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뭐 사춘기 때나 벌어질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 꽁무니를 쫓아오는 이 사람. 그리고는 불현듯이 얼굴이 화끈거리며 뜨거워졌다. 아주 오래 전에 은희 오빠 꽁무니를 쫓아 다닐 때가 떠올랐다. 물론 몰래 쫓아간 게 아니라 다같이 쫓아갔다. 자기가 걸음이 조금 빨랐을 뿐이다. 가고자 하는 길도 같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서로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다. 발걸음도 어릴 때와 너무 비교된다. 그때 은희도 자신도 그 오빠 뒤를 가벼운 걸음으로 쫓아갔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뒤뚱뒤뚱 쫓아오고 있다.
그 순간 뒤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에 이런 모습을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본다면 온갖 상상의 이야기들이 나올 것만 같아서 걸음을 느릿느릿하게 바꿨다.
“야! 젊으니 좋네. 아직 살아있어”
이런 시답잖은 농담을 받아 줄 기분이 전혀 아니다. 집에 근처인 걸 후회하기는 처음이었다.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둔 걸 후회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집에 바로 가기는 싫었다. 벌써 며칠이 아닌 몇 달째 적막하기만 한 집에 들어간다는 건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에 들어간다는 느낌을 수도 없이 받았다. 이 일이 있기 전에도 아이들이 집에 없으면 가끔 적적했다. 지금은 모두 독립해서 나가서 산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남편을 반갑게 맞이해주려고 기다리던 시절은 그때 얻어터지고는 끝났다. 이젠 애들도 없는 집안에 남편이 먼저 와서 기다릴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가끔 남편이 집에 오면 자신은 단지 하나의 이성에 불과했다.
남편은 이성간에 하는 요식행위만 하고 또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은 그런 요식행위가 그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 행위를 끝내고 난 뒤 쳐다 보는 시선이 너무 불쾌했다. 그때는 묻고 싶은 충동도 있었지만 폭력이 두려워 감히 묻지를 못했다.
‘성 매매나 바깥에서 만난 여자에게도 끝나고 난 뒤에 그런 시선으로 보나요?’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배회한다고 모든 남자가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세상에 들리는 추잡한 말들보다 남편의 오래된 버릇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랑도 남자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말을 인용하자면, 남자는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라도 그 여자가 한번이라도 다른 남자의 손끝만 거치면 절대 용납 못한다고 했다. 불결해한다고 했다.
그럼 여자만 남자를 용서해야 하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해숙은 고개를 흔들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사람. 선배와의 관계를 절대로 상상하지 않았다. 단지 집안에 들어가면 적적하다는 생각만 했다. 그리고 남편이 먼저 들어와서 기다릴까 두렵기도 했다. 또 물어보고 싶은 말도 갑자기 떠올랐다. 그건 은희 오빠에 대해서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요! 한잔해요”
여름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문을 연 호프집은 없었다. 간단히 한잔 할 수 있는 막걸리 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후배도 알아보지 못했네. 미안하네”
낮에 반말을 해서 기분이 상해있었는데 막상 마주보며 얘기를 하니 금방 오랫동안 알고 지낸 선배처럼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당연하죠. 같이 학교를 다니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반가워요. 선배님”
잔을 부딪히고 한잔을 쉬지도 않고 죽 들이켰다. 배가 왜 나왔는지 이유를 알자마자 웃음 ‘푹’하고 나왔다.
“왜?”
“아뇨! 그냥 웃음이 나와서요”
그리고는 배를 쳐다 보았다.
“아! 이거! 나이 살이야”
“선배는 많이 심하네요”
“그런가?”
민망한 듯이 자기 배를 한번 쓰다듬고는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해숙이 예상한대로 신랑 얘기를 시작했다.
“창훈이에게 얘기는 들었어 잘 알고 있다. 내가 진작에 알았으면 도와줄 수 있었는데 안타깝네”
진작은 아직 진행 중이었다. 아직도 그 제품이 저장탱크에 보관 중이고 지금 보관료만 신랑 말대로 천 만원이 봇물 터지듯이 줄줄 세나가고 있다.
“창훈이란 사람과 정말 친해요?”
“너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인데 네 선배라는 것도 알고 있지”
“예! 그런데 아직 그 제품이 거기 저장돼 있어요. 어디 팔 때 없어요?”
“그건 나도 잘 모르는데 창훈이한테 팔면 더 이상 손해는 막을 수 있다더라. 신랑한테 얘기해서 그렇게 하라는데 어때?”
해숙은 숨이 콱 막혔다. 지금 신랑의 관계를 차마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혹시 오빠가 창훈이 오빠한테 얘기해서 우리 신랑한테 전화하라고 하면 안돼요?”
선배에서 오빠로 변해 버렸다. 잠시 놀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른 고개를 흔들고는 한참 동안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확신에 찬 듯이 해숙이 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창훈이는 곤란하고 수리 동생 있지. 이름이 뭐였더라?”
“은희!”
“’은희가 자기 오빠가 도와주지 않아서 자기 신랑이 도와주기로 했다’. 이 말만 수리 귀에 들어가면 그 놈이 발벗고 나설 거야. 그 놈이 영철이에게 지는 걸 엄청 싫어해. 허허. 내 말 믿어. 바로 전화해봐”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런 짓을 어떻게? 저는 할 수 없어요”
“그럼! 몇 십억을 그냥 날릴 거야? 밑져봐야 본전이잖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저히 그런 거짓말은 할 자신이 없었다.
“저! 못하겠어요”
그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인걸이가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
“어이! 성은이 오랜만이야. 그래. 그래……….”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니 다시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어이! 영철이 잘 지내지. 그래! 해숙이 알지? 그래! 오늘 알았는데 우리학교에 같이 근무하네. 그래. 지난 번에 해숙이 신랑 일 때문에 내가 그 회사에 성은이하고 통화를 했다. 도와주기로 했는데 네가 한번 만 더 공 부장에게 전화해줘라. 그래. 그래”
전화를 끊고는 빙긋이 웃으며 한 잔을 더 마셨다. 조금 이상했다. 왜 수리오빠에게 직접 전화를 하지 않는지 물어보았다.
“내가 얘기했잖아. 이렇게 경쟁을 붙여놔야 수리가 자존심이 상해 나선다는 말이지. 걱정 마. 자! 한잔하게”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을 거의 일년이나 끌었는가? 도대체 그 사람들이 왜 자신과 신랑을 도와주지 않았는지 믿을 수도 없고 이 사람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믿음은 정말로 오래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