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리암경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실래요?”
“그래, 언제까지 모른척할 수는 없으니…….”
잠깐의 침묵이 너무도 무거웠다.
하지만 이내 아버지는 호흡을 가다듬고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들었듯 리암은 천민이란다. 그 애와는 2년 전 여정 도중에 지나친 천민들의 마을에서 처음 만났고.”
블릿의 입에서 천민이라고 들었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그 말이 피부로 와닿았다.
“그럼 리암을 어떻게 데려오신 건가요?”
“그 때는 정말 참담했지. 당시 10살이었던 리암은 돌에 맞아 죽은 제 어미의 곁에서 묵묵히 돌을 치워내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순간 머릿속에 전에 들었던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
‘그거 아십니까? 천민들의 마을에서 큰 죄를 지은 사람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마을 사람들이 커다란 돌을 들고 와 죄인이 죽을 때까지 돌팔매질을 하죠. 저희 천민들은 죄를 짓는 사람을 그렇게 침묵시켜 왔습니다.’
리암이 블릿에게 했던 말.
그 말에 깃든 가시는 리암 본인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혼자가 된 그 어린 아이를 도저히 내버려둘 수가 없었단다.”
“그래서 리암경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이군요.”
“적당히 몸을 추스르고 정상적인 가정에 입양될 수 있도록 절차를 거칠 생각이었다만 그 녀석이 검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아직까지 훈련장에서 지내고 있지.”
리암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훈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지금의 그에게는 오로지 검만이 전부였다.
“고작 2년인데 리암은 지금 우리 훈련장에서도 손꼽히는 기사로 자라고 있단다. 그러니 네가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 그 작은 아이는 생각보다 강하니까.”
“맞아요. 리암경은 강해요.”
아버지의 따스한 미소에 마음속에 응어리진 감정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리암이 더 이상 괴로운 과거에 자신을 가두지 않기를, 그 나이대의 아이답게 웃어주기를 바란다.
지금은 잘은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든 리암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아버지와 함께 침실로 향했다.
***
눈이 일찍 뜨였다.
전날 있었던 일들이 마치 꿈인 것처럼 현실성 없이 다가온다.
설마 내가 그 큰 기사 앞을 막아설 줄이야.
리암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그렇게까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자신이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어머, 아가씨.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좋은 아침이야, 한나.”
“네, 좋은 아침이네요.”
한나는 방 안의 모든 커튼을 걷어 끈으로 고정한 뒤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맑은 풀 냄새가 섞여 들어온다.
“한나, 혹시 리암경은 벌써 훈련장으로 돌아갔어?”
“아, 아직 안 돌아가셨을 텐데요…….”
한나는 말끝을 흐리더니 내게서 시선을 피한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모양이다.
“흠... 그럼 가기 전에 인사라도 해야 되겠다.”
“네? 아가씨 안돼요!”
“왜?”
필사적으로 앞을 가로막는 한나를 보며 조금 전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리암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한나를 추궁하려던 찰나 창 밖에서 목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왜 저 둘이 대련을?”
창밖에서는 리암과 크리스가 목검을 맞대고 있었고, 아버지와 로건은 가운데 서서 두 사람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목검으로 대련하는 것이지만 마치 진검으로 승부하는 듯 박력이 넘쳤다.
그런데 전에 네 명의 기사를 쓰러뜨려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던 리암이 오늘은 왠지 지쳐 보였다.
“저 대련 언제부터 시작했어?”
“네? 그게... 해 뜨기 전부터 시작했을 거예요. 저도 처음부터 본 건 아니라 정확한 건…….”
“뭐?”
한나가 아침 일과를 시작하는 시간은 대략 5시 정도인데 리암은 그 전부터 대련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혹시 어제 일로 리암이 벌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잠옷도 갈아입지 않고 방을 뛰어 나갔다.
멀리서 한나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버지!”
“리지?”
“아가씨?”
큰소리로 부르니 모두의 시선에 내게 향했다.
대련은 자연스레 멈췄고, 나는 숨을 고르며 네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아버지, 리암경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 벌을 주려고 하시는 거면 저도 같이 받을게요. 그러니 제발 멈춰주세요.”
“리지, 이건 벌을 주는 게 아니라 단순한 아침 대련이란다. 그러니 일단 진정하렴.”
아버지는 내 키에 맞춰 허리를 숙인 뒤 망토를 벗어 잠옷 위에 덮어주셨다.
그제야 내가 얇은 잠옷 한 장만을 걸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리암의 뺨이 조금 붉게 물든 것은 못 본 척 하는 게 좋겠고, 대놓고 웃음을 참고 있는 크리스의 얄미운 얼굴은 기억해 둬야 되겠다.
“리지, 아직 새벽이슬이 다 마르지도 않았단다. 치맛자락이 젖어 감기에 걸리면 어쩌려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던 아버지는 결국 나를 들어 올렸다.
아버지의 말대로 치맛자락이 조금 젖어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니?”
“목검 부딪치는 소리가 침실까지 들려서 일어났어요.”
“이런, 미안하구나. 네 침실까지 들릴 줄 알았다면 다른 곳을 찾았을 텐데.”
목검 소리에 깨어난 것이 아니었기에 아버지에게는 거짓말을 한 것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끝없이 이어지던 대련에서 리암을 빼낼 구실은 생겼다.
“아버지, 다들 지친 것 같으니까 대련은 그만하고 함께 차를 마시는 게 어떨까요?”
“음... 좋은 생각이지만 기사들은 아침 훈련 때문에 곧 훈련장에 돌아가 봐야 하니, 차는 우리 둘이 마시게 되겠구나.”
“단장님, 잠깐만요!”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 보던 아버지는 크리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썹을 구기셨다.
“무슨 일이지, 크리스 루스벨트.”
“단장님, 또 치사하게 나오실 겁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제 그만 훈련장으로 가보도록.”
단호하게 말을 끊어버린 아버지는 이내 크리스에게서 등을 돌려 저택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크리스가 떼를 쓰고 있는 듯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곁에서 함께 해준 그에게 보답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가버리는 건 미안하다.
“아버지, 아침 훈련까지 시간이 아직 조금 남았죠? 모두에게 차를 대접하게 해주세요. 어제 크리스경이 곁에 있어줬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었는데 저는 아직 아무 답례도 하지 못했어요. 제발요.”
“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가 없구나.”
양손을 모으고 부탁했더니 아버지는 쉽사리 뜻을 굽혀주셨다.
겉으로는 매정하게 대하지만 사실 아버지는 크리스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하신다.
요 며칠 사이에 들은 바로는, 현재 훈련장에서 크리스의 적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버지나 로건 뿐.
리암도 아직은 크리스의 실력에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크리스는 자신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과신하지 않는 분별력 있는 사람이고, 모두가 꺼려하는 일을 자진해서 해결하려 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버지도 그를 싫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쪽으로 따라오도록. 단, 간격은 10미터를 유지할 것.”
“네!”
쫓겨나지 않았다는 것에 안심한 듯 우렁찬 크리스의 대답소리가 들리고, 우리는 모두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어제 아가씨 정말 멋있었다니까요. ‘미안하지만 어린애는 인내심이 없거든요.’이런 말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내신 겁니까?”
“크리스경, 제발 그만해줘요.”
“‘그리고 나는 경이 생각하는 만큼 순진한 아가씨가 아닙니다.’이 말 들었을 때는 저도 덩달아 놀라서......”
“으으, 제발 그만해요.”
아버지께 애원해서 리암, 크리스, 로건을 데려온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크리스의 쉬지 않고 열리는 입이었다.
차라리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면 웃는 얼굴로 장단을 맞췄을 텐데, 크리스는 집요하게 어제의 일만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머리는 얼마나 좋은 것인지 어제 내가 한 말을 그대로 읊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크리스. 아가씨가 곤란해 하고 있잖아. 그만둬.”
“로건, 네가 어제 아가씨 모습을 곁에서 직접 봤으면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걸 알거야.”
로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는 이 주제의 대화를 중단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항상 크리스와 반대 의견을 냈던 아버지도 지금만큼은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계셨기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리암뿐.
리암에게는 좋은 일도 아니었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일 수도 있으니 그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이 대화를 중단시킬 의무가 있다.
“리암경, 어제의 이야기를 계속 듣는 건 재미가 없죠? 다른 이야기를…….”
“아니요, 아가씨. 저는 어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단장님과 로건경도 이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건 대충 다 알 텐데…….”
“아니요. 대충 알아서는 안 됩니다. 아가씨가 얼마나 큰일을 하셨는데, 이건 모두가 다 알아야죠.”
틀렸다. 리암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미 크리스가 하는 말에 심취해 있고, 조금 전까지 반대하던 로건도 이제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크리스의 말을 듣고 있고, 리암은 눈을 반짝이고 있다.
여기서 억지로 이야기를 끊으면 안 되겠지…….
결국 나는 아침 훈련 시간이 되기까지 계속해서 어제의 일을 들어야만 했고, 모두가 돌아가고 난 뒤에는 녹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가씨, 시원한 물이라도 드릴까요?”
“응. 고마워, 한나.”
방으로 돌아온 나를 맞이하는 한나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하다.
“한나, 왜 그런 표정이야. 혹시 네 말을 듣고 갑자기 뛰어나간 것 때문에 그래?”
“그야, 정말 놀랐는걸요. 아가씨가 잠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갑자기 뛰어가시다니. 제가 입을 잘못 놀린 건가 싶었죠.”
“후후, 한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할 테니까 이제 그만 얼굴도 펴고.”
“네, 아가씨!”
전담 시중을 맡고 있는 한나는 성격이 정말 좋다.
무슨 문제가 있든 특유의 웃음으로 모두 넘겨버리는 것은 아직도 신기할 따름이다.
그녀에게도 힘든 일이 있을 테고, 가끔은 투정을 부리고 싶을 텐데 그 모든 것을 꿋꿋이 참아낸다는 것은 그녀가 강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나는 몇 살이야?”
“올해 열일곱이 되었어요.”
“한나는 정말 어리구나.”
“하하하, 아가씨도 참. 이제 일곱 살이 된 아가씨가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물을 가져올 테니 잠깐 침대에서 쉬고 계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한나를 웃기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내 말을 듣고 웃는 그녀를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
“음... 지금이 몇 시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니 창밖으로는 햇빛이 쨍쨍했다.
물을 가지러 간 한나를 기다리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든 것이었는데, 커튼도 쳐져있고, 이불도 곱게 덮여있는 걸 보니 일부러 나를 깨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나? 밖에 있어?”
목소리를 높여 불러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긴, 한나도 매 시간마다 내 곁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번에는 내가 직접 움직여야지.
처음에는 너무 높아 넘어졌던 침대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어떻게 하면 잘 내려올 수 있는지 요령이 생겼다.
방 안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몸을 단장하고 나오니 어느새 한나가 돌아와 있었다.
“아가씨, 죄송해요. 아직 주무실 줄 알고 잠깐 나갔다 온 건데.”
“아니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나저나 아버지께 오늘 오후 훈련 일정에 대해 여쭤봤어?”
“아, 오늘은…….”
아버지는 훈련장에서 나를 며칠 간 관찰하시고 한 가지 결론을 내리셨다.
오전 훈련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한창 성장기인 내가 잠을 줄여가며 훈련할 것을 염려하신 모양이었다.
실제로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기준을 마련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지금쯤 과로나 근육통으로 앓아누웠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여기에 다른 규칙 하나를 더 붙이셨는데, 그건 바로 이처럼 한나를 통해 오후 훈련 일정을 먼저 알 수 있게 하여 무리일 것이라 판단되는 일정을 지우는 것이었다.
“아! 그리고 오후 훈련의 막바지에는 병사들의 체력측정시험이 있다고 하셔서 아저씨는 먼저 저택으로 돌아오실 수 있도록 마차를 준비할 거라고 하셨어요.”
“체력측정시험? 그게 뭐야?”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병사들의 기본 체력을 평가하는 시험이에요.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리기도 하고, 무거운 통나무를 들어 올린다고도 들었어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하녀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벤트죠.”
“재미있는 이벤트이긴 한데 왜 하녀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벤트인 거야?”
별 생각 없이 물은 말에 한나는 갑자기 얼굴이 붉어져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평소에는 무슨 말이든 술술 내뱉던 애가 저런 반응이니 이유가 더 궁금해지는데.
“왜 유명한 이벤트인지 말해주면 오늘 견학할 때 한나도 같이 데려갈게.”
“아가씨! 그게 정말인가요?”
“당연하지, 내가 왜 한나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다시 몇 초간 뜸을 들인 한나는 괜히 우리 밖에 없는 방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그건... 기사님들의 성난 근육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이벤트이기 때문이죠.”
“뭐?”
“훈련의 강도가 높아서 기사님들이 땀을 흘리시거든요... 결국 나중에는 더워서 탈의를…….”
비밀 이야기를 하듯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한나를 바라보니 입 꼬리가 씰룩인다.
“하하하하!”
“아가씨, 왜 웃으세요?”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하는 한나는 아까보다 더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래서, 한나가 마음에 두고 있는 기사님은 누구야?”
“네? 그런 분 없어요…….”
한나는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정확히 짚은 듯하다.
오늘 견학 때 한나의 그 분이 누군지 알 수 있을 테니 나중의 즐거움을 위해 더 이상 이에 대해 캐묻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