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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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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26
작성일 : 23-05-23 11:34     조회 : 221     추천 : 0     분량 : 8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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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석류 - 원숙미

 

  여름 초입에 들어서 분재와 화분 신품이 다량 입고됐다. 아침 나절 내내, 그것들을 비닐하우스 안에 적절히 배치하는 작업을 하는 중인데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정리 작업을 마무리하고 물조리개를 이용해 촉촉하게 적셔주는 사이 얼굴에 묻어나는 게 물인지 땀인지 모를 정도였다. 옆에서 함께 물을 뿌리던 예슬이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자 의뭉스럽게 씩, 웃음을 짓는다.

  “사람 무안하게 왜 뚫어지게 쳐다 봐?”

  “언니, 달라 보여요.”

  “오늘따라 내가 젊어 보이니? 화장품 어떤 걸로 바꿨는지 물어보려는 거야?”

  “아니 오히려 성숙해 보이세요.”

  “뭐야, 그거,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이잖아. 칭찬이 아니네.”

  “칭찬이에요, 칭찬.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하지? 꽃이 이파리를 열고 화사하게 봉오리를 피어냈다고 할까요?”

  이번엔 내가 짓궂게 미소를 지었다.

  “아유, 이번엔 아주 문학적으로 들리는데. 너무 과한 칭찬은 오히려 독이 되는 거 아닌가. 이제 마지막 꽃봉오리를 피웠으니 질 날만 남았다는 거잖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언니, 뭐랄까, 여인이 되셨어요.”

  “여인이란 표현은 또 뭐야?”

  “아, 제가 이런 거 설명 정말 못하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해도 될라나. 어떤 나이대에 이르기까진 소유할 수 없는 특별함을 이제 막 드러내게 된 거죠.”

  “왜 하필 지금이야?”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일에 치여 바쁘다는 핑계로 대화를 멈췄다. 예슬이가 묻는 질문을, 아니 내가 먼저 물었나, 곰곰이 생각해보고 싶었다. 오전 작업을 마무리 짓고 먼저 씻고 나오겠다며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벽에 걸린 거울에 이리저리 상체를 돌려가며 비춰본다. 달라진 데가 있긴 한 거야? 기미가 오른 양볼, 조금만 더 높았으면 하는 코, 비뚤한 입술까지 어디 마음에 드는 부분이 없다. 여인이 되었다고? 요즘 내 삶에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 그 사람이지. 그를 만나서 여인이 되었다니 그럼 이제까진 여인이 아니라 소녀였어? 바보 같은 생각이다. 소녀라니. 나이는 먹을 대로 먹어가지고. 아직 철이 덜 들었던 거지. 그럼 이젠 제대로 철이 들었나? 아직 한참 멀었다. 항상 성급하고, 참을성 부족하고, 눈앞에 닥친 상황에만 급급하게 대처하는 근시안인데. 오히려 내겐 다홈이가 여인이란 단어에 훨씬 잘 어울린다. 어른스럽고 차분하고 세상 물정 잘 아는 성인.

  그런 다홈이가 다급히 나를 찾았을 때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평소 무심하고 도도한 이미지가 어울리는 다홈이가 근심어린 어조로 속내를 내보여 그 무게가 더욱 가슴을 내리 눌렀다. 차에 올라타자 다홈이가 짧게 인사를 건네고 차량 물결 속으로 진입했다. 조심스레 다홈이 안색을 살폈다.

  “택수랑, 안 좋은 일 있었어?”

  잠시 앞만 보고 집중하던 다홈이가 평소와 다른 가라앉은 톤으로 대답한다.

  “미안. 이 근처는 차가 많네. 어디 들어가서 제대로 얘기하자.”

  “아니, 내가 미안해. 운전하는데 방해하면 안 되지.”

  복잡한 차량 행렬을 빠져나와 한적한 도로로 접어든다.

  “어디로 갈까? 가고 싶은 카페라도 있어?”

  “네가 골라. 속에 담긴 것 맘 편하게 꺼내기 좋을 곳으로.”

  “그럼 조용한 데로 가자. 너무 안 늦었어? 조금 멀리 나가도 돼?”

  “아직 여유 있어. 괜찮아.”

  서울과 달리 경기도 외곽 지역은 시내를 벗어나면 금세 한산해진다. 다홈이가 차를 댄 곳은 음식 맛보다는 한적하게 주변 경치 구경하며 시간 보내기 좋은 장소로 추천을 받는 카페다. 솔로이스트. 이름이 그에 어울렸다. 해가 기울어가지만 아직 완전히 어둠은 내리지 않은 어정쩡한 시각이라 그런지 카페 안 손님은 많지 않았다. 최대한 멀리 떨어진 구석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을 마치고 다홈이가 길게 숨을 내쉬더니 눈을 반쯤 올려 나를 본다. 나와 시선을 완전히 마주치지 않는 것도 전혀 다홈이 답지 않다.

  “괜찮아? 오늘 정말 너답지 않다.”

  다홈이가 물컵을 들어 입술을 축인다. 그 동작이 스산해 보여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기까지 어째 한참이 걸린 기분이 든다.

  “나답다는 건 어떤 거야?”

  “뭐어?”

  “한여은이 보는 이다홈이라는 사람은 어떤 존재야?”

  생각지 못한 질문에 답을 꺼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여기서 존재론에 관한 질문을 하는 건 뭔데? 이다홈이라. 어릴 때부터 옆에 있는 걸 당연하게 여겨온 친구라 내게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본 적이 딱히 없었다. 전화를 걸어 말을 꺼낼 때부터 진지하게 시작하더니 이런 심각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보통 때라면 웃어넘길 만한 질문이라도 이런 상황에선 그냥 넘길 수 없겠지.

  “똑 부러지는 성격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 너는 뭐든지 대강하지 않잖아. 확실한 일처리가 네 삶의 좌우명 아니던가.”

  “좌우명까지는 아니고. 무슨 일을 하든 제대로 해내는 게 좋긴 하지. 그리고 또?”

  “음, 다른 건······. 아, 쉽지 않네. 갑자기 물으면 알던 것도 안 떠오르잖아.”

  “남자들은 내 어떤 면에 끌린다고 생각해?”

  “어어?”

  이거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여자가 보는 면이랑 남자가 보는 면이 다르다는 건 알지만, 그냥 네 생각이 궁금해.”

  “내 생각이?”

  “같은 여자로서 내가 섹시한 편인가?”

  “섹시라.”

  “아니라는 거지?”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는데.”

  “그렇다고 답을 못하잖아.”

  “그게 아니라 네가 섹시한지 아닌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거지.

  “왜, 그런 건 네 전남편이 더 잘 표현해주지 않았어? 네가 사랑스럽다거나 섹시하다거나 칭찬하면서.”

  “택수는 내 어디를 보고 마음에 들어 한 걸까?”

  “응? 돈 때문이 아니었어?”

  “얘는! 자꾸 돈을 들먹이네. 돈이 삶에서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라고. 돈 문제가 아니라, ······, 나한테 고백했어.”

  마음이 반쯤 놓이고, 반쯤 복잡해진다. 사람 사이, 금전적인 문제가 얽히면 정말 지저분해지기 마련이라 그게 아니라니 다행인데, 택수가 다홈이에게 고백을 했다니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저저, 얼굴 붉히는 거 봐봐. 세상 그렇게 당당하게 사는 다홈이가 발그레한 표정을 다 짓다니.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심각한 태도였어?”

  “그럼 이건 심각한 일이 아니야?”

  “그, 그게, 그러니까, 심각하지. 심각한 건데, 내 예상이랑 완전히 빗나가서.”

  다홈이가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켜고 주위를 천천히 훑는다.

  “걔가 갑자기 그렇게 나오니까 사람이 달라 보이는 거 있지.”

  “어떻게 달라 보이는데?”

  “뭐랄까, 같은 반 동급생이라고 생각했던 애가 갑자기 교생선생님이 되어 앞에 나타났다고 할까?”

  “참, 표현하곤.”

  “지금 비꼬는 거야?”

  “비꼬는 게 아니라, 네 문학 감수성이 너무 뛰어나서 내가 감히 따라가질 못하겠어.”

  “갑자기, 교생, 선생님이 되어버렸어.”

  교생선생님이라. 그 단어를 뱉는 다홈이의 표정이 들뜬 듯해 차마 부정적인 말은 입밖에 내지 못했다. 교생선생이라는 존재는 어딘가 애틋함이 스민 동경의 대상일 텐데. 그런 감정을 가진다고? 이다홈이 임택수에게?

  “다홈아, 네가 힘든 시기를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신중하자. 괜히 말 실수하지 말고.

  “힘든 시기라니?”

  “네 전남편이랑 이혼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이런저런 일들.”

  “아, 그거. 이미 다 지나간 일이지. 쉽지 않았지만 견딜 만했어.”

  살짝, 입을 다시고 말을 이었다.

  “사람이 힘든 시기를 겪고 나면 감정적으로 변하기 쉽다잖아.”

  “그래서?”

  “그런 순간에 네가 택수한테서 고백을 받았으니까······.”

  나를 보는 다홈이의 눈빛이 약간 흔들린 듯하다. 내가 이어나가기 전에 다홈이가 먼저 말을 꺼낸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응?”

  “택수가 고백한 사실을 이성적이 아닌 감정적으로 판단할까 걱정해주는 거잖아.”

  “그, 그런 셈이지. 내 말은 말야······.”

  “아니,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어.”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다홈이. 사실 이건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할 말은 해야 하는 거고 피하고 싶어도 다가오는 현실은 직시해야 하는 법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결핍되면 한계점이 낮아진다잖아.”

  “나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그래도 한동안 연애라는 건 해보지 못하고 지냈잖아. 이혼합의에 이를 때까지 시간이 꽤 걸리기도 했지.”

  슬쩍, 미소를 흘린다.

  “왜 웃어?”

  “네가 어째 어린 사춘기 소녀 잘못 나갈까 걱정해주는 엄마 같아서.”

  나도 따라서 웃음기를 머금는다.

  “내가 널 볼 때마다 항상 그런 마음이다.”

  “진짜?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일이야 잘하지. 추진력도 좋고. 그렇지만,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 때문에 조마조마한 것도 사실이야.”

  물을 한 모금 더 들이켜는 다홈이.

  “너무 성급하게 반응하면 안 되겠지?”

  “내 말이 그거야. 너무 성급하지 말라는.”

  이번엔 얼굴 전체로 웃음이 퍼진다.

  “고마워, 엄마.”

  “어이구, 우리 딸, 언제든지.”

  잠시 주문한 음료와 티라미수 케잌이 탁자 위 단정히 자리 잡을 때까지 보고만 있었다. 가게 점원이 자리를 뜨자 다홈이가 스푼을 들어 케잌을 맛본다.

  “성급하지 말라는 거지 택수가 무조건 안 된다는 뜻은 아니야. 네 마음은 어떤데?”

  손에 든 스푼을 내려놓고 턱 아래 두 주먹을 괸다.

  “처음엔 말했던 대로 택수가 달리 보이더라고. 괜시리 가슴이 몽글몽글해지기도 하고.”

  “어련하시겠어.”

  “네 말 맞다나 이런 연애 감정 가져본 지 좀 됐잖아.”

  “그런 기분이 드는 걸 즐기지 말라는 뜻은 아닌데, ······, 성급하게 행동했다 너나 택수가 상처받을까봐 조심스러워서 그래.”

  “그렇지. 그게 가장 중요하지. 서로 상처주지 않는 거.”

  대뜸, 내 눈을 대놓고 바라봐서 약간 무안해졌다. 눈을 반쯤 내리깔자 내게 물어온다.

  “그런데 말야, 상처주지 않으려 다 피하고 살아야 해? 항상 조심하면서 모든 가능성을 내쳐버리고?”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지금? 내가 답할 수 있는 논제가 아니었다. 이것이 엄마처럼 챙겨주니까 정말 엄마한테 묻듯이 진지하게 물어온다. 나중에 현무가 커서 지금과 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다홈이가 내게 그 질문을 한 후엔 한참을 머릿속에 그게 맴돌아서 제대로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사실, 정민 씨와 함께 보낸 시간을 말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것도 어째 꺼낼 수가 없다. 저렇게 본인 문제로 고민하는 중인데 내가 보낸 여유로운 하루 내용이 귀에 들어올 리 없을 터였다. 상처주지 않고 상처입지 않는 게 중요한 건 맞다. 그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자주 봤다. 하지만 다홈이가 묻는 대로 상처입지 않으려고 다 피하고 산다면 도대체 사는 의미가 뭐지? 옛날 속담처럼 눈 가리고 귀 덮고 입 틀어막고 세상과 단절한 삶이라니. 다홈이도 굳이 나한테서 답을 얻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던지 내 대답을 기다리기보단 자기 생각 속으로 빠져든 모습이다.

  “사는 게 단순하면 좋겠어. 뭘 하더라도 이렇게 저렇게 재지 말고.”

  “그렇게 살면 머리 아플 일도 없겠지.”

  “응?”

  “방금 나한테 하는 말 아니었어?”

  “아, 미안. 그냥 나 자신한테 하는 소리였어.”

  저렇게 자기 생각에 빠진 다홈이라니. 역시 다홈이답지 않다. 애정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뒤바꿔버린다.

  “힘들어?”

  “힘들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복잡해.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니 영 불편하네. 난 목표를 정해놓고 딴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직진하는 게 성미에 맞거든.”

  “이다홈은 그래야지.”

  “앞으로 우리 모임은 어쩌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한 거.”

  “그게 왜?”

  “너는 괜찮겠어? 나랑 택수 사이에서?”

  “이전 같진 않겠지.”

  생각해보니 그렇다. 세 명이 만나는 자리에서 둘이 연애를 한다면 남은 한 명은 어떻게 되는 거지? 차라리 모른 척 해? 내가 있어서 다홈이와 택수가 어색해지려나?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으니 어색할 건 없잖아? 결국 다홈이가 최종 선택을 해야 한다. 아직 택수가 한 고백을 받아들일지 거절할지 결정하지 않았다. 비스듬히 고개를 내린 채 그 눈길은 테이블 위에 고정되어 있다.

  “택수한테 시간을 달라고 했어. 바로 그 자리에서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택수도 알겠다고 했고. 그런데 있잖아······.”

  “택수가 고백한 그 시점에서 이미 모든 게 달라진 거지.”

  “내 말이. 이건 내가 대답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택수가 말을 꺼낸 순간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졌어.”

  “그 사실이 분해?”

  “기분이 좋진 않아. 택수한테 일방적으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해.”

  “그건 좀 심한 비유 아닌가?”

  “얻어맞은 듯이 머리가 얼얼하다는 표현이야. 그 정도로 나도 충격을 받았다고.”

  연애라는 게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양쪽 당사자의 합의가 필요하겠지만 다홈이 성격에 택수에게 선취권을 빼앗겼다는 사실만으로 분할 수 있다. 게다가 다홈이가 받아들이든 거절하든 앞으로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그렇다면 다홈이에겐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사실이 당연 달갑지 않겠지.

  “우리 다음 모임 전에 네가 대답을 해야지 않겠어? 그럼 결론이 나겠지.”

  “만약 더 이상 모임을 하지 못하게 되면, ······, 많이 아쉬울 거야. 나름 좋았잖아.”

  “나한테는 한 달에 한 번 신선한 공기를 공급받는 소중한 날이었어.”

  “마치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했잖아. 쉼없이 떠들고 먹고 마시고.”

  “택수가 나오지 않는다고 모임을 중단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택수없이 우리 둘이서 만나곤 했던 때로 돌아가는 거지.”

  “택수에겐 어떤 구실을 대지?”

  “일방적으로 나오지 말라고 통보할 거야?”

  이번에도 내 시선을 피하는 다홈이.

  “내가 받아들여도 거절해도 모임 분위기가 어색해질 텐데. 받아들이면 네가 우리 중간에 끼인 꼴이고, 거절하면 택수가 정기적으로 날 만나고 싶겠어?”

  이거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하다. 그래, 다홈이 말이 맞다. 이렇게 저렇게도 예전 같을 수가 없다. 차라리 확실히 결론을 내리는 게 낫겠지.

  “나는 네가 너 자신에게만 오롯이 집중해서 판단했으면 좋겠어. 나나 택수는 더 이상 염두에 두지 말고. 우리는 네가 어느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든 어떻게든 살아갈 거야. 그러니 스스로에게 진솔해지라고. 주변 사람들 때문에 생겨나는 부담감은 모두 내려놓고.”

  말이 없다. 쉽지 않을 거다. 이럴 땐 빨리 답을 하라고 재촉할 게 아니라 가만히 기다려주는 게 상책이다. 그저 옆에 있어주면서. 결국 다홈이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평소보다 말수가 무척 줄어든 다홈이와 별다른 얘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괜찮다고, 충분히 시간을 가지라고, 그렇게 다독여주기만을 반복했다. 시부모님 댁 앞에 나를 내려주고 멀어져가는 다홈이 차량 뒤편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차에 가려 보이지 않는 그 뒷모습이 왜 그렇게 시린 이미지로 상상이 되던지. 상상만으로 가슴이 이렇게 아플 수가 있다는 사실이 참 낯설었다. 고장난 냉동창고에 갇혀 얼어죽었다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가 거짓이 아니구나, 새삼 이해가 된다.

  “이제 많이 더워졌잖니. 애 얇은 옷으로 입혀라. 땀을 많이 흘려 벌게진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야.”

  요즘 한창 기온이 오르긴 했다.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는 나지만 여름이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특히 현무가 더운 날씨에 땀띠가 나서 고생하는 걸 보는 건 고역이다. 안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거기다 어머님이 저렇게 한 소리 하시면 이건 아픈 상처에 제대로 소금을 뿌리는 꼴이다. 누가 모르냐고. 잠시만 정신을 딴 데 두고 있으면 어느새 계절은 바뀌어있고 애는 앞서서 그 바뀐 계절에 예만하게 반응을 한다. 유모차를 끌고 가다 한 번씩 현무를 둘러보면 어머님이 말한 만큼 나빠 보이진 않는다. 어찌나 현무 일이라면 법석을 떠시는 분이라. 차가운 물에 식히기만 하면 금방 괜찮아질 건데 그리 야단이시다. 웃겨.

  어, 저 여자? 정민 씨 회사 동료잖아. 그 재수덩어리. 왜 우리 가게에서 나와? 남편이 따라 나온다. 어라. 명함을 건네잖아. 어쩜 저렇게 명함 건네는 자세도 재수가 없어 보이지. 지가 무슨 왕족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역시 돈은 꽤 있나 보군. 차가 수입외제찬데. 저 동그란 오륜기 달린 차량 이름이 뭐더라. 아, 동그라미 네 개다. 그럼 사륜기인가? 그녀가 차를 몰고 사라지는 걸 바라보다 남편을 향해 다가갔다.

  “현무 아빠.”

  “왔어.”

  “그 여자 누구야?”

  “누구?”

  “방금 당신이 배웅까지 해줬잖아.”

  “아니, 별 사람 아니야. 영업하러 온 사람.”

  “그런 사람을 배웅까지 해줘?”

  “예의상 그런 거지.”

  그러고선 쑥,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오늘따라 다들 말을 많이 하지 않으려 든다. 그런 날이 있긴 하다. 말을 꺼내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드는 날. 그저 혼자만의 동굴 속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날.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거기서 억지로 꺼내려 들면 역효과가 날 건 뻔하다. 하지만 그걸 보고만 있으려니 나도 답답하다고. 언제까지 참고 기다려줘야 하는지 기한이라도 준다면 좋겠는데 이건 기약없이 기다려야만 하니 고역이다. 그럼 나 혼자서라도 답을 찾아야하나? 가만, 정민 씨 회사 동료니까 그녀가 영업하러 여길 왔다는 건 무슨 의미지? 부동산 회사 직원이 영업하러 왔다고? 부동산 회사가 하는 영업이라면 건물을 사고파는 일이잖아? 설마 가게를 팔 생각을 하는 거야? 아님 가게를 하나 더 내려고? 말도 안 돼. 지금도 이렇게 바쁜데? 아님 이 사람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당장이라도 따라가서 따지고 싶은데 역효과가 걱정되어 억지로 마음을 내리눌렀다. 아니야, 지금 꺼내려 든다면 동굴이 무너져 깔린다니까. 그럼 안 된다고. 남편과 다홈이 얼굴이 번갈아 떠올라 교차한다. 내 주위에 가슴이 심란한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진 거야? 다홈이 말처럼 사는 게 단순하면 참 좋을 텐데. 지금은 남편을 귀찮게 하지 말자. 어렵사리 자신을 다독이며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사이 속에서 질문이 끊이질 않는다. 어째 집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또렷해진다. 정민 씨와 그녀는 가까운 동료 사이로 보였다. 그럼 정민 씨는 그녀가 우리 가게에 방문한 목적을 알고 있을까? 그에게 물어봐야 할까? 잠깐 동안 너무 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무래도 오늘 밤엔 일찍 잠들지 못할 듯하다. 그런 날이 있다. 생각이 너무 많아 잠이 오지 않는 날. 오늘이 그런 날이다. 여름에 들어선 그런 날.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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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경계 - 19 2023 / 5 / 4 229 0 8725   
18 경계 - 18 2023 / 5 / 3 228 0 10760   
17 경계 - 17 2023 / 5 / 1 229 0 6719   
16 경계 - 16 2023 / 4 / 28 225 0 5667   
15 경계 - 15 2023 / 4 / 27 226 0 6666   
14 경계 - 14 2023 / 4 / 26 239 0 5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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