키보드에서 손을 뗀 희연이 병재를 바라본다.
"예전부터 싫어했잖아. 자기 영장 남이 건드는 거"
"우리가 남인가요?"
"그런 뜻 아닌거 잘 알잖아...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사건은 항상 안좋은 일이 생기더라고"
희연이 쓰게 웃으며 병재를 부른다.
"속도 깊고 생각도 깊으신 우리 조장님"
"..."
"아마 경일 선배가 더 신경쓰는 건 따로 있을 걸요?"
"뭐?"
"경일 선배가 겉으로는 물렁하고 생각없어 보여도 속은 선배만큼 생각 깊은 사람이에요"
"아..."
병재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희연의 신임여경 성추행 내부고발 사건으로 영우는 6개월 정직이라는 중징계 처분을 받게 되었지만 그 이후 알게 모르게 희연도 윗사람들에게 찍혀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내부감찰을 통해서 조금 더 부드럽게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는데 굳이 외부의 힘까지 빌려가며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 해야 했냐' 라며 대놓고 조직의 배신자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었다.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가다보니 희연은 다른 일반직원들과도 서먹서먹해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경일이었다.
경일은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직원들 사이에서 '희연이 배신자라느니' 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대부분의 직원들이 자신들에게 불이익이 올까 두려워 침묵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나서서 용기를 낸 사람이 왜 배신자 소리를 들어야 되냐' 며 화를 내곤 하였다.
희연도 사람인지라 그런 분위기에 조금 주눅이 들어 있었는데 경일의 행동이 큰 도움이 되어 평소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속이 깊은 거랑 자존심 문제는 별개야"
병재의 말에 희연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말하는 건 그런게 아니에요"
"...?"
"선배, 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요?"
"...무슨 말이야?"
"피해자가 7명이나 발생하는 동안 범인의 뒤꽁무니도 발견하지 못한 치밀한 연쇄살인마, 죽인 후에도 자신의 행동을 세상에 자랑하듯 시신을 훼손하는 미친 싸이코패스. 맞죠?"
병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건 피해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요?"
"...주부, 20대 백수, 60넘은 노인, 식당 아주머니, 여대생까지.. 대충 기억나는 건 이정도네"
병재의 말에 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다방에서 일하는 아가씨랑 30대 회사원 1명까지 총 7명이죠"
"근데 그게 무슨 상관..."
"그 중에서 여대생. 그러니까 마지막 피해자요"
"...?"
"준혁이 친누나에요"
"...!"
병재가 경악한 얼굴을 했다.
"뭐라고?"
"몇 번이고 강간당하고 칼에 난자당한 채 시신은 하수구에 버려져 있던 그 끔찍했던 7번째 여대생 살인사건. 그 피해자가 준혁이 친누나인 고(故) 조은비씨 라구요"
"맙소사..."
병재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희연이 말한다.
"예전에 준혁이한테 물어본 적 있어요. '형사팀에 들어온 이유가 뭐야?' 라고. 자기는 누나 죽인 새끼 꼭 자기 손으로 잡고 싶어서 들어왔다고 하더라구요"
"..."
"저도 알고 있는 사실을 경일 선배가 모를까요?"
"당연히 알겠지"
희연이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한다.
"그런 사실을 전부 알고 있는 경일 선배가요. 팀장이 저렇게 대놓고 떨어지는 콩고물 한 번 먹어보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할까요?"
"..."
"겉으로는 '영장을 남이 쳐서 기분이 나쁘니, 수사관으로서 자존심 상하니' 얘기하겠지만 진짜 기분 나쁜건 그 이유 때문일거에요"
"..."
"그게 제가 아는 경일선배니까요"
"하..."
병재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저희는 저희 나름대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큰 사건 앞두고 우리끼리 감정소모할 필요는 없잖아요? 일단 그 새끼 잡아 놓고 봐야지"
병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꼭 잡자"
"물론이죠"
희연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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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님"
"..어?"
준혁이 차량 조수석에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경일을 불렀다.
"무슨 생각해요?"
"아니.. 그냥.. 왜?"
경일의 대답에 흘깃 경일의 옆모습을 쳐다본 준혁이 말을 잇는다.
"어디부터 가보는게 좋을까 해서요"
"당장 알아볼 수 있는거라고 해봤자 이웃주민이나 가족들 밖에 없지?"
"...그렇죠"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족이야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지 마누라에 어린 아들 둘이 전부니까 특별히 알아볼 것도 없을 것 같고... 이웃주민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왜요?"
"너 너네 옆집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어?"
배가 나온 반대머리의 40대 아저씨를 떠올린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며가며 얼굴은 한번씩 봤죠"
"그 사람 이름이나 나이는 알아?"
"아"
준혁이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사는 사람이 대부분일텐데 그 사람 평소 성격이 어떤지 따위는 말할 것도 없지"
"그럼..."
"잠깐 기다려봐"
말을 마친 경일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뚜르르르르르...달칵
"네 선배"
수화기 넘어로 들려오는 희연의 목소리에 경일이 말을 잇는다.
"희연아, 영장 치기 전에 다른 것부터 먼저 해줄 수 있을까? 조금 급한 일이라서"
'영장' 이라는 말에 운전하던 준혁이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그럼요. 말씀하세요"
"오철식이 통화내역부터 좀 따줄 수 있겠어? 아무래도 무작정 탐문수사하는 것보다 오철식이가 평소에 자주 통화하는 놈들 따로 정리해서 그 부분을 중심으로 탐문하는게 나을 것 같아서..."
"역시 베테랑. 1시간 내로 후딱 처리해드릴게요. 염려마세요"
"양평까지 올라가는데 3~4시간은 걸리니까 조금 천천히 해도 돼. 부탁할게"
"네 선배. 수고하세요"
통화가 끊긴 것을 확인한 경일이 준혁을 바라본다.
"이렇게 시작하면 되겠지?"
준혁이 말없이 핸들을 잡고 있지 않은 오른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근데 행님... 뭐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
"뭔데?"
"혹시...아, 아닙니다"
무언가 말하려던 준혁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 이런거 제일 싫어하는거 알면서. 뭔데? 혹시 뭐?"
"아 진짜 아닙니다"
"진짜 죽어볼래? 아닌게 아닌 것 같은데?"
"아 혹시 제 USB에 담아 놓은 야동 건드렸나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봤습니다"
"야! 그걸 내가 왜 건드려? 너 USB에 야동도 넣어 뒀었냐?"
경일이 큰 소리로 외치며 발끈했다.
"아 아니면 말구요. 다 날아갔길래 혹시나 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야동있으면 부탁좀 하자고..."
"집에 가면 애본다고 정신없는데 야동같은 소리하네. 이 치사한 새끼야. 좋은거 있으면 조장이랑 공유를 하라고. 너 혼자 야심한 밤에 이 여자, 저 여자 번갈아가면서 재미보지 말고"
경일의 말에 준혁이 피식 웃었다.
"아 늬예늬예"
"쳇"
혀를 찬 경일이 창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사실 준혁도 경일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영장이 어쩌니, 수사관의 자존심이 어쩌니' 했지만 경일이 그 얘기를 할 때는 감정기복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집중하면 주변 사람의 심장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준혁이 그 부분을 놓쳤을 리가 없다.
오히려...
'팀장이 오철식이 잡아 공을 세우려는 모습에서 더 큰 감정기복이 느껴졌지'
경일을 바라보며 따스하게 미소 지은 준혁이 속으로 말을 삼켰다.
'부탁인데.. 오철식이 보고 행님이 더 흥분해서 사고치지 마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