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을 말해. 오빠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제발. 이 손 좀 이제 놓아줘.”
자욱한 안개에 눈 앞, 그 어느 것 하나도 또렷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눈, 정우의 눈을 통해서 단 한 가지만은 확실히 볼 수 있었다. 흰색 원피스. 창백한 얼굴. 그 안에 애써 숨긴 안타까운 표정. 정우의 아내, 서경의 아름다운 얼굴은 그 짙은 안개조차 숨기지 못했다. 날카로운 서경의 외침에 정우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위화감을 느낀 정우에게는 여기가 어딘지, 그가 지금까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만, 그의 본능이 서경의 손을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현재 그 본능에만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자꾸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 흘러 나온다.
“서경아, 어딜 가겠다는 거야? 설명을 해봐. 말을 해줘야 내가 알지..”
정우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고, 그를 바라보는 서경의 얼굴에도 서글픔이 묻어난다. 모든 시공간이 멈춰 있는 듯한 이곳이 어디인지는 그 둘 모두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이 상황이 너무나도 안타까울 뿐이다.
기어코 놓지 않은 정우의 손에 이끌려 안개에 둘러싸인 어느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둘.
“서경아 대체 여긴 어디야? 왜 우리가 여기 있는 거고 응?”
말없이 서경은 정우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머리를 쓰다듬던 그 손길에서 정우의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보인다. 그런 그녀의 손길을 한참이나 그대로 둔 정우는 결국 그의 얼굴에 멈춰있던 그녀의 두 손을 잡는다.
“오빠, 나 이제 가야돼. 가기 전에 오빠 얼굴 딱 한 번만 더 보러 온 거야.”
정우,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체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말 안 해주면 보낼 수 없어. 아니, 해줘도 절대 보낼 수 없어. 대체 뭐..”
정우의 말을 중간에서 자른 서경이, 조금은 편안해진 표정으로 정우에게 말을 건넨다.
“한 가지만 약속해줘.”
정우는 그의 습관대로 고개를 끄덕인다. 잡은 손은 절대 놓치 않고.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오빠의 습관들을 바꿀 거라 약속해줘. 알겠지?”
정우는 영문은 모르지만 그녀를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서경은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하지만 갑자기 정우의 귀에 그녀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점점 희미해지는 서경의 얼굴과 그녀의 몸체.
정우, 그녀를 붙잡으려 하며, 그녀의 입모양에 집중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내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결국은 점점 사라져가는 서경. 정우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팔을 뻗으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 뿐 이었다.
“서경아! 서경아!!”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지, 듣지 않는지 서경의 형체는 점점 사라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