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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변이하는
작가 : 교관
작품등록일 : 2019.9.26

주인공은 6일 동안 자신의 변이에 대해서 인지를 한다.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이 조화와 균형이 된다

 
변이하는2
작성일 : 19-09-27 11:50     조회 : 38     추천 : 0     분량 : 24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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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도대체 어떤 환영일까.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마동은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상상을 애써 하지 않았다. 전경이라고 불리는 시야가 만들어낸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섬뜩했다. 사람들의 어깨에 올라탄 그것들은 목이 없는 몸이 전부였다. 소름이 돋았다. 때를 가리지 않고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처럼 몸의 털이 바짝 솟구치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것이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졌다.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이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눈앞에 그 모습이 그대로 그려졌다.

  만약 지금 내가 본 환영이 실제의 현실이고, 달리고 있는 지금이 현실이 아니라 다른 편의 세계라면? 마동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한 번씩 마동은 세계가 암흑으로 바뀌는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하는 경험을 했다. 마동의 의지가 아니었다. 가만히 있으면 다가오는 계절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머릿속에서 돌연 나타났다가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그동안에는. 이렇게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다. 몹시 지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눈앞에 환영처럼 가끔씩 보이는 다른 세계는 근래에 들어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지금의 세계가 전부 암흑으로 바뀌는 모습이었다. 세계가 어둠으로 종식되기 전에 마동은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한다. 사람들은 마동을 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어딘가 이상한 이야기만 자꾸 한다. 글자로 치마를 만들었다느니, 캔 깡통의 맛은 달다고 하는 말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사람들은 동과 이야기를 하면서 마동의 눈을 보는 것 같은데 자세하게 보면 눈 뒤의 어느 지점을 응시하며 말을 한다. 마동은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조금씩 겁이 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마동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눈에서 약간 떨어진 밑이나 옆의 어디를 계속 보며 이상한 말을 쏟아낸다. 마동은 다른 사람에게 간다. 하지만 다른 사람 역시 마동의 눈을 보지 않고 어딘가를 응시하며 이상한 말을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전부 이상해진다. 그리고 저 멀리서 하늘이 점점 검은색으로 뒤덮인다. 바뀐 세계의 암흑은 물엿처럼 찐득하고 무서운 검은색이다. 하루에 한 번, 내지는 이틀에 한 번씩 무의식중에 그런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고 눈앞에 나타났다.

 

  이계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아니다. 마동이 그동안 생각했던 다른 세계는 적어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환상의 곳, 오즈의 먼치킨 마을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암흑이 온 천지를 뒤덮는 세계는 아니었다. 비록 우울하지만 엘리스가 재버워키를 물리친 마을의 풍경정도라면 괜찮았다. 그렇지만 마동의 눈앞에 펼쳐졌다 사라진 광경은 무참했고 무차별적인 폭력이 만들어 놓은 세계였다. 폭력에는 당연하게도 정당성은 배제되어 있었고 이유나 폭력의 강도도 알 수 없었다. 마동이 바라는 이계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모자장수처럼 미쳐야만 해’ 체셰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미쳐가고 있는 것일까.

  체셰의 말은 분명 이상한 나라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지금, 이 현재를 살아가는데도 미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미쳐야만 한다.

 

  여름은 여름이었다. 달리기 시작한지 십오 분을 넘어가면서 땀이 목덜미를 내려와 가슴을 타고 가슴골로 흘러 내렸다. 액체라는 것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점성과 성분을 떠나서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린다. 점점 몸에 텐션이 가해지면서 달리는 속도를 조금 더 냈다. 들숨과 날숨을 조절해가며 마동은 사람이 없는 조깅코스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어폰을 통해 폴리시달의 노래가 끝이 나고 안타까운 비비킹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십 여분을 달렸다. 하늘은 속살이 비치는 에이프런 속옷처럼 구름이 엷었다. 엷은 구름 속에 또 다른 구름이 보이고 그 속에 또 다른 구름이 보였다.

  이퀴벨런트.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조깅을 하는 사람도, 걷는 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 달려가면 대나무공원이 나온다. 마동은 조깅을 하다 대나무 공원이 나오면 그곳에 잠깐 멈춰 서서 다리를 풀고 숨을 고른다. 이 도시는 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60년 전에 떠들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작은 강(이라고 하지만 바다로 이어지는, 도시를 가르는 총 길이가 50킬로미터가 넘는) 하나를 사이에 둔 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농경마을의 단락이 군데군데 있을 뿐 도시라는 형태를 갖췄다고 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지엽적인 모습이었다. 당시 대통령이 해안가를 둔 이곳을 제 1의 임해공업단지로 조성을 하는 계획 하에 세계 최고의 수출을 목표로 제조업을 전국에서 긁어모아 이 도시에 집결시켰다. 그 결과 당시 전국의 노동을 집약적으로 발휘하여 생산품을 수출하면서 제조회사도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다. 수출의 성과를 거둬들임으로 해서 경제적 발전이 꾸준하게 일어났다. 70년대의 부흥기를 거쳐 80년대에 정착기와 이후 황금기를 도시는 맞이했다. 현재 서울과 수도권의 위성도시가 배부르게 생활하기가 힘들다는 소리가 있음에도 이 도시에 터전을 마련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호소하는 수도권의 사람들에 비해 적었다. 각종 농산물을 근교에서 직접재배하고 수확하여 타 지방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여 그대로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질 좋은 농수산물을 공급했고 선박과 철강의 수출이 세계 최고조에 달했으며 선박의 제조에 필요한 부대부품의 생산 공장도 속속들이 생겨나서 생산능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타지방에서 못살겠다는 사람들이 계속 이 도시에 몰려 들면서 과포화를 이루었고 큰 기업에서는 노조가 생겨나 매년 노동파업으로 인해 시민들에게 피해가 돌아갔다. 도시는 경제가 발전하는 것에만 집중을 했다. 건축에 관한 산업의 발전이 없어서 타 도시에서 들어온 건축업자가 대부분 이 도시의 고층건물의 신축과 증축에 관여했고, 문화에 대한 발전은 아기의 걸음걸이 속도만큼 더디었다. 근래에(최근 7, 8년 사이에) 문화와 여가생활의 발전이 경제발전의 밑거름이라는 토대로 시청에서 문화 사업이 시행중이었다. 하청을 둬서 추진 중이고 도시의 중심을 흐르는 강을 살리는 노력과 그에 따른 조경 사업을 차곡차곡 착공하고 있는 추세다. 그 계획 하에 50킬로미터가 넘는 강변의 조깅코스에는 다양한 체험형식의 인공자연 숲이 조성이 되었다.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공원에는 시에서 너구리를 방사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다.

  마동은 대나무 숲을 향해 달려 나갔다. 습한 공기 때문인지 무릎에서 땀방울이 살갗을 뚫었고 정강이에서도 땀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때, 인적이 없는 가운데 조깅코스 저 앞에 검은 무엇인가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무엇일까?

  마동은 달려서 앞으로 갔다. 여름밤은 겨울의 밤만큼 어둠이 짙지 않다. 밤이라는 관념은 또 다른 세계, 그것이다. 과연 밤이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 인생은 어떤 삶으로 이어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인생에서 밤이 사라져 버리는 삶은 상상만으로 끔찍했다. 반대로 밤의 세계만 펼쳐진다면 또 어떨까. 그 나름의 세계가 있어서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밤이 오면 사랑하는 이들의 스킨십도 더욱 로맨틱해진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아이들의 활동도 밤이 되면 잠잠해진다. 증기기관차처럼 폭주하던 종합병원의 내과병동도 밤이 도래하면 환자들의 잠자는 소리와 낮은 기침소리로 조용한 악단을 조성한다. 밤이 되면 누구나 인상주의가 되고 현실에서 벗어나 시인이 되고 주인공이 된다.

  소설가들의 첫 소설은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의 한 가운데를 지나 새벽녘에 대부분 탄생되었다. 겨울의 깊은 밤, 산울림의 ‘독백’을 들으면 고독의 실크로드 속에 발바닥을 디디는 기분이 든다. 산울림의 독백을 통해 내려놓는다는 것에 대해서 느낄 수 있었다. 밤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고독으로의 항해는 밤이 깊을 수록 방향이 뚜렷해지고 밤의 정취 속에서 자아는 밤으로 녹아들어 버린다. 밤이 다가와 고독해지는 것은 지극히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라고 조용히 읊어 보기도 한다. 밤이 어깨를 두드려주며 오늘은 수고했구나,라며 괜찮다고 끊임없이 속삭여주고 그 힘을 얻어 밤새도록 깨어있고 싶지만 마술에 걸린 공주처럼 밤의 응원을 등에 업고 잠들어 버리고 사람들은 꿈을 꾼다. 밤이 무서워 도시를 환하게 불 밝히지 마라고 하는 글귀를 본적이 있다. 밤의 어둠은 무서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죽음에 맞닿기 직전까지 같이 가야 할, 가족보다 더 친밀한, 이불 같은 관념이다. 글귀가 있던 책에는 도시가 자아내는 불빛이 강하여 그 존재를 돋보이려 해도 밤은 제 몫을 확실하게 해낸다고 했다. 어둡다고 말 할 수 있는 밤이 새삼 정겨웠다. 밤이 깊어지면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나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낮게 드리운다. 작은 난쟁이들이 타협점을 찾으려 올라오고 밤하늘의 별은 그들의 앞을 비춰줄 것이다. 밤은 여름보다 겨울이 깊이가 더 있어서 겨울밤에 더 강하게 끌린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여름밤이 좋다. 마동은 늘 그렇게 생각했다. 낮 동안은 느껴볼 수 없는 은유를 여름밤이 되면 절실하게 갈구하고 있었다. 밤에는 확실하게 밤의 언어가 존재한다.

  마동은 밤이 주는 아름다운 색채를 머릿속에서 상기하며 조깅코스를 달려 앞에 보이는 검은 물체 쪽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모습은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달리기를 출발하여 조깅코스의 시작점을 지나면서 봤던 긴팔의 긴치마를 입은 그 여자였다.

  마동은 머리를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다. 조깅을 하다보면 아무리 조깅화의 끈을 질끈 동여매어도 신발 안으로 미세한 돌멩이나 먼지덩어리가 들어온다. 그것은 매일매일 밥을 먹듯 조깅을 할 때마다 조깅슈즈 속으로 무례하게 들어왔다. 신발안의 작은 돌멩이들을 무시하고 그냥 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마동은 그렇지 못한 축에 속했다. 마땅하겠지만 달릴 때 운동화 속으로 들어온 아주 작은 돌멩이는 신경을 건드렸다. 달리는데 발바닥에 가시 같은 자극을 주는 그 작은 돌멩이 때문에 제대로 달리는 행위에 집중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달리는 것을 멈추고 운동화를 벗어서 신발을 털어냈다. 운동화를 끈을 풀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달리는 패턴이 끊어져버린다. 몸을 풀어주는 사이 마동보다 조금 뒤에서 따라오던 러너들이 마동을 앞질러 저만큼 앞서가는 뒷모습을 보며 이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멈춰있으면 누군가가 나를 앞질러 가버리는 인생 따위의 법칙 같은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 만큼은 작은 돌멩이나 덩치가 큰 먼지덩어리가 조깅슈즈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미세한 돌멩이도 왜 그런지는 모르나 사람들이 많은 날에는 유독 두세 번씩 신발 안으로 들어왔다. 돌멩이들은 인적이 드물 땐 신발 안으로 기어들어오기를 회피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렇게 느껴질까. 확실히 움직일 수 없는 작은 돌멩이나 알갱이들이 사람들의 움직임에 의해서 이동되어져 온 탓이 아닐까.

  작은 돌멩이는 유전자처럼 사람을 따라서 이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처럼 사람이 없는 날에는 지금까지 운동화 속으로 작은 돌멩이가 들어오지 않았고 마동은 아직까지 쉬지 않고 꾸준하게 달리고 있었으므로 처음 출발 코스 근처에서 봤던 긴팔에 긴치마의 느린 걸음걸이를 가진 여자가 마동보다 저만치 앞서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초의 일렬횡대로 걸어가던 아주머니 무리를 지나쳐 왔고 그녀들은 코스 중간에서 집으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주머니들을 제외하고 마동은 꾸준하게 같은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걷는 사람은 마동의 속도를 앞질러 갈 수는 없다. 운동화에 들어간 돌멩이가 없어서 아직 달리는 패턴이 깨지거나 멈추는 행위 없이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전혀 없지 않은가. 마동은 처음 봤던 그 여자가 아닌가싶어서 빠르게 여자의 옆을 지나치면서 곁눈질로 보면서 빠르게 달려 나갔다. 보니 처음코스에서 지나쳤던 여자가 맞았다. 도저히 아니라고 하기에는 행색과 옷차림이 너무나 특이했다. 저 여자도 운동중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옷차림이었다. 그렇지만 현실의 여자는 마동을 앞질러 나가서 저 만치 앞에서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달려서 조깅을 하다가 힘이 들어서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도 속도나 차림새가 너무 어색했다. 일단 치마가 너무 길었다. 저런 차림을 하고 달려서 마동을 앞질러 갔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긴 치마를 입고?

  원피스처럼 생긴 옷을 입고? 흠.

  하지만 타인의 문제이니 마동이 이렇다 저렇다 관여할일은 아니었다. 천천히 앞을 보며 걸어가는 그 여자를 지나쳐 빠르게 달렸다. 마동은 그만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인간의 시야각은 대단한 각을 유지하고 있다. 많은 카메라회사에서 인간의 시야각과 흡사한 각도의 렌즈를 만들어내느라 고심했다. 그런 것을 보면 인간이란 참 알 수 없는 존재다. 곁눈질로 쳐다봐도 시야각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의 감지가 가능하다. 어두워서 뚜렷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정면을 꼿꼿이 응시하는 여자의 눈동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면만을 바라보는 이지러진 눈빛에 마동은 그만 매료됨과 동시에 연민스러운 섬뜩함도 동시에 느꼈다. 이것 역시 마동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섬뜩함이 잠시 들었지만 마동은 앞을 보며 달려 나기기 시작했다. 긴팔에 긴 치마를 입은 여자를 스치며 마동은 조깅코스의 앞으로 달려갈 뿐이다. 그저 그러면 되는 것이다. 지나고 나면 느꼈던 섬뜩함 따위는 사라진다. 노래는 서태지의 인터넷전쟁이 흐르고 있었고 막바지로 가고 있었다.

 

  파멸 위한 발전 또 다시 겪을 세계전

  네가 버린 그 독한 폐수가 어린아이 혈관 속을 파 내려가

  단단하게 박혀 새로 탄생할 오염변이체 항상 나 자신을 위협한

  난 내 자신에게서 저항한 결국 나 내게 경고한

  우련 결국 스스로를 멸망케 할

 

  우리들, 인간은 편리해진 시대에 어쩌다가 태어나 발을 들이고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것이 편리함인지 인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편리함이 장마처럼 대량으로 주어진 환경 속에 쏟아져 사람들은 그것이 전달하는 의미를 건지지 못하고 있었다. 편협하고 경멸적인 어조와 이기심으로 뭉쳐진 개인이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 복잡해진 삶속에서 단순함을 찾으려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굉장하다고 불릴 만큼 복잡해진 시스템 속에서 반복을 강요받고 그렇게 적응해가다가 문득 반복의 패턴에서 벗어나면 난처해하고 일을 크게 만들기도 한다. 여기에서 조화와 균형이 깨져버린다. 그 순간 상상력도 같이 깨져버리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상상력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

 

  바이러스 끝없이 맞서는 백신

  온 세상 지천에 널린 어덜트 갤러리

  감춘 칼날이 어린 우리 아이 머릿속을 훌린

  아동학대 자학변태 소녀들을 노리는 추태

  천태만상의 실태 애석하지만 너

 

  안터넷전쟁처럼 세상은 혼잡하고 불투명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뉴스전문 채널에서는 연일 성추행 범죄에 대한 뉴스와 성희롱에 관한 기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종교집단의 우두머리는 어린 여학생을 성추행하고 그것이 신의 뜻이라 했고, 여고생을 가리키던 선생님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성추행을 범했다. 사람들은 모두 한 마디씩 했다. 마음속에 어떤 마음이 있는지조차 자신도 모르는 채 입 밖으로는 비슷한 말을 쏟아냈다.

  성범죄와 이혼율은 세계 1위 자리를 탈환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중국과 일본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줬지만 어느 순간 휙 하며 순서가 바뀌어 버렸다. 성범죄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썼다고 말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거짓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범죄자들은 성적인 욕망을 채우고, 채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신의 결핍을 보상받으려는 심리 때문인지 범죄를 저지르는 동안 구타를 일삼고, 저항하는 여자들을 기이한 모습으로 처참히 죽이기까지 했다. 죽어버린 여자의 성기에서 죽은 쥐가 나오기도 했다. 죄책감도 갖지 않았다.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고 천사도 아니다. 어떤 누구도 동등한 위치에 있는 인간을 같은 인간이 무참히 죽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꽤 여러 가지 부류로 나뉘며 거기서 또 여러 갈래의 인간으로 나뉜다. 변두리에 속한 인간들 중에 몇몇은 내면의 자아가 이성을 짓누르고 밟고 올라타서 껍질에 불과한 육체에게 성적인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찾아서 욕구를 풀어버리라고 강요한다. 성범죄자들 중 많은 수가 제대로 교육을 받고, 올바르게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올곧게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한 여자의 남편인 것이다.

  마동은 살고 있는 독신자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늦은 시간에 탈 경우, 아파트에 살고 있는 젊은 여성과 동승하는 일이 벌어지려고 하면 그냥 계단을 걸어 올라가 버렸다. 이미 사회가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렇게 한 여름에 긴 팔과 긴치마를 입고 무방비로 걸어가는 여자는 성범죄에 노출이 되어 있다고 불 수 있다.

  땀을 쏟아내며 달린다는 것은 이런저런 해학에 관한 것들을 상상 할 수 있고 마동이 보낸 하루 동안의 오만함에 대해서도 반성이 가능했고, 노래를 듣고 그 가사에 맞게 서사를 늘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 마동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하는 일의 작업에 관한 부분에 기여하는 상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인터넷 전쟁이 끝나고 노래는 조지마이클의 목소리를 내보냈다. 조지마이클이 이반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의 목소리는 더 멋지게 들렸다. 두서없는 음악이 끝없이 이어폰을 통해서 흘러나왔다. 노래를 들으며 가사에 집중을 하다 보니 어느새 대나무공원까지 달려와 버렸다. 보통은 이곳에서 몸을 풀고 다시 달려 나갔다. 대나무공원에 도착했을 때, 긴치마를 입고 느릿느릿 걸어오던 여자가 다시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뇌 속의 공기가 전부 빠져나가버리는 느낌이 들어 어지러웠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동이 잘못 본 것은 아니다. 앞서가는 여자를 보고 멍하기만 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성범죄가 만연하는 것과는 다르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눈앞에 일어나고 있었다. 이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는 일이 아니다. 비록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나 마동은 지극히 리얼한 인간이었다. 현실에서 미신이니 형이상학적 궤변 등은 마동의 문화권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충분히 설명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일단 눈앞에 실체가 보여야 한다. 실체를 받아들인 다음, 그 다음에 허구적인 공상과 상상이 가능한 논리를 적용시키는 타입니다. 그것이 마동이 하는 일과 결부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저 여자는 어떠한 논리나 정의로도 설명이 불가능했다. 사전적 해석으로 확정지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오늘은 사람들이 없는 관계로 대나무공원에서 몸을 풀지 않고 바로 달려서 지나치려고 했지만 공원의 벤치에서 잠시 멈추어서 몸을 풀기로 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조깅코스에서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계속 달리다가 다시 멈추었다가 또 다시 달려 나가는 것을 반복하면 달리는 기복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오늘같이 이렇게 달리기 좋은 날에는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앞으로 뻗어나가는 행운이 주어지는 것이다. 진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어딘가에서 활자나 문형이나 어떤 방식으로든 개념이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결단코 진리가 아닌 사실은 될 수 있으면 입에 담지 않으려 했다. 지금 보는 저 여자에 대해서 어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믿어 줄 사람도 없지만 마동 역시 입 밖으로 꺼내서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만약 저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는지 꽤 진지하게 짧은 시간동안 생각해봤지만 답은 커다란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마동은 몸을 풀면서 천천히 걸어가는 저 여자를 뒤따르며 관찰했다. 여자는 걸음걸이가 영화화면속에서 빠져나와 현실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며 걸어가는 비현실적인 걸음처럼 보였다.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가 걸어가는 속도보다는 빨라보였지만 어쩐지 걸음걸이는 알 수 없는 미궁 속에 빠져있는 듯했다. 누군가 억지로 걷게 하는 모습처럼.

  여자의 걸음걸이는 리듬을 타는 것도 아니며 특정한 순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걸어가는 것뿐이지만 걸음걸이에는 설명이 안 되는 미묘한 체념이 있었다. 행복과 불행이 보이지 않았으며 걷는 행위가 효율적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걸어가야만 한다는 인상이 강하게 풍기는 걸음걸이였다. 천천히 조금 걷다가 잠시 멈추는 듯 했다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그것이 멈췄다가 다시 앞으로 갔다고 표현하기에는 모자람이 많았지만 이를테면 그렇다는 말이다. 처음 봤을 때처럼 얼핏 보면 술에 취한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처럼 보이겠지만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걸음걸이였다.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겠지만 치마 밑단의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보통 걷는다고 하면 다리를 교차하며 움직여야 한다. 그러면 치마는 그 반동으로 어떤 식으로든 침묵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저 여자의 치마는 그러한 논리에서 완전하게 벗어났다. 전혀 치마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하. 지. 만. 여. 자. 는. 분. 명. 히. 천. 천. 히. 걷고 있음이 확실했다.

  천천히 걷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토끼와 거북이에서 거북이처럼 꾸준히 앞으로 가는 것에는 ‘속도’라는 것이 따라잡을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토끼가 한눈을 팔고 멈춰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마동은 지치지 않고 꾸준하게 조깅코스를 달려왔다. 여자가 마동보다 앞서 걸어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마동은 여자를 지나치면서 자세하게 봤다. 어둠 속에서 흐린 달빛과 가로등불빛을 받아서 보이는 저 여자와 머리카락은 그야말로 흑발이었다. 밤이지만 여자의 검은 머리카락은 고혹적인 빛깔이었다. 아주 강한 흑발, 여름의 밤보다 몇 배나 짙은 검은색이었다.

  이런 얼토당토 안 한 상황에서 여자의 머리카락이나 눈에 들어오다니.

  강변을 따라 치누크가 한번 크게 불어왔다. 이질적인 바람은 마동의 마음에도 묘한 파동을 일으켰고 반사적으로 강변의 모습을 이전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치누크가 불어와 대숲을 흔들고 얼굴에 있는 땀방울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바람이 물고 온 기이한 냄새는 지나간 시간의 냄새이기도 했고 닿지 못한 먼 곳에서 시작하여 이곳까지 불어온 바람처럼 느껴졌다. 치누크는 당연히 한여름의 중간쯤에 불어오는 그런 뜨거운 바람이 아니었다. 온도도 그렇지만 냄새가 달랐다. 한여름의 바람 냄새라는 것을 딱히 해석할 길은 없지만 후욱 하고 폐로 들어오는 습한 바람의 냄새가 아니었다. 지금 불어오는 치누크의 냄새가 그랬다.

  보통 한여름의 냄새는 환영받지 못한다. 냄새라는 것은 싫든 좋든 인간의 코를 통해 뇌로 전달이 된다. 냄새의 싫고 좋음을 뇌는 인지를 한다. 마동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여름에는 그러한 냄새가 도처에 존재한다. 그것과는 다른 냄새가 바람을 따라와서 풍겼다. 지금 불어오는 치누크는 얼굴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았다.

  바람이 한 번 더 불어왔다. 바람이 마동을 스쳐 걸어가는 여자에게 도달했지만 여자의 머리카락은 바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마동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 들여야 했다. 실체와 비논리가 톱니바퀴에 의해서 서로 어긋나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동시존재하고 있었다. 치누크라는 바람이 불어오는 것부터 무엇인가 비틀어지고 이질적이라고 판단을 해야 했다.

  오늘은 조깅을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인간은 유기체라는 것, 미묘한 물질의 세포형질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마동은 늘 상기하고 있었다. 인체는 매일 운동을 하는 것을 지극히 피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일주일의 사이클을 꼬박 쉬지 않고 돌린다면 어느 순간에 삐거덕한다는 것이다. 피곤한 날은 조깅을 피하고 다른 꺼리를 찾아봐야겠다고 한 번 생각했다.

  얼굴만 빼고 긴팔이 긴치마를 입은 여자는 이렇게 무더운 날임에도 지나칠 때 보니 전혀 더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창백하고 차가워 보이기까지 했다. 온 몸을 소중한 보석으로 감싸듯 두꺼운 옷으로 꽁꽁 가렸다. 흑발의 머리는 길어서 허리까지 내려와 더욱 더워보였지만 더위를 전혀 타지 않는 체질일지도 모른다. 병 때문에 여름에도 긴팔과 긴치마를 입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팔다리에 상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저 여자는 이 모든 가설과 함께 겨울을 너무 좋아하는 체질인 것이다. 그래, 한 여름에도 가죽점퍼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겨울을 동경하는 사람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겨울을 좋아한다. 겨울의 향과 겨울의 온기와 겨울의 따뜻함을 좋아한다. 추운 계절이 전하는 따사로움의 위배를 사람들은 사랑했다. 일 년 동안 자주 내리는 비와는 다르게 겨울에는 눈이 있고 그 사이를 관통하는 커피향도 어울리고 무엇보다 크리스마스가 있어서 사람들은 겨울을 좋아한다. 하지만 마동은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름을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땀을 흠뻑 흘릴 수 있어서 좋아했고 크리스마스가 없어서 좋았다. 애써 겨울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여름은 조깅을 하며 흘린 땀이 빨리 마르지 않아서 좋았다. 오래전에는 역시 겨울이 자신에게 맞는 계절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마동 자신의 오해였다. 계절에게도 오해를 하다니,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언젠가부터 마동의 육체가 먼저 여름을 반겼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여름 속, 여름의 밤을 신혼의 주말부부가 일주일을 건너 만났을 때처럼 반겼다. 봄이 지나 여름이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하면 마동의 몸은 신호를 보내기 시작하고 축제준비에 돌입한다. 짧디 짧은 여름의 밤이 출발을 알리면 신체는 여름밤의 정취 속으로 달려들어 한없이 그 속을 휘젓고 다니다가 새벽에야 힘이 떨어져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마동에게 있어 여름이라는 계절은 몸을 마음껏 풀어줄 수 있고 달려고 겨울만큼 힘들지 않는 계절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여름이라는 계절에 대해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대로 괜찮을까.

  대체로 막연하고 땅 밑의 지층의 비틀림을 걱정하는 불투명한 걱정이 드는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여름에는 한 시간 반 이상을 달려도 기분만은 상쾌하다. 열기가 가득한 여름에 두 시간을 걸으면 다리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한 시간을 달리면 맑은 정신이 되었다. 조깅 후에 차가운 물로 진지하게 샤워를 하고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폭력적인 잠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은 여름에만 가능했다. 겨울이라는 계절에는 따뜻한 냄새가 도처에 널려 있을지 모르지만 마동의 몸은 겨울에는 민감해졌다. 건조해진 피부는 가려움을 유발했고 잠을 자다가 자신도 모르게 긁어버리면 긁은 살갗에서 피가 올라왔다. 피부의 표피를 뚫고 나오는 피는 마동 자신의 피가 이닌 듯 보였고 자다가 일어나서 피를 닦고 나면 긴긴 겨울밤을 가려움과 싸우며 눈을 뜨고 지새우기도 했다. 그저 건조해서 그렇다고 병원에서 말하지만 마동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마동의 신체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름이라는 찬란한 계절을 육체는 잘 받아들이고 실컷 적응해놨는데 겨울이 오면 신체가 투정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터무니없지만 겨울이 되면 그런 생각을 내내 하게 되었다.

  날이 차가워지면 나라에서 지정한 명절이라는 연휴가 있다. 명절은 식칼 같은 것이라 여겨졌다. 명절 이전과 이후의 환경을 싹둑 잘라버렸다. 더불어 마동의 신체도 명절의 경계를 지나 달라졌다. 명절이 오면 고향으로 갔다. 경진군에 있는 고향집을 찾았다. 경진군 삼리면의 고향 집에는 여생을 밭일을 일구며 지내온 어머니가 있다. 명절이 오면 경진군의 고향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 명절기간동안 오전에 그곳의 동네를 한 시간 이상 달렸다. 공기가 맑고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지만 조금만 달려도 숨이 막히고 힘이 들었다. 도시생활의 반복적인 패턴에 익숙해져있어서 일까, 늘 달리는 곳을 벗어나서 어색한 땅을 밟으며 달리는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체역시 고향땅에서 달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왜, 어째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고향이라고 하지만 인사를 할 만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없다. 그러다가 문득 명절은 말 그대로 뚝 하고 끊어져 버린다. 고향이라고는 하나 마동에게는 고향에 대한 향수라든가, 늙으면 이곳으로 와서 살아야 하는 성찰은 없다.

  여름이 지나고 12월이 다가올수록 명절도 다가오고 연말이 되면 회사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행사도 반갑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달릴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회식을 가져야 하는 경우가 있다. 마동이 다니는 회사는 다른 회사에 비해 회식의 횟수가 적고 사원들이 비교적 술에 절어있는 회식을 즐기지 않음에도 회식을 가지게 되면 몇 명은 흙탕물을 만들기 마련이다. 술과 담배냄새와 새벽까지 지속되는 언어유희의 향연은 전쟁만큼이나 싫었다. 하지만 마동은 회식에 참석을 해야 한다. 마동은 입사하여 앞만 보며 일을 해서인지 부서의 팀장이 되었으며 회식자리에서 뜬금없이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그들의 말을 스케치 했다. 연말에 가지는 회식자리에는 회사와 연계되어 도움을 주고받는 타사의 사람들도 참석을 하기 때문에 오너는 연회자리에 항상 마동을 대동했다. 연회를 가지고 난 이후의 뒤풀이와 회식자리를 마동은 그동안 피해왔다. 그렇지만 오너는 회식자리도 중요한 하나의 이음새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그 뒤로는 죽 참석하게 되었다. 어떻든 그렇게 해야 다음에 오는 일 년을 나름대로 아무런 사고 없이 무탈하고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었다. 생각대로 생활을 하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이것역시 조화와 균형이라면 그렇게 불러야 한다. 겨울이 다가오면 한 해가 지나간다는 덧없음에 또 기분이 상하고 결락을 맛본다고 해서 사람들은 겨울의 끝에서 끈을 놀칠 수 없어했다. 그리하여 연말에는 취객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것과는 다르게 마동은 겨울, 그 자체가 맞지 않는 것이다. 신체가 여름을 더 받아들일 뿐이니까.

  인생이란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누구에게나 평이하게 주어지는 하나의 스톱워치 같은 것이다. 일련의 난잡하고 조잡한 부조리의 나열 속에서 반복되는 과정의 귀결 같은 것이다. 흘러가는 한 해의 덧없음이나 감성에 호소하며 지나가는 막바지의 끝을 아쉬워 해본적은 마동은 없었다. 달리는 행위로만 따지자면 겨울에는 무엇보다 계절의 탓으로 달릴 때 얼굴만 빼고 몸을 중무장하고 달려야 한다. 그것이 마동이 탐탁지 않았다. 조깅이란 무릇 가벼운 몸으로 한 시간이상 끝없이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땀을 듬뿍 흘린다. 단지 그것인데 겨울에는 추위가 몸을 옷으로 꽁꽁 감싸 매고 달리게 만들었다. 그런 겨울을 아무리 노력해도 좋아 할 수 없다. 겨울에 두껍게 입고 달리는 것이 싫어서 gym을 찾아서 운동을 한 적이 있었다. 실내라는 곳도 겨울만큼 마동과 맞지 않다는 것을 그때 알 수 있었다. 실내에서 이런저런 운동을 한다는 것이 마치 살찐 햄스터가 되어 쳇바퀴를 돌리는 것처럼 운동을 해야 했다. 비슷한 복장의 모습을 한 남자들이 비슷한 시간대에 들어와서 비슷한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비슷한 숨쉬기를 하며 비슷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운동을 하는 곳이 실내 운동장이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장면이 연상이 되었다. 전부 인상을 쓰며 말없이 운동을 하다가 갑자기 누군가 피를 토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 비슷하게 죽는다. 그 공포가 점점 확산되어 간다. 사람들은 원인을 알지 못한 채 다음 날 또 한 사람이 피를 토하며 죽는다. 벌벌 떨었고 공포는 이미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헬스클럽을 삼키려 한다. 그때 누군가 한 사람이 선동을 한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 가능하지만 반박을 하려면 여러 개의 문장과 연구결과에 입각한 사실을 가져와야 한다. 하지만 이미 반박을 준비하는 것 역시 선동에 당한 것이라는 괴벨스의 말처럼 사람들은 한 사람의 말에 자신의 마음도 믿지 못하게 된다. 서로를 의심하고 범인은 상대방이라고 서로 외치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은 없다. 스티븐 킹이 실내체육관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죽음을 소설로 써 낸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지만 스티븐 킹은 이런 따위의 글은 쓰지 않는다.

  실제 헬스클럽이 영화 속의 모습과 다른 점은 헬스클럽에서의 운동도 지극히 혼자만의 운동이지만 클럽장이나 트레이너, 먼저 들어온 회원은 신입회원에게 친절함을 보이기 위해 관심이나 간섭을 한다. 그저 내버려두기에는 안타깝거나 안 된다는 무언의 의무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마동에게 이런 운동은 이렇게 하는 게 좋다든가, 이 기구는 이렇게 들어야하지, 같은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그저 트랙을 달릴 수 있으면 만족했지만 의도치 않게 아령이나 근력 운동에 필요한 운동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마동을 가만두지 않았다.

  아마도 마동이 이렇듯 싫어하는 겨울을, 저 긴팔에 긴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는 무척 좋아하는 계절이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히 그럴 거야. 그럼에도 ‘왜’라는 의문은 꼬리표처럼 붙었다. 필시 불가결한 어떠한 무엇에 의해서 저 여자는 겨울을 단맛 가득한 딸기무스케이크만큼 좋아하거나 더위를 타지 않는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 까지 생각하고 마동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대나무공원에서 몸을 살며시 풀면서 여자의 걸음걸이를 쳐다보고 있으니 비가 한 두 방울 우두둑 하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름날의 비는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이런 레인시즌에 내리는 비는 더욱 그러한 모습이 짙었다. 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은 곧 십여분 힘 있게 떨어지다가 인간의 모습에 놀라 달아나버리는 새떼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조깅 중에 예고도 없이 갑자기 쏟아지는 비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여름에 중구난방으로 내리는 비는 일기예보관들까지 난처하게 만들었다. 특히 소나기의 경우 더 그랬다.

  계절 또한 변이하고 있었다. 한낮의 온도가 35도를 넘어가는 날, 밤에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는 시멘트나 아스콘 특유의 냄새를 사람들의 코 안으로 밀어 넣었다. 건조한 여름날에 내리는 비 비린내도 지금처럼 장마 기간 중에 떨어지는 냄새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는 시멘트냄새와 뒤섞인 비 비린내를 저쪽 세계에서 어떠한 문을 쾅 열고 통과하여 나온 것 같은 묘한 냄새를 풍겼다. 한여름의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는 실내 체육관에서 역기를 드는 남자들처럼, 얼굴의 표정을 일그러트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비가 후드득, 큰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비 비린내가 자아내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땀과 함께 얼굴을 타고 가슴골을 지나서 배로 내려가는 빗방울의 느낌은 아주 좋은 기분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떨어지는 비는 정의 할 수 없는 흥분을 자아냈다. 조깅코스 어딘가에서 비를 피했다가 다시 달려가면 되지만 마동은 비를 맞으며 조깅코스의 앞으로 달려가려는 강한 끌림을 받았다. 이처럼 잡아당기는 끌림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이끌림의 정체가 무엇인지 마동은 알고 싶었다. 알고 싶다는 욕망적 근원이 팽창하며 마음속의 어느 부분에서 일렁거렸다.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마동은 다시 전위를 가다듬고 달리기 시작했다. 긴팔의 긴치마의 여자를 슥 지나치며 곁눈질로 여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마동의 목적은 어쩌면 여자를 한 번 더 확인하기 위함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역시 정면을 응시한 꼿꼿한 눈동자 속에는 ‘적당히’를 넘어선 사람을 잡아당기는 매력과 차가운 감성이 서려있었다.

  잠깐 스쳐 지나치는 여자의 눈동자 속에서 어째서 그런 것들이 보이는 것일까.

  저런 복장으로 필시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운동을 목적으로 긴팔에 긴치마를 입고 미동도 거의 없이 조깅코스를 하릴없이 걷지는 않을 것이다. 장마기간의 스산한 밤에 비까지 내려 더욱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거닐다가 혹시 취객들에게 해코지나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에게 말이라도 걸어볼까.

  마동은 그런 마음이 잠시 들었지만 요즘처럼 성희롱 때문에 떠들썩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 타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자신이 왜 이렇게 그저 지나치는 여자에게 신경이 쓰이는지 놀랐다. 마동은 고개를 저었다. 스쳐가는 한 사람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동은 지나치는 여자에 대해서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자꾸 생각이 났다. 마치 어쩔 수 없이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 스치는 여자의 눈동자는 차가운 달처럼 보였다. 하늘에 떠 있어야 하는 달이 마치 작은 수정으로 축소되어서 여자의 눈동자를 대신해 조깅코스의 앞을 밝히며 걸어가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여자의 눈 속에 비친 달은 무거운 침묵을 잔뜩 지닌 채 어떠한 말에도 함구할거야, 하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고 하늘의 달을 여자는 자신의 눈 속에 고이 안착시킨 후 앞으로 이동했다. 마동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아 이래선 조깅을 하는 것은 무리다. 생각하지 말자.

  마동은 다시 고개를 여러 번 세차게 흔들었다. 머리카락 끝으로 빗물이 떨어졌다. 차가운 냉철함이 여자에게 받은 첫 인상이었다. 비가 투두둑 하며 거친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여자의 근처에서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는 여자의 옷깃이나 머리카락을 전혀 적시지 못했다.

  뭐지? 몸에 어떤 장치를 한 것일까? 어째서 비가 여자의 몸을 적시지 못하는 것일까.

  마동은 달리면서 팔뚝을 쳐다보았다. 팔뚝에서 열을 내며 방출시킨 땀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맞아서 시원하다는 감촉이 분명하게 전해졌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굳이 설명 따위로 풀이하지 않아도 된다. 논리로 설명을 하려면 비에 젖지 않는 저 여자 쪽을 설명하는 편이 나았다. 마동은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혼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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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동안 너무 이기적으로 살아왔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을 위해 전문의에게 상담의 길을 열어 놨다. 정보화시대의 한가운데로 접어든 이 시대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를 죽 다니려면 정신이 올바른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야 하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기반’과 비슷하다. 흔히 사람들은 기반을 잡는다는 말을 한다. 기반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기본반찬의 준말일까. 그렇다면 끼니때마다 기본반찬을 먹으며 생활하기가 쉬운 일일까.

  회사는 그간 동종업종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직원들은 사내에서 또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려면 그만큼의 노력이 가해져야 하고 그 노력 속에는 일반론으로 설명 할 수 없는 이해들이 얽혀 있었다. 인간은 유기체다. 그 점을 나는 시시때때로 각인하고 있다. 스트레스의 출발은 여러 사람이 동일선상에 있다고 해도 도착지점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제각각인 것이다. 각각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축적하거나 방향성을 잃은 채 배설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회사는 직원들의 일탈을 예방하기 위해서 연계한 정신과전문의에게 정기적으로 모든 사원들의 정신적인 문제를 상담해주고 있다. 상담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며 각자의 고민과 상담시간은 본인이 느꼈을 때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회사생활이 불편하다고 생각이 들면 전문의를 찾아가서 상담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회사 내에서는 서로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많은 직원들이 상담을 받고 있으며 그 중에는 꽤 심각한 수준의 스트레스로 고통을 받는 직원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나는 아직 상담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있었다.

  중학교 때 이 도시로 흘러 들어와서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지만 아직 스트레스 때문에 상담의 필요성을 덜 느끼고 있는 편이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그것이 스트레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때문에 생활이 불편하거나 그것으로 인해 끊임없이 뇌를 창으로 찌르는 고통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나도 언젠가는 상담을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 시기가 단지 언제인지 확정지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나에게는 그것 이외에 나를 따라다니는 잠재적 고통이 있다. 분명 정신과상담은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필요하다고 내 자신에게 말하곤 했다. 나는 기억이 상실된 부분이 있다. 고등학교시절에 나는 어떠한 계기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입원한 경위에 대해서 그 일을 기억해내지 못할뿐더러 어린 시절의 어떤 부분에 대한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입원을 하여 눈을 떴을 때부터 기억은 생생하지만 무슨 일로 병원에 입원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때 당한 사고와 어린 시절의 고향에서의 기억이 조금씩 상실되었는데, 그 부분이 아직도 복구가 되지 않고 있다. 사고를 당했을 때 고향에 머물렀던 어머니가 병원으로 와서 나의 간호를 맡았다. 병원에서 눈을 뜨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는데 마치 몬스터의 얼굴 같았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부어있었고 두드려 맞아서 폐허 속의 부서진 담벼락처럼 제멋대로 멍이 들어 있었다. 눈이 부어서 눈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를 단춧구멍이 겨우 거울을 통해 보였다. 거리감이 상실되어서 손으로 거울을 어느 지점에 대고 봐야 하는지 거리 측정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제게 무슨 일이 있었죠?” 나는 어머니에게 질문을 했지만 어머니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었고 의사에게 매달려 살려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덤덤하게 나의 옆에서 낫기를 바라며 고요하게 간호를 할 뿐이었다. 나는 이후 의사에게 직접 들었지만 사람들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누군가들’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말은 여러 명이라는 말이다. 누가 나를 이토록 무자비하게 때렸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구타를 당할 만큼 어떤 짓을 벌이면서 지내지 않았다. 친구도 거의 없었고 만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불량배들에게 그렇게 당했을 거라는데 본 사람도, 신고를 한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서 의사는 여러 명이 때렸다고 해서 이런 식의 멍이 드는 경우는 드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전혀 기억이 없다. 뇌의 자기공명 단층촬영을 통해서 머리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곳도 뢴트겐으로 촬영해본 결과 이상이 없다는 것으로 나왔다. 앞으로 살면서 어떤 일이 뇌의 어느 구간에 영향을 끼치는지 모르겠지만 이상이 없다는 뇌 생리학 전문가의 소견이 있었다. 그렇다면 믿을만했다. 그렇지만 현재에 와서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이나 고등학생 때, 당시의 기억이 소멸된 것으로 보아 그 의사의 소견을 철저하게 믿어서는 안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당시에 머릿속에 대해서 좀 더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구체적인 소견을 들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후회가 가끔 들기도 했다.

  후회라는 것은 건강한 후회가 있고 그렇지 못한 후회가 있다고 키가 작고 머리통이 큰 심리학자가 말했다. 그 당시에 확실한 것은 어머니의 변화였다. 어머니는 내가 병원에 입원하는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어머니를 지탱하고 있던 어떤 것이 누락되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함으로써 어머니에게 입력되어야 할 어떤 부분이 머릿속에 기입되지 못하고 그대로 빠져 나가면서 원래 지니고 있던 자아에게도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마음과 머릿속이라는 대지에 세워놓은 건물이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건물 안의 집기들만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건물 자체가 하룻밤 새 그대로, 몽땅, 흔적도 없이,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머니의 변화는 내가 입원하는 시점에서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내가 병실에서 눈을 뜬 그 때부터 어머니의 변화를 감지했다. 평소에도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명절에 찾아가서 보는 어머니의 모습은 한 곳을 응시하는 시간을 많이 가진다는 것이다. 티브이를 보는 경우도 드물었고 책을 읽지도 않았다. 정해지지 않는 무엇인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듯 보였지만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깊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지정되지 않은 곳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어머니를 부르면 그제야 얼굴 가까이 있는 나를 알아채고 식사준비를 하곤 했다. 전화통화를 하면 안부를 묻고 그날의 이야기를 하지만 어딘가 겉도는 이야기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어머니의 마음의 누락을 가져왔는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의 건강검진도 나쁘지 않았다. 노안으로 나타나는 몇몇의 징후를 제외하고는 장기라든가 대부분의 기능은 아직 말짱했고 치매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누락시킨 그 무엇이 내 기억까지 가져가 버린 것이 아닌지 나는 의심을 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 뒤로 제대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 정신과상담을 미루고 있는 형편이지만 언젠가는 상담을 받아 보리라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지금 조깅코스에 보이는 저 여자의 모습은 그동안 정리가 안 되어 있는 마동의 머릿속을 더욱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마동은 전문의와의 상담을 ‘언젠가는’에서 ‘내일’로 바꾸었다. 비에 젖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몸에 무슨 장치를 하지 않고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맞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나도 너무 이탈한 궤변이었다. 논리라는 관점이 전혀 없는 일이다. 레인시즌에는 비가 많이 온다. 비가 떨어지면 세상은 비에 젖는다. 여름나무가 젖고, 여름 나뭇가지가 젖고, 여름나뭇잎이 젖는다. 땅바닥이 젖고, 땅바닥의 흙이 비에 젖는다. 해변이 젖고 바다위의 배가 비에 젖는다. 비가 오면 모든 것이 비에 젖는다.

  마동은 지금 상황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았다. 비가 오면 비에 젖는다는 것은 논리다. 그것이 사실이고 정론이며 공식이고 상식인 것이다. 그동안은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시간적으로 현재라고 불리는 지금은 논리에서 벗어난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문득 마동은 기억이 상실한 부분과 어머니의 누락된 부분과 저 여자는 상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동은 지금 자신의 정신적인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해 볼 필요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의 사고로 인한 정신적인 후유증이 이제야 나타난다던가,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복잡한 인간관계에 얽히면서 뇌의 여러 구간이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마동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특정부분에 대해서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닐까 의심을 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하필 오늘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런 식으로 눈앞에 나타난단 말인가.

 

  마동은 오컴의 면도날을 대입시켜 긴팔의 긴치마를 입은 여자가 비에 젖지 않는다는 비현실적인 상황을 대입하려고 했지만 첫 관문에서 막혀 버렸다. 마동은 생각을 다시 시작점으로 돌렸다. 어쩌면 저 여자는 옷 속을 비에 젖지 않는 장치로 채웠을 것이다. 그 장치가 조금 추하기 때문에 긴팔에 긴치마를 입고 있는 것이다. 비가 내린다는 것을 일기예보를 통해서 전해들은 회사는 그러니까 저 여자가 속해있는 회사(이 회사는 비에 젖지 않는 장치를 개발하는 회사로)는 직원인 저 여자에게 실험을 목적으로(대신 사 내에서 더위를 타지 않는 여자에게 월급이외의 보너스 수당을 듬뿍 지급하기로 합의를 한 다음) 인적이 드물 것 같은, 오늘 같은 날의 강변 조깅코스를 천천히 걷게 하는 것이다. 회사는 우산 없이 비를 맞지 않는 장치를 개발하는데 사활을 걸었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비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할 뿐, 비에 젖은 것은 바퀴벌레만큼 싫어했다. 우산을 드는 것도 사람들은 귀찮아했다. 회사는 프로젝트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개발은 계획처럼 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 빠르게 걸으면 비에 젖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천천히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는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속도를 붙여가면서 실험을 이어 갈 것이다. 회사의 연구팀은 어딘가에서 여자를 주시하거나 사무실에서 무선망으로 그 결과를 그래프로 받아서 체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가설을 세우고 나니 어느 정도 이치에 맞아 들어갔다. 그런데, 저렇게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감에도 달리는 마동을 앞질러 앞서 걸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막히기 시작했다. 아무리 채워도 바닥이 드러나는 그릇처럼 막막했다.

  그래, 생각하기를 포기하자.

  마동은 더 이상의 생각은 해롭다고 느끼고 그대로 달리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늘 하던 대로 그저 달리는 것이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평소와 같을 것이다. 내일 당장 상담을 받아 보는 것에 마동은 자신과 합의를 본 후, 다리에 힘을 주었다. 타인의 일인데 뭐, 하며 여자를 지나쳐 앞으로 내쳐 달리기 시작했다. 긴팔의 긴치마의 여자가 옆에서 뒤로 멀어져갔다. 달라다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의 모습은 곁눈질로 볼 때보다 확실히 미. 스. 터. 리. 했다.

  키는 163센티미터 정도 밖에 안 돼 보였지만 키가 커 보였다. 긴치마에 가려져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높은 구두를 신어서 그럴 것이다. 굽 속에 비를 맞지 않는 장치를 숨겨 두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키가 커 보였다. 확실하게 그렇게 보였다. 마동의 키가 그렇게 큰 편이 아니기 때문에 지나치면서 본 여자의 키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멀어지면서 보면 여자의 키는 상당히 커 보였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여자의 얼굴이 눈에 잘 들어왔다. 여자는 외국의 매력적인 모델인 안젤라 카사모안의 얼굴과 닮았다. 그렇게 보였다. 눈매가 동양인의 것이 아니었다. 안젤라 카사모안과 닮았다고는 했지만 분위기는 달랐고 화장이 진한 안젤라에 비해 옅은 화장이 여자의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여자의 눈매는 브리티시여자들처럼 쑥 들어가 있었다. 입체감이 드는 눈매였다. 영화 속의 여자 주인공을 보는 듯 비현실적인 눈이었다. 그래서일까. 눈동자의 깊이가 몹시 깊었다. 깊은 눈동자는 떨어지는 비에도 전혀 깜빡임 없이 정면을 또렷이 응시하고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오로지 걸어간다. 앞으로 가는 것 하나에 모든 신경을 쏟아 부은 것처럼 보였다. 긴팔을 입었지만 타이트해서 팔이나 몸매가 드러나 보이는 것이 기이하고 신비스러워 보였다.

  여자가 입고 있는 긴팔에 긴치마의 옷은 블랙계통의 옷이었다. 이 밤에 홀로 뜬 달을 시기하듯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있었고 비를 뿌리고 있어서 달빛이 너무 미미했지만 연약한 달빛을 받아서 상의의 자수가 살짝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은 여자의 얼굴과 함께 신비스러움을 가중시켰다. 그러고 보니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달빛이 미미하게 비치는,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밤이었다. 치누크가 불어와 기시감이 떠올랐다면 자수의 신비한 빛은 기시감을 좀 더 구체성을 띠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 구체성이라는 것이 불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여 무엇인지 감지해내지는 못했다. 마동은 이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내일 상담을 통해서 다 쏟아내야 할 것만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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