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시험 전 주
기말고사가 바짝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나연은 생물학서적이 배치되어 있는 4층 자료실로 들어갔다. 웨이브진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나연은 자료를 찾으려고 책을 훑어보다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안경을 쓴 재수 오빠가 자료를 찾는 걸 보았다. 안경 속에서 나연이의 눈이 빛났다. 나연은 재수 오빠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오빠.”
“안녕.”
“근데 오빠 저한테 밥 사 주기로 한 거 언제 사 줄 거에요?”
“아, 참 깜빡하고 잊었네.”
“자료만 찾고 바로 가자.”
재수는 자료를 찾은 후 나연이랑 같이 도서관을 나왔다.
4교시 교양과목인 천문학 수업이 끝났다. 교수님이 나가자 강의실에 앉아 있던 아이들도 나가기 시작했다. 유진과 희연이도 가방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둘은 교양 선택과목으로 천문학을 같이 듣고 있었다.
“다음 주면 시험인데 공부 좀 했어?”
강의실을 나오자 유진이가 물었다.
“조금. 이제부터 해야지. 넌 좀 했어?”
“아니.”
“우리 점심 먹으러 가자. 어디로 갈까? 밖으로 나갈까?”
“학교식당 가자. 거기가 싸잖아?”
“응. 근데 다음 주에 시험 끝나고 뭐 할 일 있어?”
“아니. 그건 왜 물어?”
“뭐 특별히 할 일 없으면 교회에 한 번 나오지 않을래?”
“교회에?”
“응. 다음 주 토요일에 교회 건축 30 주년 행사하거든. 목사님도 너 보고 싶어하고.”
“너 행사 때 뭐 하기로 했어?”
“피아노 연주하면서 찬송가 부르기로 했어.”
“하긴. 교회에서 행사 있을 때마다 늘 그랬으니까. 갈게.”
“정말 오기로 약속한 거야?”
희연은 다짐을 받아두려는 듯이 말했다.
“그래.”
두 사람은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학교 식당쪽으로 걸어갔다. 운동장 곁을 지나가다가 유진은 농구코트에서 민이가 혼자서 농구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기 있는 애 민이 아냐?”
유진이 말했다.
“그런 거 같은데.”
희연과 유진은 농구 코트쪽으로 걸어갔다.
민이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드리볼을 하고 있던 민이는 유진과 희연이를 보자 공을 잡았다.
“날도 더운데 혼자서 무슨 농구야?”
유진이가 물었다.
“이 정도 더위 가지고 뭘. 1:1로 한 게임 하는 게 어때?”
“그러지 말고 우리랑 점심이나 같이 먹으러 가자.”
“사 주는 거야? 난 땡전 한 푼 없거든.”
“그래. 같이 가자.”
희연이가 대답을 대신했다.
“과실에 공 갖다 놓고 금방 올게.”
민이는 학과실에 공을 갖다 놓고 왔다.
세 학생은 함께 식당으로 걸어갔다.
식당에는 학생들이 식권을 뽑는 기계 앞에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세 학생은 그 줄 뒤에 가서 섰다. 메뉴판을 보니 오늘 점심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유진이가 주머니에서 식사비를 꺼내 희연이에게 건네주려 하였다.
“됐어. 오늘은 내가 살게. 다음에 니가 사면 되잖아.”
희연은 유진이가 건네주는 돈을 받지 않았다.
“오늘도 또 얻어먹네. 다음엔 정말로 내가 살게.”
“응.”
10분정도 지나자 세 학생은 기계 앞까지 다가왔다. 희연이가 식권을 뽑아가지고 나눠주었다. 세 학생은 식권을 넣는 네모난 아크릴통에 식권을 넣고 배식을 받으러 갔다.
“어디로 갈까?”
세 학생이 배식을 다 받고 나자 유진이가 두 사람한테 물었다.
“저기 머저리 있는데 저리로 가자.”
민이가 재수를 보고 나서 말했다. 민이의 말에 유진과 희연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선 재수가 나연이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재수 오빠와 맛있게 점심을 먹고 있던 나연은 민이 언니가 유진오빠와 언니랑 같이 함께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하여튼 되는 일이 없다니까. 저 언니는 왜 또 나타난 거야?’
나연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야, 머저리, 넌 언제 나연이한테 빌붙은 거냐?”
민이가 식판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유진이와 희연이도 자리에 앉았다.
“빌붙긴? 내가 너 같은 줄 아냐?”
“그럼 니가 사 주는 거야? 웬 일이냐? 니가 선심을 쓸 때도 다 있고.”
“나연이가 너보다 훨씬 이쁘고 착하니까. 너도 좀 본 받아봐라.”
“오, 그랬던 거야? 하여튼 그 몰골에 여자는 되게 밝힌다니까.”
언제 그칠 줄 알 수 없는 둘의 말싸움이 또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또 만나자마자 시작이야?”
유진이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싸우는 것도 좋지만 식기 전에 밥은 먹는 게 어때?”
희연이가 또 둘의 싸움을 저지하려고 나섰다.
“네 말이 맞다. 어차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민이는 한 술 밥을 떴다.
희연이는 둘의 싸움이 끝나자 목에 걸린 금십자가 목걸이를 꼭 쥐고 경건하게 기도를 한 후 수저를 들었다. 유진은 희연이가 식사하기 전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경건함을 느꼈다. 하지만 유진은 식사하기 전 한 번도 기도를 올린 적이 없었다. 신을 믿지 않는 유진은 그런 짓은 어리석은 짓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도 언니가 유진오빠한테 점심 사 주는 거야?”
나연이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민이 언니 때문에 엉망이 되어버린 속마음을 감추며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그래. 다음에 내가 사 주기로 했어.”
희연이가 엷게 미소만 띄울 뿐 대답을 하지 않자 유진이가 대신 대답을 했다.
“다음엔 꼭 그렇게 해야 돼요? 오빠.”
“응?”
“솔직히 좀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맨날 언니한테 얻어 먹기만 하고.”
“유진이가 언제 맨날 나한테 얻어 먹었다고 그래? 맨날 나한테 얻어먹는 건 너잖아? 어제도 니가 짬뽕 사 달라고 해서 짬뽕 사 줬잖아?”
“언니, 정말 이러기야? 짬뽕 때문에 자매의 정을 깨서는 안 되는 거라고.”
“어휴, 정말 내가 이런 걸 동생이라고? 됐으니까 밥이나 먹어라.”
“난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니네 둘이 친자매라는 게.”
민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