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장에 휑-하니 찬 기운만 감돌았다.
볼이 빨개진 여울이 손을 비비자, 마루가 일어나 보일러가 있는 곳을 찾았다.
“춥지?”
“응..”
“여울아 오늘 일 끝나고 밥이나 먹자.”
“너랑?”
“응. 왜 싫어?”
“아니.. 싫을 것까지야..”
‘아가씨가 이쁘네. 여자 친구야?’,‘둘이 선남선녀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점심 먹고, 세-네명의 여사님들이 작업장으로 돌아오는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달칵- 문이 열리자, 여울과 마루가 일어났다.
“누구여?”
“처녀 총각 둘이서 뭐한데?”
방금 들어온 세 명의 여사님들이 한 목소리로 질문세례를 쏟자, 마루가 손 사례를 치며 말했다.
“에이. 아니에요. 저희 일하러 왔어요. 여기 작업장에서 일하시는 어머님들이세요?”
“그러지. 여기서 일하지~ 박사장 보러 왔나?”
“네. 사장님도 오신걸로 알고 있는데?”
하완과 수정이 들어왔다.
네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에게 마주쳤다.
하완은 여울을, 마루는 하완을, 수정은 여울을, 여울은 수정을..
1초간 짧은 순간이지만 서로를 탐색하는 미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여사님들이 네 사람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셨다.
“왜들 그려? 다들 처음 봤어?”
“아가씨들이 긴장했네?”
“왜 그러고 서 있대. 다들?”
여사님들의 호기심 섞인 말에 네 사람의 경계심이 풀어졌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하완이 넉살좋게 말했다.
“아, 소개할게요. 여긴 수정씨. 제 어머니 제자였어요. 저랑 친구사이고요. 과수원 배경으로 출사 나왔다가 파이 제조하는 작업장이 궁금하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그리고 저쪽은 마루씨. 저희 아삭파이 프랜차이즈화 해주실 분이에요.”
“아, 그래? 저 총각이 엄청난 일을 해주실 분이네.”
“그러니까. 그러니까.”
여사님들의 수다가 다음 할 일을 하게 해주었다.
하완은 마루에게 작업장을 소개시켜줬고, 여울은 하완이 마루를 상대하는 동안 혼자 있는 수정의 말 상대가 되어주었다.
“사장님 친구분이라구요?”
“네. 아삭파이에서 일 하시죠? 저 카페 아삭파이 자주 갔는데, 몇 번 봤어요.”
“네. 저도요. 손님으로 오신 거 봤어요.”
평범한 대화였지만 여울과 수정 사이에 여전히 서로를 탐색하는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여울은 하완과 마루를 보았다.
하완을 대하는 마루의 태도는 사무적이었지만, 마루를 대하는 하완의 태도는 다정했다.
마루가 궁금해 하는 것에 하나하나 대답해주고, 가끔 어깨를 두드리고도 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꼭 친한 형,동생 같았다.
마루는 어쩐지 하완에게 서운함이 들었다.
낯선 여자에, 여울의 전 남자친구에게 다정한 남자라..
알쏭달쏭했다.
***
작업장 견학이 끝나고 네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사람은 네 명인데, 차가 두 대였다.
하완이 타고 온 차 한 대, 수정이 타고 온 차 한 대.
흠흠- 헛기침을 한 마루가 불쑥 먼저 말을 꺼냈다.
“여울이 오늘 여기서 퇴근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 같이 저녁식사 하고 싶은데.”
마루의 도발에 여울이 마루를 쳐다봤다.
“어우 야. 너 왜 그래?”
여울은 하완의 눈치가 보였다.
싸늘한 하완의 표정은 오늘 따라 창백한 하완의 얼굴이 더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왜요? 둘이 뭐 할 말이라도?”
마루가 여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네. 사실 저희가 친구거든요. 좀 긴밀했던 친구라고 해야하나? 그래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같이 저녁을 하고 싶습니다.”
여울은 마루의 손을 치우며 불쾌감을 표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난감했다.
“그래요. 그럼.”
하완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여울을 실망시켰다.
수정이 그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하완이 너는 나랑 밥 먹을래?”
“...”
하완이 대답하지 않았다.
여울이 잡아주기라도 기다리는 듯이..
하완의 대답을 마루가 대신 하듯 말했다.
“그럼 저랑 여울이는 먼저 가볼게요.”
마루의 손가락이 여울의 옷자락에 닿았다.
“어떻게 가려구? 차도 없는데?”
뒤늦게 하완이 붙잡듯이 말했다.
“차 없으면 택시타고 가면되죠. 코코아택시 부를게요.”
“...”
마루의 당당함에 하완은 더 이상 잡지 못했다.
“그래. 그럼 둘이 가던가.”
빨간 차를 탄 수정이 여울과 마루를 지나치면서 차창 문을 열어 윙크하며 인사했다.
“다음에 봐요. 우리”
여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들릴락 말락 작게 읊조렸다.
“뭐야 재수 없어..”
하완의 차는 두 사람 앞에 멈추지도 않고 지나쳤다.
여울의 입이 뾰로퉁하게 나왔다.
그런 속도 모르고 마루가 여울의 손을 덥썩 잡았다.
여울이 마루의 손을 뿌리쳤다.
“야. 이건 오바다.”
여울의 손을 살포시 놓은 마루가 아쉬운 듯이 말했다.
“우리 사귈 땐, 많이 잡았잖아.”
“지금은 사귈 때가 아니잖아.”
슝-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쳤다.
***
코코아 택시를 타고 무작정 시내로 나온 마루와 여울이 따뜻한 곳을 찾아 해매었다.
여울은 대충 아무 카페나 들어가고 싶어했지만 마루가 기어이 고집을 부렸다.
마루가 여울을 시내 변두리로 인도 했다.
‘애는 여기 와보지도 않았을 텐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여울은 점점 불안했다. 마루와 걸어가는 변두리 거리에 모텔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여울이 마루를 째려봤다.
“대체 어디 가는거야?”
“여기다!”
마루가 인도한 곳은 2층 주택을 분위기 있는 카페로 개조한 곳이었다.
“여기 요즘 뜨는 곳이래.”
“인스타 맛집?”
“응.”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시멘트 느낌이 그대로인 벽과 제각각인 탁자와 의자들이 보였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와 벽장에 진열되어 있는 수입 차들은 한눈에 봐도 고가로 보였다.
“여기서 뱅쇼 마시자.”
신난 얼굴로 여울을 보는 마루에게 여울은 살짝 미소 지었다.
‘맞다. 마루는 맛집 투어 잘하지.’
변두리에 있는 것 치고는 안에 사람들이 붐볐다.
마루와 여울이 자리 잡은 곳은 앞, 뒤로 소파가 있는 넓은 테이블이었다.
“너랑 너무 멀어졌엉..”
아쉬운 마루가 혀 짧은 소리를 냈다.
큭- 그 모습에 여울이 웃음이 터졌다.
“뭐냐. 너. 지금 말투가 짧아진 거냐?”
“우리 연애할 땐 원래 내가 애교 많았잖아. 너보다.”
맞다. 마루는 원래 애교가 많았다.
여울은 마루와 연애하던 때가 새록새록 생각났다.
“근데 너 나랑 왜 헤어지자 했냐?”
대뜸 마루가 물었다.
“응..??”
“갑자기 잠수타고 헤어지자고 했잖아. 그 이후, 연락도 안하고 나 딴 사람 생긴줄 알고 혼자 착각만 하고. 뭐야 너?”
“아.. 그게..”
차마 헤어진 이유를 밝히지 못하고 헤어졌다.
절대로 마루가 이해할 수 없는 여울의 열등감 문제였기 때문이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바쁜 가게 사정 때문에 웨이터가 이제야 메뉴판을 들고 나타났다.
메뉴판을 펼쳐보던 마루가 뱅쇼와 리코타 치즈를 곁들인 연어 샐러드를 주문했다.
“너 먹고 싶은 거 있어?”
“나..?”
“오늘 당연히 내가 사는 거야.”
마루에게 메뉴판을 받아 든 여울의 눈이 자연스럽게 가격에 먼저 갔다.
만원이하는 아예 없고, 별거 없어 보이는 안주나 샐러드, 케익도 모두 2-3만원대였다.
“어.. 나는..”
메뉴판을 한참보던 여울은 결국 메뉴판을 닫았다.
“우리 부족하면 시키자.”
“그래.”
주문을 하고, 마루와 잠깐 대화가 멈춘 사이 여울은 잠깐 회상타임을 가졌다.
중견기업 대표의 아들로 태어난 마루는 재벌 2세까지는 아니었지만, 언행이나 씀씀이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티가 풀풀 났다.
여울은 마루와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음원회사 서포터즈를 하다가 알게 된 둘은 마루가 군대를 갔다 온 후 이후로 연인사이로 급격히 진전됐다.
처음엔 정말 좋았다.
“여울아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너 야근하느라 힘들지? 이거 먹으면서 해. 네가 좋아하는 초밥 도시락이야.”
“뭘 이런 걸 사왔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울은 좋아서 입이 귀까지 걸렸다.
마루는 여울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시간도, 돈도..
그런 마루가 불편하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3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였다.
“여울아. 이거 우리 100일 기념 선물이야.”
“헐.. 사넬백? 이거 너무 비싼 거 아니야? 얼마야?”
“얼마 안 돼. 명품치곤 되게 싸. 100만원 정도?”
“...”
여울이 준비한 것은 10만원도 안 되는 서류철 가방이었다.
“여울아. 나 졸업하면 우리 여행 한번 갈래?”
“여행? 어디로?”
“유럽으로. 나 이탈리아 가고 싶어. 우리 피사의 사탑보자.”
“이탈리아? 비싸지 않을까? 나 이번에 원룸 보증금 때문에 돈 많이 써서 통장이 텅장이야.”
“괜찮아. 내가 내면 되지.”
“...”
마루와 멀어진 건 그때부터였다.
여울은 마루가 비싼 선물을 주고, 비싼 데이트를 할 때마다 마음에 빚이 쌓여갔다.
항상 받기만 하는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여울아!”
“응?”
“무슨 생각해?”
과거 회상에 멍 때리고 있던 여울을 마루가 적절하게 끊어줬다.
“뱅쇼 나왔어.”
“응.”
독특한 유리병에 담긴 뱅쇼를 와인 잔에 따라주는 마루의 눈빛이 고혹적이었다.
너무 짙지 않은 눈썹에 선한 눈망울, 오똑한 코를 가진 마루는 누가 봐도 귀티 나는 얼굴이었다.
180에 가까운 작지 않은 키 덕분에 여울과 함께 서 있으면 키 차이로만 여울을 감싸줄 것만 같은 나무 같은 존재였다.
여울은 뱅쇼를 마시기도 전에 마루의 눈빛에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사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