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리쬐는 햇살이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부서졌다.
햇살은 강렬한데, 바람은 찬 아이러니한 날씨였다.
하완의 차에서 내린 여울이 입고 있던 겉옷 속으로 손을 더 깊숙이 넣었다.
눈으로 대충 주위를 훑었다.
과수원 수확을 위해 왔던 동네여서 그런지 익숙했다.
도심 속 변두리에 있는 깔끔하고 정갈한 시골 동네.
낮은 1층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파스텔 톤으로 페인팅 된 건물들.
하완이 차에서 내리며, 앞에서 걸어오는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사장총각이네.”
짝-할머니가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파이 벌써 매진됐어?”
“아니요. 오늘 견학이 있어서요.”
“아, 그랴? 그런것도 해?”
“네.”
하완이 사람 좋게 웃었다.
여울과 하완이 바로 앞, 2층 건물로 들어섰다.
아삭파이 작업장이라는 표지판만 간판처럼 달린 건물의 밋밋한 앞모습과 다르게 안은 기계가 돌아가고, 사과박스가 쌓여있는 작업장이었다.
“원래 마루씨도 같이 오려고 했는데, 서울에서 출발이 조금 늦는다고 하네요. 그래서 도착하면 택시타고 바로 여기로 온대요.”
“네.”
여울은 주변을 둘러보는 척 하며 무심히 말했지만 막상 마루를 마주하면 어색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하완이 여울에게 말했다.
“저 삼촌 좀 뵙고 올게요.”
“네!”
여울이 하완을 향해 환히 웃었다.
하완도 여울을 향해 환히 웃었다.
하완이 나가고, 여울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사과 박스가 즐비하고, 체리나 호두 등 다른 식재료들도 많이 보였다.
파이를 굽는 기계가 따로 있지는 않았지만, 음식점 주방으로 보이는 곳에 뒤집개와 프라이팬이 즐비한 걸 보니, 일일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3-4명 정도 일하는 것 같았다.
‘아까 만난 할머니는 여기서 일하시는 직원이신건가? 우리가 와서 자리를 피해준 건가?’
찬찬히 살펴보던 여울은 주방 구석에 있는 전기 물레를 발견했다.
구석으로 치워져 있었지만, 큼지막한 것이 눈에 띄었다.
“누가 여기서 도자기도 만들었나?”
의아함에 물레를 이리저리 만져 봤다.
꼭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인의 손을 탔던 것처럼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물레를 한참 보던 여울은 빈공간에 울리는 째각-소리에 시계를 봤다.
12시 5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점심시간이라 모두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드는 것 치고는 가격이 좀 싼 것 같은데..”
입구에서 딸각-소리가 났다.
누가 들어왔나 보다.
“사장님이세요?”
대답이 없었다.
“어..?”
마루였다.
한손에는 서류철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커피가 있는 캐리어를 든 마루가 정장에 롱 코트를 입고 여울 앞에 서 있었다.
저번에도 봤지만 마루의 정장 입은 모습은 어쩐지 낯설었다.
그때는 너무 당황해서 마루가 뭘 입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또렷이 보였다.
동갑이라 가벼워 보였고, 항상 어린 것 같았던 마루의 모습이 오늘 따라 어른스러워 보였다.
흠, 괜스레 헛기침을 한번 한 마루가 여울에게 다가갔다.
“자주 보네?”
“... 작업장 구경할래? 나도 오늘 처음인데.”
마루가 코트를 벗어 간의의자에 올려두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캐리어 안 커피를 꺼내, 여울에게 주었다.
여울은 커피를 받아들면서 0.1초간 마루의 손이 스쳤다.
밖은 추워도 종이컵에는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여기서 파이 만드나봐. 일일이 다 수제로 작업해.”
여울은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일부러 마루와 시선을 마주치며 설명했다.
마루의 시선도 여울을 따라 움직였다.
“내가 이따 보내줄 ppt에도 사진이 다 있을 거야. 내가 찍은 건 아니고, 사장님이 찍으신 건데.”
마루가 여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보면 과수원도 있을 거야. 거기서 주로 재료를 구하셔.”
여울이 한마디, 두 마디 할수록 마루와 여울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졌다.
“프랜차이즈를 내면 서울부터 시작할..”
어느새 두 사람은 손바닥 한 뼘 사이로 가까웠다.
마루가 여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커피를 잡고 있어서 그런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여울아, 나랑 사귈래?”
“...”
주방에 뚫린 창문 너머로 햇살이 부서지듯이 비쳐왔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햇살에 눈이 부셨다.
빛이 너무 강렬해서 시야를 가려버렸다.
***
부릉- 하완이 시동을 걸자, 자동차 아래에 숨어있던 검정색 고양이가 갸르릉 거리며, 밖으로 빠져 나왔다.
걸어오던 하완이 멈칫했다.
“이 동네가 고양이가 많네.”
혹시라도 밑에 고양이가 있을까봐 시동을 걸고 잠시 쉬었다가 차를 몰았다.
하완은 과수원으로 향했다.
겨울이 온 과수원은 나무들만이 앙상한 가지를 뻗은 채, 우둑하니 서있었다.
과수원 근처 삼촌의 집으로 향한 하완의 눈에는 밖에 세워진 빨간색 차가 들어왔다.
‘누가 왔나?’
정차 후, 삼촌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저 왔어요.”
응- 인터폰에서 짧은 대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1층 거실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거실에 익숙한 사람이 테이블에 찻잔을 들고 앉아있었다.
“하완이 왔냐?”
반대편에 앉아 계시던 이모가 환한 얼굴로 하완을 맞이하셨다.
“수정씨 오셨어. 여기 배경으로 사진 찍고 싶으 시대. 그래서 내가 그러라고 했어.”
“아.. 네. 이모.”
“하완아 오랜만이다. 여기서 만날 줄이야.”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 통유리 사이로, 하얀 원피스를 입은 수정의 모습이 눈부셨다.
말 그대로 눈이 부셨다.
하완이 얼굴을 찌뿌렸다.
“응. 사진도 찍네?”
“어. 원래는 사진만 찍었는데. 나중에 대학원 간거잖아.”
“아, 그래? 근데 이모부는 안 계세요?”
하완이 이모를 보며 물었다.
“이모부 잠깐 마을회관 가셨어. 지금 오시라고 전화할까?”
“네. 거래처 사람 왔다고 전해주세요. 부탁 좀 드릴게요.”
“그래. 너도 여기서 앉아서 기다려. 커피 갔다줄게.”
“네.”
하완이 테이블에 앉았다.
이모가 나가고 수정과 단 둘이 앉아있자니, 뭔가 어색했다.
“요즘 뭐 하는 거 있어?”
수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응 프랜차이즈 사업.”
“오, 정말? 너 되게 잘나간다.”
“그런가?”
“그럼 지금 만나는 거래처 사람이..”
“응. 우리랑 프랜차이즈 하기로 계약한 유통업체.”
“아..! 현장 돌아보고 있구나. 과수원 한 바퀴 도는 거야?”
“아니. 작업장. 파이 만들어지는 곳.”
“그래? 나 거기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나도 가 봐도 돼?”
하완이 고개를 갸우뚱 했다.
‘거길 왜 가지?’ 라는 생각에 대답을 안했다.
“네가 말 안 해도 나 갈 거다.”
수정의 도발에 하완이 잠깐 시선을 피했다가 수정을 쳐다봤다.
“왜? 네 일도 아닌데?”
수정이 잠깐 뜸을 들이고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 어머니께서 도자기 제조하셨던 작업장 아니야? 나, 어머님 제자였잖아.”
“아..!”
잊고 있었다. 하완은 언제나 과수원을 운영하시던 어머니 모습만 기억난다.
하완이 대학시절, 시간강사로 학생들 앞에서 수업하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
“맞다. 기억났다. 너 제자였지. 내가 그래서 너랑 친해졌고.”
“세상에. 나는 잊어도 너는 기억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너무 무심했나 싶었다.
하완은 기억을 되짚어 봤다.
시골로 귀농해서 과수원 일 하면서도 틈틈이 공부하셔서, 대학원까지 들어가시고, 박사 과정 중에 동 대학에서 시간강사 하시면서 좋아하시던 어머니 얼굴이..
그때, 어머니가 도심으로 나가면 꾸밀 일이 있어서 좋다고 말하시면서 원피스를 자주 입으셨는데, 그때 자주 입으셨던 원피스가..
잠시잠깐이었지만 수정과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갑자기 두 사람이 닮아보였다.
아니면 오늘 착장이 그래서 그런 건가..
“삼촌 지금 오신대. 그래도 5분 정도 걸리니까 뜨듯한 커피라도 마시면서 기다려.”
작고 우아한 찻잔을 내보인 이모가 두 사람을 흐뭇한 표정으로 쳐다보셨다.
“말들 많이 나누고, 하완이 친구 봐서 좋네.”
수정이 환하게 웃었다.
얇은 입술이 귀까지 걸리자, 어머니와 더 겹쳐 보였다.
생전에 저렇게 웃으셨던 것 같은데..
하완은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왜? 어디아파?”
수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두통이 잠시 온 것 같아. 아침에 찬바람을 쐬 서 그런가?”
수정이 걱정스레 하완 곁에 다가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하완의 손과 수정의 손이 맞닿았다.
놀란 하완이 수정의 손을 뿌리쳤다.
“미안!”
수정이 재빨리 사과했다.
하완은 자신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사실 그렇게 기분 나쁜 것도 아닌데..
두 사람 사이로 강렬한 햇살이 부서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