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훈이가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수리는 창훈이보다 더 큰 회사의 대표나 담당자들과 친밀한 사이였고 창훈은 필요할 때 급히 필요한 구급대원이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창훈이 섭섭하다고 면전에 내색은 절대 하지 않는다. 창훈도 아직은 수리가 튼튼한 가교 대이기 때문이었다. 말하지만 수리는 썩어도 준치였다. 수리가 이 화물에 대해 오래도록 신경을 끊고 지낸 이유는 그 제품을 저장하고 관리하는 데 들어가는 돈은 수리가 아니고 해숙이 통장에서 나갔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가격변동의 추이만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에 자기 주머니서 일원 한 푼이라도 나간다면 이렇게 방치해 놓지는 않았다는 걸 수리도 수리와 통화한 사람도 똑 같이 잘 알고 있는 입장이었다.
“해숙아! 나! 은희 오빠야! 잠시 만나자”
거의 일년이 지나서 들리는 목소리가 엊그제 들었던 목소리같이 익숙했지만 원망이 먼저 가슴 깊은 곳으로 몰려왔다. 목도 메였다. 눈물도 주르르 쏟아져 내렸다. 코도 막혀 숨도 가눌 수도 없었다. 그러니 ‘대답을 어떻게 해! 이런 등신아!’가 벌써 가슴과 머리 속에서 되뇌어 지고 있었다.
“자네 신랑 제품 때문에 할 얘기가 있어”
제품이란 말에 귀가 솔깃한 건 바로 스쳐지나 버리고 자네라는 말에 언제부터 내가 오빠에게 이방인이 됐나 하는 생각에 섭섭했지만 신랑이라는 말에는 다시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통화했다가는 훌쩍이는 소리만 들려줄 것 같아 전화를 끊고 싶었는데 다행이 이틀 뒤에 시간이 난다고 해서 약속 장소와 시간을 물어 보고는 전화를 끊어주었다.
몇 십 년 만에 만나는데 과연 알아볼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만나기로 한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릴 때 모습은 하나도 없고 그저 낯설기만 한데 이상하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이야기는 들었다. 고생 많았지?”
또 눈물이 벌컥 쏟아지려고 해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봇물은 터진 뒤였다. 신랑 첫 기일 때도 이렇게 눈물이 나지 않았는데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수리가 일어서 해숙이 옆으로 앉아서 등을 토닥거리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냉혈 동물은 맞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고 온 종이더미를 테이블에 놓고는 이미 계산하고 온 것처럼 돋보기 안경을 끼더니 능숙하게 계산기를 두드려 확인하고 금액이 큼직하게 적힌 종이를 보여준다.
“자! 이거 내가 알아본 액수야. 자네 신랑이 손해 본 금액은 10억 정도 되던데 저장소 임대료부터 시작해 자네가 이것저것 잡다한 돈을 전부 지급하고도 2억은 이익을 볼 수 있어. 알아보니까 곧 경매 들어갈 것 같던데 그러면 절반도 못 받아. 수학 선생님이니 얼른 계산이 될 거야. 자! 해봐”
무슨 보험회사 직원이 보험계약 하러 온 것처럼 너무 사무적이다. 게다가 보험회사 직원처럼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최소한의 안부 정도는 물어봐야 하는데 위로의 한마디만 안부로 퉁 치고 마는 게 너무 야속했다.
“오빠! 바로 알아보고 손을 흔들던데 어떻게 절 알아봤어요?”
잠시 해숙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입술을 툭 올려 미간에 힘도 한번 꾹 주고는 익살스런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한다.
“응! 이 오빠가 소갈머리는 없어도 기억력은 좋아. 허허. 너 임마! 어릴 때랑 똑같아. 여전히 예뻐! 여기 빙 둘러봐라. 너처럼 예쁜 사람이 어디에 있어?”
어이없어 나오는 웃음인지 아니면 농담에 장단을 맞추는 웃음인지 모르지만 한번 툭 소리 웃고 나니 가슴에 얹혀진 쇠 뭉텅이가 종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이! 오빠는 제가 언제 소갈머리 없다고 했어요? 허 참! 절 나쁜 년으로 매도하네요. 그리고 저도 곧 쉰이에요. 그건 나이던 사람을 희롱하는 말이나 같아요. 호호”
“그래? 내 눈에는 아직 어린 아이처럼 보이는데. 내가 눈이 굉장히 높은데 지금까지 자네보다 예쁜 여자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어. 나이트클럽가면 자네처럼 비슷한 나이 또래 사모님들 많이 만나는 데 전부 쪼글쪼글 하던데 아직 탱탱한데. 허허!”
씁쓸한 미소가 살짝 비친 해숙이가 어떤 마음인지 알아차리고도 수리는 전혀 아랑곳하지 미소를 머금고 쳐다본다. 해숙이도 무거운 짐을 내려 놓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런 말 마세요. 오빠! 어릴 때 한 사람만 좋아했잖아요. 그 선배 이름 얘기해 볼까요?”
“하지마! 꼭지 돌아가. 그런데 이 액수면 되겠지?”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또 씁쓸하게 미소를 띠고는 속내를 털어놓는다.
“솔직히 섭섭해요. 그 전에 이렇게 해주시지 그땐 왜 하지 않았어요?”
수리는 선뜩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때 네가 소갈머리가 없다고 한 사람이 나라고. 그 말도 기분 나빴고 너를 골프장서 보는 순간 네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렸고 그 순간에 짝사랑했던 여자 친구도 떠올랐고 게임 내내 통화하는 것도 기분 나빴고 창훈도 개입되어 있었고 등등. 밤새도록 털어놓아도 전부 털어 놓지 못할 불만들이 산더미처럼 있었다. 그 속엔 자신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무식했다는 신랑이 상속으로, 재개발로 갑부가 된 것도 볼썽사나웠고 등등. 차마 그 말은 자존심이 상해서 하지 못하고 변명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땐 그 가격이 너무 폭락해서 기다려 보려고 했지”
해숙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기다림이 신랑이나 그 파렴치한 선배가 죽음을 기다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그들은 일찍 떠났다. 꼴랑 2억 때문에.
해숙은 그 2억을 받기 위해서는 공무원인 자기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증이 낼 수가 없어 수리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수금된 돈을 현금으로 받기로 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신랑처럼 이 사람도 위조를 하는구나. 사업자등록증을 자기 이름으로 쉽게 내는 걸 봐서는 직업은 뭐지 모르지만 직장은 없는 것 같아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몇 달이 지닌 후에 제품이 다 팔렸다며 해숙은 2억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받았다. 그때쯤에 그 패거리들이 졸업한 중학교에 발령을 받고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 학교는 해숙과 은희의 모교이기도 했다.
학교 담장 밖으로는 단풍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봄에 부임해 올 땐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지만 이 시골 학교 출신들 사이에 그런 큰일이 벌어진 데 대한 어떤 감회 같은 게 몰려왔다. 휴일인 오늘은 당직이라 출근을 했다. 출근하고 얼마 있지 않아 교정에 승용차가 한두 대씩 들어오다가 운동장 주변을 가득 채워졌다. 가을이 되어서인지 매주 토 일요일이면 졸업생 운동회가 열려 운동장은 항상 왁자지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