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유, 그대에게 힘이 생겼으니 그걸 제대로 다룰 줄 알아야겠지?”
“그래야겠죠? 사실 너무 갑작스럽게 쓴 거라 어떻게 쓴 건지도 모르겠어.”
“내 힘과 똑같다면 쓰는 방법도 똑같겠지. 내 힘은 원하는 걸 만드는 힘이야.”
“원하는 걸 만들어요? 어떤 식으로요?”
“그대가 지금 강하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그대가 원하는 걸 만든다고 생각하면 쉬울 거야. 예를 들면…. 의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자.”
“의자요? 알았어요. 어떤 의자이든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죠?”
“그래. 강하게. 지금 의자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라티안스의 말에 따라 지유는 눈을 감고 지금 의자가 없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푹신푹신하고, 앉으면 무척 편안한 의자. 장시간 서 있었던 나에게 꼭 맞는 의자가 필요해.
그 의자가 내 눈앞에 생겼으면 좋겠어. 이왕이면 흔들의자처럼 흔들거렸으면 좋겠다.
“원하는 의자의 이미지를 집중해서 머릿속으로 그리는 거야.”
라티안스는 지유의 발밑에 몰려드는 붉은 기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붉은 기운은 꿈틀거리며 무슨 모양이 되려는 듯 여러 방향으로 뻗쳐나갔다.
그리고는 나무로 만들어진 흔들의자가 지유의 앞에 생겨났다.
“지유, 눈 떠봐.”
“…와! 만들어졌어요! 생각했던 거랑 똑같아!”
“이런 식으로 만들면 돼. 해보니까 어때?”
“집중력이 상당히 필요하네요…. 좀 어렵기도 해요.”
“처음이라서 그런 거야. 연습하면 지금보다 더 빨리 될 거야.”
“익숙해지면 다른 것도 만들 수 있나요?”
“물론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만들 수 있어.”
“예를 들면요?”
“내가 마을에서 누군가를 찾을 때를 기억해? 그때도 이런 식으로 발밑에 붉은 기운이 모였지?”
라티안스의 발밑에 모이는 붉은 기운을 보며 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기운이 훅, 퍼지며 바람 한 점 없던 방안에 바람이 불며 지유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방금 바람이….”
“그래, 그 바람은 내가 만들어낸 거야. 누군가를 찾고 싶다고 생각하며 만든 바람이지.”
“신기하다…….”
“나 역시 아직 내 힘을 100% 활용하지 못해. 힘이란 건 활용하는 자에 따라 다르니까.”
“그렇군요…. 그럼 저 열심히 연습할게요!”
“처음에는 작은 물건부터 만들어봐. 큰 물건을 함부로 만들었다간 체력이 버티지 못할 테니.”
“알겠어요.”
지유는 눈을 꼭 감으며 머릿속으로 열심히 자그마한 곰 인형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 지유가 그저 사랑스러워서 라티안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조금은 거칠지만 말랑하고 따뜻한 것이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지자 지유는 눈을 뜨고 멍한 얼굴로 라티안스를 바라봤다.
“라, 라티안스 씨…? 방금 뭘?”
“내가 뭘? 난 아무것도 안 했어. 계속 연습해.”
지유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에도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긴! 분명 따뜻하고 말랑한 것이 이마에 닿았는데, 아무것도 아니라니!
집중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라티안스의 입술 감촉이 떠올라 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지쳐버린 지유가 자신이 만든 의자에 앉으며 포기선언을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래요….”
“하긴 무언갈 만들어 내는 일이 그렇게 쉽진 않은 일이지.”
“그것 때문에 지친 게 아니란 걸 알면서…….”
“잘 모르겠군. 어쨌든 오늘은 푹 쉬어.”
“저…. 라티안스 씨. 궁금한 게 아직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아요?”
“뭐든 물어봐.”
“라티안스 씨는 뭐까지 만들 수 있어요? 저는 아직은 형태가 있는 것밖에 상상을 못하겠어요….”
“내 힘은 원하는 건 뭐든 만들어낼 수 있어. 지금의 나는 아직 부족해서 대단한 걸 만들어내진 못해.”
“그래도요. 알고 싶어요.”
“뭐…. 검이라던가 사람을 찾는 바람이라던가, 원하는 건 대부분 만들 수 있지. 더 익숙해지면 모든 이를 쓰러트리는 바람도 만들 수 있을걸?”
라티안스의 말에 이 힘에 얼마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숨어 있는지 깨달았다.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뭐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 말 그대로 뭐든지 만들 수 있음을 뜻했다.
원한다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바람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바람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무궁무진하네요….”
“시전자가 어떤 것을 바라는지에 따라 달리 쓰이는 힘이야. 그러니까 그대도 조심해서 써야 해.”
“…….”
“강한 힘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는 법이야.”
“네, 조심해서 쓸게요.”
“그래. 그거면 됐어.”
라티안스는 앉아있는 지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문밖을 나섰다.
아무래도 훈련장으로 가는 듯했다. 지유는 혼자 거실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가 지금 가장 강하게 원하는 것, 이곳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바로 눈앞에 그려지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붉은 기운이 발밑에 모이는 것을 느끼며 지유가 천천히 눈을 뜨자, 그곳엔 라티안스의 조각상이 서 있었다.
“부끄러워!”
원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니까 그 부끄러움이 두 배가 되는 기분이었다.
얼른 없어져! 없어지라고! 라고 생각하자 조각상은 공기에 녹아버리기라도 한 듯, 사라져버렸다.
정말이지…. 힘을 얻은 것까진 좋은데 묘하게 사실적인 조각상을 보자 자신의 마음을 전부 들킨 것 같아 쑥스러워졌다.
그렇지만 아까 그 조각상을 보고 정말 강하게 원하면 원할수록 구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라티안스 씨의 조각상으로 알게 됐다는 점이 묘하긴 하지만.”
그만큼 나는 라티안스 씨를 원하고 있는 걸까, 까지 생각하자 지유는 이마가 간지러워졌다.
조금 전 이마에 닿았던 라티안스의 입술 감촉이 되살아는 것 같았다.
부드럽고 조금은 까칠했지만 따뜻했던, 그 온도가 생각나자 지유는 행복했다.
‘그래.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해.’
그의 사랑을 받는 것은 매우 욕심나는 일이었지만, 사랑을 받으면 위험해진다.
라티안스의 약점이 되는 것은 자신으로써도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의 등 뒤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이 힘을 능수능란하게 다뤄야 했다.
적어도 내 몸을 지킬 만큼은 돼야지 않겠어? 남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했다.
뱀파이어 세계는 누가봐도 약육강식의 세상이었다. 인간인 자신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약했다.
“강해져야 해.”
죽고 싶지 않으니까. 여기서 죽고 싶진 않았다. 죽을 수 없다.
아직 나에게는 할 일이 많이 남았다. 라티안스 씨를 도와 뱀파이어 세계를 안정시켜야 하기도 하고, 집에 돌아가야 한다.
엄마랑 친구들도 봐야 하고. 학교에도 다시 다니고 싶었다.
그 모든 것을 이루려면 일단 자신이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들이었다.
“좋아! 조금 더 연습해볼까!”
설렘은 잠시 접어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지유는 눈을 감고 다른 것들을 상상했다.
아직은 조그마한 것이라던가 도통 실전에선 쓸 수 없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게 고작이었지만.
한편, 라티안스는 훈련소가 아닌 빛이 별로 들어오지 않는 폐건물 안에 있었다.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는 누군가가 살았던 흔적조차 없을 정도로 오래된 건물이었다.
라티안스가 자리에 앉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로브를 뒤집어쓴 채 그의 앞에 앉았다.
“…어떻게 됐나?”
“문제없습니다. 오히려 의심도 하지 않고 저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그거 잘 됐군. 나와 칼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야 할 거야. 잘 할 수 있겠나?”
“귀족의 기본자세는 줄타기와 눈치 아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어떤가 상황은?”
“여론은 아직도 칼립에게 쏠려 있습니다. 칼립이 몇백 년간 공포 정치를 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더군요.”
“공포를 이용해 그들의 발을 묶어두고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는 거군.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미지의 공포로.”
“그런 것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공포가 큰 만큼 그것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도 크니까요.”
“그 심리를 잘 이용하면 되겠군.”
“그것 역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대에게만 이런 일을 맡겨둬서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중요한 일을 맡는다는 건 그만큼 능력이 된다는 소리니까요. 아, 그리고 로드. 가기 전에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뭐지?”
“칼립쪽에 있는 뱀파이어 중 한 명이, 아무래도 숙소에 왔다 간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베일리에게 들었습니다. 어린 여자아이가 왔다고. 성에서 본 것도 여자아이였습니다.”
“여자아이? 설마…….”
“짐작 가는 것이 있는 겁니까?”
라티안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앞에 왔던 벨이라는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어째서 그런 어린아이가 칼립의, 그것도 이런 싸움에 끼어든 것일까.
그렇게 어린아이까지 이용하다니. 역시 칼립은 뱀파이어 로드에 맞지 않는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