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결과를 도출하지 않는 것이 사람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다. 또한 이들이 원하는 예의에서 너무 벗어나서도 안 된다. 어쨌던 이 사람들은 선생이기 때문에 지성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에 걸 맞는, 전혀 엉뚱한 범주 속에서 예의를 표하는 것도 이들에겐 무례를 범하는 짓이다. 예의로 치자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 영철이다. 너무 깍듯해서 가끔씩 그 모습이 가식이 아닌가 오해를 받기도 한다.
“허허! 남편 분들이 부럽군요. 허허허! 존경스럽습니다”
수리는 고개뿐만 아니라 몸까지 비틀어 뒤로, 하늘로 향해 쳐다 보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막고 있다. 지금까지의 그 놈의 전화로 인해 받았던 짜증스런 순간들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줬지만 그건 순간에 불과했다.
그 놈의 휴대폰이 또 수리 염장을 파헤쳤다.
이제 한 홀만 더 치면 끝인데 그걸 참지 못하고 선생님이라는 한 사람이 걸려 오는 전화를 받으며, 미안한 표정으로 수리 일행을 쳐다보더니, 또 한번 미안하다고 하고는, 또 어디론가에 전화를 걸고는, 거의 읍소하듯이 부탁을 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그 순간이 마치 릴레이 달리기나 하듯이 영철이가 전화를 받고 또 뭔가를 열심히 설득을 하고 있다. 인내에 한계가 왔다. 수리는 전화를 걸은 사람이 누군지를 눈치채고는 영철이 휴대폰을 뺏어 상대의 말을 들을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바로 휴대폰을 입에다 대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야! 임마! 내가 안 된다고 했잖아. 내가 안 된다고 말을 할 때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는 말 아니냐? 왜 자꾸 사람을 귀찮게 해? 다시는 전화하지마!”
그리고는 전원을 아예 꺼 버린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흥분의 여파를 생판 처음 보는 이 여 선생과 영철을 번갈아 가며 노려본다.
순간 마주친 눈에서 섬뜩한 섬광을 캐치한 영철이가 민첩하게 수리 옆으로 간다. 이 불길한 전조를 쉽게 알아차리는 사람은 가족과 몇몇 친한 친구들뿐이다. 천만다행이 영철은 친구며 가족이다.
얼른 날쌔게 수리 입을 털어 막았지만 때는 늦었고 손바닥에 침만 소나기처럼 내리 쏟고 있었다.
“이 봐요. 선생님! 학생들에도 수업 시간에도 그렇게 전화 통화를 해요.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주세요. 무슨 과목인지 모르지만 애들이 그 과목만 배우려면 학원에 가지 뭐 하려고 학교에 가겠어요? 선생님이라면 그 정도는 알 거 아니에요.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맨날 여기도 비싸다며 낑낑 앓으면서 여기에 왔으면 돈의 가치만큼은 치고 가야 할거 아니에요. 여기가 무슨 전화 방입니까? 정말 도저히 못 참겠네요. 어이 씨!”
조용했다. 정적뿐이었다.
수리가 미간을 잔뜩 찌푸려 씩씩거리고는 커트에 올라 타 털썩 앉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길게 빨아 당기고는 내뿜는다.
전화를 전혀 하지 않았던 다른 선생님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연기를 피해 멀찌감치 물러선다.
그때 휴대폰에 매달려 있던 선생님이 옆으로 와서 기어이 한 소리를 한다.
“이 봐요! 남자가 무슨 소갈머리가 그렇게 좁아요. 제가 아저씨한테 뭐라 했어요? 왜 신경질을 네요?”
“뭐! 소갈머리? 이 보세요. 아주머니! 남자는 뭐! 화 낼 자격도 없어요? 여자만 소갈머리가 좁아요. 이 아줌마가 선생님이라고 내까지 자기 학생으로 보이나? 제가 지금까지 공치는데 아줌마가 얼마나 많이 방해한 줄 아세요? 선생님이니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 정도는 알고 계시겠네요. 치는 내내 인상을 잔뜩 찌푸리길래 저희들이 잘못 끼어들었나 생각도 했어요. 그렇다면 마음 맞는 네 명이 맞춰서 오지 왜 두 명만 왔어요? 제 얼굴에 무슨 똥 묻었어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죽을 인상을 짓는데 제가 불안해서 공을 못 쳤어요. 이런 데 오려면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서 오세요. 선생님이나 돼 가지고 그런 예의도 모르고.. 에이 씨!”
8홀 내내 쌓아둔 감정을 한방에 터트려 버리고는 커트 뒤로 가서 씩씩대며 벌써 채 정리를 하고 있다. 캐디가 수리 옆으로 와서 귓속말로 속삭인다.
“오늘은 어찌 오래 참는다 했는데 기어이 터트리네요. 호호호”
“내가 언제? 내처럼 골프장 예의 깍듯한 사람이 또 어디 있던데?”
“예의는 최고죠. 한방 터트려 허물어버려서 그렇지. 호호호”
“내가 그랬나?”
“예! 참으세요. 이제 한 홀 밖에 안 남았어요”
마지막 홀에서 수리는 공을 쳤는지 깼는지 모른다.
영철이 아내인 은희에게 전화도 했다. 마지막 홀을 잔소리로 가득 채우고는 조인된 여자들과 인사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고 샤워장으로 갔고 거기서도 영철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집으로 가다가 수리가 영철에게 전화를 건다.
“한잔하고 가자. 참! 아까 여편네 중 한 명 있잖아. 안면이 없어?”
“글쎄! 나이트클럽에서 만났겠지. 신경 끄자. 매너도 개떡 같고 재수 없던데 거기선 그 말 하지 말기. 오케이?”
“오케이!”
항상 가는 그 집. 다닥다닥 붙어 옆 사람의 대화가 다 들리는 또 장어구이 집이다. 이 집에 갈 때마다 한두 번은 두 사람 모두 망설인다. 그래도 일단 술이 입에 들어가면 주변 소람들에게 꼭 한번은 경고를 받는다. 너무 시끄럽단다. 단 둘이 얘기하는데 시끄럽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이니 이 두 사람의 입에서 터지는 봇물은 서로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었거나 아니면 그 사정 때문에 숨기고 있는 앙금을 술만 마시면 발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참! 은희 오라고 하지. 내가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도 알아듣지를 못하는 보면 네가 내 뜻을 확실히 전달 못한 것 같다”
“네가 부르면 되지 그걸 꼭 내가 해야겠나?”
“자식이! 형님한테 대들기는. 부르라고 하면 빨리 불러. 군소리하지 말고. 나는 창훈이 부를게. 확실하게 타일러야겠다”
영철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상당히 상했다. 그래도 참아왔던 건 이 놈이 아무리 어깨에 힘을 주고 이래라 저래라 시켜도 집에서 화풀이할 상대가 있어서였다. 자기 동생이 같이 한 이불에서 자기 때문에 그 많은 세월 동안 자기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자기 동생이 당하고 있다는 걸 이 놈은 모른다.
그렇게 오래지 않아 창훈이 왔고 항상 어울려 다니는 영어 선생님인 인걸이를 데려 왔다.
인걸이가 앉자마자 창훈에게 대수롭지 않게 뭔가를 묻는다.
“참! 김성은이 알지? 그 놈이 웬일인지 내한테 전화 왔더라. 뭐 좀 도와달라는데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서”
창훈뿐만 아니라 전부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