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무 짝에도 필요 없는 인연에 굉장히 불쾌했다. 그렇게 불쾌함만 선물해준 가정을 도와 준다는 건 등신이나 할 짓이다. 어쩌다가 도와줘 봤자 자기들끼리 공치사할 결과를 뻔히 안다. 그 사람들이 그래서가 아니라 세상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분이 더러웠다. 치가 떨렸다. 뻔뻔스러웠다. 사람들이 너무 가식이란 생각도 떠올랐다. 누굴 등신으로 아나? 도 떠올랐다. 잔디에 올려진 공을 보고는 그 놈과 그 두 년이라 여기고는 사정이 내리 찍어 버렸다.
‘악’ 비명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야! 임마! 갑자기 왜 그래?”
수리가 오른 손가락으로 왼쪽 팔꿈치를 꾹 누르며 고통스러워한다. 숨을 거칠게 내쉬고는 다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는 속으로 되뇐다.
‘정말 재수 없는 년이네. 어떻게 이름만 떠올렸는데도… 아이고 팔꿈치야! 어이 씨! 재수없는 년! 어이 씨’.
그리고는 불똥을 영철에게 날린다. 분명한 건 자기가 잘못 쳐서 잔디를 파헤쳤다.
“야! 다시는 그 년 이름 거들먹거리지 마! 재수없게”
“왜? 무슨 일인데?”
잠시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잔디를 파헤쳐버렸지만 모두 다 지나가버린 과거사에 연연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기에 씁쓸히 웃으며 커트에 앉아 팔꿈치를 만지고 있다.조인된 동반자들은 들은 척 만 척 한숨만 내쉬지만 내심 불안한 지 눈치를 살피고 있다.
“죄송합니다. 제가 뭐 좀 도와달라며 너무 닦달을 해서 이 친구가 열 받은 것 같습니다. 허허허. 죄송합니다”
영철이가 동반들을 안심시키고 수리도 빙긋이 웃으며 미안한 듯이 목례를 살짝 하면서 사과를 한다.
“너나 나나 아무 관련이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는 게 좋지. 잘 하면 본전이고 그 사람들 성에 차지 않으면 괜히 원망만 듣는 게 세상사 아니냐! 미안! 내가 너무 애민했다. 여사님들에게도 죄송합니다.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네요”
걱정했던 것보다 이 사람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여 주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렇잖아도 친구분이 사장님에게 뭔가를 계속 다그치는 것 같아서 저희들도 불안했어요.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은 안 하는 게 좋지요. 잘되면 내 탓이고 못되면 네 탓인 세상이잖아요. 호호호. 저도 똑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애들에겐 이런 말은 못해요”
“대부분 그렇죠. 부모란 이유 때문이죠”
“아닌데. 이 친구가 말하는 애들은 학생들을 의미해요. 선생님이거든요”
“애가 그런 말은 왜 해!”
그 말에 영철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다.
“오늘 평일인데 선생님은 수업이 없으면 학교에 안 있어도 돼요?”
그때 선생이라고 한 사람이 대답을 해준다.
“그래도 공무원인데 그러면 안되죠. 살짝 도망쳐 왔어요. 이름도 다른 이름을 쓰고”
“허! 최고의 직장은 맞네요. 부럽습니다”
“당연하죠. 남자들에겐 최고의 로망인 아내 직장이잖아요. 호호호”
“그러는 그 쪽은요?”
“마찬가지예요”
약간은 들떠 있다는 음성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았다. 물어보지 않은 자신의 직업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꺼내놓은 건 어찌 보면 거만함이 몸에 베인 사람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리는 자기 코에서 거친 콧바람이 나온 걸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광대뼈를 덮은 살점들이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만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오’라고 생각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느낌도 동시에 받았다.
이들은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상대에게 주입시키려 하고, 그 주입된 그들의 품격에 대한 대우를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즉각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 같기도 했다. 그건 그들의 환경이 만들어낸 하나의 우월감이고 그것은 곧 그 세계의 병폐고, 또한 수리와 영철에게 자격지심을 유도하는 실언이기도 했다. 교사라는 직업 속에 있다는 그 말은, 금전적인 부분은 잘 벌어 흥청망청 아니면 다른 이유로 궁색할지 모르지만, 지성에만큼은 사회적 우위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 증거로 전혀 궁금하지도, 물어보지도 않은 그들의 정체를 들뜬, 우쭐한 목소리로 공표하는 거였다.
그건 수리가 경험해봤기 때문에 잘 안다.
어릴 때 딱 한번 전 과목 만점을 받았을 때가 있었다. 그때 꽁지에 불이 나도록 집으로 쫓아가 부모님, 형님, 동생뿐만 아니라 온 동네가 떠들썩하게 자랑을 했던 기억에서 비롯됐다. 부모님께서 점지해주신 형제라는 서열에서 밀려나 받은 어리광 섞인 서러움에 대한 복수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곧 질투와 시기를 가져왔고 움츠림도 선물하게 되었다. 바로 밑에 딱 하나인 동생인 은희의 기를 팍 죽였다는 사실을 어른이 돼서야, 동생이 아닌 이 놈 박서방인 영철에게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또한 그때 서열상 상위인 형님들에게 했던 복수처럼 묻지도 않았는데 이 사람들이 밝힌 자신들의 정체는 그들보다 잘나고 우월한 학부모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썩인 앙갚음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돈과 권력이 바탕이 된 힘센 학부모에게 당한 치욕이 은연 중에 자신들의 뇌리에 파고들어 패배와 자격지심 같은 걸 지내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지식과 돈이 바탕이 된 권력 사이에서 오가는 미세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 같기도 했다. 전혀 밀려 날 이유가 없는 자신들의 환경 속에서 절대로 있지 말아야 할 돈이 바탕이 된 알력에서 밀려난 패배감 같은 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그들은 우선순위를 먼저 가지려다가 오히려 밀려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만약에 영철이나 수리가 먼저 뭐 하시는 분이냐는 질문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그들은 이런 평가를 절대 받지 않았을 것이다. 허긴 골프 치는 사람들의 불문율이 상대가 말하기 전에는 절대 직업을 묻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밝힐 기회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조바심도 가졌을 것이다.
그 증거가 영철이 표정에서 나왔다.
영철이가 입 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고 웃는다. 그녀들에겐 들리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수리는 콧방귀 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사람들에겐 반드시 어떤 반응이라도 보여줘야 한다. 존경이던 경멸이던 어느 하나는 선택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민망해지거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화를 불러 일으켜 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