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낱이 알면서도 희롱한 것 밖에 되지 않았고 자신은 그에게 놀아난 셈밖에 되지 않았다. 관계가 좋을 때와 나쁠 때에 대한 그의 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는 극과 극의 대조를 보여줬다. 이중적인 성격이었다. 게다가 비열하기까지 했다. 화살을 아내에게 돌렸다. 해숙이란 이름을 들먹이며 비꼬기도 했다. 아내도 자신인 고동우와 마찬가지라고 했다.
예전도 지금도 자신인 고동우는 재산이 많아 이용하려고 했고 아내도 그와 마찬가지로 ‘눈감고 아웅’하는 식으로 그와 함께 산다고 했다. 모든 건 돈이 중심에 서 있고 본인인 임정훈은 하찮은 인간이라고 했다. 그렇게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거기다가 한 술 더 떠 이 놈이 어떻게 알아 냈는지 아내의 과거도 얼버무리듯이 들먹거렸다. 그건 분명히 의도된 그의 화풀이였지만 그 말이 임정훈의 이성을 잃게 했다.
아내와 은희 오빠는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 정도로 깊은 연인관계였고 최종 선택은 돈 많은 본인이었다고 눈꼬리를 비틀어 부럽게 쳐다보고는, 그게 모두 그들 사이를 알고 있는 그 놈 패거리들의 복수라고 했다. 단적인 증거가 지금인 현실이라고 했다. 그의 아내인 해숙은 본인인 임정훈의 과거가 창피한 것 보다 그들 패거리들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단 한번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결과라고 했다.
그들 패거리들의 마음은 임정훈의 학력 위조를 알면서도 돈을 보고 결혼한 해숙의 감추고 싶은 과거사였다. 어느 말이 맞는 지 구분이 되지는 않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는 말들이었다. 당장이라도 철창을 부수고 들어가 죽이고 싶었지만 그는 단단한 철창 건너서 비웃고 있는 이 놈의 역겨운 미소만 노려 볼 수 밖에 없었다.
며칠 내내 그 놈의 비웃는 미소와 말이 눈 앞에서도 귀 속에서도 떠나지 않았고, 무슨 마력이 끌린 듯이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에까지 끌고 들어가 버렸다. 분을 삭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막대한 손해를 가져 오기까지 아내인 해숙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놈이 화풀이로 내뱉은 말들의 위력은 대단했다. 처음 그 말을 들을 때는 분개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놈이 말한 대로 은희 오빠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 봤지만 뚜렷한 직업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그의 인맥은 살아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에게 매달려 있었다.
한편으로는 아내가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다. 철없던 시절에 잠시 불탄 사랑을 아직도 가슴에 담고 꽁한 마음을 가지고 복수를 하는 그가 옹졸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런 놈에게 매달린 자신이 한심스러워 헛웃음까지 나왔다. 첫사랑에 대한 복수의 피해를 생각하면 더 가당찮은 웃음이 나와서 집에 가서도 계속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나 표정엔 절대 웃음이 없었다. 해숙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도저히 안 된데요?
“뭘?”
“그 물건…”
“뭐? 그 물건! 허허! 당신 눈에는 10억이 물건으로 보여?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그렇게 몰라? 이해가 안돼? 똑똑한 당신이 왜 그런 건 이해를 못하지… 참! 이상한 일이네. 수학 선생이면서 그렇게 계산이 안돼? 당신 월급으로 평생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봐라. 그 돈 모을 수 있는지! 어떻게 선생이라는 작자가 그것 밖에 안돼! 내가 정말 누굴 믿고 사는 지 정말 한심하다. 대가리 먹물 많이 묻혔다고 뭐 좀 아는 줄 알았더니 내가 더 못해! 어떻게! 답답하다. 답답해! 당신 그 오빤지 뭔지는 찾아가봤어? 내 같았으면 벌써 수 백 번은 찾아 가겠다. 지금 이게 남의 일이야? 아이고 내가 정말 소 새끼한테 말하는 게 훨씬 낫겠다.”
그렇게 몰라 세우고는 뒤 덜미를 주무르면서 안심해 보이는 듯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는 노려 보고 있었다.
갑작스레 몰아붙이는 신랑의 말에 어떠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모욕적인 말이었다. 이번 일이 성사되지 못한 모든 책임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어떤 약간의 경멸 같은 눈빛도 느끼게 했다. 아주 잠시였지만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 눈빛은 오래 전에, 신혼 초에 수도 없이 보아 온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때 신랑은 친구들을 만나고 오면 항상 이유도 없이 트집을 잡고 해숙의 의견을 무시해버렸다. 그때와 너무나 똑 같았다. 그리고는 뒤에 나오는 말도 항상 같았다.
“당신은 학교 다닐 때 뭐했어? 친구도 없었어?”
오늘도 그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트집을 잡고 있다. 또 잠자코 있을 수 밖에 없어 일어서 방으로 가려는데 뜬금없는 소리로 움칠하게 한다. 그 말은 어디선가 사실을 듣고 와서 반대로 비꼬는 말로 들렸다.
“은희 오빠가 당신을 그렇게 좋아했다며? 손 한번 잡아주지 그랬어! 그럼 이번에 일이 술술 풀렸을 텐 데 아쉽네. 허허허!”
차라리 있는 그대로 ‘그 오빠를 그렇게 좋아했다며’라고 물으면 이런 비굴한 느낌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마비됐던 신체의 어느 한 군데가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한 부분은 기억이었다. 신랑이 그 기억을 일깨워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은 그렇다고 말 할 상황이 아니다.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얼른 신랑 주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혼자 있고 싶었다. 혹시라도 순박했던 마음이 들킬 것 같아서 가능하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혼자만의 추억을 살리고 싶은 충동이랄까? 그런 게 들었다.
“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에요. 괜한 트집 잡지 마세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얼른 도망치듯 방으로 들어가 무의식 중에 리모컨을 켜고는 어느 드라마인지도 모르는 드라마를 보는 동안 머리 속에는 또 다른 재방송이 벌써 켜져 상영되고 있었다. 최근에 이상한 일이 벌어짐은 감지하고 있었다. 은희 오빠에 대해 이름도 얼굴도 잊혀진 건 벌써 30년이 지났고 그 사람에 대한 어떤 것도 까맣게 사라져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맞이해도 누군지 모를 얼굴인데 신기하게도 그 오빠의 얼굴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같이 있었던 것 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