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련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나의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힘없이 지내던 내가 갑자기 눈에 불을 켜고 돌아왔으니 놀란 안나가 달려나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 있나요?"

　"아니 전혀 내 방으로 저녁좀 부탁해.

　아, 고기로."

　"아가씨!!"

　들은체 만체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괴로웠던 내게, 마음껏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었다.

　"아가씨!"

　부스스 잠이 깬 내 곁에서 안나가 발을 동동 굴렀다.

　"므.. 애.....시끄르..."

　"아가씨 편지가 왔어요."

　입도 못 여는 내 옆에서 안나가 편지를 내밀었다.

　안나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어서 눈을 힘겹게 떠보았다.

　'친애하는 엘리온 챔버,

　리베론 교수입니다.

　3일 후, 추가 교습 겸 조교 훈련에 초대합니다.

　급박한 초대에 심심한 유감의 말을 전하며, 챔버 가의 기사단의 합동 교습 또한 환영하는 바입니다.

　영애의 의지에 따르며, 거절도 환영합니다.

　다만, 거절한다면 가능한 티타임을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훈련의 초대인원은 10가문 내외에 이르며, 개인교습이 아님을 밝힙니다.

　당신의 리베론.'

　완벽한 초대문이었다.

　가문의 호위 인원도 함께 초대하면서 단체 초대임을 밝히고, 동시에 거절해도 다음을 기약하는 문구까지.

　이렇게까지 초대문을 구사하면서 평민인 척이 성공하리라 보는지, 순진함에 코웃음을 치게되는 부분이었다.

　이미 꼬리가 3개나 자란 체리는 절.대. 놓치지 않을 부분일 것이다.

　'평민은 당신의 xx,라는 문구는 애인에게만 쓴다고!!!'

　소리없는 절규를 뿜으며 방문하겠다는 답신과 함께 기사단에게 준비하라 일렀다.

　아빠에게는...... 역시 선사고 후허락이 진리다.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멀리서 기사단 훈련을 하던 홈크 단장이 반갑게 다가온다.

　"단장, 훈련은 잘 되고 있어?

　주말에 내 호위 겸 훈련하러 다른 곳을 찾아갈까 하는데 가능하겠어?"

　"어느 가문인가요?

　적당히 예의를 차리는 쪽인가요?"

　"잘 모르는 가문이고, 어느 쪽으로 흘러갈 줄 모르겠어.

　실력은 적대적이지만, 인원 수는 호의적이게.

　무슨 말인지 알지?"

　홈크단장과는 윙크로 의사전달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다.

　"아, 그런 쪽!

　알겠습니다."

　역시 짬바.

　아버지가 인적 자원을 알아보는 안목이 탁월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기사단과 훈련을 시작했다.

　아카데미에서는 아직 대련 수업을 시작하지 않았기에 간만의 대련이 기분 좋았다.

　계속되는 기초 훈련으로 확실히 체력이 좋아진게 느껴졌다.

　기사단이 하나 둘 나가 떨어질때까지 훈련을 계속했다.

　검사와의 싸움에서 맨몸으로 이겨내기 위해서는 빠른 속도와 그것을 뒷받침할 체력이 필수였다.

　"아가씨, 곧 해가 집니다.

　그만 하시죠.

　애들 이렇게 조져, 앗, 힘을 빼 놓으시면 내일 저 녀석들 검도 못 듭니다.

　물론 내일 일어나도 아가씨한테 체력으로 진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겠지만요."

　악마같이 웃는 홈크 단장을 보며 내일은 토하느라 밥도 못먹을 기사단에게 조의를 표했다.

　"단장, 지금은 둘 다 맨몸이지만 상대가 검을 들면 내가 너무 힘들겠지?"

　"확실히 그렇죠.

　그냥 호신용으로 배운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검사와 싸울 일이 뭐가 있죠?"

　"아, 아니....

　검을 들고 위협할 수 있잖아....?"

　"기사가 레이디를 검으로 위협한다구요?"

　단장의 경악에 찬 표정에 아차 싶었다.

　"아, 단장.

　솔직히 말할게.

　비밀로 해줄 수 있어?

　특히 아버지께."

　"누가 아가씨를 괴롭히나요?"

　"지금 수업을 같이 듣는 영애가 있어.

　검술에 재능이 상당해.

　곧 대련 수업을 시작할텐데.

　나는 그 영애가 싫거든."

　이해가 간다며 단장이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곧 아가씨가 익히기 쉬운 무술 쪽을 더 연구해보겠습니다.

　저는 검밖에 모르는 놈이라 다른 기사를 붙여줘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어요?"

　"단장의 안목을 믿어."

　안나에게 찜질용 물주머니를 기사단에 전달하라 이른 뒤 목욕탕에 몸을 담궜다.

　돈 벌 생각과 무술을 배울 생각에 이렇게 마음이 설레는 걸 보니, 역시 나는 사고치는 게 체질인 모양이다.

　금방 시간은 흘러갔고, 홈크 단장 외 4명을 호위로 세운 나는 리베론의 저택에 도착했다.

　교수보다는 거상이 어울리는 저택의 크기에 혀를 내두르며 집사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이 평민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편견이란 무섭다고 고개를 젓는데 곧 리베론 교수가 나타났고, 위엄있게 서 있던 홈크 단장에게서 바람빠지는 소리가 났다.

　"리..론...?"

　"안녕하십니까, 아카데미 교수 리베론입니다.

　챔버가의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혼란스러운 홈크 단장의 말을 자르며 리베론이 인사했다.

　'오호, 단장이 리베론의 진짜 신분을 안다는 말이지?'

　여전히 입을 벌리고 서 있는 단장을 외면하며 리베론이 말을 이었다.

　"궁금한 점이 많으시겠지만 일단 연무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챔버 가의 호위단장님은 저와 함께 훈련에 대해 상의를 하시죠."

　홈크 단장은 과거에 발손 제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적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때의 인연이겠지만, 동료라기엔 나이 차이가 상당한데.

　어떤 사이였을까 궁금했지만 자세한 것은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을테니 호기심은 묻어둬야겠지.

　연무장에서 몸을 풀며 단장과 리베론을 힐끗거렸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리베론이 단장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모양새였다.

　아직 3개 가문과 조교들만 왔기에 누가 더 초대됐을지 궁금해하고 있던 찰나에 체리 아슬라가 나타났다.

　호위 세 명만 데리고 나타난 체리는 평소와 같이 맑은 웃음으로 인사를 하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막말을 퍼부은게 마지막이었으니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엘리온.

　그 날은 교수님과의 면담까지 속상한 날이었을텐데, 제 걱정에 많이 기분 상하셨죠?

　제가 눈치없이 영애를 걱정해서......

　영애가 그렇게 폭발해버린 것도 이해해요."

　대단하다.

　상당한 레벨이다.

　내가 꼴도 보기 싫을텐데 환하게 반겨주는 것도 모자라, 나를 '걱정해줬더니 폭발해버린 개복치'로 만들어버린 체리는 더할나위없이 순진해보였다.

　"아, 급소는 알고 수업을 듣냐고 지적해주신 그 일 말이죠?

　미안해요.

　저는 진지하게 배우는 중이었는데...... 부족함을 일깨워줘서 눈물이 터져버렸어요.

　많이 당황했을거에요.

　앞으로 체리에게 그런 소리 듣는 일 없도록 더 열심히 할게요."

　아직도 그 일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는 듯 그렁그렁한 눈길로 다짐을 읊었다.

　'걱정같은 소리하네.

　전생에 msg 토크의 선두주자, 과장왕 김과장의 레벨을 보여주지.'

　뻔뻔한 연기로 대응하는 내 모습에 체리는 잠시 당황한 듯 했다.

　항상 본인이 또래에서 가장 착하고 순진한 역할을 해왔을텐데, 30대의 내공실린 연기혼은 처음인 듯 했다.

　나를 공격하기 위해 큰 소리로 착한 척을 해왔기에 먼저 와 있던 학생들도 우리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터였다.

　곧 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챔버가의 기사들이 이야기를 듣고 기세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아, 아니.

　엘리, 제가 언제 지적을......"

　"아니에요.

　기초를 제대로 배운거 맞냐면서 혹.시. 급소가 어딘진 아냐고 하셨잖아요.

　아무래도 저희 기사단이 저를 정식으로 가르친 것은 아니라서......

　제가 너무 부족했죠, 역시."

　진실에 약간의 msg 첨가했다.

　물론 지금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일 것이다.

　이것도 반복되면 믿게 되는 건 시간 문제일뿐.

　"오해하신것 같네요."

　체리의 미소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분노도 엿보였다.

　화내면 지는 건데.

　저 모습으로 관중은 체리가 진짜 그랬나보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엘리가 평범해보여서 밥으로 본 거 알고 있다.

　'원래 제일 잘 웃는 사람을 경계해야하는 법이란다 아가야. 훗.'

　"아가씨, 챔버 가의 기사로써 장갑을 던져도 되겠습니까."

　홈크 단장이었다면 벌써 장갑 한 짝으로 세 명의 호위의 뺨에 모두 맞추는 재주를 선보였겠지만, 부단장은 내게 먼저 물었다.

　그 말에 체리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 몰랐으리라.

　우물 안에서 동년배 영애들 기나 꺾으며 사교계에서 놀던 영애가 본인 말에 칼부림이 일어나게 생겼으니 놀랄만 했다.

　"부단장, 아닐세.

　영애는 나의 발전을 위해 해준 말일 것이야.

　만약 가문의 명예에 먹칠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내가 먼저 던지도록 하겠네."

　체리가 말을 어버버 하는 순간에 돌아서서 리베론을 불렀다.

　2전 2승 0패.

　나쁘지 않은 성적표였다.

　"교수님, 아직 안 온 가문이 많나요?"

　"아니, 방금 막 드라우 가문까지 6가문이 모두 왔군.

　호위기사 분들은 편하게 계셔도 됩니다.

　훈련을 시작하도록 하지."

　말은 훈련이었지만 개인교습에 가까웠다.

　대부분 검술을 배워서 입학했지만 본인이 보기에 검보다 더 어울리는 무기가 있을 것 같은 학생들만 부른 것으로 보였다.

　나에게는 검을 쥐어보게 했다.

　검은 이제 내려놓으라고 하기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의외군.

　이렇게까지 도구를 컨트롤 하기 힘들어하다니."

　체술과는 차원이 다른 힘듦에 대답조차 못하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마 지금 이미 몸의 밸런스가 다 맞춰진 상태라 칼이 그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것 같군.

　아쉬워."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다른 학생에게 옮겨갔다.

　이렇게 나를 포기하지 말아줘요, 교수님.

　잠시 숨을 몰아내쉬며 다른 학생들을 바라봤다.

　다른 학생들은 다른 무기를 만지며 재미를 느껴가고 있었지만, 체리 아슬라는 그대로 검을 배우고 있었다.

　이미 둘의 대화를 보아하니 이번 교습이 처음도 아닌 것 같았다.

　"꺄르르르."

　그녀의 청아한 웃음소리와 함께 리베론이 이빨을 보이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 리베론의 환한 미소라니.

　이미 나 모르는 사이에 소설은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나 모르는 이벤트들이 그들에게 일어났고, 리베론의 마음은 어느 정도 체리에게 기울어진 듯 보였다.

　전생부터 현생까지 평범녀 1로써, 다른 이들에게 일어나는 썸의 현장을 많이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음울했던 리베론의 검은 눈이 반짝이고 있음을.

　'안되는데.'

　아직은 사랑에 푹 빠진 모습은 아니었지만, 멀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다행인 것은 체리가 아직은 매력을 여기저기 뿌리는데 주력할 뿐, 리베론에게 딱히 다른 사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을 꼬셔본 적은 노래방에서 한 곡만 더 부르고 가자고 꼬셔본 적 밖에 없는 내가 어떻게 체리를 이겨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말싸움에서 백날 이기면 뭐하냐고!

　남자는 저 쪽이 낚는데!'

　울고 싶지만 울 수 없는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