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으로 진입한 수정이 하완에게 물었다.
“집으로 데려다 줄까?”
“아니. 나 터미널에 차 두고 왔어.”
“그럼 터미널로 가자.”
수정은 친절하게도 하완을 터미널까지 태워졌다.
주차장에서 하완이 내리자, 수정이 차창을 열고 하완을 불렀다.
“야. 박하완!”
“응?”
뒤 돌아본 하완에게 수정이 손가락 하트를 날리며 윙크했다.
“나. 너 진짜 좋아했다. 너는 나한테 관심 없었지만!”
“하- 뭐야?”
수정의 장난 섞인 애교에 하완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근데 이제 그만 놓아 줄려고. 나 딴 여자 좋아하는 남자에게 마음 줄 만큼. 지고지순하진 않다.”
수정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오늘 수고했어. 그리고 고마워.”
“응. 잘가.”
수정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
하완은 차가 주차된 곳으로 걸어갔다.
삑- 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걸었지만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5초 동안 고민하던 하완은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부웅- 차의 엔진소리가 심장 박동수만큼 빨랐다.
***
하완이 온 곳은 다름 아닌 여울의 집이었다.
저번에 여울을 태워주면서 알게 된 곳이었다.
그때도 호감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발전할 줄은 몰랐다.
‘왜일까? 왜 좋아하는 걸까?’
돌아가신 어머니와 닮은 건 오히려 수정이었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은 특히..
그런데 전혀 다른 매력인 여울에게 더 끌리고 있었다.
‘얼굴도 동글동글하고, 코는 좀 뭉툭한 것 같은데? 아닌가? 낮진 않으니까 오똑한 건가? 눈은 그렁 그렁 한게 꼭 여욱이 같아.’
여울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한편으로는 마루와 뭘 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 자식이 허튼짓 했으면 어떡하지?’
하완의 머릿속에 여울과 마루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캄캄한 복도, 마루가 여울을 끌고 가서 벽에 밀친 다음, 비장한 눈빛으로 여울이 못 빠져나가게 팔로 막는다.
“뭐하는 거야?”
여울이 마루에게 소리친다.
하지만 단호한 마루가 여울에게 하는 말은..!
“난 너 밖에 없어!”
그리고 키스를..?
응?
“으악!”
끔찍한 상상에 자동차 안에서 발을 굴렀다.
하완의 발에 맞은 경적소리가 빵-하고 울렸다.
그 바람에 차 밑에 숨어있던 고양이가 깨갱-하며 튀어 나왔다.
크흥-잠시 낮은 울음을 내던 고양이가 침을 퉤 뱉듯이 굵고 짧게 캬항-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갔다.
꼭 하완에게 욕하는 것만 같았다.
하완은 핸들에 고개를 박았다.
“내가 이러면 안 돼지.”
혼잣말도 막 중얼거렸다.
그리고 콩콩-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앞에서 여울이 걸어오고 있었다.
여울을 보자마자, 하완이 차에서 나왔다.
“여울씨..”
그러나 여울의 표정이 안 좋았다.
결국 그 날 하완은 여울에게 퇴짜를 맞고 돌아가는 신세가 됐다.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평소 감정표현이 적은 편인 하완인데, 오늘따라 약한 모습이 자꾸 나왔다.
어쩐지 눈에 눈물도 고이는 것 같았다.
“아이.. 진짜 왜이래.. 조마루같이..!”
슥- 눈에있던 눈물을 닦았다.
“눈에 뭐 들어갔나?”
혼자 있는데 쓸데없는 핑계도 대 봤다.
차의 엔진소리가 꼭 이렇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렁-그렁-!
***
last christmas I gave you my heart~
매장에 wham의 last christmas 음악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더 돋구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서 캐럴송이 많이 나왔다.
준영과 여욱이 구석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고 있었다.
“우와- 예쁘다.”
“풉-너도 예쁜 거 아냐?”
준영이 트리를 보고 감탄하자, 여욱이 비웃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준영이 여욱을 째려봤다.
“아. 진짜! 너 저번에 나한테 일주일 후에 나간다며? 군대 갈 준비 안해?”
준영의 말을 들은 여욱이 절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나 카투사 떨어졌다. 다음번을 노려야 해.”
“영어 못하지 않아?”
“아니. 나 잘하는데? 이번엔 의경 시험 볼 거야. 또 떨어지면 그냥 일반현역으로 가야지.”
“빨리 가. 어서 가.”
얼른 가라는 표정으로 준영이 손사래를 쳤지만 여욱의 군대가 미뤄지는 것에 은근히 좋았다.
물론 좋은 이유는 말로 설명하기 애매했다.
그냥 환상의 티키타카를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어서? 아마 그럴 것이라고 준영은 믿고 있었다.
“오늘 그럼 사장님 아예 안 오시는 건가?”
“아마 그럴걸? 이제 서울에 오픈했잖아.”
“그럼 너랑 단 둘이 있는 거야?”
음흉한 표정을 지은 채, 장난스럽게 여욱이 말했다.
“뭐냐. 그 표정은? 너랑 나랑 단 둘이 있으면 뭐!”
크리스마스별을 든 준영이 여욱을 별로 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돼. 그만해. 별 망가지면 안 된다고! 트리의 완성은 별이야!”
준영이 들고 있는 별을 뺏은 여욱이 조심스럽게 크리스마스 트리위에 별을 달았다.
반짝 반짝 빛나는 별이 크리스마스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만 같았다.
***
커다란 크리스마스 밑에서 짝짝짝- 박수소리가 났다.
가위를 들고 있는 하완을 포함한 몇몇의 사람들이 일렬로 서 들고 있던 테이프를 잘랐다.
마루와 여울은 테이프를 자르는 사람들 옆에서 기쁜 표정으로 같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테이프를 자른 사람들 중에는 마루유통의 사장이자, 마루의 아버지도 계셨다.
“박사장 축하하네.”
마루유통 사장님이 하완을 안아주셨다.
마루와 똑 닮은 사장님은 이마가 약간 벗겨져 게셨다.
여울은 팔꿈치로 마루를 툭- 치며 장난으로 물었다.
“너.. 지금부터라도 두발관리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아직 모르는 구나? 원래 탈모는 한 대를 건너뛰고 유전되는 거야. 난 안전해.”
“헐 그러면 네 아들은 탈모를 겪어야 해?”
“아..마..도?”
“헐..”
여울과 마루가 시덥지 않은 장난을 치고 있을 때, 하완과 마루유통 사장님의 대화는 꽤 진지했다.
“아닙니다. 다 사장님 덕분이죠. 이렇게 좋은 자리에 분점도 내고.”
“오늘은 축제야. 축제.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오픈해서 사람들도 많이 오고! 벌써부터 복이 터졌어! 앞으로 자알 될 꺼야~!”
마루유통 사장님의 말대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 도심가로 나온 사람들이 행사 중인 ‘아삭파이’에 관심을 가졌다.
신난 여울을 마루가 뿌듯한 얼굴로 쳐다봤다.
“여울아. 수고했어.”
“뭘. 네가 다했지. 난 예향에 너 왔을 때랑 서울 몇 번 올라간 것 말고는 한 게 없어.”
“그래도 너 아니었으면 하완 형이 마음 편하게 체인사업 못했지. 체인사업 한다고 본점 신경 안 쓸 수도 없고.”
“어? 하완 형이라고 불러?”
“응.. 우리 그만큼 친해. 질투 나?”
“뭐어?”
마루의 도발?에 여울이 웃었다.
“응. 질투나.”
“뭐? 이거. 이거 봐.. 주여울 박하완 좋아하는 거 확실해.”
“아니야. 난 그냥 사장님으로 좋아하는 거라고.”
“사장님이라서 고백을 못 받는 건 아니고?”
“글쎄다. 그건.. 그리고 내가 진짜 좋아했으면 여기 그만둘 거 각오하고 사귀었겠지.”
“그래? 그럼 지금은 확실히 아니라는 거지? 그 태도 좋다. 계속 유지하자. 여울아.”
여울은 시치미를 뚝 뗐다.
마루는 시치미를 떼는 여울의 속도 모르고 아직 여울이 하완을 정말로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1m 떨어진 공간에서 자신을 그윽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하완과 눈이 마주쳤다.
‘일터에서 저렇게 둘이 속닥속닥 거려야 하나? 일만 해야지.’
하완은 다정한 마루와 여울이 질투났다.
겉으로는 그윽한 눈이었지만 사실 질투의 레이저 광선이 눈에서 발사되고 있었다.
하완의 눈빛을 대충 짐작하고 있는 여울은 애써 눈을 피했다.
‘왜 피하지? 나도 사실 좋아하는데..’
하지만 만날 수 없었다.
사실 하완이 고백했을 때, 마루에게 이미 흔들린 후였다.
하완에게 가는 건 양심상 그럴 수 없었다.
지금도 아직 마루에게 흔들리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저거 롤스로이드 아니야?”
“응?”
아삭파이 앞에 검은색 롤스로이드 한 대가 섰다.
“헐 대박.. 내가 완전 좋아하는 차인데. 부티 장난 아니다.”
롤스로이드 안에서 중년의 신사 한명이 지팡이를 짚고 내렸다.
신사는 고급 진 잿빛의 코트를 입고, 분명 100% 캐시미어일 울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은빛머리와 호랑이 기운이 느껴지는 날카롭고 단단한 표정이 신사의 성품과 사회적 지위를 단박에 보여주었다.
“헐. 사장님 아버지 아냐?”
여울은 신사를 단박에 알아보고 뛰어갔다.
“안녕하세요!”
굳은 표정의 신사가 여울을 보고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 그래. 저번에 봤던 아가씨 아니야?”
“네. 맞아요!”
신사는 여울을 반갑게 맞이했다.
신사가 내린 차에서 하완의 새 엄마도 따라 내렸다.
“어머. 저번에 아가씨 아니야? 또 만났네?”
하완의 새 엄마도 여울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새 엄마는 신사를 옆에서 부축했다.
“아가씨가 우리 한번 인도해봐.”
신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네!”
똑 부러지게 대답한 여울은 신사와 하완의 새엄마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 모습을 본 마루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벌써 가족까지 본 사이란 말이야? 주여울.. 진짜 이러기야..?”
마루의 뾰로퉁한 입이 툭-하고 튀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