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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도전! 에스퍼 리그
작가 : 은백
작품등록일 : 2016.10.28

수십 억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초능력 배틀 스포츠!
그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은 소년소녀의 작고 거창한 이야기

 
1부 - 유니온 프릭스(9)
작성일 : 16-10-28 21:04     조회 : 361     추천 : 0     분량 : 7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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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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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도 안 믿는 거야? 분명히 있었다고. 헤일로 엔터테인먼트랑 노아즈 아크 사이에 불온한 거래가. 그게 아니라면 마스터즈 플랜이, 패러독스가 그딴 삼류 팀에게 질 이유가 없어!”

  “그, 그, 그래.”

  “패러독스는 억울해. 기득권층이 장기 집권을 위해 특권을 남용해서 저지른 만행에 당한 거라고. 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패러독스를 대신해서, 이 부조리를 깨부수고자 에스퍼 리그에 도전하는 거란 말이야. 한낱 엘리시온이 탐나서 이러는 건 줄 알아?”

  “아, 아하하. 딴거 보자, 그래. 딴거.”

 

  아더가 대뜸 흥분해서 열변을 토하자 린다는 손을 홰홰 내저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아무래도 채널을 돌려 화제를 바꾸는 쪽이 신상에 좋을 듯하다.

 

  가냘픈 엄지로 채널 전환 버튼을 연타하면서도 린다는 아더의 인상 깊은 말을 곱씹어보았다. 유토피아보다도 값진 우승 메달 엘리시온을 ‘한낱’이라고 표현하다니, 이 소년은 돈은 둘째 치고 성공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조차 없단 말인가? 정말 순수하게 동경해 마지않던 영웅이 변명이나 해대는 비겁자로 취급받는 현실이 미워서, 이 더러운 현실을 몸소 바꿔놓기 위해 일어난다고? 한없이 제로에 수렴하는 성공률은 염두에도 안 두고?

 

  린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지만, 진지하게 이 소년과 뜻을 함께 할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게 분명하다. 이런 확신까지 들자 실패할 것은 꿈도 안 꾸고 무조건 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아더의 자신감이 가련하게까지 보였다.

 

  초고속 카메라에만 간신히 비칠 법한 속도로 버튼을 연타해대던 린다가 원하는 채널이 나왔는지 움직임을 딱 멈추었고,

 

  “우와, 한다! 맞다, 오늘 이거 하는 날이었지!”

  “『마누라의 유혹』?”

  “말도 안 돼! 아더는 이것도 모르니? 요새 최고 인기 드라마라구!”

 

  아무래도 린다에게는 아더가 이 드라마를 모르는 것 자체가 부조리한 현실인 듯했다.

 

  “그래? 난 『세이버즈 AA』랑 『마법소녀 노이즈 필리아』 밖에 안 보는데.”

  “……이봐, 그거 다 어린이 드라마잖아.”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노이즈가 사역마 필리아랑 계약하고 나서도 자꾸만 방황하다가 고유 무기 제플린을 얻는 에피소드가 공개되니까 인터넷에서 얼마나 붐이 일었는데.”

  “알겠으니까 조용해봐. 오늘은 여주인공이 재벌2세한테 대쉬하는 날이란 말이야.”

 

  린다는 자리를 바싹 당겨 앉아 숨을 죽이고 드라마의 오프닝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벽안 속에 별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가려서 안 보인다고 아더가 한 마디 했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실로 무서운 집중력이다. 그러자 아더는 별수 없이 몸을 당겨 린다 옆까지 다가가서는 시큰둥한 얼굴로 팔짱을 꼈다. 그 대세라는 드라마가 어떤 놈인지 한번 지켜나 보지, 뭐.

 

 

  방영을 시작한지 20분 째.

  아더로서는 일체 이해할 수 없는 전개였다. 갑자기 카페에서 중년 아줌마가 20대 청년의 얼굴에 물을 끼얹지 않나, 뜬금없이 교통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전생활건망증과 혈액암 같이 보기 드문 질환이 무슨 감기처럼 자주 발병하는 등 몸값이 폭락하는 처지에 놓였다.

 

  아더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 극중 재미를 찾아보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냉정하게 말해 아기양이 울타리를 뛰어넘는 동영상만 100번 연속해서 틀어도 이보다는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반면에 곁의 린다는 혼자 울고 웃고 화내다가 손가락질에 고성방가까지 내지르며 솔로 콩트를 찍고 있었다. 실로 감탄을 자아내는 몰입력이다. 문화충격이란 게 바로 이때를 두고 하는 말일까?

 

  어느덧 이야기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라, 웬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정장 차림의 남자가 여주인공을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린 채 프렌치 키스를 시도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뒤에서 배경을 담당하고 있는 외제차를 감안하면 아마도 꽤 부자인 듯하다.

 

  “꺄아, 어떡해!”

 

  린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지고 양손으로 볼을 감싸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물론 아더는 죽은 동태눈으로 그녀와 흑백 화면을 관찰하듯이 번갈아볼 뿐.

 

  “린다한테도 저런 왕자님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돈 걱정에 찌든 삶이랑은 작별하고 싶어라.”

  “그게 네 꿈이야?”

  “이게 비단 린다만의 꿈이겠니? 모든 여자들의 로망이라구!”

  “저 입술이랑 혀를 비비는 짓도?”

  “로맨틱한 딥 키스는 연애에 있어서 기본 소양 아니야?”

  “페이트 녀석은 더럽다고 욕하던데 말이야.”

 

  아더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 페이트란 애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참 어리구나. 걔도 아더도 언젠가 사랑에 눈을 뜨면 알게 될 거야.”

 

  역시 끼리끼리 노는구나. 린다는 남녀 간의 사랑에 일체의 감흥도 내보이지 않는 소년과 페이트라는 소녀를 비웃으며 사소한 우월감에 취해 흥얼거렸다.

  극이 끝나고 스태프의 명단이 빠르게 말려 올라가는 엔딩에서도 둘의 키스신은 가장 진한 시점에서 멈춰있었다. 린다는 기도하듯 손을 모은 채 황홀한 어조로 묘한 감탄사를 연신 내뱉었고, 아더는 턱을 괴고 이 현상을 심도 있게 고찰하다가 간단한 결론을 내렸다.

 

  ‘역시 여자란 생물은 어려워.’

 

  아무래도 여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석양이 지고 어둑한 밤의 기운이 내려앉은 지 서너 시간이 지나면 제13지구의 주택은 하나 둘씩 가내 소등을 하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다. 가뜩이나 빠듯한 살림에 전기세를 아끼려는 요량도 있고, 가련하게도 이르면 새벽 4시부터 출근길에 오르는 일과 때문에 일찍 자지 않고서는 몸이 도저히 버텨내질 못한다.

 

  아더의 경우는 관리국에서 지급하는 보조금을 먹고 살아 직장 없이도 어떻게든 생계가 유지된다지만, 몸에 배인 습관이 무섭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밤 10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리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다. 침대를 양보해줄 거란 기대는 안 했지만 린다는 괜히 씁쓸해졌다. 이 귀하신 몸이 딱딱한 바닥에 등을 맞대고 자야하다니.

 

  그런데 아더가 뜻밖에도 배려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건 바로,

 

  “뭐해? 누워. 같이 자자.”

  “됐네요!”

 

  이 자식이 장난치나. 순순히 받아주는 데에도 정도가 있지.

 

  “그나저나 아더는 잘 때도 그거 안 벗니?”

 

  아더는 여전히 고글형 AR 스캐너 시그마를 이마에 단단히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뜯어진 부위를 애써 기운 흔적이 적나라한 이불을 덮고는 천진하게 웃었다.

 

  “헤헤, 시그마는 내 영혼의 파트너이자 동료거든.”

  “언제는 대판 혼냈다면서.”

  “내일 달래봐야겠어. 미안해, 시그마. 내일은 화 풀어~”

 

  손으로 부드럽게 시그마의 렌즈를 쓰다듬으면서 뒤늦게 어르고는,

 

  “넌 언제 잘 거야?”

  “응? 아, 메이크업 좀 지우고.”

 

  아더는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자들은 참 이상해. 얼굴이 무슨 칠판도 아니고 말이야.”

  “이건 상식 있는 여자로서의 기본 교양이야.”

  “페이트는 안 그랬어.”

  “예, 예.”

 

  그 페이트란 계집, 만나서 개인 강습이라도 시켜주고 싶군.

  린다는 건성으로 얼버무리고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또렷이 비치는 자신의 상반신을 주시했다. 귀엽고 아담하면서도 절묘한 비율을 이루는 자태에 절로 흡족한 미소가 새어나오지만 역시 인공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흉부의 양측에 알게 모르게 살짝 부풀어 오른 두 개의 융기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옥에티였다. 확대 수술이라도 할 걸 그랬나.

 

  ‘남자는 너 혼자야?’

  ‘……저 멍청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숙녀한테 남자 취급이 뭐람.’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아더가 툭 내던진 한 마디는 어느새 커다란 송곳이 되어 린다의 심장에 박혀있었다. 단단히 뿔이 나서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는데, 화장실 문 너머로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가히 지진에 비할 규모다.

  린다는 문에 얼굴을 바싹 대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가 경악했다.

 

  ‘설마 이게 인간의 코골이야?’

 

  감히 dB로 환산하기가 두려울 만큼의 진동에 소름이 돋았다. 그 예쁘장하고 중성적인 외모에 이렇게 우렁찬 장군감(?) 코골이가 나온단 말인가. 린다는 그 엄청난 갭을 수용하지 못하고 잠시 패닉에 빠졌다가,

 

  ‘잠깐. 코를 곤다는 건 벌써 잠들었단 의미인데.’

 

  이내 차분해지며 마음이 가라앉았다.

  잠이 들었다는 것은 곧 손쓸 수 없는 무방비 상태를 의미한다. 분명 아더가 잠자리에 들기 직전, 린다의 제1순위 표적 유토피아는 탐스러운 자태로 아더의 목에 걸려있었다. 이 말인즉슨…….

  견물생심이라고, 새삼 용감무쌍한 각오가 돋아났다.

 

  ‘하긴 이렇게 헐어빠진 곳에 계속 머물러봐야 뭐하겠어.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는데!’

 

  린다는 결국 계획을 틀기로 했다. 게다가 이 어린애처럼 순진해빠진 녀석에게 일일이 장단을 맞춰줄 것을 생각하니 은근히 화딱지까지 난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만해서는 저 녀석한테 붙잡힐 일은 없을 듯하고.

 

  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어지간한 경력의 린다도 입 안의 침이 바싹 말랐다. 행여 깰까 두려워 조심스레 화장실을 나서서 고양이 발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가보니, 역시 아더는 조만간 자신에게 벌어질 사태는 꿈에도 모르고 천사 같은 얼굴로 곤히 잠들어있었다. 그 목에는 비단 재질의 푸른 띠가 걸려있었다. 이런 귀중품을 보란 듯이 두르고 외부인에게 이만큼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기도 참 쉽지 않을 텐데.

 

  ‘이제껏 무수한 남자들의 뒤통수를 후려쳐왔지만, 이번만은 그 스케일이 달라.’

 

  린다는 속으로 심호흡을 하면서 조심조심 아더 목덜미의 푸른 띠를 위로 끌어올렸다. 긴장에 휩싸인 손이 바르르 떨려 위태위태한 모양새를 연출했지만 신경이 둔감한지 아더는 일말의 반응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만인의 동경을 한 몸에 사는 초고가의 금속덩이가 그 위엄찬 모습을 드러냈다.

 

  은색 바탕의 곳곳에 새겨진 부조는 육망성과 ‘For 38th runner-up(38번째 준우승자를 위해)’이라는 고딕체 문구를 또렷이 표현하고 있었다. 재질이나 모양새로 미루어보아 역시 가짜는 아닌 듯했다. 하긴 웬만한 간덩이가 아니라면 위조는 감히 꿈에도 못 꿀 물건이지만.

 

  린다는 저도 모르게 경건해져 유토피아의 가치에 대해 차분히 곱씹어보았다. 에스퍼 리그 본선의 준우승 팀원에게만 부여되는 심벌이자, 그 방대한 아르카디아 전역을 통틀어도 100개 남짓만이 존재하는 보물. 금강석보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은백색의 금속 호프늄 소재. 이를 넘어서는 보물은 단 하나, 오로지 우승 메달 엘리시온뿐이라며 만인이 굳게 인정하는 마당이다. 더욱이 엘리시온은 그 존재 자체가 신성시되어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성물임을 감안하면 금전적 가치를 매길 수 있는 보물 중에서는 유토피아가 단연 원톱의 가치를 자랑한다.

  그런데,

 

  ‘애당초 패러독스는 저런 보물을 왜 아더에게 넘겼을까.’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지만 이젠 신경 쓸 바 아니다. 한 번 굳게 마음먹은 바, 이대로 우물쭈물하다간 거사를 그르칠 수도 있다. 린다는 눈을 딱 감고 유토피아를 아더의 목에서 벗겨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역시나 요망한 계집이군.』

 

  난데없이 음원 불명의 시니컬한 기계음이 일침을 놓았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린다는 화들짝 놀란 나머지 사레까지 들려 캑캑댔다. 그 황망한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사방을 경계했지만 뜻밖에도 그 주인은 코앞에 있었다.

 

  아더가 불편을 감수하고 이마에 두른 파트너. 초 AI 칩이 탑재된 AR 스캐너, 시그마.

  그동안 쭉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 기계는 기다렸다는 듯이 린다를 몰아세웠다.

 

  『쭉 지켜봤는데, 아더한테 접근한 목적이 그거냐?』

  “…….”

 

  린다는 적잖이 당황하여 그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예측을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돌발 상황에 적응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어떻게 처신해야할지 감도 오지 않는 마당에 시그마의 추궁이 이어졌다.

 

  『어째 처음부터 수상쩍어 보였다. 뭐, 어려운 추리도 아니지. 애당초 아더한테 흥미를 가졌던 사람 치고 불순한 의도가 없었던 자라곤 엘피스 한 명뿐이었으니까.』

  “흥.”

 

  그제야 린다는 시그마가 비록 인격은 가졌지만 사지의 자유가 없는 한낱 기계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다시금 여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반격을 개시했다.

 

  “시그마도 대단하네. 이 순간만을 위해 줄곧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거야?”

  『글쎄다.』

  “하지만 지금 시그마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궁금하네? 울고 짜고 애원해도 린다는 이대로 튈 요량인데 말이야, 응? 손수 하수구에 버려줄 수도 있어.”

  『본디 진실이란 끝까지 감출 수 없는 법이지. 언제까지 과거를 외면하고 숨어살 텐가?』

  “……뭐?”

 

  꽤 정곡을 찔렸는지 린다는 눈가를 찌푸렸다. 그제까지 들썩이던 발이 땅에 뿌리내린 듯이 옴쌀 달싹하지 않았다. 시그마는 뒤이어 의미심장한 떡밥을 던졌다.

 

  『네 신체정보를 마이크로 단위로 스캔해본 결과, 외양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유전자 구조 하나는 기막히게 닮은 옛 사람이 떠올랐거든. 일란성 쌍둥이 뺨치지. 내 옛 주인을 농락하고 엿 먹인 경력이 있는데 기억 못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리, 린다는 시그마가 하는 말을 전혀 못 알아듣겠는 걸.”

  『자네랑 나는 구면이란 뜻이야.』

  “…….”

 

  어이가 없었다. 구면이고 자시고, 한낱 고글 따위의 모양새를 두고두고 기억할 괴짜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나. 린다는 기억력을 총동원해서 시그마와 동일한 모델의 AR 스캐너를 해마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인체 정밀 스캔 같은 기능까지 달린 모델이라면 그리 흔하지 않을 텐데.

 

  시그마는 가뜩이나 뜸을 들이면서 애를 태우다가 직설적인 힌트 하나를 날렸다.

 

  『아직도 기억 못 하나? 제37회 에스퍼 리그 16강전에서 만났던, 고글을 쓴 암갈색 눈의 사내를.』

  “……!”

 

  린다는 순간 명치가 뜨끔하여 가슴을 움켜쥐었다. 흡사 두통이라도 찾아온 듯이 관자놀이까지 저릿저릿했다. 머릿속 깊이 매장해둔 기억이 억지로 건져진 느낌이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스스로도 망각하고 있었다.

 

 

 

  “우와, 이 몸이 지다니. 대단한데? 역시 데스페라도의 힘은 굉장하군!”

  “……그걸, 어떻게?”

  “하하, 척이면 척이지!”

 

 

 

  그래도 그렇지,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큼지막한 방풍형 고글을 쓰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경기장에 해피바이러스를 살포하고 다니던 그 남자를.

 

  “대단한 열정인걸! 법을 저촉해가면서까지 꿈을 이루겠다니. 남들은 손가락질할지 몰라도 난 그저 대단하기만 하다. 내가 키우는 애들이 그 열정, 본받았으면 좋겠는데. 하하하하하! 혹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부탁?”

  “그래. 우리 보육원의 품을 떠난 아이 중에 혹시 인연이 닿는 녀석이 있으면 좀 도와주지 않을래? 헤일로 비전에 관심 있는 녀석은 딱 둘 뿐이지만, 둘 다 너한테 배울 게 많아보여서.”

 

  자신을 처절히 짓누른 상대가 비열한 수단을 썼다는 걸 눈치 챘음에도, 도리어 그 열정에 감탄해서 응원까지 남기던 희대의 바보를……. 왜 그새 잊어버렸을까?

 

  어쩌면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단순히 외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을 속여먹고 도주할 때마다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오는 감촉을 선사한 것도 그 남자의 기억이니까. 떳떳하진 못해도 생업인데 매번 이런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 괴로웠던 나머지 린다는 그 남자를 애써 외면하기 시작했고, 이를 기점으로 기억 속에서 서서히 옅어져만 간 것이다.

 

  “그 사람이 엘피스?”

 

  린다에게 남은 최후의 양심이자 마지막 한 조각의 이상 그 자체.

  그렇담 그 남자의 심벌과도 같던 고글을 지닌, 이 아더라는 소년은 도대체?

 

  『그 남자의 부탁을 잊진 않았겠지? 이 녀석은 그 남자가 여생을 걸고 키운 제자다.』

 

  무심한듯하면서도 잔걱정이 배어있는 충고가 린다의 조그만 가슴속에 녹아들었다.

 

  『부디 이 부족한 녀석이 멋대로 좌절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게. 그걸로 죄는 충분히 씻을 수 있어. 엘피스에게 보답하는 길이기도 하고.』

  “…….”

  『그럼 뒤는 자네에게 맡기겠네. 내 역할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이게 끝이니까.』

 

  린다는 유토피아를 슬그머니 움켜쥔 그 자세 그대로, 파라핀으로 고정된 것처럼 말없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시그마도 그 뒤로는 힐책이나 충고를 더 이상 잇지 않았다.

 

  그렇게 10년과도 같은 10시간이 흘렀다. 린다는 그 불편한 자세 그대로 한숨의 잠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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