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블라우스에 핑크 스커트 차림으로 데이트룩을 입은 아경이 지하철역 앞에 서 있었다. 생긋 웃으며 어깨에 멘 가방끈을 두 손으로 잡는 아경. 그때 갑자기 어떤 검은색 외제 차가 아경의 앞에 섰다. 아경은 상관하지 않고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창문이 열리고 차 안에 차원이 타고 있었다.
“신아경!”
“… 어? 뭐야? 이건 웬 차야?”
“빨리 타기나 해.”
아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금씩 다가가 차 문 손잡이를 잡았다. 차원이 운전하는 차에 나란히 앉는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마음이 두근거렸다.
“회사 차야, 내 차 마련할 때까지 당분간 쓰려고.”
“… 그렇구나.”
“뭐야? 너 왜 그렇게 조신하게 앉아있어?”
“… 그냥 좀 신기해서.”
“… 뭐가?”
“맨날 너랑 걸어만 다니다가 이렇게 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니까 되게 신기해서.”
차원은 아경의 말에 공감하듯 미소를 지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 재즈 음악이 흐르고, 테이블 위에는 촛불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차원이 예약한 디너코스 요리가 하나씩 나왔다.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예전 얘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웠다. 마치 조명이 한 곳에만 켜진 듯 주변의 것들은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된 배경 같았다.
빠른 템포로 흐르던 재즈 음악이 잔잔한 분위기의 블루스로 바뀌었다.
“처음부터 물어봤어야 했는데, 좋은 소식이 뭐야?”
아경이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미소지었다.
“있잖아, 나… 오디션 합격했어.”
“… 오디션?”
“응, 나 연기 준비하고 있었거든.”
“……”
“큰 역할은 아니고… 되게 작은 역이야. 그래도 그거라도 돼서 너무 기분 좋아.”
"… 잘됐네. 축하해."
차원은 어쩐지 축하를 하는 사람치고는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연기를 시작한 게 다… 너희 어머니 때문이니까.”
차원이 멈칫하고는 아경을 바라봤다.
“어머니는… 잘 계시지?”
차원은 대답 대신 앞에 놓인 물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때 레스토랑의 출입문이 열리고, 어깨 위로 재킷을 걸친 서린이 일행과 함께 들어왔다.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서린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아경을 보고 잠시 멈칫하며 서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에 기억을 더듬다가 강호가 좋아했던 바로 그 여자, 신아경임을 알아챘다. 그리고 마주 앉아 있는 남자도 쳐다봤다. 남자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 낯설진 않았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여전히… 볼품없네.”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아까 전의 훈훈한 공기는 어디 가고 적막함이 그들을 감쌌다. 앞만 보며 운전하는 차원을 바라보는 아경.
“내가 괜한 얘길 꺼냈구나.”
“… 무슨 얘기.”
“너 아까부터 말이 없잖아.”
“……”
차원이 잡고 있던 운전대가 점점 뜨거워졌다. 차원은 애써 침착하며 침묵을 유지한 채 집으로 향했다. 아경은 작은 한숨을 내뱉으며 창 밖을 바라봤다.
집 앞에 도착한 차원과 아경. 시동이 꺼지고 자동차의 잔잔한 소음마저 사라지자 차 안이 더욱 적막했다. 조금씩 아경의 얼굴이 달아오르더니 숨소리가 점점 커졌다.
“너 그때 갑자기 왜 떠난 거야? 아무 말도 없이…”
“… 그건…”
“너 유학 간 거… 엄마 찾으러 간 거잖아.”
“……”
“너는 항상 네 마음대로야. 떠나는 것도 네 마음대로, 돌아오는 것도 네 마음대로. 내가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인 줄 알아?”
아경은 모진 말을 쏟아붓고 차 문을 세게 열었다. 땅에 구두를 딛는 순간 통증이 밀려왔다. 아픈 신경을 꾹꾹 참으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 않고 앞만 보며 걸었다. 차원은 그런 아경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답답한 자기 자신을 혼내듯 운전대에 두 손을 내리쳤다.
⁕ ⁕ ⁕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 차원은 소파에 푹 주저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오늘따라 이 집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한참을 앉아있던 차원은 천천히 일어나 서재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시커먼 공간에 불이 켜지고, 차원은 그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과학 서적들이 쭉 꽂혀 있었고, 한쪽에는 연예 잡지들이 한가득 꽂혀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로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의 사진이 보였다. 차원의 어릴 때 모습이었다. 아기인 차원이 안겨 있는 사진, 과학영재 트로피를 들고 있는 사진, 단풍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다정한 부모님 사진 등. 그리고 엄마로 보이는 한 여인이 눈에 띄는 미모에 화려한 차림으로 웃고 있었다. 차원은 의자에 앉아 사진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다 책상 위에 흐트러져있는 몇 개의 잡지에 시선이 멈췄다. 2009년이라고 쓰인 한 잡지 표지에 가장 큰 글씨로 적힌 이슈가 보였다.
[황룡영화제 여우주연상 서경희, 김동진 감독과의 불륜설 이대로 추락하나]
⁕ ⁕ ⁕
편의점에서 묵묵히 걸레질을 하는 아경. 얼굴에 윤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아경은 문득문득 자신의 폰을 쳐다봤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경은 할 거
을 더 찾아가며 열심히 일에 집중했다.
출입문에서 소리가 들리자 아경은 인사를 외치며 계산대로 달려갔다. 그리고 한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뜨는 아경.
“여긴 어떻게…”
“연락을 해도 답이 없길래, 내가 직접 찾아왔지.”
아경의 앞에 강호가 서 있었다. 아경은 갑작스러운 강호의 방문에 당황했다. 강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편의점을 둘러봤다. 그리고 음료수 하나를 골라 계산대로 다가갔다. 그때 조금 수척해진 아경의 얼굴이 보였다.
“너…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오디션 됐다고 애를 너무 굴리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냐, 캐스팅 이후에… 준비할 게 많아서.”
“… 일은 언제 끝나?”
“한… 30분 뒤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자신의 차 안에서 아경을 기다리고 있는 강호. 시간이 지나자 아경이 편의점에서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강호는 바로 밖으로 나와 조수석 문을 열어 아경을 향해 미소지었다. 아경은 쭈뼛쭈뼛 걸어와 차에 올라탔다. 가벼운 걸음으로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힘차게 시동을 켜는 강호. 그리고 소리내어 출발하였다.
조금씩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도심에 불빛이 켜지고 있었다. 아경은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강호는 그런 아경을 곁눈으로 쳐다봤다.
서울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카이웨이. 아경은 그 풍경에 홀린 듯 차에서 내려 다가갔다.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너무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이 울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짝거리는 불빛 사이로 차원의 모습이 그려졌다. 조금씩 눈빛이 일렁이는 아경. 강호는 아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옆으로 다가갔다.
“신아경, 너 잘할 거잖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경이 강호를 올려다봤다.
“… 고마워, 강호야. 근데 여기… 너무 좋다.”
강호는 다시 풍경을 바라보는 아경을 계속 바라봤다.
“너는 좀 특별해.”
아경이 멈칫하며 다시 강호를 쳐다봤다.
“다른 여자애들이랑… 좀 달라. 예쁜 여자? 물론 좋지. 하지만 속이 텅텅 비어있는 애들은 한순간 뿐이야. 너는 예쁘기도 하다는 거 알지?”
아경은 멋쩍게 웃음 지으며 다시 풍경을 바라봤다.
“근데… 강호 넌 실력도 뛰어나고, 인기도 많잖아. 그러면 얼마든지 좋은 여자 만날 수 있지 않아?”
“나? 나 좋다는 여자 줄 섰지~ 근데 다 무의미해. 걔네들이 진짜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내가 가진… 돈과 명예가 좋은 거겠지.”
“… 그걸 가진 것도… 결국 너인 거잖아.”
“그래도 난 껍데기만 보고 다가오는 그들의 눈빛이 싫어. 인정은 받지만, 사랑은 못 받는 기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