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도 만물의 일부이기 때문에 잠시 여기서 인간을 만물이라고 한다. 쓸모 없는 만물은 당연히 눈에 띄지 않은 곳으로 내팽개쳐진다. 내팽개쳐지기 전에 먼저 알아서 나가면 참 좋은데, 서로 민망하게, 어색한 미소를 나누고 난 뒤에야 자리를 떠난다. ‘정년퇴직까지 기다려주면 참 좋을 텐데’라며, ‘자기들에게도 반드시 올 미래인데’ 라며, 서둘러 눈치를 주는 이들을 원망한다. 본드로 붙여지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들이 먼저 본드로 붙여 주는 걸 싫어했고 붙이기도 전에 떼어버렸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들은 그렇게 그 사실을 망각하고 원망만 한다. 비단 이런 조직 사회에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건 아니다. 너무 어렵게 말을 비비 꼬아서 설명했나? 직장인들 대부분이 정년퇴직이 임박한 선배들을 쳐다보며 생각하는 말인데 그렇데 어렵나? 다시 한번! 저 사람이 나가야 내가 안 나간다. 돌고 도는 인생이야기이다.
조금 더 비꼬자면, 시내 한복판이나 유명한 음식점에 가면 계절에 걸맞지 않는 나무를 본다. 본드인지 뭔지는 몰라도 다양한 접착제에 붙여져 있을 것이다. 호기심에 아주 잠시 눈 속에만 들어오지 가슴 속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차라리 깊은 밤! 유리창에 비치는 살아서 흔들리는 가로수 그림자가 더 멋진 하나의 화폭인데 우리는 싹둑 잘라 바로 눈 앞에 두려고 한다. 서글프지만 우리 인간이 그렇다고 본다. 직장이던 생명이던 접착제로 붙여지면 처음엔 어떤 감흥과 같은 위로를 받지만, 곧 거추장스런 폐기물 대접을 받게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지금 여기서 사랑이라고 해서 꼭 남녀 사이로 한정해서 말하는 건 아니다. 사랑은 뺏고 뺏기는 농구공이 아니다. 만물의 사랑은 노력의 대가로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고 또 자연스럽게 떠난다. 마치 생명처럼. 그런 생명을 가질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뿌리부터 싹둑 잘라버리는 관행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걸 비난하고 싶어하고 싶어 한다. 옹졸하게 수리는.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매제인 영철이가 뭐라고 중얼거렸다.
“또 한 세월 다 갔네”
자연의 생리와 흐름에 대해 같은 생각으로 중얼거렸는지는 몰라도, 하품소리가 들리는 걸 봐서는 전혀 다른 생각이나, 아니면 머리를 텅 비어 놓은 상태에서, 늦가을이란 자연에 도취돼 하는, 의뢰적인 말인 것 같다. 굳이 들어 달라거나 맞장구를 쳐 달라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뒤끝이 개운찮다. 음의 높낮이가 다르다. 그냥 동의가 아니라 늦가을의 매력에 같이 빨려 들어가자는 강요 같기도 하다.
어떤 주제를 설정해두고 하는 대화가 아닌 이런 식의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이는, 툭 던지듯이 내뱉는 말에 맞장구를 잘못 치면 센스가 없다거나 무식하다거나 등의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는 참사를 불러 오는 핀잔 섞인 개 무시를 당할 수도 있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하루에도 수천 번 왔다 리 갔다 리 하는 본인인 자기 자신의 마음도 모르는데 이런 씩의 뜬 구름 잡은 식의 흥얼거림에는 어떤 식으로 던 자기 기분에 맞춰줄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귀찮다. 성가시다. 이 계절과 이 풍경에 맞는 자신만의 생각에 고요히 머물고 싶은데 왠지 뭔가를 자기 기분에 맞게 억지로 요구하는 답변을 원하는 것 같아 불쾌하기도 했다.
그것도 자기 마음 속에 오래 전부터 저려 담가 놓은 마늘 장아찌 맛에 대한 자기 나름의 평가와 같은 대답을 강요하는듯한 어투는 거의 50년을 같이 지내왔기 때문에 그 목에서 나오는 음 높낮이 만으로도 이 놈의 의중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차라리 딱 꼬집어 한 세월 다 갔는데… 그 뒤로 뭔가를 묻거나 아니면 다 갔는데 어떻다 등등을 얘기 해 줬으면 좋겠는데… 등등…
추리와 생각으로 인한 정신적인 노동이 얼마나 피곤한지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이 이런 식의 막연하고 광범위한 말로 맞장구를 쳐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건 골프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골프 얘기로 계속 떠드는 거와 마찬가지지만 이해는 간다. 모두들 일하는 시간에 골프나 치러가는 놈. 얼마나 할 일이 없었으면, 얼마나 친구가 없었으면, 처남 매부간에 골프를 같이 가겠는가? 이 놈도 수리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텅 비우고 싶은 날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가슴에서 느껴지고 받아들여지는 이 계절인 가을이 지금 이 두 놈의 인생과 같은 중간 역을 지났다는, 뭐! 그런 느낌. 아마 같은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있다가 무의식 중에 튀어 나왔을 것이다.
이 나이에 누구나 가지는 별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에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여 오랫동안 꿈틀거린 것 같다. 벌써 대답해줄 시점이 지난 것 같다. 계속 잡생각이나 한다. 혼자서 변명도 한다.
얼마나 친구가 없거나, 할 일이 없다는 건 너무 앞선 나쁜 선입견이다. 오늘 두 놈이 쉬는 날이 아니고 노는 날이다. 두 놈 다 일정한 직업이 있다. 단지 한 놈은 일에서만큼은 자기하기 나름이다. 일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한다. 다른 한 놈은 다르다. 연차가 많이 남아 다 써야 한단다. 그래서 오늘 논단다. 연차를 쓸려면 자기 마누라하고 놀지 하필이면 손위 처남을 불러 귀찮게 한다.
수리가 대꾸하기 싫은 건 당연하다. 일도 자기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놈인데 자기 쉬는 날이라고 골프장에 따라가는 게 썩 마땅찮은 모양이다. 이유는 모른다. 일일이 따지고 들면 서로 피곤하기 때문에 오늘은 그냥 이놈이 뭘 잘못 쳐 먹은 모양이다 하고 수리가 그냥 못 들은척하며 은근슬쩍 대답도 않고 넘어가려고 하는데 영철이가 집요하게 대답을 강요하고 있다..
“야! 임마! 한 세월 다 갔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보고 어쩌라고? 그 세월이 내 때문에 쫓겨났냐? 내보고 왠 짜증이야?”
못 들은척하기로 헸으면 끝까지 그랬어야지 기어이 자기도 한 성깔이 있는 놈이란 걸 보여 주고 만다.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답만 하고 차장 밖으로만 시선을 고정시켜 놓고 바로 후회를 한다. 이 놈이 이런 반응에 꽁해 있다가 그 불똥을 동생에게 앙갚음하지나 않을까? 뒤끝 더러운 놈인데.
아주 간단하게 ‘그래! 이렇게 한 세월이 또 가고 우리도 그렇게 같이 늙어가는 거지’라는 일반적인 접대 식 알랑방귀나, 아니면 ‘아~~ 옛날이여~~’, ‘그때가 그립네’ 정도의 감성적인 말을 선택 했더라면 분위기도 대화도 편안 했을 텐데, 낯간지러워, 바로 후회할 가시 돋친 말을 해버려 분위기만 설렁하게 만들어 버렸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으면 애당초 없던 본전이라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퉁명스런 대응으로 뒤끝이 있는 놈으로, 뒤끝이 생기게 된 놈으로 만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