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 후, 스산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준영이 전화를 받고 있었다.
“사장님 출장 후, 바로 퇴근하시는 거에요?”
“아니. 오늘 늦게라도 카페 아삭파이 갈 건데, 넌 그냥 마감하고 퇴근 해.”
“네. 알겠습니다.”
준영이 전화를 끊고, 1인석 긴 테이블을 닦았다.
오늘 따라 카페 아삭파이를 찾는 고객들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빈도수가 낮았다.
방금 들어온 커플 말고는 새로운 손님은 없었다.
카운터에는 준영 또래의 알바생이 커피와 파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여욱은 은지가 오자, 먼저 퇴근했다.
준영이 헹주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은지야. 뭐 도울 거 없을까?”
“아니. 오늘따라 손님이 별로 없네. 심심하면 바람이라도 쐬고 올래? 사장님도 안 계신데.”
“내가?”
준영이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평소에 하지 않는 일탈이었다.
“응. 내가 가는 것보다 네가 가는 게 맞지 않을까? 넌 매니저급인데. 쉬어도 네가 쉬는 게 맞지. 아니면 평소에 필요했던 거 쇼핑이라도 하던지.”
준영이 매장을 둘러봤다.
방금 들어온 커플 두 사람 말고는 없었다.
손님이 적은 날에는 굳이 두 명이나 자리를 채우고 있을 필요 없었다.
한 명이 할 일이 없어 무색할 뿐이었다.
“그럼 잠깐 10분만 나갔다 올게.”
준영은 드레스룸으로 갔다.
허리앞치마를 풀고, 캐비넛에서 외투와 지갑을 챙겨 나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 올리브 영으로 곧장 갔지만 딱히 살 물건은 없었다.
화장품들을 구경하다가 맨 손으로 나오기는 그래서 마스크팩 몇 개를 집었다.
“프로비타민 마스크팩 2매 해서, 총 4,000원입니다.”
점원의 말에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는데, 카운터 옆에 비치된 리플렛이 눈에 띄었다.
‘루이 강의 비오는 오후展’. 리플렛에 있는 남자의 얼굴이 익숙했다.
‘아까 봤던 남자 아니야?’
“지금 하고 있는 전시회인데, 한번 구경 가시겠어요? 현재 2층 갤러리에서 전시중이에요.”
준영의 시선에 점원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아, 그래요?”
“그거 가지고 가셔도 되요.”
얼떨결에 준영이 리플렛을 집어 들었다.
퇴근까지 시간도 많이 남았겠다, 호기심이 들었다.
준영의 발걸음이 갤러리로 향했다.
***
호기심이 발동해 찾아간 갤러리의 그림들은 그저 그랬다.
비가 내린 후 잿빛도시를 걷는 남자, 건물들 사이에서 우산을 쓰고 있는 남자, 건너편 창문에 비친 흐릿한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 등..
전체적으로 비와 남자가 주제인 것 같았다.
‘일부러 비 오는 날 맞춰서 오픈한 건가?’
그림 속 남자는 우울한 배경만큼이나, 슬퍼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가 오는 날 카페를 배경으로 하는 여자와 남자의 마주보는 모습. 꼭 이별을 앞두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요?”
불쑥 누군가 말을 걸었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준영 옆으로 와서 뒷짐을 지고,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루이였다.
“아, 잘 모르겠어요.”
“이 그림에 오래 서 있길래.”
“그런가요? 좀 인상적인 것 같긴 해요.”
“아하..! 뭔가 통했군요?”
루이가 알겠다는 듯이 손바닥을 아래로 펴서 주먹으로 쳤다.
“통 했다고요? 어떤 부분에서요?”
준영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림과 통한 거죠. 가끔 그림이 내 마음을 관통할 때가 있어요. 나의 어떤 감정적인 부분을 건드릴 때?”
“...”
준영은 공감이 갈 듯 하면서도 공감이 가지 않았다.
“직접 경험해 보는 순간이 오기 전까진 모르는 거랍니다.”
씩-웃는 루이의 얼굴이 어쩐지 교활해 보였다.
“아가씨의 마음에 제가 잠시 들어갔다 온 것 같군요.”
어쩐지 불쾌한 준영이 시선을 피하고 자리를 뜨려했다.
“저 갈께요.”
돌아서는 준영의 뒷모습에 루이가 웃으며 말했다.
“또 놀러 와요! 아님, 제가 놀러갈게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준영은 여전히 불쾌함을 거둘 수 없었다.
준영은 서둘러 카페 아삭파이로 돌아갔다.
아까와 다르게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긴 줄을 은지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사과하며 준영이 드레스룸으로 뛰어갔다.
대충 허리앞치마를 매고, 나왔다.
손님이 없다가도 언제 많아질지 모르는 게 장사인 것 같았다.
“계산은 네가 받아줘. 커피는 내가 만들게.”
준영이 능숙하게 커피머신을 다뤘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많아진 손님들을 받느라, 시간이 금방 갔다.
시간이 9시를 향해 쉼 없이 달렸다.
째각- 시계가 9시 정각이 되자, 거짓말처럼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테이블에는 몇 명의 손님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곧 마감합니다.”
준영의 말에 그 몇 명마저도 나갔다.
커피머신을 세척시키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매장을 쓸고 닦자, 마감도 금방 끝났다.
“은지야 수고했어.”
“준영이도!”
은지를 보낸 준영이 허탈함에 테이블에 앉았다.
창 밖에는 비가 다시 내리고 있었다.
지금 마감하면 우산을 쓰고 퇴근해야 했다.
왠지 마감하기 싫은 날이었다.
중2병 걸린 소녀처럼 어두운 매장에 우두커니 서서, 밖을 바라봤다.
‘비가 언제 그치려나..’
매장 음악도 꺼지고, 사람도 없는 조용한 매장에는 오직 비 내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때, 어둠속에서 딸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겁에 질린 준영이 옆에 있던 대걸레를 집어 들었다.
한번, 더 딸각-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어둠속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하완이었다.
“여기서 뭐하니? 퇴근 안해?”
“아.. 사장님..”
준영이 대걸레를 내려놨다.
“퇴근 안하고 뭐하고 있어?”
“저, 사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준영의 시선이 차창 너머로 반사되는 하완과 자신의 모습에 꽂혔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저, 사실.. 사장님 생각하고 있었어요.”
“왜 날 생각하지?”
하완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제가..”
뜸을 들이던 준영이 결국 고백했다.
“제가 사장님을 좋아하거든요.”
준영은 몇시간전의 일이 떠올랐다.
“그림은 가끔 사람마음을 관통하거든요.”
그림은 현실이 되었다.
이별을 앞둔 남녀의 모습으로..
준영의 관점에서만..
***
우우웅- KTX열차 오는 소리가 들렸다.
들뜬 여울이 도착한 열차 위에 폴짝 올라탔다.
그 모습을 본 하완이 작게 웃었다.
“대박..! KTX를 타다니..!”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를 찾아갔다.
창가 자리에는 여울이 앉고, 바로 옆에 하완이 앉았다.
역무원이 한번 쓱 훑어보고, 열차는 바로 출발했다.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열차가 출발하자, 여울이 차창너머의 야경을 구경했다.
꺼지지 않는 건물의 불빛들이 치열한 서울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저 수많은 불빛 속에 내 자리는 없구나.’
어쩐지 허탈감이 들었다.
무일푼으로 올라와서 악착같이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을 하고, 다시 알바라니..
여울은 앞날이 먹먹하게만 느껴졌다.
여울의 슬픈 옆모습이 힐끔힐끔 바라보는 하완에게 비췄다.
여울의 마음을 읽은 하완이 지나가듯이 용기를 주는 말을 했다.
“잘하고 있어요. 여울씨.”
“네?”
뜬금없는 하완의 말에 여울이 눈을 반짝거리며 하완을 쳐다봤다.
“그냥 모든 면에서요. 마침 필요할 때, 나타나 줬고, 일도 금방 배우고, 오늘처럼 난처한 상황에서 잘 대처해주고.”
“아..”
잠시잠깐 고민을 한 여울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아까 본 마루 유통 조마루 사원 제 전 남친이에요.”
“아..”
살짝 놀란 하완이 말을 삼켰다.
“놀라셨죠?”
“네..”
“저도 놀랬으니까요. 마루유통이 아마 마루 아버지 회사일걸요? 걔 금수저에요.”
“아.. 부럽네요.”
“그래요?”
“네. 금수저라면서요.”
그럴 리 없다는 얼굴로 여울이 하완을 빤히 바라봤다.
“제 생각에 사장님이 더 금수저 일걸요? 아까 보니 집이 완전 으리으리하던데..? 마루 집보다 더 좋아보였어요.”
“아..”
하완이 어깨를 으쓱했다.
흠-하는 헛기침과 함께 진짜 궁금한 걸 물었다.
“마루씨 집 갔었나봐요?”
“네. 한 일년쯤 사겼을 때? 마루 부모님이 궁금해 하셔서.. 근데, 그리고 얼마 안 되서 깨지긴 했죠.”
“왜요?”
“그것까지 말해야 해요?”
여울의 공격에 하완이 물러섰다.
“아.. 아니요?”
“뭐. 중요하진 않고. 그냥 제 낮은 자존감 때문에 헤어졌어요. 원래 금수저인거 알고 있었는데, 너무 금수저였던거죠. 우리집은 흙수저인데. 끝이 보이는 결말이었다고나 할까?”
하완이 실망한 표정으로 여울을 봤다.
“이유가 그게 다에요?”
“네? 네..”
“여울씨는 여울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울씨보다 잘 살면 앞으로도 무조건 헤어질 건가요?”
“그건 아닌데..”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마루와 사귈 때부터 해결하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였다.
여울이 대답하지 못하자, 하완은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ktx는 고속버스보다 훨씬 빨라서 한 시간만에 예향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ktx에서 내려, 함께 걸어갔다.
역밖으로 나왔을 때, 하완이 결심한 듯이 말했다.
“여울씨.”
“네.”
“저랑 사귈래요?”
부르릉- 차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역에 도착한 사람들이 분주하게 제 갈 길을 갔다.
여울은 사람들 틈에서 단호하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하완이 슬픈 눈빛으로 여울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 시간 후, 하완은 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그럴수 없어.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가을의 끝자락에서 짝사랑의 고백들은 그렇게 엇갈리고 있었다.