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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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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23
작성일 : 23-05-15 13:01     조회 : 228     추천 : 0     분량 : 17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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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금목서 – 마음을 끌다

 

  사람 마음을 단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이런저런 감정이 복잡하게 섞이거나 심지어 반대 감정이 공존하기도 한다. 이중감정. 현재 내 속이 그렇다. 묘한 기대감으로 인한 흥분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이 뒤섞여 아주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 혼란스러움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저 가슴 밑바닥 아래 꾹꾹, 눌러 담으려 노력하지만, 그게 의도한 만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렵다. 잠시라도 방심한 사이, 내 몸과 얼굴에 흔적이 드러난다면, 그래서 누구에겐가 들켜버린다면, 하는 상상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감정이란 게 이리 조절하기 어렵다니. 그걸 아주 제대로 체험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실이 원망스럽긴 한데, 어쩐 일인지 아침에 가뿐히 일어나게 된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 상쾌한 컨디션으로 침대 밖으로 나온다. 심지어 오후 당번으로 매장 마무리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 늦게 잠들어도 아침엔 쉽게 깨어난다. 뭐지, 이 변화는? 다가올 내일에 대한 기대감?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마음이 바뀌었다고, 당신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그에게 말해버리면 이전과 동일한 생활로 돌아갈 터였다. 말 한마디면 그저 아무 일 없듯이 돼버릴 걸 무슨 대단한 일인 것처럼 소란을 피우는지. 그를 알아갈수록 실망하게 될지도 모르고, 상황에 치여 다 놓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고, 아님 그가 누군가 만나 결혼한다고 할 수도 있는 거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언니, 어디 전화 올 데 있어요?”

  “응?”

  “자꾸 휴대폰 확인하시기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일은 무슨. 아니야. 나도 요즘 휴대폰 중독됐나 봐. 자꾸 폰 확인하게 된다.”

  “그러게요. 현대인들 하루에 휴대폰 붙잡고 보내는 시간이 너무 많다고 비판하는 소리가 높더라구요. 심지어 휴대폰 디톡스가 유행이래요.”

  “휴대폰 디톡스?”

  “휴대폰에 중독되서 쌓인 독을 풀어내자는 거죠. 일정 시간을 정해놓고 그 사이에는 휴대폰을 아예 꺼버리고 지내는 거예요. 저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공감은 하는데 막상 휴대폰을 꺼놓고 하루를 보낸다고 상상하니 끔찍한 기분이 드는 거 있죠. 실천할 엄두는 나질 않네요.”

  내게 필요한 건 휴대폰 디톡스가 아니라 박정민 디톡스 같다. 그 사람 때문에 자꾸 휴대폰을 보게 되니까. 그렇지만 디톡스라고?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는데? 이러다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물불 안 가리고 마구 뛰어들게 되는 거 아닐까? 내가 그럴 거라는 게 믿겨지지 않고 그러길 원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이성적이어야지 본능적으로 살면 망하는 지름길로 바로 향하는 거니까.

  “가면무도회 끝나고 영식 씨랑은 잘 들어갔어?”

  “네, 그럭저럭요.”

  “얘는. 그럭저럭은 또 뭐야?”

  “그냥요.”

  그냥요, 라. 한창 보기만 해도 꿀이 뚝, 뚝, 떨어져야 하는 시기에 그 표현은 또 뭐냐고.

  “왜? 또 싸웠어?”

  “언니가 또 싸웠어, 라고 물으니까 꼭 우리가 맨날 싸우기만 하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아니에요. 싸우긴요.”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이전에 다투고 나서 화해 잘했잖아.”

  “그게 그러니까요.”

  연애상담이라는 게 그렇다. 내 앞가림도 잘 못하면서 남 일엔 감 놔라, 배 놔라 간섭하게 된다. 상담을 청하는 사람도 딱히 어떤 답을 바라는 게 아니라 털어놓고 싶은 상대가 필요한 거고.

  “언니, 유현상이 얼마 전에 파혼했었잖아요.”

  “유현상? 그, 그랬었나? 그랬지, 아마?”

  “사람 일이라는 게, 그게 어디 단칼에 무 자르듯이 딱 정해지나요. 남녀가 만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도 하는 거죠.”

  “그으렇겠지?”

  “영식 씨가 함부로 험담을 하잖아요. 사람이 지조가 있어야지, 이러면서. 연애하는 데 지조가 중요한 게 아니죠. 두 사람 사이 감정이 아직 살아있다면 그걸 포기하지 않고 가꾸어가는 게 얼마나 아름다워요. 우리 유현상이 그동안 마음고생 얼마나 많이 했는데. 이제 행복해질 때가 됐다구요.”

  우리 유현상? 이젠 아주 가족처럼 말하는구나.

  “어어, 누구나 행복해지면 좋은 거지.”

  뭐야, 이런 것도 진지하게 대꾸해줘야 해?

  “영식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은근히 좀생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아요. 그러니까요······.”

  띠링. 문자다. 문자가 왔어.

  “잠시만. 나, 이거 확인 좀 하고.”

  별 것도 아닌 걸로 열을 내고 있다. 어휴, 그 나이 때 연애질이 그렇지. 사소한 걸로 화내고 사소한 걸로 감동 먹으니까. 지금은 내 앞가림하기도 바쁘니까 예슬이 연애상담은 이걸로 끝.

  ‘점심은 뭘 먹을 거예요?’

  정민 씨다. 그런데 갑자기 점심은 왜? 참, 이 사람 밑도 끝도 없다. 자주 이러니까. 그걸 그냥 받아주고 싶진 않다.

  ‘오늘 날씨가 반반이네요.’

  ‘반반?’

  ‘햇살 반에 구름 반이요.’

  ‘아주 문학적인 표현이네요.’

  ‘소싯적에 책 좀 읽었어요.’

  ‘반반 하니까 짜장 반에 짬뽕 반이 떠오르네요.’

  아니 문학적인 표현에 그런 대답은 뭐냐고.

  ‘그건 그닥 문학적인 표현은 아닌데요.’

  ‘점심 질문엔 아직 대답을 못 받아서요.’

  ‘갑자기 점심은 왜요?’

  ‘함께 먹을래요?’

  잠시 멈춰있었다. 점심 함께 먹자고 묻는다. 받아들여야 할까 거절해야 할까. 거절할거면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제 와서 겁난다고 피해 다니기엔 늦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곧 점심시간인데 너무 갑작스레 묻는군요.’

  ‘솔직히 말해서 원래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펑크가 났어요.’

  ‘그럼 나보고 대타가 돼달라는 건가요?’

  ‘여은 씨와 알게 되서 그런 덕도 보는 거죠.’

  사실 정민 씨가 아니면 혼자서 먹을 점심이었다. 한 사람은 가게를 지켜야 하니 예슬이와 함께 식사를 할 수는 없다. 혼자 먹는 점심에 이골이 나기도 했다.

  ‘외롭게 점심을 먹어야만 하는 정민 씨를 위해 큰 선심 쓰겠어요. 제가 구조해드리죠.’

  이런 건 제대로 우려먹어야지. 두고두고 생색을 낼 거니까.

  ‘이거 황송해서 말로 표현할 수가 없군요. 말 나온 김에 짬짜면 먹을까요?’

  ‘아니, 구조해주니 겨우 중국집인가요?’

  ‘중국집 음식을 하찮게 보시는군요. 나름 고급메뉴도 많아요. 유산슬이나 팔보채는 웬만한 경양식집 한 끼 가격보다 세답니다.’

  ‘짬짜면은 가장 기본 메뉴잖아요.’

  ‘그건 제가 먹을 테니 여은 씨는 드시고 싶은 거 드세요.’

  ‘몇 시에 어디로요?’

  ‘근처에 자주 들르는 곳 있으세요?’

  가까운 곳에서 그와 식사를 하길 원치 않았다.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러운 게 솔직한 심정이니까.

  ‘근처보다 어디 나가서 먹으면 안 될까요?’

  ‘그러죠. 바람도 쐴 겸.’

  그가 점심시간에 맞춰 데리러 오겠다고 한다. 막상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들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조금씩 그 시간이 다가올수록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반복해서 시계를 확인하다 의아해하는 예슬이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화분을 옮기는 중 그만 떨어뜨려버렸다.

  “언니, 괜찮으세요?”

  “괜찮아, 괜찮아. 내가 이리 조심성이 없네.”

  내 안색을 살피는 예슬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도처에 널브러진 흙을 주워 담는다. 예슬이는 물러갈 생각은 않고 그런 내 등 뒤에서 취조하듯 물어온다.

  “아무래도 일이 있긴 있죠? 아침부터 연신 휴대폰 확인하고 일하는 것도 허둥지둥하며 집중 못하잖아요. 누가 아프기라도 해요?”

  “아니야. 아픈 사람도 없고 어떤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컨디션이 살짝 그렇네. 너무 신경 쓰지 마.”

  “몸 안 좋으시면 일찍 들어가실래요? 제가 마무리해도 되는데.”

  “아니라니까. 괜찮으니 걱정 안 해도 돼.”

  괜찮다고 하는데도 예슬이는 걱정하는 안색을 바꾸질 않는다. 이럴 땐 착한 것도 병이다. 그냥 넘어가도 될 텐데 워낙 주변 사람 잘 챙기는 아이라 관심의 끈을 놓질 않는다. 딱히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일부러 화원 안쪽을 들락거렸다. 그렇게라도 예슬이 시선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이런 죄책감이 든다는 게 싫다. 그건 뭔가 옳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가 보내는 신호니까.

  “안녕하세요. 배달 물품 받으러 왔습니다.”

  “네. 잠시만요.”

  요즘엔 배달 문화가 발달해서 직접 화원에 들르지 않고 저렇게 화분을 배달시키는 경우가 흔해졌다. 예슬이가 배달하러 온 사람의 주문 사항을 확인하고 포장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요. 화분 하나에요. 혼자서도 충분하답니다.”

  다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예슬이. 본인이 괜찮다는데도 자꾸 저런다.

  “언니는 어디 앉아서 잠시 쉬세요. 지금 바쁘지도 않고.”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다.

  “그럼 안쪽 정리하고 있을게. 나 필요하면 불러.”

  예슬이 대답은 듣지도 않고 서둘러 안으로 향한다. 이럴 땐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 어찌나 챙기려 드는지. 호의라는 게 그렇다. 호의를 받아들이는 상대방이 그걸 고맙게 받아들일 때야 호의가 되는 거지, 원하지 않는 호의는 섣부른 간섭이나 주제넘은 참견이 돼버린다. 그게 도를 넘어버리면 심지어 스토킹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받는 사람이 체하지 않도록 적당히 주는 게 중요하다. 정말로.

  물을 준 지 얼마 되지 않은 묘목들 앞에 쭈그리고 앉아 괜히 물조리개를 흔들어댔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필요치 않는 호의는 안 주니만 못하다고 해놓고 나야말로 필요치 않은 물을 뿌려대고 있다. 나 때문에 엄한 너희가 고생이다. 나보고 스토커라고 할 거야?

  “있잖아. 너희는 항상 그 자리에 지키고 서서 누가 오면 오나 보다 가면 가나 보다 다 받아주고 다 보내주잖아.”

  입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이 술술, 흘러나온다. 입사시험 면접 같은 데서 이렇게 언변이 좋으면 합격은 따논 당상이겠지.

  “나도 너네처럼 그럴 수 있을까? 내 앞을 지나치는 누구라도 그저 무심하게 받아주고 보내버리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누구도 내 소관은 아니라는 거지. 그저 열심히 싹을 틔우고 위로 쑥쑥, 자라기만 하면 된다고.”

  짙은 녹색을 싱싱하게 머금고 있는 잎 끝자락을 툭, 건드려본다. 살짝 위아래로 흔들렸다 멈춘다.

  “나만 잘하면 된다고 말야.”

  가지에 매달렸던 물방울 하나가 아래로 떨어져 바닥을 적신다. 물기가 퍼져나간다. 나만 잘하면 된다고? 그게 말처럼 쉬워? 아무리 착하게 살아보려 해도 가만히 두질 않는 게 세상이다. 매일 감사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하게만 대하며 살면 좋겠지만 어디 그게 마음먹은 대로만 되냐고. 누구나 그러길 바라겠지. 항상 칭찬만 받고 싶고 좋은 소리만 듣고 싶은 게 사람 천성이잖아. 그렇지만, 아무리 잘하려 해도 뜻대로 되질 않을 때가 있고, 아니 그럴 때가 더 흔하고, 뜻은 잘하려 한 건데 그걸 그렇게 받아들여주질 않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얼마 전, 점심시간이라 예슬이가 식사하러 나가고 혼자 있는 와중 갑자기 손님이 여럿 들이닥쳤다. 당연히 혼자서 여러 손님을 한꺼번에 상대하려니 제대로 된 접대가 되지 않는다. 이미 그런 상황이 성에 차지 않았던 손님 한 명이 화분을 골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이거 포장해주세요.”

  “잠시만요.”

  자기보다 먼저 온 손님을 접대하는 중인 걸 보면서도 자신의 주문을 외쳐댄다. 손목에 찬 시계를 반복해서 확인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누군가 쳐다보고 있으면 익숙한 일도 손에 제대로 잡히질 않는 법이다. 어느 순간 관자놀이 주위로 땀이 맺힌다. 항상 하던 일인데 왜 이리 더딘지. 날아오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며 손을 바삐 움직였다.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하고 그 손님에게 가려 했었다.

  “저기요.”

  “네, 금방 갈게요. 여기 거의 다 끝나가요.”

  “저, 점심시간 다 지나서 얼른 돌아가야 한다구요. 이 멍청한 화분 하나 때문에 누구 잘리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빨리요!”

  빨리요, 라는 말꼬리 톤이 매섭게 위로 올라간다. 앞에 서 있던 손님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화난 인상의 그녀를 쳐다본다. 그 시선은 안중에도 없다. 팔짱을 단단히 낀 채로 나를 노려보는 눈길을 거두질 않는다. 오히려 무안해진 맞은편 손님이 낮게 속삭인다.

  “전 괜찮으니 저기 먼저 가보세요. 잠시 기다려도 돼요.”

  그 손님이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무례한 손님을 먼저 해주기 싫었다. 저렇게 나오는데 누가 제대로 대우를 해주고 싶겠나. 오히려 이렇게 친절한 손님을 더 잘해줘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게 내 마음이었지만 그게 또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불평 실컷, 늘어놓으며 게시판에 나쁜 평을 함부로 올려대는 게 저런 손님들이니까. 급한 불부터 먼저 꺼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사과를 건네고 그 화난 손님을 상대하러 가는 발걸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사람에게 월급을 주진 않는다. 하기 싫은 일을 하니까 돈이 넘어온다. 그 손님은 단단히 화가 났는지 포장을 끝낼 때까지도 팔짱을 풀지 않고 계속 노려보고만 있다. 나를 힘들게 하겠다는 속셈이겠지. 아무 말 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것도 은근히 사람 피곤하게 한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 사과를 건네고 결제를 했다. 사과할 일을 한 적 없는데도. 인사 한 마디 없이 홱, 돌아서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얼음짱처럼 차갑다. 저런 냉기를 뿜어내는 것도 능력이겠지. 누군지 모르지만 저런 사람 아래서 일해야 하는 직원이 불쌍해진다. 남 걱정해줄 만큼 내가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항상 고객에게 친절하자, 최선을 다하자, 고 다짐하지만 그게 상황이 받쳐주지 않을 때가 여러 번이다. 내가 분신술이라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한계에 도달하는 법이다. 그런 한계치는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뛰어넘을 수가 없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상황 때문에 좌절하게 되면 이유야 어떻든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못한다.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해도 가슴 아래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죄책감을 완전히 쫓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건 나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아무리 위로해도 며칠간 찝찝하게 따라다닌다. 제대로 된 실패작이라는 오명을 스스로에게 씌우면서.

  “너한테는 빨리 오지 않는다고 화내는 사람은 없겠지. 가만히 서서 자리를 지키는 게 네 일이니까. 나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일하면 좋겠다. 그럼 세상만사 스트레스 받을 일이 뭐가 있겠어. 아닌가? 그럼 너무 재미없으려나?”

  앞에 자리한 이파리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문득, 같은 녹색이라도 다양하다는 걸 깨닫는다. 아주 짙은 녹색부터 옅은 연두색까지 천차만별이다. 어쩔 땐 하나같이 전부 동일해 보이던 게 이리 다르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니 너무 만만하게 봤다 보다. 여기 화원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직원은 누구나 거기서 거기처럼 보이겠지. 아무런 특색도 없고 동일한 유니폼을 입은 직원 중 하나. 그건 나라고 예외가 아니다. 마트에 장 보러 가면 계산대에 서서 고객을 기다리는 직원들 모두가 거대한 대형기계를 잘 돌아가게 만드는 부속품처럼 느껴진다. 그들 중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인사를 건넨 기억이 없다. 나조차 그러질 못하면서 내 일터에서 손님한테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기대를 하면 안 되는 거겠지만, 괜한 트집 잡아서 진상부리는 일만 좀 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것만 정말 바란다. 그런 일 겪고 나면 다음날 일 나오는 거 자체가 고역이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된다고, 네가 부럽다고 했지만, 대신 평생 움직이지 못하고 그렇게 못 박혀 있기만 해야 하니 그것도 견디기 힘들 거 같아. 취소할게. 너처럼은 못 살 거 같다.”

  너라고 어디 힘든 점이 없기만 하겠어. 다 살면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거지.

  “언니, 식사하러 안 가세요?”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정민 씨와 약속한 시간이 촉박하다. 지금부터 서둘러도 어차피 늦을 듯했다.

  “점심시간 다된 것도 모르시고. 진짜 무슨 일 있죠?”

  도무지 통할 것 같지 않지만, 예슬이에게 반복해서 아니라고 부인하고 허둥지둥, 밖으로 나섰다. 일부러 화원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만나기로 해서 발을 다급하게 놀렸다. 약속시간은 이미 지났고 그걸로 얼마나 사람을 핍박할지 눈에 선하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그 사람,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의 차를 보는 건 처음이다. 뒤에 커다란 짐을 싣기 용이한 남편의 트럭과 달리, 스포틱한 느낌이 살짝 드는 세단이다. 택수가 이전 모임에서 했던 말이, 어떤 차를 고르는가도 그 사람 성격을 나타낸다고 했는데, 그 당시에는 나와 다홈이 둘 다 동의하지 않았었다. 차는 차일 뿐이라고. 이제 보니 그 말에 약간 수긍이 가기도 한다.

  “오래 기다렸어요?”

  입 주위로 옅게 떠오르는 짓궂어 보이는 미소. 경고등이 켜진다. 주의! 주의!

  “오래, 기다리긴 했는데 괜찮아요. 일이 바빴나 보죠?”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단어를 잘 골라야 해. 어떻게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지 모른다고.

  “딱히······.”

  아니다. 차라리 바빴다고 하는 게 나을 듯.

  “그게, 정신이 없었어요. 손님이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서요.”

  “딱히, 정신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내 말은, 딱, 손님이 갑자기 들이닥쳤어요.”

  의뭉스레 쳐다보는 눈길. 밖으로 나서더니 내 앞에서 차 문을 열어준다.

  “어째, 단어 선택이 평범하지 않으신데요.”

  그게 누구 때문인데.

  “앉으시죠.”

  날 위해 누군가 차 문을 열어주니 은근히 기분이 괜찮다.

  “친절하시기도 하셔라.”

  “아무에게나 그렇진 않죠.”

  “어머, 전 그럼 아무나 수준은 넘는 거군요?”

  “쭉, 그래왔는데 이제 깨달으셨나 보죠?”

  “제가 그런 걸 알아채는 데 둔해요.”

  차 문을 닫아주고 운전석으로 넘어가 앉는 그. 그의 손이 날 향해 쑥, 넘어온다.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사리니 그가 조금 더 짓궂게 웃는다.

  “안전벨트.”

  괜히 튀어나오는 헛기침.

  “굳이 그렇게까지 안 챙겨주셔도 되는데요. 안전벨트 정도는 저 혼자서도 잘 채울 수 있어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려구요. 처음부터 안 했으면 안 했지, 시작을 했으면 뭐든 완벽하게 하자는 게 제 인생 좌우명 중 하납니다.”

  “이제 보니 완벽주의자셨군요. 너무 그렇게 살면 심장에 무리가 온다던데요.”

  “어휴, 제 건강까지 챙겨주시고.”

  “차 얻어타고 가다 사고날까 염려되세요.”

  풋. 옅게 터지는 그의 웃음.

  “조금 챙겨주시는 것도 별로 나쁘지 않을 텐데요.”

  “지금 제가 챙겨주길 바란다고 하시는 건가요?”

  “챙겨주는 걸 싫어할 사람은 없겠죠.”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그가 나를 향해 눈길을 줬다 다시 앞을 본다.

  “왜요? 뭐라도 묻었나요?”

  “어디를 어떻게 챙겨드려야 할까 가늠하는 중이었어요.”

  “나름 볼만 하죠?”

  큭. 이번엔 내가 웃음이 터졌다.

  “차암, 자기 자존감이 높으신 분이네요.”

  “타인의 존중을 받는 게 쉽지는 않으니 스스로라도 존중하며 살자고 다짐했죠.”

  “도대체 좌우명이 몇 개에요?”

  “뭐,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여남은 개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추가할 의향도 있구요.”

  “이렇게 운전까지 해주시는데 감사의 뜻으로 하나 지어드릴까요?”

  “이거 영광인데요.”

  그가 차 시동을 건다.

  “말을 꺼내기 전 한 번 더 생각하자, 어때요?”

  살짝,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

  “그거, 제가 함부로 말을 한다는 의미인가요?”

  “아니, 꼭 그렇다기, 보다는, 조심하며 살면 좋지 않겠어요? 혀 아래 도끼 들었다잖아요.”

  “도끼요?”

  “말을 잘못하면 도끼로 찍어대는 것처럼 상대가 상처를 입게 하죠.”

  “아무리 그렇지만 여은 씨가 도끼 휘두르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드네요.”

  이번엔 입꼬리뿐만 아니라 눈꼬리까지 따라 움직인다.

  “그건 비유잖아요. 게다가 도끼는 몸에 상처를 입힐 뿐이지만 말은 영혼에 상처를 입힌대요. 그 상처는 죽을 때까지 안고 간다구요. 이봐요. 지금도 난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그저 장난조로만 받아들이시네요.”

  “뭐든 중도를 지키는 게 좋지 않겠어요? 여은 씨는 진지한 쪽으로 기울어진 듯해 저는 그 반대쪽으로 기울어 균형을 맞추려는 거죠.”

  “그럼 이제 내가 그쪽으로 가볼게요. 정민 씨가 그 맞은 방향으로 기울어 보시죠.”

  차가 슬쩍, 한쪽으로 쏠렸다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이, 참. 차가 아니라 정민 씨 태도요. 절대 진지해지진 못하겠죠?”

  흐흐흐. 참기 힘들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그렇다면 여은 씨는요?”

  “제가 뭘요?”

  “균형을 맞추려면 여은 씨도 기울어야죠.”

  “그래서요?”

  이제 완연한 웃음기가 그의 얼굴 전체로 퍼진다.

  “한 번 제대로 웃겨보시죠.”

  “네?”

  “진지함의 반대는 가벼움이나 유쾌함이 아닐까 싶은데요. 가벼운 농담으로 저 유쾌해지게 해주시죠.”

  말문이 턱, 막힌다. 그가 요구하는 건 절대 내가 잘하는 분야가 아니다. 나보고 웃겨보라고? 그것도 당신 같은 사람을? 어, 떻, 게?

  “그게, 반드시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그쪽으로 가볼 테니 나보고 맞은 방향으로 가라고 한 건 여은 씨였죠, 아마?”

  “꼭 그럴 때만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군요.”

  “이런, 가벼워도 불만이고 진지해도 안 되고 그럼 저는 어쩌죠?”

  은근히 이렇게 사람 자극한다. 내가 한다고, 해.

  “아니요. 저도 제가 꺼낸 말 물리고 싶지 않네요. 정민 씨 웃겨볼게요.”

  “기대하죠.”

  세상에. 저, 저, 봐. 아주 신이 났다. 능글거리는 표정 위로 얄미운 미소가 제대로 덧칠해진 인상이라니. 어쩌면 지금이 좋은 기회다. 얼굴에 웃음기가 남아있을 때 웃기는 게 더 쉽지 않겠어? 어떤 농담을 해주지? 내가 요 근래 들었던 재미난 얘기가 뭐가 있더라?

  “나리라는 이름 예쁘지 않아요?”

  정면을 주시한 채 고개만 얕게 주억거린다.

  “그런데 성이 미씨래요.”

  나를 향해 눈길을 줬다 거둔다. 찌그러지는 그의 미간. 이어지는 침묵. 점점, 그 침묵을 견디는 게 힘들어진다. 공연스레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똑, 똑.

  “그러다 부러지면 어떡하려구요?”

  손이 멈춘다. 손가락 관절 꺾기는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행동이다. 어릴 때 엄마가 하지 말라고 나무라던 기억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 습관이 고쳐지진 않았다.

  “그렇게 약하진 않아요.”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닌 듯한데요.”

  “긴장하면 저절로 하게 돼요.”

  “긴장했어요?”

  “재미없어요?”

  잠시 침묵.

  “흠. 그거 거의 아재개그 수준이던데. 아재는 아니니까 숙모개그라고 할까요?”

  “이봐요. 제대로 곱씹으면 나름 웃겨요. 미나리라니까요, 미나리. 안 웃겨요?”

  허헛. 허파에서 겨우 비집고 나오는 탄식 같지만 웃은 건 웃은 거다.

  “어, 웃었다.”

  “저기 이건 웃음이라 할 건 아닌데.”

  “지린 그것도 그거래요.”

  “그것이 뭐죠?”

  “알면서 굳이 그걸 물어야겠어요?”

  “몰라서 묻는 건데요.”

  “으휴, 정말.”

  탁, 그의 오른팔과 가슴팍 사이를 때렸다. 이건 때렸다고 할 수 없고 거의 건드린 수준이었는데, 그만, 차가 휘청거린다.

  “어머.”

  놀라서 다급히 차 가장자리를 집고 자세를 가다듬는다. 그런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가관이다. 저 능글맞은 미소.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운전하는 사람 폭행하면 큰일 납니다.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요.”

  “그게 무슨 폭행이에요? 살짝 건드린 것뿐이잖아요. 그렇다고 운전대를 그렇게 돌려대는 거예요, 지금?”

  내 목소리 톤이 올라가자 다시 차가 휘청, 거린다.

  “저기요!”

  한층 더 톤이 올라갔다. 이 사람이 보자보자 하니까.

  “운전하는 사람 놀래키면 당연히 차가 제대로 갈 리 없죠.”

  빠아앙. 뒤에 있던 차가 앞질러가며 경적을 울린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이 차창을 내리며 확연히 욕지거리가 들리도록 소리를 지른다. 그걸 듣고는 욱, 하고 속에서 올라와 대뜸 맞고함을 질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하게 말씀하시는 거 아녜요!”

  그가 내 팔을 툭, 건드린다. 그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면서.

  “욕 먹을 짓을 하긴 했죠. 뒤에서 앞차가 왜 이러나 걱정도 되고 짜증도 나고 그랬을 겁니다.”

  이번엔 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그러니까 욕 먹을 짓을 왜 해요!”

  “이 정도는 돼야 제대로 기울어졌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지금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세요?”

  “얼굴이 발개졌어요.”

  내 얼굴이 붉어진 걸 보고 좋다고 웃음이 나와? 웃음이 나오냐고?

  “그럼 죽을 뻔했는데 표정 하나 안 변할 만큼 철면피는 아니거든요.”

  “설마 그렇게 쉽게 죽을 정도로 운전을 못하진 않는답니다.”

  더 이상 말대답을 하기 싫어 잠시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화 많이 났어요?”

  차 속력이 줄더니 도로를 빠져나온다. 좁은 길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식당이 보인다. 중화요리 식당이 있을 만한 위치가 아닌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다 왔습니다.”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조심스럽다. 이제야 내 기분이 신경 쓰이나 보지?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언짢은 건 아니죠?”

  팔짱을 낀 채로 앞만 보고 있으니 쿡, 쿡, 내 팔을 찔러댄다.

  “왜 이래요?”

  “기분 풀고 밥 먹으러 들어가자구요.”

  약간, 고민했다. 이대로 넘어갈까, 아님 좀 더 성질을 부릴까? 아주 비싼 밥 얻어먹는 걸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그럼 내가 먹고 싶은 대로 주문할 테니 말리지나 마세요.”

  “들어가 주시는 걸로 감사하죠.”

  “그리고 앞으론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은 치지 말아주세요. 장난치다 저 세상 가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더욱 조심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냥 하는 말이지만, 장난치다 떠나는 것도 그닥 나쁘지 않잖아요?”

  “장난치다 떠나는 거요?”

  “고통 속에 허덕인다거나 죽지 않으려 집착하다 떠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말입니다.”

  안으로 들어서며 속으로 감탄했다. 중화요리 식당이라고 하기엔 인테리어가 엄청 고급스러웠다. 하기야 위치 자체가 평범한 중화요리 식당이 자리 잡을 곳이 아니다. 이건 뭐 짜장면 한 그릇도 엄청 비싸겠다. 손님은 우리가 유일하다. 평일 이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올 손님이 많진 않겠지. 창밖이 보이는 자리에 앉으며 하던 대화를 이어갔다.

  “사람이 죽는 일인데 그렇게 쉬울 수만은 없겠죠.”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자는 뜻은 아닌데, 죽는 과정이 반드시 고통스럽거나 심각해야만 하나 의문을 가져볼만 하죠. 세상만사 받아들이기 나름이잖아요.”

  종업원이 다가와서 주문할 음식을 묻는다.

  “저는 짬짜면 주세요.”

  “죄송한데 저희는 짬짜면을 따로 팔지 않거든요.”

  굳이 이런 곳에 와서 짬짜면을 찾냐, 는 의도가 몸짓 위로 역력하게 드러난다.

  “그럼 짜장면 하나, 짬뽕 하나 주세요.”

  “그걸 다 먹게요?”

  “다 못 먹으면 남기죠.”

  “저는 음식 낭비하는 거 못 보는 성격이거든요. 그럼 하나씩 시켜서 저랑 나눠먹어요.”

  “아니, 아주 값비싼 요리라도 시킬 것처럼 기세등등하시더니 겨우 짜장면과 짬뽕인가요?”

  듣자하니 그렇다. 제대로 등쳐먹겠다는 듯 정민 씨에게 으름장을 놓고선 결론은 짜장면과 짬뽕이라니. 이건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무조건 싸고 양 많은 것부터 찾는 내 천성이다. 아무리 내 돈 나가는 상황이 아니라도 비싼 음식을 주문하는 건 주저하게 된다. 그 돈을 훨씬 알차게 소비할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자동으로 머릿속에 올라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버릇은 뼛속 깊숙이 자리 잡아 죽을 때까지 뽑아내기 힘들겠지.

  “점심식사 마치고 다시 일하러 돌아가야 하는데 너무 거나하게 먹으면 부담될 거예요.”

  “그럼 제대로 된 저녁을 사야겠군요.”

  저녁 약속을 잡자는 건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는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내 입장에서 저녁 시간을 내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주문을 기다리는 종업원의 눈길이 영, 심기를 건드린다. 손에 든 메뉴판을 내리며 단정지었다.

  “일단 오늘은 짜장면과 짬뽕으로 하죠. 중국요리의 기본이잖아요. 뭐든 기본은 실망시키진 않으니까요.”

  “군만두도 하나 시키죠. 이 집 군만두 제대로에요.”

  그렇게 짜장면, 짬뽕, 군만두로 주문을 마쳤다. 겨우 그걸로 할 거면서 그렇게 시간을 끌었냐고 묻는 것처럼 보이는 종업원의 부담스런 시선은 나만 의식하는지 그는 아무렇지 않게 창 바깥 풍경을 즐긴다. 여느 중화요리 식당에선 보기 힘든 풍경을 가지긴 했다.

  “말은 함부로 꺼내면 안 되거든요. 한 번 나온 말은 주워담을 수 없잖아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슬쩍, 올라간 오른쪽 입술. 미소를 지을 때 묘하게 입술 양쪽이 비대칭이 된다.

  “제가 함부로 꺼낸 말이라도?”

  “저녁 산다고 했어요.”

  “그건 여은 씨 책임도 있어요.”

  “그 책임은 뭔데요?”

  “여은 씨가 오늘 점심, 짜장면이나 짬뽕이 아니라 제대로 시켰으면 다시 저녁을 살 필요가 없죠.”

  “점심 거나하게 먹긴 부담스럽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그러니까 제가 여은 씨 사정을 봐주는 거죠.”

  “그게 사정을 봐주는 건가요?”

  “손해를 봐가면서 여은 씨 오후 일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잖아요.”

  어쩜, 저렇게 제멋대로일까? 그가 손 위에 괸 채로 턱을 앞으로 내민다.

  “재밌어요?”

  “뭐가요?”

  “내가 하는 말이. 지금 미소 짓잖아요.”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미소를 지었나보다. 아, 자존심 상해.

  “음식 냄새가 좋아서 웃었을 뿐이에요.”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종업원이 다가온다.

  “주문하신 요리 나왔습니다.”

  보통 중화요리 식당에선 보기 힘들 연둣빛을 띤 화사한 장식이 조각된 접시 안에 담백하게 담긴 짜장면과 탁한 붉은 국물을 두른 짬뽕이 먹음직스럽다. 싸고 양 많은 걸 선호하는 나지만 비싼 건 또 비싼 값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 집 가격은 부담스러워도 가게 인테리어나 음식 모양새는 상당히 잘 갖췄다. 맛은 어떨지 기대가 된다.

  “나눠드신다고 해서 여분의 그릇을 가져왔어요.”

  그런 센스는 있네.

  “감사합니다.”

  그가 짜장면이 담긴 그릇을 앞으로 당기더니 젓가락을 넣고 휘젓는다. 나도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아 짬뽕 그릇에 담긴 면을 먹기 좋게 풀어낸다. 그가 한 말처럼 군만두가 제대로다. 보기 좋게 노릇이 구워진 만두에서 뿜어나오는 향에 저절로 입 안에서 침이 고인다. 생각 같아선 바로 하나 집어 맛을 보고 싶지만 일단 예의를 차리기로 했다. 그가 짜장면 준비를 마칠 때까지.

  “얼른 드시죠.”

  그가 짜장면 그릇에서 면을 덜어내고 나서 내 앞으로 내민다. 나는 짬뽕 그릇에서 얼만큼 덜어낸 후 그에게 건네고 슬쩍, 군만두를 하나 집어드는데 그가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군만두 냄새가 참 좋죠? 웬만해선 중식당에 가서 군만두를 잘 시키지 않는데 이 집에선 꼭 시켜요. 맛이 빼어나답니다.”

  한 입 베어물자 육즙이 흘러나온다. 기름이 지나치지 않고 적절히 배어있어 느끼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단순한 만두 하나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이리 다르다. 후릅. 그가 짬뽕 들이키는 소리. 나는 일단 짜장면부터 먹어보기로 한다. 검은 양념으로 버무려진 면에 젓가락을 찔러 넣어 들어올린다. 향이 좋다. 입에 감기는 식감. 너무 진하고 단 짜장면은 좋아하지 않는데 이 집 요리사 특유의 손맛인지 풍미가 연하고 은근하게 퍼진다. 먹는 사람이 쉽게 질리지 않도록 고려한 것인가.

  “맛이 어때요?”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 들이켠 후 그가 묻는다.

  “짬뽕까지 맛보고 말씀드릴게요.”

  “아주 제대로 품평을 하시려나 보군요.”

  그가 하는 말은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짬뽕 국물에 숟가락을 담근다. 보이는 빨간색과 달리 맵지 않게 얼큰하다. 특히 이건 기름진 음식을 먹고 난 후 입 안을 달래기 딱 좋을 맛이다. 그가 이제 두 손을 턱 아래 모으고 내 대답을 기다린다. 엄마가 빨리 원하는 걸 주길 바라는 아이처럼. 천천히, 입술 근처를 닦아내고 답을 주려 하자 그가 손을 뻗어 내 입술 근처 오른쪽 볼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거둔다. 멈칫, 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닿았던 곳을 더듬었다.

  “짜장 소스가 묻어 닦이지 않았어요.”

  흠, 흠. 무안스레 목을 가다듬었다.

  “아, 그랬어요?”

  짓궂게 변하는 그의 미소.

  “까만 점 같아 보이더군요.”

  얼굴이 상기돼는 게 느껴진다. 아, 안 돼. 붉어지지 마. 그럼 그의 말에 그대로 낚이는 거나 다름없잖아.

  “유치해요. 그런 걸로 놀리지 마세요. 음식 먹다 튈 수도 있는 거죠.”

  “입술 옆에 새로 생긴 점이 사실 섹시해 보이더군요.”

  어으, 저 짓궂은 미소. 그냥 포기했다. 울그락불그락 제대로 열이 올랐겠지. 그가 바라보는 시선을 피해 잠시 먹는 데만 열중했다. 왕래하는 손님이 적고 운치 있는 바깥 풍경까지 더해지니 요리를 여유롭게 먹기 좋았다. 보통 중화요리 집에 가면 후다닥, 주문한 음식만 급히 먹고 나오곤 하는데, 오늘만큼은 고급 호텔 레스토랑에라도 온 듯이 호사를 부리며 식사를 하고 있다.

  “이 집 그럭저럭 괜찮죠?”

  “괜찮은 정도가 아니에요. 위치도 좋고 나오는 음식도 정갈하고. 여기 주소가 어떻게 돼요?”

  “아주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다시 오시게요?”

  “네. 다시 와보고 싶어요.”

  그가 일어나서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손에 식당 명함을 들고 돌아온다. 그가 건네는 명함을 받아 지갑에 넣다 그 속에 든 휴대폰 화면을 켜고 시각을 확인했다. 이런, 그만 시간 챙기는 걸 깜빡했다.

  “어머,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점심시간 다 지났어요?”

  “죄송한데 일어나야겠어요. 서둘러도 늦을 듯해요.”

  “그럼 가시죠. 저도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그가 계산을 마치길 기다리며 차 앞에서 기다리다 그가 차량 문 잠김을 풀자 얼른, 자리에 앉았다.

  “많이 늦었어요?”

  “아주 늦진 않았어요. 서둘러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가 차를 출발시켜 도로로 나선다. 큰 도로로 들어서자 갑자기 차 속도를 높인다.

  “이보세요.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치지 않기로 했죠?”

  “지금 장난치는 건 아닌데. 여은 씨가 늦겠다고 하니 지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에서······.”

  “됐거든요. 늦어도 되니까 조심해서 가요.”

  급격하게 느려지는 속도. 뒤에서 오던 차들이 앞질러 나간다.

  “이건 너무 느리자나요.”

  “여은 씨가 늦어도 된다고 했어요.”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늦게 가는 건 또 뭔데요?”

  “이건 뭐, 빨라도 뭐라 그래, 늦어도 마음에 안 들어. 여엉, 기분을 맞추기가 힘드네요. 원래 그리 까다로운 분이세요?”

  “저기요!”

  그의 능글거리는 웃음과 맞춰 속도가 올라간다. 휴대폰을 꺼내서 화원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감사합니다. 현자플라워입니다.”

  “예슬아, 여은이 언니. 미안해. 언니가 좀 늦겠어. 많이 늦을 건 아니고 최대한 빨리 갈게.”

  “언니,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안 그래도 오늘 언니 컨디션 안 좋아 보이시던데 충분히 쉬시다 오셔도 돼요. 지금 안 바쁘니까 저 하나로 문제없어요. 서두르지 마세요.”

  사과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미 늦은 건 늦은 거고, 서두른다고 달라질 건 없을 테니 마음을 편히 갖기로 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저 바람을 나도 쐬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올라온다.

  “저기, 창 열어도 될까요?”

  “이제 마음에 여유가 생겼나 보죠?”

  “다행히 같이 일하는 동료가 천천히 오라고 해주네요. 지금 많이 바쁘진 않다구요.”

  “얼마든지 창 여셔도 됩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흐으음. 피부 위로 감겨오는 바람의 질감이 너무 좋았다. 황홀할 정도로. 차에서 내리기 싫을 만큼. 하지만 언제나 할당된 시간은 정해져 있고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차가 그를 만났던 장소 근처에 가까워진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차를 댈까요?”

  “아니요. 어차피 늦었고 늦는다고 연락도 했으니까 그냥 저기에 세워주세요.”

  차에서 내려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화원을 향해 달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 예슬이에게 돌아온 걸 알리고 금방 거울만 보고 나오겠다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선다. 휴. 화장실 거울에 비춘 내 모습. 서둘렀던 발걸음 때문인지 발갛게 상기된 양볼. 그, 런, 데, 그 볼에 닿은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 모양새다. 확연히 알 수 있다. 내가 웃고 있다. 밝게. 언제 이렇게 웃어본 적 있었던가 가물하다. 밤에 잠들면서 오늘 하루는 좋았다고 할 수 있겠다. 기분 좋게 웃었으니까. 그게 잠깐이라도 그렇게 웃을 수 있었으니까 하루가 좋았다 할 수 있는 거다. 그 웃음이 점심 때 먹었던 짜장면이랑 닮았다. 연하고 은근하게 퍼진다. 중화요리점 주소처럼 이 웃음을 전해줄 주소를 안다면 좋을 텐데. 그럼 웃고 싶을 때 찾아가면 되지 않겠어. 어쩌면 그 주소를 이미 알고 있는지도.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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