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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도망치는 영웅
작가 : time stop
작품등록일 : 2017.6.2

겁쟁이, 비겁자, 도망자라고 불렸던 용사의 동료인 카인. 그는 마지막, 마왕과의 싸움에서 용사 로엘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진다. 죽음을 직감하고 지면에 머리를 처박은 후, 눈을 떠보니……살아 있었다.
마왕 퇴치후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세계에서. 카인은, 로엘을 찾는다.

 
첫 시작은 괜찮았지
작성일 : 17-06-03 14:37     조회 : 294     추천 : 0     분량 : 7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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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그닥 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이너스 영지로 향하는 마차의 안. 나는 내 앞에 앉아 있는 흑발에 그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뭐라고 했었지?

  거래 건,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는 일이 있었기에 일정을 앞당겼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군요.”

  “……글쎄요?”

  거래가 있다는 거, 이거 거짓말이다.

  나는 마차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만약 거래가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이런 식으로 가지는 않았을 거다.

  우리가 타고 있는 마차 하나. 거래를 위한 짐은 전혀 없다. 아니, 실을 수도 없을 정도로 작다.

  거기다가 상단에 있는 그 어떤 단원도 태우지 않았다. 오로지 아키르나와 나, 둘 뿐이다. 만약 거래를 가는 것이라면 적어도 상단의 단원들 여럿 데려가야 한다.

  그런 작은 마차에다가 호위는 무려 마차 세 개 분량. 이게 무슨 의미이겠냐.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조금 떠올려 봐도 답은 바로 나온다.

  도망치지 마라.

  도망가지 마라, 전혀 위험하지 않으니. 무려 마차 세 개 분의 용병들이 우릴 호위하고 있으니까. 그리니까 도망가지 말라고.

  암묵적인 외침이다.

  그는 현재 나를 믿고 있지 않는다. 완벽히 믿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믿는다고도 못할 상황이다.

  이미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에게 선언했다. 그런데도 이런 조치를 취한다는 건. 아직 나라는, 카인이라는 인간 자체를 못 믿고 있는 거였다.

  단박에 내 말을 믿기에는 내가 보인 전과(?)가 존재했으니까.

  “……얼마나 걸리죠?”

  화제를 돌렸다.

  지금 그에게 뭐라고 말 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거기다 나 자신도 내가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단언 할 수 없었다. 그저 내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 있는 겁쟁이의 본성이 그리 말 하라고 시켰을 뿐.

  “아마 넉넉히 잡아서 사흘 정도 걸릴 겁니다. 어차피 빨리 갈 필요도 없고……중간 중간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져 보고요.”

  “그렇……군요.”

  정확한 거리는 모르지만 아마 사흘이라는 시간은 거짓일 게 분명했다. 아니, 거짓이다. 정확한 위치,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라이너스 영지 자체가 이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었다. 길면 이틀, 짧으면 하루라는 시간 만에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아마 그 사흘이라는 주어진 시간 동안, 그는 나를 떠볼 생각인 거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정말로 도망치지 않겠다고 선언한 그 말을 그대로 이행할 수 있는 인간인지 알기 위해서.

  ‘머리 아프겠네.’

  그는 상단주이자 상인이다. 상인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뭔 줄 아나?

  돈? 권력? 인맥? 계산?

  다 아니다. 일단 언변, 입을 잘 털어야 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이끌어 가려는 상대의 말을 짓눌러야 한다.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듯이, 오히려 퍼준다는 듯이 논리로 찍어 누르고, 빠져나가야 한다.

  아마 탈탈 털릴 거다. 영혼까지, 피까지 뭐든 남김없이. 그리고

  ‘……어째서지.’

  분명 나를 싫어하지만, 좋아하지 않지만 그는 나를 돕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아니, 아니지.

  나를 돕는다고?

  한심하다는 생각에 양옆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날 도와주는 게 아니다. 애초에 싫어하는 사람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을 도와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가 나를 통해서 도울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단 한명 뿐이다.

  ‘로엘…….’

  로엘을 돕기 위해서 나를 그곳으로, 없던 명목까지 만들어서 향하는 거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를, 로엘을 돕고자 하는 거지? 아니, 난 이 사람을 언제 만났었지?

  기억을 더듬어 본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기억의 파편을, 단편 적인 것들을 한곳에다가 모은다.

 

  아키르나 마차 습격 도움 산적 운반 로엘 도망…….

 

  머릿속에 수십 가지의 단어들이 침투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차례대로 걸러낸다. 필요한 것들만, 필요 없는 부위들을 가차 없이 떼어낸다.

  아, 응. 그래, 그랬지.

  그리고 그것들을, 남은 것들을 조합해서 기억을 떠올린다. 마치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한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로엘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때 카인은 로엘과 함께 숲을 지나고 있었다. 다른 마을로 향하기 위해서. 그리고 때마침 들려오는 비명소리.

  ‘뭐, 뭐지? 로엘. 방금 무슨 소리가…….’

  연이어 들리는 비명소리. 그것에 로엘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그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달려 나갔다.

  ‘잠……로엘, 어이! 같이 가자고!’

  로엘에게 붙어 다니는 떨거지 같은 존재인 카인.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 그렇기에 로엘의 뒤를 쫒아, 달려 나갔다.

  애초에 로엘과 카인, 둘은 신체 능력부터가 월등히 차이가 난다. 힘들게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카인, 그의 옆에는 숨 하나 고르지 않은 로엘이 서 있었다.

  ‘산적……!’

  작은 마차 한 대가 습격 받고 있었다. 모두 괴상한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상한 무리였다.

  ‘로엘, 꼬, 꼭 도와줘야 할까……? 나중에 보복을 당할 수도…….’

  카인의 말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들리지도 않는 듯 했다. 카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검의 손잡이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복면인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커억!’

  ‘뭐, 뭐냐 네놈……으, 으아아아!’

  ‘어이 어이! 일단 저 망할 꼬맹이부터……!’

  산적이라도 그저 칼 든 일반인일 뿐.

  전략도, 전술도 없이 그저 길 지나가는 사람들 터는 집단이다. 터는 것에 대한 기술은 있을 지라도 전투에 대한 기술은 없을 게 뻔했다. 그저 칼 든 오합지졸들.

  결과를 굳이 말해야 아나?

  산적들은 거의 반쯤 죽은 상태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살생을 하지 않는 로엘이었기에 힘 조절은 했겠지만 후유증으로 죽을지 살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들이 죽던 말던 둘 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별 것 아니었다는 듯이 옷에 달라붙은 흙먼지를 털어 내며, 로엘은 그 마차의 주인 격으로 보이는 흑발의 남성, 아키르나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할지…….’

  ‘은혜라뇨, 그저 도움을 드린 것일 뿐입니다.’

  저게 문제다.

  착한 게 정도가 있어야지, 로엘은 지금의 상황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봤자 나만 힘들지. 그리 생각하며 카인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하하……죄송하지만 지금 목적지가 어디이신지?’

  ‘아, 그게……라이너스 령입니다만.’

  좋다, 이건 운명이다. 마침 목적지도 딱 같지 않나.

  ‘그렇다면……혹시 동행할 수 있을까요? 저희도 그쪽 부근으로 가는데 도보로 이동하는 중이었거든요.’

  어차피 목적지도 같은데다가 산적의 습격으로부터 목숨을 구해 준 은인(로엘). 거절 할 이유는 없었다.

  ‘잠깐,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알겠습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기꺼이.’

  폐는 뭐가 폐라는 말이냐. 이용할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철저히 이용해 먹어야 하지. 그 기회를 또 날려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로엘이라는 인간은.

 

  “산적…….”

  “네?”

  “산적들한테 공격 받고 계실 때, 처음……만났었죠 아마.”

  내 말에 그는 나를 의외라는 듯 쳐다보았다.

  “그걸 아직 기억하시네요.”

  그래, 기억 한다. 하지만 굳이 산적의 습격에서 구해 줬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는 그가 이렇게까지 로엘을 위할 리가 없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존재한다. 대체 그 이유가 뭐지?

  “왜……어째서.”

  백날 고민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직접, 직설적으로 묻는 게 백배 천배 편하다.

  “저를 아니, 로엘을 도우시려는 겁니까.”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건, 용케 알아챘네요.”

  애초에 날 위한 게 아니다. 로엘을 위한 거다. 자기 자신 때문에 동료가 죽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자신을 원망하고, 질타하는 그를 위해서. 동료는 살아 있었다고, 죽지 않았었다고.

  “그에게 당신을 데려가면……더 이상 신전에 처박혀 있지는 않겠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이유가 되지는 않잖습니까. 제대로 된 이유, 동기를 물어봤습니다.”

  산적에게서 공격 받을 때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살아났다. 그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같은 말 한 마디씩 내 뱉고 물건 몇 개 던져주면 될 일이다. 겨우 그것 하나로, 생판 모르던 남을 위해서 이런다고?

  “…….”

  그는 눈을 감았다.

  1초

  5초

  10초, 그리고 30초.

  이윽고 1분이 되자, 그의 붉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뱀을 연상시키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는 내게 말했다.

  “그처럼 되고 싶으니까요.”

  되고 싶다? 용사가, 영웅이 되고 싶다는 건가?

  “용사가 되고 싶으신 겁니까?”

  “아뇨, 저는 검도 못 쓰고 마법도 못 쓰는 평범한 상인입니다. 전 용사가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로엘’이라는 인간을 모방한 존재가 되고 싶은 겁니다.”

  이해할 수 없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로엘을 모방한다, 그처럼, 용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대체 뭘 말하는 거지?

  “……당신 같은 인간들은 평생 이해 못할 그런 것이지만요.”

  “그렇습니까…….”

  그의 말대로,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언제 도착할까요.”

  이제 화제를 돌릴만한 것도 없다. 붉게 녹아내리는 노을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타닥, 타다닥.

  작은 불씨가 나무를 태우는 소리. 로엘과 함께 다녔을 당시에 매우 자주 듣던 익숙한 소리였다.

  원래 이 상태에서 눈을 뜨면, 로엘이 뭐든 집어넣어서 먹을 걸 만들고 있을 텐데.

  “일어나, 안 먹으면 몸에 안 좋으니까. 일어나 카인.”

  어라, 왜인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진한 묵색의 배경을 도화지 삼아 마구잡이로 뿌려져 반짝이는 별들, 그리고 푸른 머리카락의 한 사람.

  “……로엘?”

  푸른 머리카락에, 그만큼이나 푸른 눈동자. 내 기억 속에 있는 인물, 로엘과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일치하는 게 아니라 그냥 로엘인가?

  “피곤한 건 알겠지만 일단은…….”

  잠깐만 로엘, 너……지금 신전에 처박혀 있다고…….

  “한 것도 없는데 그 형씨가 피곤하기는 뭘!”

  와하하하하.

  여러 명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뭐지? 대체 누가.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본다.

  항상 나와 로엘만 있었던 노숙 자리에 다른 이들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걷는 것도 의외로 피곤한 일이죠. 예전에 비브라 산맥을 도보로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죽을뻔했죠 아마?”

  이 목소리도 익숙하다. 흑발의 그, 아키르나의 목소리.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키르나……씨?”

  “어라? 제 이름을 알려드렸었던가요?”

  그리 말하며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따뜻한, 여러 재료가 섞여 들어간 수프였다.

  “뭐, 일단은 드세요. 배고프면 더 힘드니까요.”

  “아, 예…….”

  수프를 받아들었다. 이 사람이, 원래 내게 이렇게 친절했던가?

  호의적이다, 여기에 있는 아키르나라는 인간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키르나는.

  “로엘님도 드시죠.”

  “태워다 주시는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아아, 이해 됐다.

  산적에서 아키르나의 상단을, 지금이 아닌 매우 작았던 그의 상단을 산적의 습격에서 구해주고 난 뒤의 밤. 그날이었다.

  “한 사람 더 먹는다고 아무 문제없으니까 드세요.”

  그 말에 조금 거칠어 보이게 생긴 남성이 소리쳤다.

  “어이! 그럼 난 더 못 먹는데?”

  “이거나 쳐드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행동에 모두가 웃었다.

  와하하하하.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과거로 돌아와? 아니면 개꿈?

  ‘꿈…….’

  아, 꿈이다.

  아마도 그때의, 산적에게서 그들을 구해냈을 때의 기억을 억지로 떠올려 내서 이런 꿈을 꾸는 거다.

  “아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동조했다. 꿈, 허상. 진짜가 아닌 것. 하지만 진짜면 좋을 듯한 꿈.

  여기에는 로엘이 있다. 멀쩡한 로엘이, 그리고 나를 적대하지 않은 아키르나가. 나를 싫어하기 전의 사람들. 또 겁쟁이가 되기 전의 카인.

  아직, 도망치지 않은 카인은 이 꿈속에 있었다.

  ‘이 꿈은…….’

  깨지 않았으면, 아니. 차라리 이쪽이 현실이었다면 좋을 텐데.

  “카인 피곤하면 먼저 잘래?”

  상냥하게 물어오는 그 말이, 대체 얼마만인 걸까. 넌 아직도 변한 게 없는 걸까 로엘.

  현실이기를 바라는 꿈, 아직 비극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이니까.

  “미안, 로엘.”

  꿈이니까, 현실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말한다. 로엘에게.

  “……카인?”

  로엘은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응, 그렇겠지. 네 눈에는 내가 잘못한 게 없어 보이지만, 갑자기 사과를 해서 당황스럽겠지만.

  “미안해……정말로, 미안……하니까.”

  미안해, 도망쳐서. 미안해, 널 돕지 않아서.

  그때, 로엘을 버리고서 도망치기 싫었다. 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그때는 로엘이고 뭐고 도망 쳐야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만약 같은 상황이 다시 내게 다가온다면, 나는 주저 없이 같은 선택을 할 거다. 다른 이가 해결 해 줄 것이라고, 동료가 피를 흘리고 있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그러니까 도망쳐도 된다고.

  죄책감?

  당연히 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공포는, 겁은 그걸 뛰어넘고, 짓누른다.

  “카, 카인? 갑자기 왜…….”

  그래도, 쌓이고 쌓인다.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쌓여버린 죄책감은 나를 흔들어 놓았다. 그 결과가, 로엘을 구하기 위해 달려든 것.

  그때 그 행동으로 로엘이 마왕을 잡은 건지, 아니면 로엘이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는데 내가 달려 든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난 만족한다, 그때 그 행동에.

  “미안……해.”

  이때의 로엘은 모른다. 이때의 아키르나도, 상단의 단원들도 모른다. 내가 겁쟁이라는 걸, 도망쳤다는 걸. 아직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이들과 함께 향한 마을, 그 마을은 습격 받았었다. 사람의 생을 태우는 불길이 치솟고, 끔찍한 비명들이 난무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곳에서 나는 도망쳤다.

  로엘을, 아키르나를. 그들을 버리고.

  고립되었었다.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채로, 어떻게든 난관을 극복하려는 로엘이었지만 내 눈에는 아무 소용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도망쳤다.

  나는 멀리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불러 오거나, 아니면 주변에 있는 무언가로 그를 돕거나.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도망쳤다. 내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서.

  그래서 미안해 로엘.

  그게 첫 번째. 내 첫 번째의 도망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서, 다른 이들의 앞에서 나는 항상 로엘을 버리고 도망쳤다.

  전투가 끝나면 언제나 그에게 다시 다가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말을 건네는 도망자. 겁쟁이, 비겁자.

  그게 나였다, 카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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