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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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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38 - 2
작성일 : 23-06-12 13:05     조회 : 210     추천 : 0     분량 : 11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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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목요일.

  선선한 바람이 창을 타고 넘어와 코를 간지럽힌다. 기분 좋게 눈이 떠졌다. 푹, 수면을 취하고 난 후 밀려오는 상쾌한 기분. 기지개를 켜며 상체를 들어올리자 빠른 속도로 어젯밤 일이 상기된다. 아아, 설마. 믿고 싶지 않지만 내 몸 위를 타고 흐르는 그의 나긋한 율동을 만끽하다,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게 확실하다. 최악이다. 이건 뭐 편해도 너무 편하게 적응해버렸다. 부부흉내가 아니라 진짜 부부보다 더하다. 부부관계를 넘어서 남매도 이런 남매관계가 없다. 어쩌지, 어쩌지, 어쩐다. 이렇게 한정된 공간 안에서 그와 마주치지 않는 건 불가능한데. 피할 방법이 없겠지. 그와 마주치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슬며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거실로 향하다 쇼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그의 등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섰다. 잘 잤냐, 는 인사도 없이 내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하는 소리.

  “어젯밤 코를 골더군.”

  “나 코 안 골아.”

  “한라산 등정하고 많이 피곤해서 그랬나봐.”

  “나 코 안 곤다니까.”

  “본인은 모를 수도 있지.”

  “코 안 곤다니까 자꾸 그러네!”

  “알았어. 내 귀에 환청이 들렸나보군.”

  저 능글맞게 웃는 얼굴에 물이라도 뿌려주고 싶다. 어젯밤, 분명 노력한다고 했는데 너무 피곤했는지 의식을 잃듯 잠들어버렸다.

  “이 신문은 어디서 구한 거야?”

  “아침거리도 살 겸 밖에 다녀왔지. 누구 덕분에 밤에 잠을 아주 잘 잤더니 아침부터 쌩쌩하더라고.”

  “그게 그러니까…….”

  그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식탁으로 향한다.

  “아침 먹을까. 뭘 좋아할지 몰라 이것저것, 사왔어.”

  삼각김밥에 샌드위치, 각종 음료가 종류별로 열을 맞춰 자리잡았다.

  “바나나 우유는 또 뭐야? 완전 애들 취향이잖아.”

  “싫으면 나 주라고. 이 깊은 감칠맛을 모르는군. 군대 있을 때 어찌나 이게 마시고 싶던지. 휴가 나오자마자 편의점에서 사서 한 모금 입에 넣는데 아직도 그 감동이 잔상으로 남아있어. 그게 가슴에 제대로 맺혀서는 어릴 때도 마시지 않던 걸 나이 들어서 마시게 됐지.”

  한쪽 눈으로 윙크하며 밀봉된 윗부분을 뜯어 한 모금 삼킨다. 창밖을 확인하니 해가 높게 뜬 아침이다. 이른 아침도 아니고 늦은 아침. 어떻게 그렇게 잠들어버렸는지. 의식을 잃어버렸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일 듯.

  “어제 많이 무리했잖아. 오늘은 편하게 지내자고.”

  “그럴까?”

  “어째 표정이 떨떠름하다.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어 조급해하는 건 알겠는데 그런다고 시간이 더 늘어나진 않아.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오늘 하루는 느긋하게 보내자고.”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워서 그러지.”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던 분이 누구시더라.”

  날름, 혀를 내밀자 그가 가볍게 미소짓는다.

  “가보고 싶다던 거기나 가볼까?”

  “어디?”

  “오르막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리막이라는 도로.”

  “아, 그럴까? 되게 신기하잖아. 내리막인데 오르막처럼 보인다니.”

  “환영이지.”

  “그 환영이란 게 어떻게 생기는 건데?”

  “보통 환영이란 사실이 아닌데도 믿고 싶은 마음에 그 사실을 왜곡해서 보게 되는 거지.”

  “굳이 내리막을 오르막처럼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도 그렇게 보는 거잖아.”

  “거긴 특별히 시각을 어지럽히는 상황이 갖춰져서 그렇겠지. 굳이 의도한 게 아니었지만.”

  사실이 아닌데도 믿고 싶다. 살면서 그런 적 많잖아. 세상이 내 뜻대로 돌아가길 바라지. 그게 지나치면 왜곡해서 보게 되고. 내가 보고 싶은 대로.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왜 갑자기 말이 없어졌어?”

  “상상만으로 기대가 되네. 엄청 궁금해.”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제주도 신비의 도로, 라는 이름이 뜬다. 실제로 내리막을 달리지만 오르막을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진풍경. 사람 눈이 그런가. 있는 사물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앞에 놓인 무엇도 놓치지 않도록 눈에 불을 켜고 악착같이 살아도 결국엔 봤다고 믿는 것도 본 게 아닌 거다. 그렇다면 그 노력이 얼마나 허무해지는 거야.

  “느긋하게 출발해서 그곳에 들렀다가 맛있는 거나 먹으러 다니자고. 하루쯤 그렇게 보내기도 해야지.”

  “그래, 자기 말처럼 그렇게 보내자고. 조급해봤자 어쩌면 더 놓칠 수도 있을 텐데 차라리 여유롭게 보내는 게 낫겠지.”

  해가 저 꼭대기 위에 떠 있는 걸 보며 밖으로 나서니 기분이 묘하다. 이렇게 늦게 하루를 시작하는 게 얼마만인지. 여유로워 좋긴 하네.

  “그럼 어디 가서 뭘 먹지?”

  또 나오는 소리. 평생 부부생활 하면서 얼마나 이 말을 들을지 횟수를 세보고 싶다. 익숙해지는 만큼 질리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밥에 질려도 밥을 안 먹고 살 수는 없으니.

  “제주도 왔으니 제주도 특산물 먹어봐야겠지?”

  “특산물이라. 아무래도 섬이니까 해산물인가?”

  “아, 제주도 갈치는 다르다던데. 은갈치라지. 갈치 몸통에서 아주 은빛이 난다더라고.”

  “괜찮네, 은갈치라. 그걸로 하지.”

  “알았어. 어디 좋은 곳이 있는지 찾아볼게.”

  그가 운전하는 동안 제주도 은갈치 식당을 검색한다.

  “부부생활을 위해 이렇게 분업하는 것도 배워야 해.”

  “분업을 배워야 해?”

  “물론. 그걸 잘 못해서 다투는 부부가 은근히 많다고.”

  “그게 어렵나? 내가 이걸 할 테니 당신은 이걸 하라면 되잖아.”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고. 서로 하고 싶은 게 다를 때도 있고, 한다고 해놓고 하지 않는 사람도 많고.”

  “어렵군. 아니 쉬운 게 없어. 부부생활 하다가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얼마나 만만히 봤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쉬웠다면 세상에 그 많은 부부가 이혼할 일은 없겠지.”

  “하기야.”

  나도 예외는 아닌데. 현무 아빠는 규칙적인 생활에 충실한 사람이라 그 패턴이 어그러지면 그 얌전한 사람도 짜증을 낸다. 처음엔 그러려니 넘어가더라도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될 때까지 참다가 눌러왔던 화를 한꺼번에 풀어낸다. 그럴 땐 얌전한 사람이 더 무섭다. 쉽게 드러내질 않다가 크게 폭발시키니 놀라기도 놀라고 뒤끝이 더 오래간다. 그걸 겪으면서 조심하자고 하는데도 한 번씩 엇나가는 걸 피할 길이 없다. 또 그럼 그 사람은 그걸 하나씩 쌓아뒀다 어느 순간 터트리고. 쉽지 않지. 어렵다고, 정말.

  “그 신비의 도로에서 가까운 데로 찾아볼까?”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좀 멀어도 찾아가면 되지. 여기야 찾아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관광이잖아.”

  틀린 말이 아니다. 둘러보러 왔으니 돌아다니며 둘러보는 자체를 즐기면 된다.

  “저기 간판에 뭐라고 적혔는데.”

  휴대폰으로 검색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 신비의 도로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안내문이 적혔다. 얼른 폰을 내려놓고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살폈다. 분명 차는 아래로 향하는데 위로 붕, 뜨듯 시각이 혼란해진다.

  “어어, 이거 이상해. 어쩜 이렇지?”

  “흐흣. 진짜 말대로네.”

  위아래로 구부러진 고개 각도가 절묘하게 시야에 닿는 점과 맞아서 그런지 착시가 일어난다. 차가 진행할수록 위로 향하는 듯해도 지나고 보니 아래에 도착한다.

  “기분이 되게 요상해. 피부가 근질거리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시각이 촉각에도 영향을 주나보군.”

  “어쩜 그렇지?”

  “차 돌려서 한 번 더 지나가 볼까?”

  “그러자, 그래.”

  “그런데 위에서 내려와야 하니까 크게 돌아야겠는데.”

  그 정도야 감수하고라도 다시 지나가길 원했다. 도로를 검색해 그 지점을 다시 지나쳐 내려가도록 방향을 잡았다. 두 번째는 이미 익숙해졌는지 혼란스러운 감이 덜했지만 그래도 위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은 반복된다.

  “이게 참 신기하네. 어떻게 이러지?”

  “혹시 놀이공원 같은 데서 그런 시설에 들어가본 적 없어? 착시현상을 일으켜서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사람 키가 달라보이고, 편평한 곳을 걷는 데 흔들리는 기분이 들게 하고 그러지.”

  “그런 게 가능하구나. 3D 영화도 그런 원리겠지?”

  “그렇겠지. 눈을 조종해 생각지도 못한 세상을 경험하게 하는 원리.”

  한동안 들떠서 계속 신비의 도로에 대해 떠들어댔다.

  “식당 위치는 찾았어?”

  “어머, 미안, 미안. 내가 많이 흥분했나봐. 조금 전에 찾아보다가 도로에 들어서니까 그만 구경한다고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가 미소지으며 차 속도를 줄여나간다.

  “네, 분업 잘 하시네요. 어째 부부생활 배우려는 학생에게 좋은 본보기는 아닌 듯.”

  “흥분해서 그렇다니까.”

  “알았으니까 천천히 찾아. 잠깐 차 세울까?”

  쉼터에 들러 그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유명한 은갈치 식당 몇 곳을 골라낸다. 다들 음식이 맛있고 깔끔한 곳으로 평이 좋다. 검색한 내용을 보여주며 그와 상의를 한 후 바다에 가까운 곳으로 최종결정을 내린다. 점심시간은 이미 지나서 붐비진 않을 듯했다.

  “어릴 때 그닥 갈치를 좋아하진 않았어.”

  “왜?”

  “갈치가 가시가 많잖아. 가시 골라내기가 여간 귀찮아야지. 골라낸다고 노력했는데도 입 안에서 자꾸 걸려 나오는 게 싫었어.”

  “갈치가 가시 많은 편이긴 하지.”

  식당으로 가는 길에 하늘을 보니 구름이 조금씩 몰려들고 있었다. 간간이 검은 구름도 보인다.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다행히 날씨가 맑았었다. 오늘쯤 비가 내리려는 건지도.

  “내일 옆방에 누가 온다고 했지?”

  “응. 가족손님이랬는데.”

  “그동안 커다란 집 우리 둘이서만 잘 썼네.”

  “호사했지. 완전 전세낸 것처럼.”

  “어떤 사람들일까?”

  “너무 소란스럽지 않고 경계선 넘어 참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뭐, 겨우 이틀 있는댔잖아.”

  “그러고 나면 벌써 일요일이야.”

  일요일. 이어지는 침묵. 돌아갈 비행기표가 월요일 날짜로 예매되어 있다. 그렇다. 일주일이 이미 끝이 보이려 한다. 일주일의 첫 시작은 제주도에 도착해서 적응하느라 정신없었고, 그 다음엔 정민 씨에게 적응하느라 바빴다. 사실 아직도 그에게 적응 중이다. 그건 끝이 없겠지. 어제는 한라산 등정하느라 순식간에 지나갔고. 그러다 보니 목요일. 일주일이 그리 길진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휙, 하고 스쳐지나가듯 하다니. 그 일주일의 끝에 다다르면 뭔가가 보이리라 기대했는데, 돌아갈 날짜가 다가올수록 뭔가가 보이기는 고사하고 더욱 흐릿해져만 간다. 머릿속은 텅 빈 듯하고. 그와 눈이 마주친다. 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와 함께 지내는 것 자체를 즐기곤 있으려나.

  “어차피 흘러가는 시간을 막을 도리가 없잖아. 일분일초를 최대한 즐기는 거지.”

  “지금, 행복해? 나와 있어서? 제주도 여행 즐기고 있어?”

  앞을 확인하고 다시 나를 본다.

  “제주도 와서 첫날은 정신없이 지나가더군. 새로운 곳에 적응하려니 감상이고 뭐고 여유를 가질 수가 있어야지.”

  그건 나와 같다. 그렇겠지. 누구에게나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에 익숙해지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난 부부생활을 배우는 학생 신분이잖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니 머리에 쥐가 날 정도더군.”

  코끝에 걸리는 얕은 미소에 내가 함께 웃어준다. 그가 잠시 사이를 뒀다 나직하게 읊조리듯 이어간다.

  “관계 밖에서 볼 때와 그 안에서 볼 때, 상대방의 모습이 참 많이 달라져.”

  “지금 이 관계 안에서 내 모습은 어떤데?”

  주저하듯, 말을 고르듯, 말하는 박자 하나하나가 느리고 무게가 실렸다.

  “좋고 나쁘고를 따지고 싶진 않아. 그것보단 같은 행동을 해도 달리 받아들여진달까.”

  “같은 행동을 해도?”

  “처음 함께 술 마시러 갔을 때, 재채기를 하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재채기를 하는구나, 머릿속에 집어넣게 되더군. 사람이 재채기하는 방법이 바뀌지 않잖아. 지금은 재채기를 하면 하는구나 그저 넘겨버리게 돼. 그 모습을 봐도 머리가 반응하지를 않아.”

  “익숙해지는 거겠지.”

  “이제 우리는 관계 안에 있다, 단정하게 되니까 그 익숙해지는 속도가 두 배, 세 배로 빨라져. 흡사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한 번 본 모습을 보고 또 봐도 자꾸 반응하게 된다면 머리가 엄청 피곤해지겠지. 익숙해지는 건 머리가 효율적으로 작동해서 그만큼 에너지를 아끼고 휴식을 더 많이 취할 수 있게 하는 과정이잖아. 그렇지 않다면 힘들어서 어떻게 살겠어. 그 효율성을 위해서 두근거리는 감정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댓가를 치뤄야겠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아직 와이프한테 느끼는 설레임은 그대로 머물러 있어.”

  나를 보며 지그시 누르듯 말을 곱씹어서 하나씩 뱉는다.

  “그치만, 언제까지 갈지 장담은 못하겠어.”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내가 그럴 수 있었다면 제주도에 오는 수고를 덜 수 있었겠지. 은갈치 식당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은색과 흰색이 섞인 갈치 그림이 가로로 길게 간판 윗부분에 자리한다. 차가 속도를 줄여 주차공간으로 들어선다. 식당 안에 들어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둘 사이 말이 없다. 조금 전 신비의 도로를 경험하며 흥분했던 기분은 싹, 가라앉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주문하시겠어요?”

  “갈치 주문하면 되겠지?”

  “갈치 먹으러 왔으니까.”

  “은갈치 정식 둘 주세요.”

  밑반찬이 나오고 서로 수저와 물수건을 주고받는다. 어느새 이렇게 자연스러워졌지.

  “자기 좋은 학생이야.”

  “내가?”

  “잘 배우고 있잖아. 이제 아주 능숙해졌어. 누가 봐도 결혼생활 좀 해본 사람으로 볼걸.”

  말을 꺼내놓고 나서 이렇게 말해도 되나, 곰곰이 되씹었다. 멀쩡한 한 남자의 앞길을 어지럽히는 건 아닌지 염려하는 마음이 끼어든다.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잘했어.”

  씨익, 이라는 소리가 어울리도록 환하게 웃는다. 내 염려하는 마음은 전혀 낌새를 채지 못하는지 웃는 모습이 구김살 없다. 저 웃음을 얼마나 오래 볼 수 있을까.

  “갈치 먹으러 왔는데 다른 해산물도 아주 먹음직스러운데.”

  밑반찬과 더불어 개불이며 멍게, 해삼이 제공된다. 솔직히 멍게와 해삼까지는 먹겠는데 개불은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그래도 그 신선함은 피부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전해진다. 바로 잡아서 바로 먹는 음식, 그 신선도는 최상이겠지.

  “식사 마치고 숙소로 돌아갈까?”

  “벌써?”

  “내일부터 거길 공유해야 하잖아. 하루쯤 둘이서만 온전히 차지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럴까?”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워 자꾸 조바심내는 나와 달리 그는 차분해 보인다. 아무리 서둘러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걸 잘 아는데도, 성급한 마음이 들면 그걸 안에서 몰아내기가 쉽지 않다. 생필품을 구입하러 우리 마트에 자주 들르던 필리핀에서 온 교환학생이 있었다. 이름이 리카였는데, 빨리빨리, 라는 한국말을 알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지내는 한국사람들이 그 말을 그리 자주 써서 금세 배우게 되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한국사람 특유의 기질이라고 변명을 둘러대도 되려나. 그러기엔 정민 씨는 침착하고 서두르지 않는다. 다 그런 게 아니라 내가 그런 거지. 숨 한 번 길게 들이쉬고 마음을 가라앉히자. 악착같이 서둘러봤자 얼마나 더 본다고.

  “가는 길에 들러서 음식 사고. 내가 요리해달라고 하진 않을 테니.”

  “그럼 오늘 하루는 여왕님처럼 지내볼까. 잘 모시라고.”

  “아, 예, 그러지요, 여왕님. 손 하나 까딱할 필요 없도록 모시지요.”

  농협마트에 들러 굳이 손이 갈 필요가 없는 것들로만 먹거리를 구입했다. 평소엔 사지도 않을 것도 골랐다. 이런 때 아니면 언제 사보겠냐는 마음으로.

  “이건 완전 애들 취향 아닌가?”

  “지금 아니면 언제 먹어보겠냐 싶어서. 왜 자기도 하나 사줘?”

  “아니, 여왕님 드시지요. 저는 그거 먹는 게 고문일 듯.”

  “어머, 그래? 그럼 고문 한 번 해볼까?”

  “은근히 남 괴롭히는 게 취미신 듯.”

  “그래도 골라가며 괴롭히지. 아무나 괴롭히진 않아.”

  사고 나니 너무 많이 샀나 후회가 들 정도로 양이 많아 보였다. 이럴 때 뒷머리를 타고 올라오는 주부 특유의 경제개념을 꽉, 꽉, 밟아눌렀다. 지금은 아니라고, 지금은 아냐. 낭비도 하고 허세도 부려보는 거지. 딱, 이만큼만.

  “짐은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여왕님은 그저 편안히 쉬시지요.”

  그가 하라는 대로 짐을 내버려두고 침실로 들어서서 갈아입을 옷을 준비했다. 다홈이가 특별히 챙겨준 옷이 있었다. 레이스까지 나풀거리는 하늘빛 원피스. 이걸 제주도에서 입을 일이 있겠냐고 마다했지만 다홈이가 억지로 집어넣었다. 가장 특별한 순간에 입으라고. 가장 특별한 순간이라. 그건 마지막 밤이 아닐까, 얼핏 스쳐가듯 생각했지만 오늘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오히려 마지막 날엔 마음이 조여올지도 모른다. 차라리 조금 더 여유가 있는 오늘 이걸 입어 보자.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어째 샤워가 하고 싶어졌다. 목욕재계, 문득 떠오르는 말에 피식, 웃음이 터진다. 뭔가 신성한 일을 하기 전 목욕을 깨끗이 하여 마음을 가다듬는 행위를 일컫는 말. 너무 진지하잖아. 그래도 일부러 다홈이가 챙겨준 옷인데 맑은 몸과 마음으로 입어보고 싶었다. 온기를 적당히 머금게 물 온도를 맞추고 떨어지는 물줄기 아래에 섰다. 흘러내리는 물을 맞는 자리가 젖어든다. 머리 꼭대기부터 목을 타고 내려와 팔과 가슴, 배 한가운데, 허벅지 그리고 발목까지. 손 안에 비누를 쥐고 어깨부터 시작해서 몸 전체에 비누칠을 한다. 그의 손길을 기대하는 자리에 내 손이 먼저 닿아서 씻어내고 있다. 보기 흉하지 않게, 싫은 냄새가 나지 않도록. 그 손길을 상상하자 얼굴에 홍조가 떠오른다. 그는 분명 밖에 있는데 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에 열이 오른다. 여기 이 부분과 저기 그 자리에도 그의 입술이 닿았었지. 신기하다. 상상만으로 몸이 반응을 한다. 어쩌면 실제보다 상상이 더 달콤하다. 여행도 직접 다닐 때보다 그걸 준비하며 상상할 때가 더 즐겁다고 했지. 사랑도 직접 나눌 때보다 준비하며 상상할 때가 더 즐거울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가 바로 근처에 있어 그 즐거움이 배가 되는 것이겠지. 그가 옆에 없고 상상만 한다면 이런 기분은 들지 않을 듯하다. 여행도 떠날 날짜가 다가오지 않고 그저 떠날 상상만 한다면 그리 즐겁진 않을 거고. 떠날 날짜가 다가오니 흥분되고 그가 원하면 바로 볼 수 있게 옆에 있으니 이리 달콤함에 취한다. 갑자기 그가 몹시 보고 싶어진다. 얼른 몸의 물기를 닦아내고 침대 위에 펼쳐놓은 옷을 몸에 걸쳤다. 허리 부분이 살짝 좁게 조여서 불편하긴 했지만 달리 나빠보이진 않는다. 끝자락이 발목 위에서 멈춰 흔들거린다. 이런, 너무 서둘렀던가. 달랑 그 원피스만 몸에 걸쳤다. 속옷도 입지 않은 채로. 웃음이 터져나왔지만, 뭐, 어때, 스스로 자조하며 방문을 열었다. 말끔하게 정리된 식당 테이블 위로 바구니에 담긴 과일이 보인다. 그 바구니 양쪽에 놓인 불이 켜진 초. 하나는 붉고 다른 하나는 초록색. 언제 이런 걸 준비했지?

  “향기 괜찮아? 대단하진 않아도 얼추 분위기 나잖아.”

  그 앞으로 다가선다.

  “이 초가 불 대신에 켜놓으면 은은하게 주변을 밝혀주고 명상할 때도 좋고 말이지.”

  “초 광고는 그만하지.”

  그의 입이 반쯤 열리다 닫힌다. 할 말을 찾지 못해 궁색한 표정.

  “식사준비는 내가 하기로 했으니까 먹고 싶은 걸 골라. 손이 많이 안 가게 쉬운 요기 거리로 골라서 대단하지 않겠지만…….”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천천히 누른다.

  “말 좀 그만해.”

  입이 닫히고 그가 가만히 내 눈을 마주한다. 오른쪽, 왼쪽, 다시 가운데로 옮겨가는 눈동자. 미끄러지듯 그에게 입을 맞춘다. 그가 나를 안아준다. 몸이 밀착하듯 가까이 끌어당긴다. 당신이 그리웠어. 옆에 있는데도 그리웠어. 말하지 않아도 그가 알아들었다는 듯 나를 안아준다. 내 이마에 그의 이마가 닿는다. 내 팔과 상체를 쓰다듬더니 여왕님, 이라며 나를 숭배하듯 무릎을 꿇고 배에 얼굴을 묻는다. 숨결을 따라 내뱉는 열기가 배를 타고 그대로 전해진다. 발목을 타고 오르는 그의 손이 허벅지를 지나 내 음모를 건드리자 움찔, 그 손의 움직임이 멈춘다. 당황한 눈빛이 떠오르고 어쩔 줄 몰라 주저하는 표정이 도드라진다. 그걸 보니 더욱 당황하게 해주고 싶다. 아, 또 이런다. 자꾸 짓궂어지는 가슴팍.

  “급해서 깜박했어.”

  창피한 게 아니라 짓궂게 떠올리는 미소. 그의 당황한 표정이 내 미소에 함께 반응해 웃음을 흘린다.

  “이제 아예 막 나가시는군요, 여왕님.”

  “급해서 그랬다니까. 자기가 너무 보고 싶었어.”

  “그래도 속옷을 까먹은 건 너무 했네.”

  “오늘 말이 너무 많아.”

  딱 하나만 걸쳐서 그런지 그는 내 원피스를 사이에 두고 살을 건드렸다 물러나기를 반복한다. 그걸 벗길 노력을 하지 않는다. 역시나 내 짓궂음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러니 내가 더욱 짓궂어지지. 그에 맞춰서 따라가려니.

  “말이 너무 많아도 할 말은 해야겠는데.”

  “뭔데?”

  “그 옷.”

  “응?”

  “여왕님 같아 보이지가 않아.”

  “여왕님이 아니면?”

  “여왕님이라기엔 아주 많이 청초해서, 공주님 같아.”

  자기, 말이 너무 많아. 그 입술을 깨물었다. 내 입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혀. 그의 목을 껴안고 내 가슴으로 그의 가슴 위를 눌렀다. 누군가 아무리 힘을 쏟아부어도 떼어낼 수 없게 그렇게 달라붙었다. 그가 반동으로 나를 더 힘껏, 껴안는다. 이 순간만큼은 누가 뭐래도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거다. 그럴 거다. 천 년 만 년이 지나도 이대로 남아있을 석회암이 될 거다. 아니지. 제주도에 왔으니 그 제주도에서 유명한 돌이 뭐였더라. 그래, 제주도 현무암이 될 거다. 제주도 곳곳에 서 있는 돌하르방처럼.

  그의 동작에 점차 속도가 붙는다. 내 전신을 더욱 빠르게 훑어댄다. 나도 그가 하듯 그의 몸을 훑으려니 그가 입고 있는 옷이 방해가 된다. 하나씩 풀어내려니 단추가 왜 이렇게 많이 달렸는지.

  “난 누구처럼 깜빡깜빡, 하진 않아서.”

  짓궂게 삐뚤어지는 입술 모양. 그 아래 턱을 손에 쥐고 꼬집었다.

  “너무 말이 많다니까.”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처럼,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면처럼, 그가 채워지지 않는다. 들이켜고 삼켜도 자꾸 고프다. 바닥 위로 입고 있던 원피스가 떨어진다. 그가 내 가슴을 두 손으로 단단히 모아쥔다. 그도 나처럼 허기가 지고 목이 말랐을까. 꼭지가 아프도록 빨아댄다. 그의 그런 거친 행동이 내 안에 있는 거친 부분을 일깨운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도 몰랐던 부분을. 치고 또 치고 들어온다. 나도 그에 맞춰 쳐내고 또 쳐낸다. 그걸 넘어서진 못해도 엇비슷하게 맞춰가기라도 하려고. 마치 춤을 추며 박자를 맞추듯이.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 몸이 리듬을 타고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걸 깨닫게 된다. 나도 그런 종족이었다는 거지. 미처 몰랐을 뿐.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는다. 그도 나도. 그가 아프게 빨아댈수록 내 젖꼭지는 더욱 위를 향해 도드라진다. 팔과 다리 근육이 경직되며 뻗뻗하게 굳어간다. 그 경도가 짙어지며 내 몸이 펼쳐지자 그가 부드럽게 내 몸 위를 타고 안으로 들어선다. 쾌락은 몸 전체에 연결된 신경세포를 타고 흐르는 전기전도라고 했는데. 머리 정수리부터 저 아래 발가락 끄트머리까지 구석구석으로 그 감각이 타고 흐른다. 아주 사람을 못살게 군다. 숨이 가빠지고 의식이 희미해질 만큼 차고 오른다. 진절머리를 칠 만큼 가득 찬다. 곧 터질 듯하다. 터져나온다. 가슴 저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머리를 가득 울릴 만큼.

  아아악.

  목구멍에서부터 튀어나온다. 온몸이 떨린다. 전율이 흐른다. 그가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내 이마에 자기 머리를 대고 가만히 목을 받쳐준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요즘 자주 운다. 어제도 울었는데 오늘도 울고 있다. 이렇게 마음 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남들은 울어도 내 자신이 우는 건 용납하지 못했다. 우는 자체가 약하다는 증거니까. 그렇게 약해빠진 나를 순순히 받아줄 만큼 만만한 세상이 아니니까. 그런 내가 자꾸 울고 있다. 이러다 울보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툭, 하면 눈물을 보이는 나를 그가 너무 어리숙하게 보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도저히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다. 안에서 심한 응어리가 졌던 걸까. 아님 그가 내게 감당하기 힘든 감동을 준 것인지. 그게 뭐든지 한 번 터져버리니 감당을 못하겠다. 그저 내버려두는 수밖에. 운다. 둑이 터지듯이 울어댄다. 물이 다 빠져 바닥이 보일 때까지. 그저 모두 내려놓고 운다. 세상에 갓 태어난 신생아처럼. 그렇게 운다. 울어댄다.

 
작가의 말
 

 스토리야 웹페이지에서 용량제한을 하여 두 번에 나눠 올립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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