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일 Å(오)
밀리온은 눈 앞의 야크를 찾아 전세계 여기저기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그렇게 50년을 밤마다 그를 찾아다니며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오늘 밤에도 그를 찾아 스페인의 이름 모를 마을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창 밖에 떠있는 커다란 보름달을 바라보는 그녀의 가슴이 오늘따라 유독 심하게 두근거렸다.
50년 동안 매번 보름달을 볼때마다 야크를 생각하며 가슴 한편이 아련했던 그녀였다.
그렇지만 이처럼 자신의 심장소리가 크게 들린 적은 없었다.
그녀는 따뜻한 우유를 마시면 진정이 될까 싶어 1층으로 내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50년동안 주방에서 일한 그녀였기에 구조를 훤히 꿰차고 있는 그녀는 주방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병을 꺼내 들었다.
우유가 담긴 컵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버튼을 누른 그녀는 주방 한 켠에 나 있는 창문을 통해 밖을 쳐다봤다.
새벽이 다가오는 듯 달도 어느덧 저물고 있었다.
“땡-!”
“딸랑~딸랑~”
우연인지 전자레인지의 알람과 출입문에 달린 방울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녀 카이라가 아침영업 준비를 하기 위해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장난끼가 올라온 그녀는 카이라가 보면 깜짝 놀라게 묶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불이 꺼진 형광등 바로 밑에 고개를 떨군 채 섰다.
잠시 뒤 주방으로 들어선 카이라가 형광등 스위치를 켰다.
“꺄~~!!!악~~~!!!!“
형광등의 불이 들어오며 카이라의 비명이 주방을 뒤흔들었다.
카이라의 비명소리에 만족한 밀리온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얼굴을 들어 카이라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놀람과 경악으로 파르르 떨렸다.
투덜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카이라의 뒤에 50년 전 마을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늑대인간이 콧김을 내뿜으며 서있는 것이었다.
“오…세상에…야크…”
밀리온은 늑대인간의 모습을 한 야크를 보고 기절해버린 카이라를 대신해 늦어진 아침영업을 서둘러 준비하고 있었다.
커피 머신 전원을 켜는 밀리온은 좀 전에 식당문을 열고 나간 야크가 자신에게 한 말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1시간 전
어느덧 날이 밝아 야크는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밀리온에게 말했다.
“카렌을 찾았어. 이제 곧 여기로 올거야.”
그런데 50년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는 야크를 멍하게 바라보다 그의 말에 놀라며 다시 되물었다.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밀리온… 당신 엄마를 찾았어. 그리고 지금 그녀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늑대인간일때와 별반 차이 없는 커다란 덩치로 돌아온 야크가 그녀의 작은 어깨를 큰 손으로 감싸 잡으며 다시한번 말해주었다.
“세상에… 그러니까 엄마가 지금 여기로 오고 있다는 말이죠?”
밀리온은 주름진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랐다.
“그래. 하지만, 문제가 있어.”
밀리온의 눈에 비친 야크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다.
“어떤 문제요?”
엄마에게 문제가 있다는 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
“사냥개에게 쫓기고 있어.”
“네? 사냥개라니 그게 무슨…?”
“그래, 음? 이런 밀리온, 지금은 더 많은 얘길 나눌 수 없겠구나. 나중에 다시 찾아오마.”
말을 하던 중에 야크는 뭔가를 느꼈는지 급하게 출입문을 열고 나갔다.
“야크!! 잠깐만요! 야크~”
밖으로 나간 야크를 뒤쫓아 나온 밀리온은 부엉이로 변해가며 날아가는 야크의 모습을 아쉬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녀는 저 멀리 야크가 사라져가는 걸 보고 있다가 주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손녀가 생각났다.
“맞아! 카이라!”
주방으로 들어간 밀리온은 기절해 있는 카이라를 보며 살짝 고민하더니 공중에 띄워 2층 침실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밀리온은 잠이 든 카이라 몸 위로 두꺼운 거위 털 이불을 덮어주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주문을 읊었다.
“델리오”
카이라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에서 은빛 광채가 은은히 나더니 곧 사라졌다.
자고 있던 카이라는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카이라를 보고 빙긋 웃으며 밀리온은 아침영업 준비를 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드드드드드드”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던 찰스는 귓속으로 나무바닥을 빠르게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더니 급기야 자신의 몸이 떨려오자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다리가 떨리며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뿐 만이 아니었다.
유리창은 덜덜 떨리고 있고, 가구들은 방바닥위를 드르르르 소리를 내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찰스는 벌떡 일어나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을 대충 걸쳐 입기 시작했다.
깡총깡총 뛰며 바지 한쪽 다리에 발을 넣으려고 하는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바지를 부여잡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을 지켜보던 찰스는 재빨리 옷을 입고서 방문을 열고 로비로 빠르게 걸었다.
“저기 봐. 지진이래.”
로비 소파에서 TV를 보던 유진은 로비로 들어선 찰스가 앉을 수 있도록 엉덩이를 움직여 옆으로 비켜주며 손끝으로 뉴스가 나오고 있는 TV를 가리켰다.
찰스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서 TV 속에서 뉴스 앵커가 로포텐의 현재 상황을 보도하고 있는 것을 봤다.
“얼마 전 스볼베르에 일어난 지진이 이번에는 소르바겐에서 규모 5.7 강도로 발생했습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진원지는 점점 서쪽으로 이동 중이며, 이동 중에 비슷한 규모의 지진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인명피해는 없는 상황이고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박들이 서로 부딪혀 파손이 발생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 밖의 빌딩이나 다른 건축물 등은 현재 피해가 없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각 도시 및 마을에서는 신속히 대책을 세우고 아무쪼록 피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앵커의 말이 끝나자 TV화면에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나오는 향수 광고가 흘러나왔다.
멍하니 TV를 보던 찰스는 얼굴 가득 황당한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봤다.
“세상에 지진이라니... 나 이거 처음이야.”
“아마도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아.”
“이거 살짝 무서워지려고 하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진을 본 찰스는 자신의 몸을 두 팔로 감싸고 부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TV에서 나오던 광고가 중간에 끊기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뉴스 앵커의 모습이 나왔다.
“속보입니다. 오늘 아침 레크네스의 한 술집에서 집단 자살로 보이는 십 오명의 남녀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최초 발견자는 길 건너편 주유소 직원이라고 하며 발견 당시, 시신들은 옷가지를 전혀 입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합니다. 현재 경찰에서는 종교집단 자살로 보고 있으며.... 픽-.”
“저런~ 미치광이들 같으니!! 세상이 망하려고 하는 건지 나 원 참.”
반대편 소파에 앉아 있던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TV를 꺼버렸다.
“이게… 지진에, 집단 자살이라니…오늘은 무서운 일만 일어나네.”
TV가 꺼져버려 새까만 화면만 눈에 들어오자 찰스는 유진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듯 그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다.
‘혹시, 그들이…?”
그녀의 머릿속에는 여섯 명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딸랑~딸랑~”
“세상에~ 갑자기 웬 지진이야~넘어질 뻔 했잖아~.”
투덜거리는 여자의 손이 엉덩이 위로 올라간 치마를 끌어내리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걸 신고… 나 참, 정말이지 어이가 없군.”
뒤따라 들어오는 남자가 여자의 엄청 높은 구두 굽을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뭐~래~ 패션도 모르는 주제에~ 흥!”
“뭐라고~!!”
서로 투덕거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그들은 바렌과 록시였다.
어제 늦은 저녁에 Å(오)에 도착한 그들은 그 사이에 놓쳐버린 유진을 찾기 위해 이른 오전부터 숙소를 나섰다.
하지만 길을 나서자 마자 록시가 배고프다고 징징거리며 투정을 부리자 바렌은 그녀를 데리고 Å(오)에서 아침부터 문을 여는 유일한 식당인 브리가 레스토랑을 찾아온 것이다.
갑작스러운 지진에 찬장에서 떨어진 접시를 허리 숙여 줍고 있던 밀리온은 방울소리에 일어서며 문을 열고 티격태격하며 들어오는 첫 손님들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두 분 이신가요?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가 따뜻해요.”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난롯가 옆에 있는 테이블에 앉은 그들은 그녀가 건네준 간단한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가벼운 식사 …….. 30크로네
배부른 식사 …….. 50크로네
고급진 식사 …….. 100크로네』
“가격이 아주 마음에 드는 걸, 이걸로 하지.”
매우 흡족한 듯 록시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가벼운 식사를 짚었다.
바렌의 손가락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록시는 입을 샐쭉 내밀며 메뉴판을 툭치며 바렌에게 말했다.
“고급진 식사.”
그녀의 말에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며 바렌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돼. 절대 안돼!”
“아니~왜~에!”
록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도저히 이해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렌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넌 어차피 입만 대고 안먹잖아!!!”
한 입씩 먹고 다이어트니 뭐니 하며 음식을 버리는 그녀였다.
“그럼, 이 몸매가 그냥 유지되는 줄 알았던 거야. 나 참 어이가 없네~”
자신의 몸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살짝 쳐드는 록시였다.
그는 얼른 주문하라고 재촉하는 록시의 얼굴에 메뉴판을 던져버리고 싶다고 마음 속으로 수십 번도 더 생각하며 밀리온을 불러 식사주문을 했다.
“네, 그럼 고급진 식사 두개 맞으시죠?”
식사주문을 한번 더 확인한 밀리온은 주방으로 들어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좀 전부터 투덕거리는 저 젊은 부부한테서 사람과는 다른 존재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주문을 받기 위해 그들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가니 그 느낌이 좀더 강하게 다가왔다.
그건 뭔가 더럽고 추악한 욕망 같은 역겨운 느낌이었다.
카이라에게 그들이 주문한 식사를 알려주고 난 뒤 그녀는 그들에게 물잔을 가져다주며 속으로 영혼 투영 주문을 읊었다.
‘위시토 아니마’
주문이 끝나자 그녀의 머릿속에 저들의 영혼으로 보이는 붉은 형상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조금 더 집중하자 붉은 형상들이 점점 뚜렷해지며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것들은 탐욕스러운 얼굴을 하고 텅 비어 있는 듯한 검은 눈동자를 한 추악하게 생긴 늙은 남자와 황소와 염소 그리고 인간의 머리가 달린 여자의 모습이었다.
머릿속에 아직 그것들의 잔상이 남아있던 밀리온은 쟁반 밑을 받친 손을 덜덜 떨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악마라고 부르는 존재를 본 것이었다.
밀리온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을 심하게 떨며 테이블에 물잔을 올려 놓는 걸 보는 바렌의 눈에 의혹이 서렸다.
“저 늙은 여자 좀 이상하지 않아?”
그는 돌아서 걸어가는 밀리온을 바라보며 록시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그녀는 손질 중이던 손톱을 들여다보며 바렌의 말에 별 관심 없다는 듯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살짝 기분이 상한 바렌은 접시를 정리하고 있는 밀리온을 쳐다보며 한숨 쉬듯 말했다.
“됐다. 됐어. 아무것도 아냐~”
“어~”
엄지손톱을 다듬으며 기계처럼 말하는 록시였다.
“왠지 낯이 익단 말이야….”
바렌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방에서 나온 자신들의 식사를 쟁반에 올려놓고 있는 밀리온을 바라봤다.
“Imagine me and you~~♬ I do~~♪ I think about you day and night~!♪ It's only right~~~♬ to think about the girl you love~!♪ and hold her tight~!♪ So~ happy together~~~♬”
메뉴판에 적힌 글대로 제법 고급진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바렌의 가슴팍에서 터틀스의 해피 투게더가 흘러나와 굳어 있던 식당 안의 공기를 살짝 부드럽게 만들었다.
“아~지겨워 도대체 언제까지 듣고 있을거야!”
노래가 지겨워 죽겠다며 빨리 전화 받으라며 투덜거리는 록시를 흘겨보며 바렌은 오리털 패딩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여, 조셉 아침부터 웬일이요?”
“[바렌, 카렌 그 여자가 도망쳤소.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을 거요.]”
“이런, 젠장!! 놈이 풀어줬군. 그 여자 지금 어디쯤 있소?”
“[그게 정확하진 않지만, 그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을 거요. 아 참! 그리고 야크가 그쪽에 있는 걸 알아냈소.]”
“그렇다면 둘이 여기서 만나려고 한 모양이군. 그런데 그 여자는 누가 쫓고 있는 거요?”
“[탐식의 주인이 사냥개를 풀었소. 곧 잡힐거요.]”
“그랬군. 그래서 땅이 흔들렸던 거였어.”
“[아무튼 그렇게 알고 상황에 맞춰서 알아서 하시오.]”
“아, 그렇게 하리다. 그럼 이만, 식사하던 중이라….”
“[오~ 이거 미안하게 됐군. 얼른 식사마저 하시오. 그럼 나중에 또….]”
“조셉이 뭐래, 응? 이제 돌아오래?”
통화를 마치고 품 안으로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넣는 바렌을 록시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를 힐끔 쳐다본 그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더니 맛있게 구워진 송아지 엉덩잇살 스테이크를 썰어가며 대답했다.
“탐식 그 여자, 아가레스를 풀었다는 군. 휩쓸리지 않게 조심해야겠어.”
“뭐..!! 그 여자 제 정신 인 거야? 아니, 우리가 있는데 그 흉측하게 생긴 악마는 왜 보낸 거야?”
록시는 방금 입술에 묻은 트리플 머쉬룸 소스를 닦아낸 냅킨을 손으로 마구 구기며 신경질을 냈다.
“그게, 카렌이 도망쳤다는 군.”
“카렌이라면, 그 마녀? 아니 어떻게?”
“야크 놈이 도와준 모양이야, 젠장. 아무튼 그 자식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왜~난 그의 넓은 등이 맘에 드는데~”
록시는 눈동자가 살짝 붉어지며 입술을 핥았다.
“하~ 정말이지 에휴~, 이제 그만 일어나 가봐야 돼.”
바렌은 록시의 게슴츠레한 눈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밖에 눈 오는데 좀 만 더 있다 가며 안돼~? 응~?”
바렌은 록시의 말에 창밖을 보니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레스토랑 앞 주차장으로 미니 쿠퍼 한 대가 들어오는 것도 보였다.
“딸랑~딸랑~”
하얀 털뭉치가 달려있는 회색 빛 니트 털 모자를 쓴 유진이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섰다.
“눈이 제법 오네. 아무래도 오늘은 돌아가기 힘들 것 같아.”
그리고 뒤 이어 찰스가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털어내면서 따라 들어오며 걱정 섞인 목소리로 유진에게 말했다.
“괜찮아 아직 여기서 할 일이 있거든.”
유진은 찰스를 돌아보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그리고 찰스가 유진을 마주보며 웃어주려 할 때였다.
레스토랑을 안 쪽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 할 일이란 게 뭐지? 응? 기자 양반?”
찰스는 유진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순간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걸 느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던 찰스는 그녀의 뒤로 시선을 옮겨 목소리의 주인인 듯한 남자가 난롯가 옆 테이블에서 뒤돌아 선채로 일어서는 걸 보았다.
“이거 정말 놀랬지 뭐야. 분명 숨이 끓어진 걸 확인했는데 말이지.”
돌아선 바렌은 이죽거리며 그녀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유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바렌을 돌아보며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로 그에게 물었다.
“나를 계속 따라다닌 게 당신과 저기 앉아있는 록시였군요. 맞나요?”
“맞아. 하지만 우리만이 아니었어. 되살아난 당신을 가장 먼저 본건 승조였거든.”
“백승조-!”
“그가 당신을 대사관에서 발견했다고 알려줬지. 자기도 엄청 놀랐다고 하면서 말이지. 큭큭큭.”
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한국 대사관과 하숙집만 조심스럽게 왔다갔다했던 그녀였다.
그녀는 그들 중 한 명이 한국 국적이었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북경어를 유창하게 말하던 백승조를 당연히 중국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설마 같은 한국인이었을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던 거였다.
“이거 놀라운데요? 그가 한국인이었다니 말이죠.”
“뭘 그리 속았다는 표정이지. 그가 아니라고 한적도 없었잖아.”
“이봐, 거기~ 돌 어쨌어?”
“록시… 그때도 말했지만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뭐? 잃어버렸다고 나 참, 어이없어. 너 그땐 버렸다고 말했거든? 응?”
“이런~ 제가 그랬나요? 그것도 전혀 기억 안나는 군요.”
“뭐라고!! 바렌!! 저 여자 죽여버려!!! 얼른!!!”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하지만 그전에 말이야, 확인할 게 있어서… 이봐 기자, 아마 이곳에 돌은 없는 것 같군. 그지?”
“그걸 왜 저에게 물어보는지 모르겠군요.”
“들었지 조셉? 저 년 말 할 생각이 전혀 없다니까 그냥 저 년의 머리를 뽑아버리겠어.”
스마트폰을 들어 유진을 향해 폰 화면을 보여주며 살기가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유진 정말 말을 안 할 생각이요? 사실 그 돌, 당신이 숨겼다고 해도 우리가 금방 찾아 낼 거요. 그런데 꼭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생각이요? 옆에 있는 당신 친구는 무슨 죄요, 안 그렇소?”]
폰 화면에서 조셉이 찰스를 쳐다보자 유진은 그제서야 자신 옆에 있는 찰스를 이들이 살려 줄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찰스는 아무 상관없어요. 그는 전혀 모른다구요. 그냥 보내줘요.”
“[그건 당신 하기에 달려 있다오.]”
조셉이 까슬까슬하게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녀에게 말했다.
“정말…. 그를 살려….”
유진은 자신을 뒤로 당기며 자신의 앞에선 찰스 때문에 말을 멈췄다.
“유진!! 아무 말도 하지마!! 여긴 나한테 맡기고 얼른 도망가!!”
유진을 문 밖으로 밀어내며 찰스는 바렌이 스마트폰을 자신의 귓가에 가져다 대는 걸 보며 유진에게 소리쳤다.
“[바렌 얼른 처리하고, 여자는 꼭 산채로 데려와야 하오.]”
“쳇, 알았소.”
통화를 끝낸 바렌은 찰스를 쳐다보며 록시에게 말했다.
“록시! 저 여자를 잡아. 저 멍청이는 내가 처리하지, 큭큭큭.”
자신의 오른손을 몇 번 폈다 쥐었다 한 바렌은 긴장해있는 찰스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편 밀리온은 주방 앞에 서서 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녀는 바렌과 록시의 대화를 들으며 자신의 엄마 카렌이 저들에게 붙잡혀 있는 걸 야크가 구해줬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아침에 야크가 말한 사냥개가 아가레스라는 악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무서운 악마에게 엄마를 뒤쫓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밀리온은 심장이 떨려왔다.
그리고 그녀는 저 동양인 여자에게서 왠지 야크의 흔적이 느껴졌다.
일단 저들을 도와주기로 맘 먹은 밀리온은 좀 전에 슬립주문으로 미리 잠을 재운 카이라를 투명화 마법으로 그녀의 몸을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모베오르”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한 밀리온은 사라졌다 유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난 밀리온을 보고 놀란 유진은 제자리 멈췄다.
“어…누구?...”
“모베오르”
유진의 손을 잡아챈 그녀는 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차 순간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어? 저 늙은이는~”
높은 굽 때문에 엉덩이를 엄청 흔들며 유진의 뒤를 쫓던 록시는 갑자기 나타나 그녀를 데리고 밀리온이 사라지자 눈만 꿈뻑거리며 그들이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그렇게 사라진 밀리온과 유진의 모습이 찰스의 옆에 나타났을 때에는 찰스의 팔이 뜯겨 나가며 레스토랑 바닥에 그의 피가 뿌려지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악-!! 찰스~!!!”
팔이 뜯겨 나가면서 뒤로 넘어지는 찰스의 모습에 유진은 놀라 소리쳤다.
“이런, 빨리 저 애를 잡아!! 빨리!!!”
유진과 밀리온은 쓰러진 찰스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보고 바렌이 눈에 시뻘건 광채를 뿜어내며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을 주먹으로 짓이겨 버릴 심사였는지 레스토랑 천장을 두발로 밀어내며 그 탄력으로 빠르게 그들이 있는 자리에 떨어져 내렸다.
“쾅-!!!”
바닥이 뚫리며 먼지가 사방을 가렸다.
천천히 일어선 바렌은 허공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눈 앞의 먼지를 날려보냈다.
“사라졌네~. 아! 아까워~”
문을 열고 들어오며 그들을 놓친 게 아쉬웠는지 록시는 연신 바닥에 발을 굴렸다.
“그러게 그런 구두를 안 신었으면 놓치는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록시가 유진을 놓친 게 구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짜증난 바렌이었다.
잠시 뒤.
붉은 와인색의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돌기둥에 환하게 빛이 비쳤다.
환한 빛이 석실 안을 가득 메우더니 밀리온과 찰스를 끌어안고 있는 유진의 모습이 나타났다.
밀리온과 유진은 뜯겨진 왼팔을 부여잡고 벌벌 떨고 있는 찰스를 물이 흘러내리는 돌기둥 쪽으로 데리고 갔다.
돌기둥 앞에는 길다랗고 넓은 바위가 공중에 둥둥 떠있었다.
“여기에 그를 눕혀요.”
밀리온의 말에 유진은 그녀와 함께 찰스를 바위에 천천히 눕혔다.
팔이 뜯겨져 나간 상처에서 출혈이 많아 창백해져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 찰스의 얼굴을 보며 유진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흑…흑…흑….”
“자 진정해요. 지금은 그의 상처를 치료하는 게 급해요.”
“네, 정말 고마워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할머니가 아니였으면… 정말…. 고마워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는 말을 하는 유진을 보며 안쓰러워 밀리온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네, 네, 알았어요. 이제 그만 고마워하고 친구부터 살펴봐요.”
“네…”
밀리온의 품에서 떨어진 유진은 흐르는 눈물을 계속 훔쳐내며 찰스를 바라봤다.
“저기에서 물을 좀 가져다줘요.”
손으로 돌기둥을 가리키며 밀리온은 찰스의 윗옷을 벗겨냈다.
돌기둥으로 재빨리 다가간 유진은 물을 담을 그릇이 보이지 않자 밀리온에게 물었다.
“물 담을 만한 그릇이 어딨죠?”
“그 돌기둥 위에 있잖아요. 그걸 가져와요.”
밀리온은 손으로 돌기둥위에 있는 돌접시를 가리켰다.
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돌 접시를 바라본 유진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흘러내리던 물이 멈추며 잔잔한 수면을 만들었다.
신기했지만 일단 찰스가 걱정된 유진은 얼른 밀리온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접시를 받아든 밀리온은 유진에게 찰스의 입을 벌리게 하고 천천히 접시 안의 물을 그의 입 안으로 붓기 시작했다.
그의 목구멍으로 물이 꿀렁거리며 전부 내려가자 밀리온은 찰스의 입을 닫은 다음 왼팔이 뜯겨져 나간 어깨에 양손을 가져다 대고 주문을 읊었다.
“메델라 레메디움”
녹색의 광채가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상처를 가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손에서 나오던 빛이 사라지고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다.
그리고 창백하던 찰스의 얼굴에 핏기가 돌더니 이내 숨소리도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유진은 놀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밀리온을 바라봤다.
“정말이지… 여기에 와서 놀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네요.”
잠이 든 찰스의 남아있는 손을 잡으며 그녀는 밀리온에게 조용히 말했다.
“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거에요? 그거 놀랍군요.”
자신이 한 일은 생각도 않고 그저 유진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밀리온이었다.
“야크라고 여기 노르웨이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였어요. 그 친구의 신기한 능력이 저를 살렸죠.”
유진은 뭔가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밀리온을 돌아보며 말했다.
“방금 야크라고 했나요? 이런…세상 참 좁군요.”
밀리온은 야크를 알고 있는 유진이 반가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 할머니도 그를 아시는 군요. 진짜 세상 좁네요!”
유진도 너무 반가워 밀리온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럼요, 알다마다요. 그는 나의 가족인걸요.”
“가족이라면….손자….”
유진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 전에 눈 앞에서 은빛을 환하게 뿜어내며 변해버린 밀리온을 바라보며 멍해졌다.
반짝이는 은빛머리에 탱탱한 피부를 가진 어린 아가씨로 변한 밀리온은 그런 그녀를 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뇨. 아빠에요. 아빠.”
“지금 이모습은…혹시… 변신…?”
유진은 자신보다 더 어려보이는 밀리온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봤다.
“아뇨. 사실 이게 제 본 모습이에요. 많이 놀랐나요?”
그녀는 자신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고 있는 유진에게 물었다.
“네… 하지만, 곧 적응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할머….”
밀리온을 보며 말하던 유진은 할머니란 단어가 안 어울리는 밀리온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괜찮아요.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요. 아 참, 제 이름은 밀리온이에요.”
웃으며 말한 그녀는 찰스의 안색을 살펴본 후 유진에게 잠시 나갔다 올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라 말하고서 순간이동 마법으로 사라졌다.
유진은 그녀가 사라지자 곤히 잠이 든 찰스의 곁으로 돌아와 그의 턱수염을 쓰다듬자 이내 또 마음이 아파 눈에 눈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석상 앞에 있는 문이 힘없이 열리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유진의 눈에 웬 여자를 안고 들어오는 야크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