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채는 오랜만에 깨지 않고 잤다. 아니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시간을 몸이 버텨내지 못했다. 그래서 몸이 영채를 깊은 잠속으로 보내버렸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이것저것 정리하고 마무리하면서 많이 지쳤었다. 사실 가능하다면 스스로를 더 지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정신없이 바빠야 했다. 그래야 다른 복잡한 생각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이 모든 것들에 의해 무너지지 않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6개월 전 할머니의 병을 듣고 6개월 내도록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 할머니의 병을 알게 된 그날, 할머니에게 조만간 마지막이 올 거라는 말을 들은 그날, 영채는 할머니랑 하루 종일 울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영채에게 오늘 이후로는 서로 이런 모습 보이지 말자고 했다. 할머니는 영채와의 마지막을 최대한 좋은 기억으로 보내길 원했기에, 영채는 매순간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을 웃는 얼굴 뒤로 보내야 했다. 할머니의 마지막일지도 모를 부탁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영채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없는 삶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영채에게 할머니는 엄마였고, 친구였고, 모든 것이었다. 지금까지 영채를 버티게 해준 것도 할머니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영채의 인생이 한없이 잔인하게 느껴졌을 때도, 아무 희망도 없는 것 같았을 때도 그 좌절의 끝에서 영채는 할머니를 보며 생각했다.
‘할머니 같이 멋있는 사람이 꼭 될 거야.’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멋있었다. 그래서 영채는 더욱 그 모습이 그리웠다. 생의 마지막 고통을 견뎌냈고, 그 고통 속에서 마지막 미소를 영채에게 남겨주고 그렇게 떠나셨다.
그런 할머니를 떠올린 순간 영채의 눈에는 눈물이 차버렸다. 얼굴을 따라 흐르는 눈물은 영채도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와의 약속은 지켰으니 이제 펑펑 울어도 될 것 같은데, 그냥 할머니는 그런 모습 안 좋아 할 거라는 생각에 울기 싫었다.
출근을 준비하는 영채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신경이 쓰였다. 눈은 피곤 때문인지 자신도 모르는 순간 흘렀던 눈물 때문인지 부어있었고, 얼굴은 생기가 하나도 없이 지쳐보였다. 매니저 언니의 배려로 하루 더 쉴 수 있었던 영채는 오늘은 가능하다면 좋은 얼굴을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에 후회가 되었다.
다행히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오늘은 상태가 좋지 않아도 별로 부각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길 바랐다.
“매니저님, 저 왔어요.”
영채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민선이는 영채가 문 밖에서부터 연습했던 얼굴의 어색함을 눈치 채 버렸다. 영채의 불편한 마음을 알기에 결코 직접 드러내진 않았다.
“송영채, 밥은 먹었니?”
둘은 그렇게 서로를 배려했다. 그래서 영채는 늘 민선이가 고마웠고, 그런 영채를 민선이는 아껴주었다.
“언니, 밥은 아직 못 먹었고, 그리고... 요 며칠 고마웠어요.”
영채는 민선이에게 장난기 있는 얼굴로 엄살을 부리고 싶었지만, 고마움은 직접 말하고 싶었다. 그런 영채를 향해 민선이는 미소를 지었다.
“얼른 옷 갈아입고, 안에서 뭐 좀 챙겨먹고, 그리고 열심히 일하자”
영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용 휴게실로 들어갔다. 무언가 큰 숙제를 끝낸 것 같았다. 그리고 바쁘게 일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온 것에 감사했다.
영채가 일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은 영채가 2년째 일하고 있는 곳이었다. 항상 모든 일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던 영채에게 이 일도 처음에는 힘들었다. 그러나 영채의 복이었던지 민선이를 만나고 영채는 그렇게 적응하며 이제는 즐기게 되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일한 후, 영채는 극단적인 체력의 한계에서 오는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좋아했다. 그걸 알게 된 순간 영채는 마음이 힘들 때 그 방법을 택하곤 했다.
비가 내리는 오늘은 손님들이 덜 붐볐다. 그래서 영채는 지금의 상태를 온전히 잊지 못했다. 창밖에 흐르는 빗물에 영채는 몇 번의 울컥함을 참아야 했다. 쉽지 않았다. 제발 바쁘기를, 그래서 창밖의 빗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를 바랐다.
겨우 오늘의 일이 끝나고 영채는 퇴근을 준비했다. 그리고 울린 문자메시지 소리에 영채는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영채의 이제 하나 밖에 없는 가족인 오빠, 영우였다. 영우가 결혼했으니까 가족이 더 있는 건 맞는데, 영채는 이 모든 상황이 편하지 않았다. 영우와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어색했고, 그래서 오빠의 가족 안으로 자기가 들어가는 건 더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오빠네는 곧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영채는 괜히 더 오빠의 행복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영우와 서먹하게 지내는 건 맞지만, 영우의 행복은 진심으로 바랐다. 영우만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언젠가부터 영채는 생각했다.
자신에게 더 이상 마음을 열지 않는 영채를 영우는 늘 기다려주었다. 영채가 자신에게 마음을 닫은 그때 영채의 마음을 좀 더 받아주지 못한 게 늘 후회가 되었었다. 그때가 영우에게도, 영채에게도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영우는 영채보다 조금 더 컸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영우는 그 모든 걸 영채보다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영채야, 할머니 보내드리느라고 힘들었지. 그래도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멋있는 모습 보여주시고 가셨다. 영채야, 난 너의 가족이야. 그러니까,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힘들면 나한테 좀 기대도 된다고. 내가 미안하다. 그러니까 힘내자.’
영채는 영우의 문자에 또 다시 목이 메었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서둘러 퇴근해야 했다. 먼저 가겠다고 어색하게 웃으며 나온 영채는 계단을 올라갔다. 영채의 지금 유일한 피난처인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 문을 열었다. 빗소리가 시끄러울만큼 바닥을 때리고 있었다. 영채는 우산을 펼쳐서 빗속에 섰다. 이 빗속에서 울어도 될 것 같았다. 영채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인생이 너무도 슬펐다. 아니 괜찮다고 생각하면,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영채는 사실 너무 힘들었다. 세상에 아무도 없이 자신 혼자라는 생각이 오늘따라 강하게 들었다. 영우가 자신에게 기대라고 했지만, 그냥 그랬다.
하늘에서 겨울비치고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소리에 영채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산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영채에게 조금씩 용기를 주고 있었다. 더 크게 울어보라고.
“난 잘 살고 있다고...나한테 왜 이러냐고...”
늘 묻고 싶었다. 자신에게 왜 이러냐고...그 말이 입 밖을 나가는 순간 영채의 슬픔이 터져버렸다. 눈물은 빗물처럼 흘렀다. 목소리는 영채도 모르게 커져갔다.
“내가 뭘 잘못했냐고, 이 지랄 같은 인생. 나한테 왜. 이. 러. 냐. 고.”
영채는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자신에게만 잔인하게 구는 것 같은 인생에 너무도 억울했다. 그렇게도 울고 싶었던 울음이 빗소리에 섞여 들어갔다. 늘 참아왔기에 할머니 장례식장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울음이 지금 이 순간 흘러나왔다.
한참을 울던 영채는 내리는 빗방울에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옥상 난간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안돼요.”
영채는 정말 깜짝 놀랐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래서 사람의 소리에 놀랐고, 혹시나 잘못 들었나 싶어서 순간 무서워지기도 했다. 확인 해야 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뒤돌아 보았고, 영채의 뒤에는 시커먼 형체의 사람이 서있었다. 생각보다 큰 사람이 서 있어서 영채는 무서웠다. 그러나 마주친 눈빛에서 영채는 마음을 놓았다.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느낀 그 눈빛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태호에게 놀랐을 뿐이라고 말한 영채는 얼른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래서 살짝 고개만 움직여 인사인지, 자리를 벗어나겠다는 뜻이었는지 모를 그런 어색한 행동을 하고 태호 곁을 지나쳐 걸었다. 영채는 태호의 모든 것이 슬펐다. 알콜 냄새까지 슬펐다.
문을 닫고 나온 영채는 그제서야 좀 전의 상황을 다시 그릴 수 있었다. 자신이 무슨 소리를 쏟아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왜 그 사람이 그런 오해를 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 거기에서 왜 술을 마시고,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해졌다.
태호 덕분에 좀 전의 슬픔을 잊을 수 있었다.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슬픔도 까먹을 정도였다. 그런 자신의 모습에 영채는 웃음이 났다. 계단을 내려오며 영채는 슬픔에 대한 미련이 좀 사라졌음을 느꼈다. 울어서인지, 비 때문이었는지, 아님 빗속에 서있던 세상에서 제일 슬픈 얼굴을 하고 있던 태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마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영채에게 위로가 되었을지도. 그 순간 세상에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자신의 뒤에 서 있던 태호의 존재만으로, 아니 태호의 눈빛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영채는 그 공간에서 그렇게 위로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